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안동권씨시조(安東權氏 始祖),권행(權幸),안동권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3:51 수정일 : 2018-03-02 12:52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안동권씨시조(安東權氏 始祖) 권행(權幸)은 본래 신라(新羅)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였다. 신라(新羅)의 천년사직이 기울어 가는 서기 927년 후백제(後百濟) 견 훤(甄 萱)이 신라에 침입하여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하던 경애왕(景哀王 : 제 55대 왕, 재위 기간 : 924~927)을 자살하게 하자 이에 격분한 김 행(金 幸)은 견 훤의 군사를 맞아 싸우고, 김선평(金宣平 : 신안동 김씨의 시조)․장 길(張 吉 : 안동 장씨의 시조) 등과 함께 태조 왕 건(王 建)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功)을 세웠다.

이어 태조(太祖)가 기뻐하며 이들에게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亞父功臣三重大匡太師)을 제수하고, 김 행(金 幸)에게는 <능히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달하다(能炳機達權)>하여 권씨(權氏)의 성(姓)을 내리고 고창군(古昌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여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니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문호(門戶)를 열게 되었다.

안동(安東)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古代)의 창녕국(昌寧國)이었는데 신라 시대(新羅時代)에는 고타야국(古陀耶國)․고창군(古昌郡)으로 불렸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견 훤(甄 萱)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安東府)승격되었다. 그 후 영가군(榮可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附)로 승격되었다.


氏族史 槪要

일찍이 우리 나라 유림(儒林)의 발상지(發祥地)로 알려진 영남 내륙(嶺南內陸)에 깊숙히 뿌리를 내린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고려 창업에서부터 두각(頭角)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오면서 명문대가(名門大家)로 확실한 기초(基礎)를 다졌으며, 10세를 전후하여 15파로 나누어졌다.


대표적인 인물

안동 권씨(安東權氏)에서 역사를 빛낸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청덕(淸德)으로「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수평(守平)의 손자(孫子) 단(㫜)이 충렬왕(忠烈王) 때 명신(名臣)으로 전리총랑(典理摠郞)을 지내며 3도를 다스려 폐단을 일소했고,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로 시관(試官)을 겸임하며 권한공(權漢功)․최한지(崔漢之)․백이정(白頣正) 등 인재를 천거하여 그의 선견지명이 후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아들인 부(溥)는 주자학(朱子學) 발전의 선구적인 학자(學者)로 「사서집주(四書集註)」․「은대집(銀臺集)」․「효행집(孝行集)」등의 저서(著書)를 남긴 청백리(淸白吏)였다. 특히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인 자신을 비롯하여 아들 5형제 준(準 : 고창부원군)․종정(宗頂 : 광복군)․고(皐 : 영가군)․왕후(王煦 : 본명은 재, 계림부원대군)․겸(謙 : 복안부원군)과 3명의 사위 이제현(李齊賢 : 경주 이씨, 계림부원군)․왕 숙(정순부원군)․왕 순(王 珣 : 회안대군)이 모두 봉군(封君)되어 <당대구봉군(當代九封君)>으로 명성을 떨쳤다.

충선왕(忠宣王)의 귀염을 받아 양자(養子)로 입양한 재(載)는 종실성(宗室姓)인 왕씨(王氏)로 개성(改姓)하여 왕 후(王 煦)라고 개명하고 아들 왕중귀(王重貴), 손자(孫子) 권 숙(權 肅)으로 대(代)를 이었으나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권씨(權氏)로 복성(復姓)하였다.

원(元)나라 만권당(萬卷堂 : 고려 26대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설립한 독서당)에서 문명(文名)을 떨쳤던 한공(漢功)은 수홍(守洪)의 증손(曾孫)이며, 그의 아들 중화(仲和)는 조선 개국 공신(朝鮮開國功臣)으로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여천백(呂泉伯)에 봉해졌다.

우왕(禑王) 때 좌사간(左司諫)으로 재직 중 고려(高麗)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安東) 옥산동(玉山洞)으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정(定)은 태종(太宗)이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거절하고 절개를 지켜 당시 사람들이 그 곳을 기사리(棄仕里)라고 불렀다.

한공(漢功)의 7세손이며 판관(判官) 질(耋)의 아들이자 함종부원군(咸從府院君) 어세겸(魚世謙)의 사위인 경우(景祐)는 당시 정희왕후(貞熹王后 : 세조의 비)의 친아우이며 우의정(右議政) 윤사흔(尹士昕)의 친형으로 세도의 핵심에 놓인 영평군(鈴平君) 윤사분(尹士昐)이 중국(中國)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오면서 외래품을 많이 사와 사치하고 치부(致富)하는 성향이 있어 외래품 밀수를 적발, 직접 임금에게 고하여 옥에 가두었다.

성종(成宗)은 이같이 곧은 신하가 해침을 받을까 우려하여 세 계급이나 올려 신분을 보장해 주었으며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윤사분 구명운동도 지조와 용기있는 신하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거절하였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로 세도가 으뜸이었던 임사홍(任士洪)의 탄핵을 청원한 것도 경우(景祐)였는데 임상호(任士洪)는 누가 중동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경우(景祐)의 집에 찾아와 “누가 감히 이 의논을 내었느냐”고 묻자 경우는 “오직 내라야 감히 할 수 있다”고 하니 임사홍은 기가 막혀 아무말도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안동 권씨 가문(家門)에 가장 번성한 인맥(人脈)을 이룬 고(皐 : 검교 시중을 역임)의 아들 희(僖)는 조선 개국 원종 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으로 태종조(太宗朝)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 중화(仲和)와 함께 국가 원로들의 교유 단체인 기영회(耆英會)를 설립하였으며, 슬하에 아들 화(和 : 삼사 우사)․이사(二巳 : 출가)․충(衷 : 의정부 찬성사)․근(近 : 대제학, 좌명 1등 공신)․우(遇 : 예문관 제학) 5형제를 낳아 명문(名門)의 기반을 닦았다.

조선조(朝鮮朝)에서 최초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근(近)은 당시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고, 나라의 예문(禮文)과 중국에 보내는 글은 모두 그가 지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특히 그는 얼굴빛이 검어서 사람들이 까마귀(烏)라 별칭 하였으므로 자치 소오자(小烏子)라 하였고, 공민왕(恭愍王)이 전부터 나이가 너무 적은 사람이 과거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던 차에 근(近)이 18세로 병과(丙科)에 급제하자 왕이 노하여 “저렇듯 나이가 적은 자도 과거에 올랐느냐”하는 공거(貢擧)를 맡은 목은(牧隱) 이 색(李 穡)이 대답하기를 “그릇이 커서 장차 크게 쓸 사람이오니 나이가 적은 것으로 볼 것이 아니옵니다”하자 왕의 마음이 풀어졌다고 한다.

그의 학문(學問)이나 문장(文章)은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에게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였는데 경학(經學)에도 밝아「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했고, 그의「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 황(李 滉)․장현광(張縣光)과 같은 석학(石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근(近)의 둘째 아들 제는 문형(文衡)으로 평생 동안 세종(世宗)의 문신정치(文臣政治)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정인지(鄭麟趾)․안 지(安 止)등과「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바쳤다. 일찍이 그가 과거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자 태종(太宗)은 “내 일찍 권 근의 죽음을 슬퍼하였더니 이제 장원에 그 아들을 얻고 보니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제의 아들로는 35세 때 과거에 장원하여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고 정난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진 맏아들 남과 좌익 2등 공신(左翼二等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진 반(攀), 연천현감(連川縣監)을 역임한 휘, 정난 3등공신으로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진 경 등 4형제가 있으며, 남의 아들 건(健)은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연산조(燕山朝)에 성 현(成 俔)등과 함께「역대명감(歷代明鑑)」을 지어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서예(書藝)에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1447년(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한 절(節)은 안동 권씨의 충맥(忠脈)을 이은 인물(人物)이다. 그는 생김새가 기이하고 키도 컸으며 힘도 무척 세어 당대에 남 이(南 怡)와 더불어 소문난 장사였다.

