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평해구씨시조(平海丘氏),구대림(丘大林),평해구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1:15 수정일 : 2018-02-22 22:5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구씨(丘氏)는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인 강태공(姜太公)의 후예(後裔)로 산동성(山東省) 창락현(昌樂縣)에 위치한 영구(營丘)라는 지명의 〈구(丘)〉자(字)를 성(姓)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조선씨족통보(조선씨족통보)」에는 하남성(하남성)에 연원을 두고 제태공(제태공)이 봉해진 땅이름 영구의〈구(邱)〉자를 자손(子孫)들이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구씨(구씨)는 중국(中國) 당(唐)나라 사람인 구대림(丘大林) 장군(將軍)이 서기 663년(신라 문무왕 30, 당 고종 용삭 3)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가다가 동해(東海)에서 풍랑(風浪)을 만나 평해(平海)의 월송정(月松亭) 부근에 표착(漂着)하여 해안의 남쪽 언덕 미포(美浦)에 터를 잡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후 600여 년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공민왕(恭愍王)조에 이방실(李芳實) 장군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공신(功臣)에 책훈되고 민부전서(民部典書 : 6부에 속한 정3품 벼슬) 에 오른 구선혁(丘宣赫)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평해(平海)로 삼아 계대(系代)하여 왔다.

평해(平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울진군(蔚珍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근을어현(斤乙於縣)이었던 것을 고려(高麗)초에 평해(平海)로 고쳤다.


대표적인 인물

평해 구씨(平海丘氏)는 선혁(宣赫)의 아들 천우(天祐)가 판도판서(版圖判書 : 판도사의 으뜸 벼슬)를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賢達)하였는데 맏아들 춘호(春浩)는 사재시사(司宰寺事)를, 차남 춘경(春景)은 판사(判事)를, 세째 춘서(春瑞)와 막내 춘보(春甫)는 낭장(郎將)을 지냈으며, 그들의 후손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전서공(典書公) 선혁의 현손(玄孫)인 종직(從直)은 가문을 반석(盤石)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등준시(登俊試 : 재상 이하의 문관을 시험하던 과거)에도 합격한 그는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주역(周易)과 경학(經學)에 정통(精通)하였으며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일화가「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성종조 명신편(成宗祖名臣編〉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과거에 올라 교서관(校書館)에 입직하다가 경복궁(景福宮) 서쪽 강녕전(康寧殿) 연못 가운데 있는 경회루(慶會樓)의 경치가 절승(絶勝)하다는 말을 듣고 밤중에 연못가를 구경하던 중 남녀(藍輿 : 뚜껑이 없는 작은 승교)를 타고 산책나온 세조(世祖)와 마주쳤다.

그가 황공하여 길 아래에 엎드리자 왕은 그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묻고는 “경전(經典)을 외울 수 있느냐” 하니 “「춘추(春秋)」를 외우겠습니다.” 하고 한 권을 다 외웠다. 왕은 크게 감탄하여 술을 내려 주고서 이튿날 부교리(副校理)에 임명하였다.

하루 아침에 9품직에서 5품직으로 임명하니 삼사(三司 : 사헌부․사간원․홍문간)가 번갈아 글을 올려 극력으로 반대하여 왕은 편전에 나가서 삼사(三司)들을 모두 불러 놓고「춘추(春秋)」를 외우게 하니 한 사람도 능히 한 구절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종직을 시켜 외우게 하니 1권을 다외우고 또 다른 질(帙)에서 뽑아 외우게 하니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하면서 청직(淸職)에 올라 있는데 종직(從直)과 같은 사람은 어찌 부교리에 해당하지 못하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달손(達孫)과 숙손(夙孫) 형제도 과거에 급제하고 직제학(直提學)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각각 역임하였다.

1464년(세조 9) 춘시문과(春時文科)에 급제한 치곤(致崑)은 첨절제사(僉節制使) 차숭(次崇)의 아들로 집의(執義)를 거쳐 성종(成宗) 때 강릉부사(江陵府使)와 충주목사(忠州牧使)에 이어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인재등용에 관한 부조리(不條理)를 진언(眞言)하고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치강(致崗)은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다.

한편 치강의 아들 영안(永安)은 선술(仙術)의 도인(道人)으로 예종(睿宗)조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과 공리에 뜻을 두지 않았고, 복남(福男)은 임진왜란 때 남원성(南原城)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평해구씨는 전국에 15,297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평해구씨조상인물

구선혁(丘선혁) 고려(高麗)말에 민부전서(民部典書)에 이르고, 1361년(공민왕 10) 이방실(李芳實)과 홍건적(紅巾賊)을 토평, 재조삼한 3등(再造三韓三等)에 책록(策錄)되었다.

