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토산궁씨(兎山弓氏) 토산에 세거해온 궁계신(弓繼信)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작성일 : 2017-11-09 13:23 수정일 : 2017-11-10 15:1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궁씨(弓氏)는 본래 중국(中國) 태원(太原 : 지금의 산서성 기령동에 속한 지명) 숙궁(叔弓)의 후손이 이름자를 성()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우리나라 궁씨(弓氏)는 태원(太原) 출신인 궁 흠(弓 欽)이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와 함께 동래(東來)하여 토산에 세거(世居)한 것이 시원(始原)이 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궁씨(弓氏)의 본관(本貫)토산(土山)순천(順天)이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토산을 제외한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한편토산궁씨세보(兎山弓氏世譜)에 의하면 상계(上系)의 실전(失傳)으로 인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토산에 세거해온 궁계신(弓繼信)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관향(貫鄕)을 토산(土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토산(兎山)은 황해도(黃海道) 금천군(金川郡)과 신계군(新溪郡)에 걸쳐 있었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 또는 월성현(月城縣)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경덕왕(景德王 :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이 토산(兎山)으로 고쳤다.

서기 1018(고려 현종 9) 에는 장단현(長短縣)에 속했다가 1062(문종 16) 개성(開城)의 직할시가 되고, 예종(睿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현감(縣監)을 두어 황해도(黃海道)에 이속하였다. 1895(고종 32) 토산군(兎山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일부는 신계군(新溪郡)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금천군(金川郡)에 편입되었다.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을 살펴보면 계대(系代)를 알 수 없는 인물인 궁 제(弓 濟)가 고려(高麗) 숙종(肅宗 : 15대 왕, 재위기간 : 10951105) 때 우문감(右門監)을 지낸 것으로 전하는 문헌(文獻)이 보이며, 시조(始祖) 계신(鷄晨)의 현손(玄孫) 인걸(仁傑)은 조선조(朝鮮朝)에서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 : 외국사절의 연향과 종실재실의 음식 공궤를 관장하던 관청의 종4품 벼슬) 을 역임하였고, 고종(高宗)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원일(元一)과 어사(御史) 석암(石岩)이 유명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몸바친 달초(達楚)와 억로(億魯)현섭(縣燮) 등이 이름났고, 인성(寅聖)은 독립단(獨立團) 평안남도 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조국(祖國)의 광복(光復)을 위해 헌신(獻身)하였다.

토산궁씨는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183가구 55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본 성본이다.

역대인물(歷代人物)

궁 제(弓 濟) 고려(高麗) 때 우문감(右門監)을 지냈다.

궁인걸(弓仁傑) 조선(朝鮮) 때 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을 역임하였다.

궁원일(弓元一)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궁석암(弓石岩) 조선 때 어사(御使)를 역임하였다.

궁 화(躬 化) 한말(韓末)에 병무 대장(兵務大將)으로 지냈다.

궁달초(弓達楚) 한말(韓末)에 독립운동(獨立運動)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