세조(世祖)는 정란하기 전 절(節)이 문무(文武)를 겸전한 인재임을 알고 찾아와 술을 마시면서 거사의 뜻을 의논하였으나 그는 청농(晴聾)이라 하여 거짓으로 먹은 척하고 응하지 않았으며, 정란이 일어난 후에도 김시습(金時習)처럼 미친척하며 떠돌이로 여생을 보내며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그러므로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원 호(元 昊)․이맹전(李孟專)․조 여(趙 旅)․정 보(鄭 保)․성담수(成聃壽) 등과 더불어 <절의 8현(節義八賢)>으로 일컬어진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고급사(告急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공헌한 협(悏)은 선무 3등공신(宣武三等功臣)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고, 그의 손자(孫子) 대임(大任)은 정선옹주(貞善翁主 : 선조의 딸)와 혼인하여 길성위(吉城尉)에 봉해졌으며, 대운(大運)은 숙종(肅宗) 때 이름난 상신(相臣)으로 호조 판선(戶曹判書)룰 역임한 대재(大載)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구례(求禮)에 유배되었던 벌(橃)은 풍채가 수려하고 성품이 검소하여 항상 악당의 세력에 항거하여 가난한 선비같이 살았다.

명종(明宗)의 살아 있는 사전(辭典) 구실을 하였던 철(轍)은 선조(宣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으며, 노년(老年)에 걸음걸이가 불편하여 내시들의 부축을 받으면서까지 임금의 잦은 부름을 받은 명상(名相)으로 그의 아들이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幸州大捷)의 명장(名將) 율(慄)이다.

율(慄)은 충의(忠義)로 가통(家統)을 계승한 권문(權門)의 자랑으로, 일찍이 한나라 영상(領相)의 집안에서 태어나 1582년(선조 15)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오직 나라를 위하여 충렬(忠烈)을 다했다.

특히 그는 사람을 거느림에 있어서 잘 친화하고 사랑하여 성심을 보이고 말과 기색이 강개(慷慨)하니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운(國運)이 위태롭게 되자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어 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 광(李 洸)의 중위장(中衛將)으로 용인(龍仁) 전투에서 패전했으나 금산(錦山)의 이치령(李峙嶺) 싸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정병 8천 명을 이끌고 한양(漢陽)으로 진격하던 도중 수원(水原)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서 다시 적을 대파한 후 한강(漢江)을 건넜다.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2천 8백 명의 병력으로 적의 3만 대군과 싸워 2만 4천의 사상자를 내어 유명한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전공을 세웠고, 이때 아녀자들의 치마폭에 돌을 날라와 투석적으로 적을 무찔렀다 하여 행주치마의 유래를 낳기도 하였다.

1599년(선조32) 가을에 병이 나서 강화(江華)의 촌 집으로 돌아갔다가 병이 위독해지자 한양(漢陽)에 우거(寓居)하던 집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아들이 없어 사위인 오성부원권(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으로 혈손을 이었다.

한편 기호학파(畿湖學派 : 조선 선조 이후 율곡이 이를 조종으로 하는 기호지방의 성리학자들에 대한 총칭)로서 예론(禮論)에 밝았던 탄옹(炭翁) 시는 인조(仁祖)와 현종(顯宗) 떼 누차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불취하고 학문연구(學問硏究)에 전력했다.

우리 나라 정주학(程朱學)의 거두(巨頭)로 일컬어진 상하(尙夏)는 일찍이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그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스승이 사사(賜死)당하게 되자 달려가서 이별을 고하고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아 가지고 돌아와 유언에 따라 청주(淸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웠고, 숙종(肅宗)의 총애를 받아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했다.

그 외 연산군(燕山君) 때 안처겸(安處謙)의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비명에 죽은 주(柱)․질(礩)․전(磌)의 3부자와 광해군(光海君) 때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궁류시(宮柳詩)로 비방했다가 발각되어 유배길에 올랐던 필(韠),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눈부신 활약 한 응수(應銖)가 유명했으며, 순장(順長)은 병자호란에 강화도(江華島)에서 의병장(義兵將)을 모아 왜적과 대항하다 성(城)이 함락되자 우의정(右議政)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자결하여 충절(忠節)의 전통(傳統)을 이어온 명문(名門)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전국에 총 696,3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안동권씨조상인물

권적(權 適) 1094 (선종 11) ~ 1146 (인종 24)

자는 득정(得正), 검교 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 덕여(德輿)의 손자. 청평산(淸平山) 문주사(文珠寺)에서 이자현(李資玄)과 교유, 학문을 닦았다.

예종 때 유학생으로 송나라에 가서 태학(太學)에 입학,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117년(예종 12) 귀국했다.

벼슬은 국자 좨주(國子祭酒)․한림 학사(翰林學士)를 거쳐 검교태 자태보(檢校太子太保)에 이르렀다.

권수평(權守平) ? ~ 1250 (고종 37)

일찍이 대정(隊正) 벼슬로 가난하게 살때 낭중(郎中) 복장한(卜章漢)이 억울하게 유배된 뒤 토지를 경작하여 살다가 그가 석방되어 돌아오자 토지와 함께 임대료를 주어 재산 쟁탈이 다반사로 행해지던 때 미풍을 남겼다.

또한 당시 권문 자제들의 선망의 대상인 견룡(牽龍) 벼슬에 임명 되었으나 가난함을 이유로 이를 사양했으며, 뒤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다.

권정(權 貞) 수중(守中)의 손자(孫子). 고려조에 복계군(福溪君)에 봉(封)해졌다.

권단(權 端)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권종중(權宗中) 고려(高麗) 때 보위 승랑장 (保衛勝郞將)을 지냈다.

권위(權 韙) 호는 성암(誠菴),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낸 수평(守平)의 아들. 정의대부(正義大夫)․판태복 시사(判太僕寺事)․한림학사(翰林學士)․충사관(充史館)․수찬관지 제고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문하시중(門下侍中)․ 중서문하 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수문전 학사(修文殿學士)․판이부사(判吏府事)를 역임하였고, 태자(太子)의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1240년 (고종 27)에 어사(御史)로서 몽고(蒙古)에 다녀왔다.

권단(權 㫜) 1228 (고종 15) ~ 1311 (충선왕 3)

자는 회지(晦之), 호는 몽암(夢巖), 시호 (諡號)는 문청(文淸), 한림 학사 위(韙)의 아들. 문하 녹사(門下錄事)로 문과에 급제, 합문 지후(閤門祗候)로 전임 후 내외 벼슬 을 거쳐 충렬왕(忠烈王) 때 전리 총랑(典理摠郞)을 지내고 3도(道)를 다스려 폐단 을 일소했다.

후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가 되어 시관(試官)을 겸임, 권한공(權漢功)․백이정 (白頣正) 등 인재를 발굴,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치사(致仕)하고 찬성사(贊成事)가 더해졌다. 청렴결백했고, 만년에 선흥사(禪興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권기(權 紀) 단(㫜)의 동생. 고려 때 영의 정(領議政)을 지냈다.

권부(權 溥) 1262 (원종 3) ~ 1346 (충목왕 2)

초명은 영(永), 자는 제만(齊萬), 시호(諡 號)는 문정(文正), 찬성사(贊成事) 단(㫜)의 아들. 안 향(安 珦)의 문인. 1280년(충렬왕 6) 문과(文科)에 급제, 첨의사인(僉議舍人)을 거쳐 1298년 밀직사(密直使)․우부 승지(右副承旨)․예빈윤(禮賓尹)․지공조(知工曹)․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가 되 었다.

1302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후 밀직사사(密直司使)․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를 역임, 1309년 (충선왕 1) 평리(評理)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찬성사(贊成事)․판총부사(判摠部事)가 되고, 1313년 영가군(永嘉君)으로 봉해졌다.

1314년(충숙왕 1) 민 지(閔 漬)와 함께 태조 이래의 실록(實錄)을 약찬(略撰), 1320년 첨의정승(僉議政丞)․판총부사(判摠部事)ㆍ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를 지냈으며,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추성 익조동덕보리공신(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이 되었다.

일찍이 정동행성 원외낭중․왕부단사관을 지냈으며,「사서집주(四書集註)」의 간행을 청하여 주자학 발전에 공헌했고,「은대집(銀臺集)」20권을 주서(註書)했었다.

권경보(權景輔) 고려조(高麗朝)에 금자광록 대부(金紫光祿大夫)․문하시랑(門下侍郞)을 거쳐 평장사(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상장군(上將軍)을 역임했다.