구천우(丘天祐)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구춘호(丘春浩) 조선(朝鮮) 때 사재시사(司宰寺事)를 역임하였다.

구춘경(丘春景) 조선(朝鮮)에서 낭장(郎將)을 지냈다.

구춘서(丘春瑞) 조선(朝鮮)에서 낭장(郎將)을 역임하였다.

구춘보(丘春甫) 조선(朝鮮)조에 낭장(郎將)을 지냈다.

구세린(丘世隣)) 조선(朝鮮) 때 낭장(郎將)을 역임하였다.

구세영(丘世英) 조선(朝鮮)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

구사중(丘思仲) 조선(朝鮮)에서 감무(監務)를 역임하였다.

구양선(丘揚善) 조선(朝鮮)조에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를 지냈다.

구차숭(丘次崇) 조선(朝鮮)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구종직(丘從直) 1424 (세종 6) ~ 1477 (성종 8)

자(字)는 정보(正甫), 시호(諡號)는 안장(安長), 판서 천우(天祐)의 증손, 양선(揚善)의 아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학유(學諭)․영동현감(永同縣監)․좌헌납(左獻納)․낙안군수(樂安郡守)․사성(司成) 등을 역임, 1462년(세조 7) 고성군수(固城郡守)로 나갔다가 직강을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겸 사성(司成)이 되었다.

그후 공조참판이 되어 1466년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있으면서 등준시(登俊試)에 급제, 146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469년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지경연사(知經筵事) 등을 역임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문장(文章)에 뛰어났고 역학(易學)․경학(經學)에 밝았다.

구치동(丘致峒) 성균생원(成均院生)으로 1455년(단종 3) 권지정자(權知正字)를 거쳐 주서(注書)․병조좌랑(兵曹佐郞)․함경도도절제사(咸鏡道都節制使)․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을 지냈으며, 1464년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고, 1467년(세조12) 좌찬성(左贊成) 윤자운(尹子雲)이 함길도체찰사(咸吉道體察使)로 갈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갔다. 그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의해 순절(殉節)했다.

구치곤(丘致崑) 1464년(세조 9) 춘시문과(春試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1490년(성종 21) 강릉부사(江陵府使)․충주목사(忠州牧使)에 이르렀다. 이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이조참의(吏曹參議)․좌부승지(左部承 旨)․대사헌(大司憲)을 역임, 후에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냈다.

구치강(丘致崗) 1453년(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판관(判官)․병조좌랑(兵曹佐郞)․주서(注書)를 거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렀다.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구달손(丘達孫) 1465년(세조 11) 춘시문과(春試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응교(應敎)․직제학(直提學) 겸 지제교(知制敎)를 거쳐 수찬(修撰)을 지내고, 1476년(성종 7) 시독관(試讀官)․시강관(侍講官)을 역임하였다.

구숙손(丘夙孫) 1475년(성종 6)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 이어 헌납(獻納)․지평(持平)을 거쳐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집의로 있을 때 국정(國政)을 바로잡는 일 등에 대하여 많은 계(啓)를 올렸으며, 벼슬은 이조정랑(吏曹正郞)․사재정(司宰正)을 역임했다.

구숙남(丘夙男)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구영안(丘永安) 자(字)는 중인(仲仁), 호(號)는 호은(壺隱). 1469년(예종 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으나 벼슬과 공리를 싫어하고 음양(陰陽)․추학(推學)․풍수(風水)․의술(醫術)․선도(仙道)․승제(乘除)의 법(法)을 통달(通達)했다.

구준경(丘俊卿) 조선(朝鮮)조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구옥경(丘沃卿) 조선(朝鮮) 때 참봉(參奉)을 역임했다.

구희필(丘熙弼)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 만호(萬戶)를 거쳐 선사진(宣沙鎭)의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에 이르렀다.

구맹전(丘孟傳) 1507년(중종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당시 어지러운 사화를 피해 서천(舒川)으로 낙향(落鄕)하여 서천파(舒川派)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구민원(丘敏元) 조선(朝鮮)조에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구민정(丘敏貞)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구복남(丘福男)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서 남원(南原)서 싸움에서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基遠)과 함께 순절(殉節)했다.

구민현(丘敏賢)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구민학(丘敏學)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구필원(丘必元) 조선(朝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구필형(丘必亨) 조선(朝鮮)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구필태(丘必泰) 조선(朝鮮)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구필항(丘必恒) 조선(朝鮮)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