권준(權 準) 1280 (충렬왕 6) ~ 1352 (공민왕 1)

자는 평중(平仲), 호는 송재(松齋), 시호(諡號)는 창화(昌和),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부(溥)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에 머물 때 시종, 대 언(代言)이 된 뒤 왕의 신임을 받아 무위 장군(武衛將軍)․합포만호(合浦萬戶)를 거쳐 1310년(충선왕 2)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 1312년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지고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심양왕(瀋 陽王) 고(暠)가 왕위를 노리고 국내에 당파를 만들자 많은 조신들이 이에 아부했으나 의를 굽히지 않아 심양왕의 변이 끝난 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 적(曺 頔)의 난이 일어나자 은퇴했다가 난이 평정된 후 길창 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외손녀(外孫女)는 충혜왕(忠惠王)의 비가 되 었다.

권적(權 適) 시호(諡號)는 원정(原靖),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준(準)의 아들. 충혜 왕(忠惠王)의 총애를 받아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에 이르렀으나 1332년 원나라가 충혜왕을 폐하고 충숙왕(忠肅王)을 복위시키자 섬으로 유배,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밀직대언(密直代 言)에 추성결절공신(推誠勁節功臣)이 되었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첨의참리(僉議參理),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공민왕(恭愍王) 때 길창군(吉昌君)에 개봉(改封)되었고,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러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서경(西京)을 함락 하자 승병(僧兵)을 거느리고 나가 싸워 공을 세우고 단성보 절익대공신(端誠保節翊戴功臣)이 되었다.

권고(權 皐) 1294 (충렬왕 20) ~ 1379 (우왕 5)

호는 성재(誠齋),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 부(溥)의 아들, 근(近)의 조부. 문화군(文化君)에 봉해졌다가 1352년(공민왕 1) 영가군(永嘉君)에 개봉(改封),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러 죽었다.

권왕후(權王煦) 1296 (충렬왕 22) ~ 1349 (충정왕 1)

본명은 권 재(權 載), 시호(諡號)는 정헌(正獻), 정부 부(溥)의 아들. 충선왕(忠宣 王)의 신임을 받은 형 준(準)의 덕분으로 낭장(郎將)에 오르고 일약 삼사 판관(三司判官)에 특진되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불려 가서 아들로 입적, 왕후라는 성명을 하사(下賜) 받았으며, 1308년 충렬왕의 죽음으로 충선왕과 함께 귀국하여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등을 역임했다.

1314년(충숙왕 1)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1316년 부원대군(府院大君)에 진봉, 왕제(王弟)라고까지 불리웠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과 함께 다시 원나라에 가서 충선왕의 요청으로 원나라 황제로부터 원나라 황태자(皇太子)의 시그루치(速古赤 : 시자)가 되고 계림군공(鷄林 郡公)의 직위와 땅․집을 하사 받았고, 이 해 환관(宦官) 바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함으로 티벳(西藏)으로 귀양가게 된 충선왕을 대신하여 가겠다고 청함으로써 황제를 감동케 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원나라에 가서 서거한지 오래된 충선왕의 시호와 충숙왕의 시호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으며, 1344년(충혜왕 5) 성절사(聖節使)로 또다시 원 나라에 다녀왔다. 이해 우정승(右政丞)에 기용되고, 이듬해 정방(政房)을 폐하고 과전(科田)을 복구했다가 탐학한 무리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7년 원나라 황제의 입조(入朝) 명령을 받고 들어가 좌정승 김영돈(金永旽)과 함께 조칙(詔勅)을 가지고 돌아와서 정치 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였고, 영돈과 함께 판사(判事)가 되어 전제(田制)를 정비하였다.

이때 기황후(奇皇后)의 친척인 기삼만(奇三萬)이 기황후의 세력을 믿고 남의 땅을 빼앗는 등 불법을 자행하자 그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둔 것이 옥사하여 문제가 일어났고, 이어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에 올랐다.

이듬해 정승이 되어 기 철(奇 轍)과 함 께 정동성(征東省)의 일을 섭행(攝行)했으며, 1349년(충정왕 1)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오던 중 창의현(昌義縣)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다. 성격이 강정 장중(剛正莊重)하여 인망이 두터웠다. 공민왕(恭愍王)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권염(權 廉) 1302 (충렬왕 28)~1340 (충혜왕 복위 1)

자는 사렴(士廉), 호는 송재(松齋), 길창 부원군(吉昌部院君) 준(準)의 아들. 음보(蔭補)로 1311년(충선왕 3) 함경전 녹사(含慶殿錄事)가 되고 1318년 삼사 부사(三司副使)․사복시정(司僕寺正)․선무장군(宣武將軍)․합포진변만호부만호(合浦鎭邊萬戶府萬戶)․응양군대호군(鷹揚軍大護軍)을 거쳐 1327년 선군별감(選軍別監)으로 수전(授田)을 적절히 하여 인심을 얻어 1330년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딸이 수비(壽妃 : 충숙왕의 비)가 되자 현복군(玄福君)에 봉해지고 뒤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권한공(權漢功) ? ~ 1349 (충정왕 1)

호는 일재(一齋), 시호는 문탄(文坦), 첨의평리(僉議評理) 척의 아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을 지내고 1294년(충열왕 20)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후에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계속 거주,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밀직부사(密直副使)․첨의평리(僉議評理)를 역임, 충숙 왕 초 삼사사(三司使)․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충선왕이 양위 후 원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에서 이제현(李 齊賢)과 함께 독서하며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후에 충숙왕에 의해 구금, 이어 장류(杖流)되었으나 원제(元帝)의 명으로 풀려 나와 그 복수로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옹립, 충숙왕을 폐위시키려 하다가 실패했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고 여천부 원군(呂泉府院君)에 봉해졌다.

권종정(權宗頂) 고려(高麗) 때 광복군(廣福君)에 봉해졌다.

권한유(權漢有) 고려조에 정승(政丞)을 지냈다.

권자형(權子衡) 고려(高麗) 공민왕 때 홍건 적(紅巾賊) 토벌 때 병마련사(兵馬練使)로서 공(功)을 세워 방십리(方十里)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다.

권숙(權 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후(煦)의 후손. 1394년(태조3)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 하다가 양촌공(陽村公 : 권근)의 상주(尙奏)로 복성(復姓)되었으며, 이조 참판(吏曹參判)과 공안부윤(恭安府尹)을 지냈고, 호조 판서(戶曹 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권엄(權 嚴) 초휘(初諱)는 완부(玩富), 자는 식부(植夫). 고려에서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하였으며 음보(蔭補)로 집의(執義)를 지냈다.

권현(權 鉉) 형(衡)의 아들. 고려 때 광복군(廣福君)에 봉해졌다.

권호(權 鎬) 호는 정재(靜齋). 고려(高麗) 때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오르고, 판원덕부사(判原德府事)를 지냈다.

권주(權 鑄) 호는 규헌(葵軒), 조의 동생. 봉익대부(奉翊大夫)와 상의밀직제학(商議密直提學)․도의사사(都議司事)를 거쳐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을 지냈다.

권현(權 顯) 적(適)의 아들. 고려(高麗) 때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권경(權 敬) 엄(嚴)의 아들. 고려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권상(權 祥) 경(敬)의 동생. 고려(高麗) 때 검교(檢校)를 지냈다.

권유(權 維) 엄(嚴)의 아들. 고려(高麗) 때 판삼군(判三軍)을 지냈다.

권인(權 絪) 유(維)의 아들. 고려(高麗) 때 전적(典籍)과 집의(執義)를 지냈다.

권희(權 僖) 1319 (충숙왕 6) ~ 1405 (태종 5)

시호는 정간(靖簡),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의 아들. 음보(蔭補)로 기용, 홍주도 병마사(洪州道兵馬使)등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고, 조선이 개국된 뒤 1393년(태조2)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400년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검교 좌정승(檢校左政丞)에 올랐다.

권법화(權法和) 1353 (공민왕 2) ~ 1426 (세종 8)

호는 지족(知足), 자는 이범(而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소명(召命)하여 태학사(太學士)․이조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 學)을 명(命)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권용(權 鏞) 초명은 일(鎰),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염(廉)의 아들. 일찍이 합포 만호(合浦萬戶)가 되고, 후에 밀직부사(密 直副使)를 지냈다.

권겸(權 謙) ? ~ 1356 (공민왕 5)

정승(政丞) 부(溥)의 아들. 충숙왕(忠肅王) 초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거쳐 민부전서(民部典書)로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5년간 체류, 귀국후 시종의 공으로 2등 공신에 오르고, 이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 충목왕(忠穆王) 때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공민왕 초 복안부원군(福安府院君)으로서 원나라에 들어가 딸을 황태자에게 받치고 원나라 태부감태감(太府監太監)을 지냈다.

권중귀(權重貴) ? ~ 1369 (공민왕 18)

정승(政丞) 후(煦)의 아들. 기 철(奇 轍) 의 사위. 공민왕 초에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1356년(공민왕 5) 기 철 등이 제거될 때 유배되었다가 1364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신 돈(辛 旽)에 의해 파직, 이어 국가의 비밀을 원나라에 누설했다가 무고로 또 유배, 곧 풀려나와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다. 1369년 북원(北元)의 조서 (詔書)를 갖고 귀국한 서원군(瑞原君) 노 은(盧 訔)이 당시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쓰고 있던 조정에 의해 문초 당할 때 고문에 못 이긴 그의 거짓 진술로 북원과 밀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효수(梟首)당했다.

권정(權 定) 자는 안지(安之), 호는 사복재(思復齋). 우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 옥산동(玉山洞)에 은거, 조선 태조(太祖)에 의해 승지(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그후 태종(太宗)이 대 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 등에 임명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이로 인하여 그때 사람들이 옥산동을 기사리(棄仕里)라고 불렀다. 옥산동에 그의 유지(遺址)와 비(碑)가 있다.

권화(權 和) 검교정승(檢校政丞) 희(僖) 의 아들. 우왕(禑王) 때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재직 중 고성(固城) 사람 이 금(伊 金)이 미륵불(彌勒佛)을 자칭, 백성들을 현 혹하여 재물을 사취하면서 청주에 이르렀을 때, 그 괴수 5명을 결박하고 중앙에 보고, 이에 의정부에서 는 전국 각 도에 통첩 하여 그들 도당 모두를 체포, 사형했다.

1386년(우왕 12) 전법 판서(典法判書)에 서 동북면 안무사(東北面按撫使)가 되었으며, 1388년 밀직부사(密直副使)․전주 목사 겸 원수(全州牧使兼元帥)를 지내고 조선이 건국된 후 1396년(태조5)에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가 되어 강원도에서 왜구(倭寇)를 막았다.

권중화(權仲和) 1322 (충숙왕 9) ~ 1408 (태종 8)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시호 는 문절(文節),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한 공(漢功)의 차자(次子). 1353년(공민왕 2) 문과(文科)에 급제, 대언(代言)을 거쳐 지 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맡아보고, 우왕(禑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1390년(공양왕 1) 이 초(彛 初)의 옥(獄)에 연루,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상의찬성사(商議贊成 事)를 역임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판 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올라 1396년(태조5)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에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이어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진 뒤 치사(致仕)했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고, 고사(故事) 및 의학․지리․복서(卜筮)에도 통달, 전서(篆書)를 잘썼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다.

권완(權 緩) ? ~ 1417 (태종 17)

태종과 잠저(潛邸) 때부터 극친한 사이로서 1407년(태종 7) 우대언(右代言), 이듬해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고, 1410년 계품사(計稟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참지 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역임, 1411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

이듬해 조세 징수성적이 불량하고 조운(漕運)을 막히게 했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영주(寧州)에 귀향가던 도중 특사로 풀려 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었다. 그 후 판원 주목사(判原州牧使)를 지냈으나 다시 대간 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

권충(權 衷) 1352 (공민왕 1) ~ 1423 (세종 5)

시호는 평후(平厚), 검교정승(檢校政丞) 희(僖)의 아들. 1372년(공민왕 21) 군기녹 사(軍器綠事)가 되고 군기시윤(軍器寺尹)․전의 부령(典儀副令)을 역임 1392년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 功臣)이 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발탁 되었다.

한성 부윤(漢城府尹)을 거쳐 1408년 이성등처 도병마사(泥城等處都兵馬使)․판삭 주부사(判朔州府事), 1411년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지내고,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으로 치사하였다.

권근(權 近) 1352 (공민왕 1) ~ 1409 (태종 9)

초명은 진(晋), 자는 가원(可遠)․사숙 (思叔), 호는 양촌(陽村),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검교정승(檢校政丞) 희(僖)의 아들.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춘추 관 검열(春秋館檢閱)이 되고, 우왕(禑王) 때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예의 판서(禮儀判書)등을 역임했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지신사(知申事)를 거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창왕의 친조(親朝)를 요청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1375년(우왕 1) 박상충(朴尙衷)․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使節)의 영접을 반대했고, 1389년(창왕 1)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화인(禍因)이 되어 우봉(牛峰)에 유배되었다가 영해(寧海)․흥해(興海)․김해(金海)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다.

1390년(공양왕 1) 이 초(彝 初)의 옥에 연루(連累)되어 또다시 청주(淸州)에 옮겨졌다가 풀려 나와 조선이 개국되자 1393년(태조2) 예문춘추관 학사(藝文春秋館學士)․대사성(大司成)․중추원사(中樞院使) 등을 역임하고, 13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정도전 일파의 시기(猜忌)를 받아서 불안한 위치에 있었다.

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 문하부사(參贊門下府使)․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사병(私兵)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 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대사성(大司成)․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이사(貳師) 등을 역임, 왕명으로「동국사략(東國史略)」을 찬(撰)했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經學)에도 밝아 사서오경(四書五經) 구결을 정했다.

또한 그의「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 황(李 滉)․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性理學者)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여 시부사장(時賦詞 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고 이를 장려, 경학(經學)과 문학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권선(權 繕) 조선(朝鮮) 때 전중직장(殿中直長)으로서 1402년(태종 2)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냈다.

권시(權 偲) 호는 탄옹(炭翁). 조선 때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권진(權 軫) 1357 (공민왕 6) ~ 1435 (세종 17)

호는 독수와(獨樹窩), 시호는 문경(文景), 희정(希正)의 아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 권신 염흥방(廉興邦)의 조카딸과 결혼하라는 염흥방의 제의를 거절, 관직을 내놓았다가 몇 해 뒤 왜구의 침입을 받는 의창현(義昌縣)의 현령(縣令)이 되어 잘 막았으며,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의 천거로 전주 판관(全州判官)이 되었다.

1398년(태조7) 침입한 왜구를 토벌할 때 조전원수(助戰元帥) 성석린(成石璘)의 추천으로 경력이 되었다. 태종(太宗) 초 강원도와 경상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지내고, 1407년(태종 7)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라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후 평안 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가 되었다.

1422년(세종 4)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형조 판서(刑曹判書), 1426년 찬성(贊成)을 지내고, 1430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전임, 1431년(세종 13)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가 1433년에 치사했다.

권전(權 專) 시호는 경혜(景惠). 조선조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권원세(權元世) 조선에서 군자정(軍資正)을 지냈다.

권홍(權 弘) 1360 (공민왕 9) ~ 1446 (세종 28)

초명은 간(幹), 자는 백도(伯道), 호는 쌍당(雙塘)․송설헌(松雪軒), 시호는 문순(文順),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균(鈞)의 아들. 1382년(우왕 8) 문과(文科)에 급제, 1389년(창왕 즉위) 간관(諫官)으로서 정몽주(鄭夢周)의 당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조선 정종(定宗) 때 좌보궐(左補闕)․사헌부시사(司憲府侍史)․성균관 악정(成均 館樂正)을 역임, 딸이 태종의 빈(嬪)이 되 자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 1407년(태종 7) 진헌사(進獻使)로 명나라에 가서, 원나라 황태자의 비(妃)로 있다가 원나라가 망하여 명나라 병사에게 잡히자 자살한 그의 재종조모(再從祖母)의 절개 때문에 후대를 받았다.

1410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1417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이듬해 예조 판서(禮曹判書)․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23년(세종 5)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이듬해 치사(致仕)했다. 문학에 뛰어나고 전(篆)․예(隸)의 서체(書體)에 능해서 헌릉(獻陵)․문묘(文廟)․기자사(箕子祠)의 비문을 썼다.

권제(權 踶) 1387 (우왕 13) ~ 1445 (세종 27)

초명은 도(蹈), 자는 중의(仲義)․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 시호는 문경(文景) 찬성사(贊成事) 근(近)의 아들. 음보(蔭補)로 경승부주부(敬承府主簿)에 기용되고, 감찰(監察) 때 대사헌(大司憲)의 비위에 거슬려 파면되었다.

1414년(태종 14)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세종 초에 이르러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대사헌(大司憲)․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인순 부윤(仁順府尹)이 1429년(세종 11) 진헌사(進獻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

1435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진, 이듬해「동국연대(東國年代)」를 찬진(撰進) 하고, 1437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전임 하여 이듬해 계품 부사(啓稟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갔다가 1439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임했다.

이듬해「고려사(高麗史)」의 편찬(編纂)에 참여, 이어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1445년(세종 27)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정인지(鄭麟趾)․안 지(安 止) 등과「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바쳤다. 총명 박학 했다.

권준(權 蹲) 시호는 안숙(安肅), 근(近) 의 아들. 1396 (태조5)에 부사(副使)를 거쳐 함경감사(咸鏡監司)를 지냈고, 수충협찬 정난공신(輸忠協贊靖難功臣)․정헌(正憲)이 되었다.

권규(權 跬) 1393 (태조2) ~ 1421 (세종 3)

시호는 제간(齋簡), 유학자 근(近)의 아들. 1404년(태종 4) 태종의 3녀 경안궁주(慶安宮主)와 결혼하여 길천군(吉川君)에 봉해지고 1407년 호분사 상호군(虎賁司上護軍)을 거쳐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를 지냈다.

1413년 흠문기거(欽問起居)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6년 길창군(吉昌君)에 개봉(改封), 1418년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가 되었다.

권채(權 採) 1399 (정종 1) ~ 1438 (세종 20)

자는 여서(汝鋤), 우(遇)의 아들, 근(近)의 조카. 1417년(태종 17) 생원(生員)이 되고, 이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1427년(세종 9)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각각 급제,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가 되었다.

그 후 검토관(檢討官)을 거쳐 1433년(세종 15) 대사성(大司成), 1435년 동부승지(同副承旨), 이듬해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1438년 유호통(兪好通)․노중례(盧重禮)․박윤덕(朴允德) 등과「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발행했고, 이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했다.

권징(權 徵) 호는 등암(藤巖). 조선 때 병마북평사(兵馬北評事)를 역임했다.

권재(權 宰) 1416년(태종 16)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시교(侍 敎)를 거쳐 당진 현감(唐津縣監)을 지냈다.

권순(權 循) 숙(肅)의 아들. 조선조에 제 용감정(濟用監正)을 지내고 한성 부윤(漢 城府尹)에 증직(贈職)되었다.

권계(權 繼) 상(詳)의 아들. 조선조(朝鮮 朝)에 현령(縣令)을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 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권훈(權 壎) 주(鑄)의 아들. 조선에서 사간(司諫)을 지냈다.

권증(權 增) 훈(壎)의 아우. 조선 때 주서(注書)를 지냈다.

권복(權 復) 순(循)의 아우. 조선조에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오르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화산 부원군(花山府院君)에 봉(封) 해졌다.

권숭례(權崇禮) 충(衷)의 아들. 조선 때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를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권옹(權 雍) 화(和)의 아들. 조선 때 평창군사(平昌郡事)를 지내고 시조묘소(始祖墓所)를 심득(尋得)했다.

권천(權 踐) 근(近)의 아들. 조선조에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지냈다.

권호(權 護) 충(衷)의 아들. 조선(朝鮮)에 참판(參判)을 지냈다.

권총(權 聰) 1413 (태종 13) ~ 1480 (성종11)

시호(諡號)는 영정(寧靖), 태종(太宗)의 외손자, 길창군(吉昌君) 규(跬)의 아들, 어머니는 경안궁주(慶安宮主 : 태종의 3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궁중에서 성장하였으며 1429년(세종 11) 부사정(副司正)이 되고, 우시직(右侍直)․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1461년(세조6)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권수(權 需) 1435년(세종 17)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하여 함경도사(咸鏡都事)․남상(南牀) 등을 역임하였다.

권개(權 愷) 시호는 장간(莊簡). 1447년(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권지(權 至) 순(循)의 아들. 1454년(단종 2) 문과(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권호(權 瑚) 자는 불기(不器). 1462년(세 조7) 추장문과(秋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봉교(奉敎)로서 1466년(세조 11)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권혜(權 惠) 조선 때 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지냈다.

권미(權 眉) 조선 때 도호 부사(都護府使)를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 되었다.

권자신(權自愼) ? ~ 1456 (세조 1)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전(專)의 아들, 문종비(文宗妃)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동생. 1453년(단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다가 세조가 즉위 후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이 되고, 1456년(세조 1)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나 이해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했다가 발각되어 처자와 함께 심한 국문을 당한 끝에 거열형(車裂刑)을 받았다. 1513년(중종 8) 관직이 복구되고, 뒤에 영월(寧越)의 장릉(莊陵 : 단종릉)에 배향 (配享)되었다.

권담(權 湛) ? ~ 1423 (세종 5)

호는 괴정(槐亭), 찬성사(贊成事) 염(廉)의 손자. 고려 말 문과(文科)에 급제, 1389년(창왕 1) 남원 부사(南原府使), 이듬해 간관(諫官)을 거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내고, 1390년 이 초(彝 初)의 옥(獄)에 연류, 강릉(江陵)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개국된 뒤 1402년(태종 2)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1412년 공주 목사(公州牧使), 1419년(세종 1)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1423년(세종 5) 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역임했다.

권산해(權山海) ? ~ 1456 (세조 1)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 벼슬은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그쳤다.

1455년 단종의 손위(遜位) 이후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 경주(慶州)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되었다.

권언(權 躽) ? ~ 1467 (세조 12)

시호(諡號)는 양정(量定). 무과에 장원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으로 복성군(福城君)에 봉해졌으며, 1462년(세조7) 명나라 황태후(皇太后)가 죽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서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권윤(權 綸) 1415 (태종 15) ~ 1493 (성종 24)

호는 소요당(逍遙堂), 숭례(崇禮)의 아들. 1447년(세종 29) 녹사(綠事)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대교(待敎)가 되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4년(단종 2) 주서(注書), 1457년(세조2) 병조 좌랑(兵曹佐郞), 1461년 사인(舍人)을 거쳐 1463년 좌익위(左翊衛)로서 제주도 경차관(濟州道敬差官)이 되었다. 1478년(성종 9) 대사성(大司成), 이듬해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 1480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내고 사직, 덕원부(德源府)에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권남(權 擥) 1416 (태종 16) ~ 1465 (세조 10)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시호(諡號)는 익평(翼平), 찬성사(贊成事) 근(近)의 손자, 찬성(贊成) 제(踶)의 아들. 1450년(세종 32)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장원(壯元), 감찰(監察)을 거쳐 이듬해 교리(校理)로서「역대병요(歷代兵要)」를 함께 편찬하던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과 뜻이 통하여 그의 참모가 된 뒤 양정(楊汀) 등 무장을 포섭했다.

1453년(단종 1)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癸酉靖難)때에 앞장서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에 특진, 1456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발탁되었다. 이어 좌익공신(左翼功臣) 1등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458년(세조3) 수찬관(修撰官)으로「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고 우찬성(右贊成)에 승진, 1459년 좌찬성(左贊成)․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462년 좌의정에 올라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 되었다. 활을 잘 쏘고 문장(文章)에도 뛰어났다. 세조묘(世祖廟)에 배향(配享)되었다.

권반(權 攀) 1419 (세종 1) ~ 1472 (성종 3)

자는 자룡(子龍), 시호(諡號)는 안양(安襄), 찬성사(贊成事) 근(近)의 손자, 찬성(贊成) 제(踶)의 아들. 음보(蔭補)로 현릉 직장(顯陵直長)이 되었다가 상서승(尙瑞丞)을 지내고, 1453년(단종 1) 형 남(擥)과 함 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했고, 1456년(세조 1) 좌익공신 (左翼功臣) 2등으로 전농시 소윤(典農寺少尹)에 발탁, 이어 첨지중 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올랐다.

세조의 허락으로 당상관(堂上官)으로서 1459년(세조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丙科)로 급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으며, 1446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겸했다.

권절(權 節) 1422 (세종 4) ~ ?

자는 단조(端操), 호는 율정(栗亭), 시호는 충숙(忠肅), 심(審)의 아들. 1447년(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갔고, 1455년(단종 2)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으로부터 거사(擧事)에 가담할 것을 여러번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생애를 마쳤다. 숙종(肅宗) 때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증직(贈職)되었다.

권감(權 瑊) 1423 (세종 5) ~ 1487 (성종 18)

자는 차옥(次玉), 호는 지수암(知守菴), 시호는 양평(襄平),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극화(克和)의 아들. 1444년(세종 26) 음보(蔭補)로 사직서녹사(社稷署錄事)가 되고, 1450년(세종 32) 사온서주부(司醞署主簿)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어 감찰(監察)․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1468년(세조 13) 남 이(南 怡)가 주살 되자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1470년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청승습사(請承襲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고, 대사헌(大司憲)․좌참찬(左參贊)․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권극화(權克和) 자는 용부(庸夫), 호는 습재(習齋), 삼(參)의 아들. 1411년(태종 11) 생원(生員)이 되고, 1414년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급제, 직강(直講)․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세종 때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觀察使)로서 기민(饑民)의 구제를 게을리 하여 한때 부처(付處) 되었다.

1451년(문종 1) 이조참판으로서 전국의 목(牧)을 폐지하고 관찰사가 그 업무를 맡아보게 하려는 관제 개혁을 극력 반대하여 중지케 했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1453년(단종 1)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增),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권이경(權以經) 1453년(단종 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사관(史官) 등을 역임하였다.

권경(權 擎) 1429 (세종 11) ~ 1482 (성종 13)

자는 신지(愼之), 시호는 양정(襄靖), 우찬성(右贊成) 제(踶)의 아들, 남(擥)의 아우. 1448년(세종 30) 음보(蔭補)로 중군사용(中軍司勇)이 되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 등을 숙청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올랐다.

이듬해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예빈시 소윤(禮賓寺少尹)․판사 복시사(判司僕寺事)를 역임, 1461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조 참판․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

권념(權 念) 준(踆)의 아들. 조선조에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다.

권첨(權 甛) 조선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우의정 부찬성(右議政府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었다.

권공(權 恭) 조선(朝鮮) 태종(太宗)의 부마이며, 경상도 도절제사(慶尙道都節制使) 를 거쳐 좌익공신(左翼功臣)이 되고 도호무대장(都護撫大將)이 되었다.

권량(權 良)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권마(權 摩) 자(字)는 성단(聖壇). 조선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권중린(權仲麟) 1457년(세조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고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권규(權 揆) 호는 훤정(萱亭), 찬(攢)의 아우.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권맹희(權孟禧) 조선 때 정랑(正郞)으로서 1465년(세조 1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으며, 길창군(吉昌君)에 봉(封)해졌다.

권계희(權季禧) 1465년(세조 10) 사직(司直) 으로서 문과(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권작(權 勺) 고(皐)의 아들. 조선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권찬(權 攢) 1430 (세종 12) ~ 1487 (성종 18)

자는 취지(聚之), 시호는 정순(靖順), 증좌찬성(贈左贊成) 훤(煊)의 아들. 1462년(세조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이 되어 널리 의술을 연구했다.

감찰을 거쳐 1466년 내의원주부(內醫院主簿)로 의학교수(醫學敎授)를 겸했고, 1467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 다음해 사섬시첨정(司贍寺僉正)이 되었다. 1468년(세조 13) 남 이(南 怡)․강 순(康 純) 등의 모반죄를 잘 다스려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으로 현복군(玄福君)에 봉해지고 행호군(行護軍)이 되었다.

1477년(성종 8) 한계희(韓繼禧)와 함께「의서유취(醫書類聚)」를 간행, 그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이듬해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을 때 의관(醫官)으로서 동반직(東班直)에 등용됨은 법에 어긋난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신임으로 무사했으며, 1483년 약방제조(藥房提調)를 겸지했다. 명의로 이름났다.

권경희(權景禧) 1451 (문종 1) ~ 1497 (연산군 3)

자는 자번(子繁), 판관(判官) 질(耋)의 아들. 1468년(세조 13) 진사가 되고, 1478년(성종 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 부수찬(副修撰)․공조 좌랑(工曹佐郞)․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호조 정랑(戶曹正郞)․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1494년(성종 25)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서 정조부사(正朝副使)가 되어 명 나라에 다녀와서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권경유(權景裕) ? ~ 1498 (연산군 4)

자는 군요(君饒)․자범(子汎), 호는 치헌(癡軒), 판관(判官) 질(耋)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진사로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490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연산군(燕山君) 때에 교리(校理)․제천 현감(堤川縣監) 등을 지냈고,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사관으로 있을 때 스승 김종직의「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사실을 그후 1498년(연산군 4) 류자광․이극돈이 연산군에게 말함으로써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국문을 단한 끝에 아들 연, 김일손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중종 반정(中宗反正 : 1506년) 후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권경우(權景祐) 자는 자수, 판관(判官) 질(耋)의 아들. 1470년(성종 1) 별시문과(別 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교(奉敎)를 지냈고, 1477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에 임사홍(任士洪)의 축출을 정했고, 검찰관(檢察官)을 거쳐 이듬해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수찬(修撰)․제주 경차관(濟州敬差官)․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을 역임한 후 사간(司諫)에 승진. 1491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어 이듬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조양의 군비(軍備)의 소홀함을 탄핵, 면직시켰다.

1493년(성종 24) 동부승지(同副承旨), 2년 후 우승지(右承至), 1496년(연산군 2) 도승지(都承旨),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98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연산군(燕山君)의 난정(亂政)을 직언(直言)하는 한편 임사홍 일 파를 탄핵했다가 파직당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권구(權 懼) 1468년(세조 13)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다.

권정(權 侹) 조선 때 첨정(僉正)으로서 1466년(세조 11) 친시문과(親試文科)에 1등으로 급제하여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다.

권효(權 曉) 자는 일요(日堯), 호는 만은(晩隱). 조선조의 좌익 공신(左翼功臣)에 책록되었다.

권형(權 逈) 부(溥)의 후손(後孫).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고, 영의정(領議政)과 길창 부원군(吉昌部院君)에 추증(追贈)되었 다.

권탁(權 倬) 조선조에 영가윤(永嘉尹)을 지냈다.

권령(權 齡) 조선 때 장례원 사의(掌禮院 司議)와 호조 정랑(戶曹正郞)․첨정(僉正)․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권걸(權 傑) 남(擥)의 아들. 조선 때 정당난공신(靖糖難功臣)에 책록 되었고 복천군(福川君)에 봉해졌다.

권억(權 憶) 조선에서 광흥창수(廣興倉守)를 지내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 되었다.

권요(權 憭) 조선조에서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다.

권영(權 怜) 조선 때 음보(蔭補)로 현감(縣監)을 지냈고, 호조 참의 (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권경온(權敬溫) 조선조에서 무공랑(務功郞)으로서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권주(權 柱) 1457 (세조2) ~ 1505 (연산군 11)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 이(邇)의 아들. 10세 때 이미 경사(經史)에 통했다. 1474년 진사(進士)가 되고 1480년(성종 11)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중국어에 능하여 1489년(성종 20)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있으면서 요동(遼東)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왔다.

1493년 부응교(副應敎)로 쓰시마도(對馬島)에 경차관(敬差官)으로 다녀와 응교(應敎)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 도승지(都承旨)에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1502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교살(絞殺)당했다. 중종때 우참찬(右參贊)에 추증(追贈)되었다.

권건(權 健) 1458 (세조3) ~ 1501 (연산군 7)

자는 숙강(叔强), 시호는 충민(忠敏), 우의정(右議政) 남(擥)의 아들. 15세에 진사가 되고 1476년(성종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이 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듬해 감찰, 1481년 부제학(副提學), 1484년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500년(연산군 6)에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성 현(成 俔) 등과 함께 역대명감(歷代明鑑)」을 지어 바쳤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서예(書藝)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권 균(權 鈞) 1464 (세조9) ~ 1526 (중종 21)

자는 정경(正卿), 호는 유연당(悠然堂), 시호는 충성(忠成), 향의 아들, 1491년(성종 22)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1495년(연산군 1) 충익부 도사(忠翊府都事)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교리(校理)․장령(掌令) 등을 거쳐 1502년(연산군 8) 보덕(輔德),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 1505년 도승지(都承旨)로서 응방제조(鷹坊提調)를 겸했다. 다음해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이에 내응(內應)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으로 영창군(永昌君)에 봉해졌다.

1507년(중종 2)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좌찬성(左贊成)․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지내고, 1518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어 영창부원군(永昌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1520년(중종 15) 호조․예조 의 판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1523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권민수(權敏手) 1466 (세조 11) ~ 1517 (중종 12)

자는 숙달(叔達), 호는 퇴재(退齋), 임(琳)의 아들.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부수찬(副修撰)을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부수찬(副修撰)으로서 연산군(燕山君)의 후원관사(後苑觀射)를 논했던 일이 화근이 되어 원지(遠志)에 부처(付處)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와 이듬해 소격서령(昭格署令)․봉례(奉禮) 등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가 현직에서 병사했다.

권홍(權 弘) 1467 (세조 12) ~ 1516 (중종 11)

자는 사의(士毅), 영(齡)의 아들. 진사로 1497년(연산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여러 벼슬을 거쳐 1504년 집의(執義)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 전주(全州)에 부처(付處)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와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이 되고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다시 장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가 미신 타파에 노력했고,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렀다. 문장에도 뛰어났다.

권의(權 義) 자는 의지(誼之). 1509년(중 종 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권섭(權 攝) 복(復)의 증손(曾孫).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권배(權 背) 조선 때 호군(護軍)과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권돈(權 惇) 총(聰)의 아들. 조선 때 통 훈대부(通訓大夫)로 통례원(通禮院)․좌승지(左承旨)를 지냈고,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 되었다.

권차주(權車奏)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다.

권귀원(權龜元) 자는 장장(子長). 1522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시정(寺正)을 지냈다.

권달수(權達手) 1469 (예종 1) ~ 1504 (연산군 10)

자는 통지(通之), 호는 동계(桐溪), 임(琳)의 아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1495년(연산군 1)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언(正言)․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 사신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와 교리(校理)가 되 었다.

1504년 연산군이 모후(母后)인 폐비윤씨(廢妃尹氏)를 추숭(追崇)하려할 때 이 행(李 荇)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다가 용궁(龍宮)에 유배, 이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다시 국문(鞠問)을 받던 중 옥사했다. 중종 때 도승지(都承旨)에 추증, 1693년(숙종 19) 함창(咸昌)의 임호 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

권희맹(權希孟) 1475 (성종 6) ~ 1525 (중종 20)

자는 경순(景醇), 호는 수암(水庵), 어모 장군(禦侮將軍) 상(詳)의 아들. 1498년(연산군 4) 생원(生員)이 되고, 1507년(중종 2)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된 후, 이해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봉해졌다.

정언(正言)․장령(掌令) 등을 거쳐 1513년 나주목사(羅州牧使), 이어 형조 참의(刑曹 參議)를 지내고, 1524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어 재임 중 죽었다.

권벌(權 橃) 1478 (성종 9) ~ 1548 (명종 3)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沖齋)․훤정(萱亭), 시호(諡號)는 충정(忠定), 사빈(士彬)의 아들. 1506년(중종 1)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지낸 뒤에 지평(持平)․장령(掌令)․사인(舍人)․사성(司成)․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519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고, 이어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나가 있다가 이해 겨울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 파직당했다.

1533년(중종 28)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복직,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형조 참판(刑曹參判)․병조 참판(兵曹參判)․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지내고, 1539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했다. 1545년(인종 1) 우찬성(右贊成)으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했고, 이해 어린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1545년(인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올랐으나 정순붕(鄭順朋)의 반대로 삭훈(削勳)되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구례(求禮)에 유배된 후 삭주(朔州)에 이배(移配)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선조(宣祖) 초에 신원(伸寃)되고, 좌의정(左義政)에 추증, 안동(安東)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권질(權 礩) 1483 (성종 14) ~ 1545 (인종 1)

자는 사안(士安), 예조참판(禮曹參判) 주(柱)의 아들. 이 황(李 滉)의 장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아버지가 살해 될 때 마침 한글로 표기된 연산군 실정의 투서가 궁중에 들어가 언문옥사(諺文獄事)가 일어나자 죄인의 자손이라 하여 혐의를 받고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와 음보(蔭補)로 현릉 참봉(顯陵參奉)이 되고 1517년(중종 12) 봉사(奉事)가 되었다가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된 아우인 수찬(修撰) 전(磌)의 사건에 연좌, 예안(禮安)에 유배되었다.

1538년 석방, 복관(復官)되었다.

권장(權 檣) 1489 (성종 20) ~ 1519 (중종 14)

자는 제부(濟夫), 호는 우암(寓菴), 사빈(士彬)의 아들, 벌(橃)의 동생. 진사로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 등을 역임, 신진사류(新進士類)로 촉망을 받았으나 이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금산 군 수(金山郡守)로 좌천되어 가다가 중도에서 병사했다. 부제학(副提學)에 추증, 예천(醴泉)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권전(權 磌) 1490 (성종 21) ~ 1521 (중종 16)

자는 군안(君安), 참판(參判) 주(柱)의 아들. 1510년(중종 5) 생원(生員)이 되고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이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안처겸(安處謙)과 함께 사형되었다.

권수영(權壽永) 자는 천민(天民). 1526년(중종 21)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첨정(僉正)을 지냈다.

권기(權 祺) 억(憶)의 아들. 조선에서 상주 목사(尙州牧使)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권이평(權以平) 조선(朝鮮)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권이(權 匂) 조선조에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좌의정(左義政)을 지내고, 영창부원군(永昌府院君)에 봉해졌다.

권우(權 遇) 자는 희안(希顔).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영가군(永嘉君)에 증직되었다.

권칙(權 勅) 자는 국정(國正). 조선조에 별제(別提)를 지냈다.

권호(權 顥) 조선에서 전적(典籍)을 지냈다.

권종(權 種) 조선 때 승정원(承政院)에서 좌승지(左承旨)․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권헌(權 憲) 자는 효장(孝章). 1501년(연산군 7) 직장(直長)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지냈다.

권회(權 懷) 조선 때 돈령(敦寧) 벼슬과 부정(副正)을 지냈다.

권예(權 輗) 1495 (연산군 1) ~ 1549 (명종 4)

자는 경신(景信), 호는 마애(磨厓), 철경(哲經)의 아들. 1516년(중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에 이어 봉교(奉敎)가 되고,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장령(掌令)․교리(校理)를 거쳐 1530년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등을 거쳐 1537년(중종 32)에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권의(權 檥)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권완(權 完) ? ~ 1547 (세조2)

조선에서 음보(蔭補)로 사정(司正)을 거쳐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지냈다.

권응정(權應挺) 1498 (연산군 4) ~ 1564 (명종 19)

자는 사우(士遇), 호는 묵암(黙菴), 관찰사 희맹(希孟)의 아들. 1522년(중종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계속 학문을 닦고, 1528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숭문원 권지정자(權知正字)에 등용된 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등 여러 청요직(淸要膱)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 때 봉성군(鳳城君) 원(岏). 송인수(宋麟壽) 이약해(李若海) 등의 일파로 몰려 강진(康津)에 유배(流配), 단천(端川)․문의(文義) 등지에 이배(移配)되었다가 1553년 풀려서 고향에 돌아갔다. 1557년(명종12) 경주부윤(慶州府尹)․안동 부사(安東 府使)를 지내고 다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권열(權 栵) 1465년(세조 10)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권인손(權仁孫) 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으로서 1475년(성종 6)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지평(持平)을 거쳐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다.

권건(權 建) 1477년(성종 8)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후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권자후(權子厚) 자는 재지(載之). 1481년(성종 12)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교리(校理)를 지냈다.

권숭후(權崇厚) 자는 여인(汝仁). 1451년(문종 1) 전의 판관(前義判官)으로서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삼등공신(三等功臣)에 책록되었다.

권세형(權世衡) 자는 자균(子鈞). 1491년(성종 22)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후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권동미(權東美)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권납(權 納) 자는 사민(士敏), 호는 매헌(梅軒).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연병장(練兵場)으로 활약하였다.

권선명(權善明)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권심언(權審言) 자는 중택(仲擇).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권은(權 殷) 1523년(중종 18)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권행가(權行可) 자는 시중(時中). 1573년(선조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좌랑(佐郞)을 지냈다.

권시(權 時) 조선조에 주부(主簿)를 지냈다.

권세인(權世仁) 자는 경초(景初).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창의(倡義)하였고 현감(縣監)을 지냈다.

권여겸(權汝謙) 자는 백익(伯益). 조선 때 군기시 판사(軍器寺判事)를 지냈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권위(權 暐) 조선조에 공․형․호조 정랑(工․刑․戶曹正郞)․춘궁랑(春宮郞)을 지냈다.

권내(權 來) 조선 때 군자정(軍資正)을 지냈다.

권병(權 秉)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권의중(權義中) 자는 의백(義伯), 호는 대수(大樹).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으로 커다란 공을 세워 익사원종공신(翊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권이중(權以中) 호(號)는 금호(金湖).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권황(權 滉) 조선 때 부윤(府尹)을 지냈다.

권해(權 澥)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권흡(權 洽) 조선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권우직(權友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하였다.

권신(權 愼)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권백린(權伯麟) 자는 여상(汝祥), 호는 매헌(昧軒). 조선 때 훈도(訓導)를 지냈다.

권응창(權應昌) 1500 (연산군 6) ~ 1568 (선조 1)

자는 경우(景遇), 호는 지족당(知足堂), 관찰사 희맹(希孟)의 아들. 1519년 생원(生員)이 되고, 1528년(중종 23)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수찬(修撰)․승지(承旨)를 거쳐 경상․전라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사건 때 봉성군(鳳城君) 원(岏)․송인수 등의 일파로 몰려 맹산(孟山)에 유배되었다.

1553년 풀려 나와 1561년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질정관(質正官)․천추사(千秋使)․사은사(謝恩使) 등으로 여러 번 명나라에 다녀왔다.

권용(權 容) ? ~ 1558 (명종 13)

자는 공택(公擇), 호는 기재(奇齋), 참판 응정(應挺)의 아들.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1546년(명종 1)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를 역임,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을 겸직하며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으로「중종실록(中宗實錄)」편 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전적(典籍)․부교리(副校理), 1554년 전한(典翰)․부응교(副應敎) 등을 거쳐 1557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권철(權 轍) 1503 (연산군 9) ~ 1578 (선조 11)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시호는 강정(康定), 부사(府使) 적(勣)의 아들. 1528년(중종 23) 진사(進士)가 되고, 1534년(중종 29)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어 사초(史草)를 쓸 때 직필(直筆)하여 영의정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고 한때 좌천, 1537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賜死)로 사관에 복직, 여러 청요직(淸要膱)을 거쳐 1544년(중종 39)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으로 경상도 경차관(慶尙道敬差官)이 되었다.

경기도 어사(京畿道御史)․우승지(右承至)를 거쳐 1552년(명종 7)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경상도․전라도의 관찰사(觀察使), 형조․병조의 판서(判書)를 거쳐 1561년 우찬성(右贊成), 1565년(명종 20)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이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좌의정(左義政)을 거쳐 1571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권상(權 常) 1508 (중종 3)~1589 (선조 22)

자는 길재(吉哉), 전생서 참봉(典牲暑參奉) 진(振)의 아들. 1528년(중종 23) 진사가 되고, 문소전참봉(文昭殿參奉)을 거쳐 선공감정(繕工監正)이 되었다.

1583년(선조 16) 효행으로 천거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80세 때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청주(淸州)의 백록서원(白鹿書院)에 제향되었다.

권벽(權 擘) 1520 (중종 15) ~ 1593 (선조 26)

자는 대수(大手), 호는 습재(習齋), 승지(承旨) 기(祺)의 아들. 1543년(중종 38) 진사가 되고, 이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 이의 천거로 사관(史官)에 기용되고, 1546년(명종 1)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 실록(仁宗實錄)」편찬에 참여했고, 오랫동 안봉 상시정(奉常寺正)으로 있었다.

1568년(선조 1)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 1573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한 후 1578년 외직에 있을 때 함경도 순무어사(咸慶道巡撫御史) 허 봉(許 篈)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1580년(선조 13)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되었다가 1583년 가승지(假承旨)에 기용, 1585년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권선(權 宣) 자는 공저(公著), 호는 성곡(城谷). 1579년(선조 12) 문과(文科)에 급제 정자(正字)를 지냈으며, 후진양성(後進養成)에 노력했다.

권고(權 暠) 조선조에 주부(主簿)를 역 임했다.

권체(權 體) 조선에서 첨지(僉知)를 지 냈다.

권임(權 任) 조선 때 군수(郡守)에 올랐 다.

권경온(權敬溫) 조선 때 전적(典籍)에 이르 렀다.

권유(權 瑠) 자는 계옥(季玉). 조선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권인수(權仁壽) 자는 미수(眉叟). 조선(朝鮮) 때 학유(學諭)를 지냈다.

권주(權 輳) 자는 백수(伯綏).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권인행(權仁杏) 자는 석과(碩果).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권운(權 雲) 자는 산용(山龍). 조선(朝鮮)에서 교리(校理)를 지냈다.

권오기(權五紀) 자는 협지(協之), 호는 졸재(拙齋). 조선 때 집의(執義)를 지냈다.

권찬(權 纘) 자는 계조(繼祖). 조선(朝鮮) 때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권물(權 勿) 자는 개지(介之). 조선(朝鮮)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권순(權 純) 자는 경일(景一).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권덕린(權德麟) 1529 (중종 24) ~ 1573 (선조 6)

자는 군서(君瑞), 호는 귀봉(龜峰), 첨정(僉正) 계중(繼中)의 아들. 이언적(李彦迪)의 문인. 1553년(명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郞)․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유배된 이언적(李彦迪)이 배소(配所)에서 죽자 위험을 무릅쓰고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세워 그를 제향(祭享)했고, 후에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죽은 뒤 경주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권문임(權文任) 1530 (중종 25) ~ 1576 (선조 9)

자는 흥숙(興叔), 달(達)의 아들. 조 식(曺 植)의 문인.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고, 1576년(선조 9)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 권지부정자(弘文館權知副正字)에 보직되었으나 부임 하기 전에 갑자기 죽었다.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권극례(權克禮) 1531 (중종 26) ~ 1590 (선조 23)

자는 경중(敬仲), 종묘서령(宗廟署令) 덕유(德裕)의 아들.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예문관(藝文館)의 벼슬을 거쳐 전적(典籍)․정언(正言)을 역임하고,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권신들을 탄핵하여 미움을 사서 원주 목사(原州牧使)․길주 목사(吉州牧使)․의주 부윤(義州府尹) 등을 역임했다.

판결사(判決事)․우승지(右承至)를 지내고, 1582년(선조 15)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함경도관찰사(咸慶道觀察使)․대사간(大司諫)을 거쳐 1589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적발했다.

권호문(權好文) 1532 (중종 27) ~ 1587 (선조 20)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규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61년(명종 16) 30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연이어 부모를 여의자 3년씩 여막(廬幕)을 지키고 관계(管界)에의 진출을 단념, 청성산(靑城山) 기슭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살았다.

만년에 덕망이 더욱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고,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成一) 등에게 학행(學行)으로 높이 평가 받았으며, 시가(詩歌)에도 관심을 가져 경기체가(景幾體歌)를 본뜬「독락팔곡(獨樂八曲)」과 시조「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을 지었다. 죽은 뒤 문인들이 안동(安東)에 송암서원(松巖書院)을 세워 제향 하였다.

권극지(權克智) 1538 (중종 33) ~ 1592 (선조 25)

자는 택중(擇仲), 종묘서령(宗廟署令) 덕유(德裕)의 아들. 1558년(명종 1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으로「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1589년(선조 22)에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예조 판서(禮曹判 書)가 되었다.

권율(權 慄) 1537 (중종 32) ~ 1599 (선조 32)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영의정 철(轍)의 아들. 1582년(선조 15)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이듬해 예조 정랑(禮曹正郞)․호조 정랑(戶曹正郞)․경성 판관(鏡城判官), 1591년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 광(李 光)과 방어사 곽 영(郭 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 목사(光州牧 使)로 곽 영의 휘하에 들아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 용인(龍仁)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전 했다.

광주(光州)로 되돌아가 남원(南原)에 주둔, 1천여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다시 북진, 금산군(錦山郡) 이치(李峙)에서 고바야까와(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에 승진했다.

정병 8천 명을 인솔, 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서울로 진격하던 도중 수원(水原)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 견고한 진지를 구축,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전개하며 우끼다(宇喜多秀家) 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했다.

1593년 병력을 나누어 선거이에게 시흥(始興)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천 8백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 3만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고바야까와의 일본군을 맞아 2 만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격퇴하였다.

전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9년(선조32)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 고향에 돌아갔다. 죽은 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1604년(선조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部院君)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기공사(紀功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권민중(權敏中) 자는 시백(時伯).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권가행(權可行) 자는 시중(時中). 조선(朝鮮)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권말경(權末卿) 자는 여익(汝翼). 조선조(朝 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 하였다.

권덕요(權德饒) 자는 요부(饒夫). 조선(朝鮮) 때 정자(正字)를 지냈다.

권승형(權承衡) 자는 형지(衡之). 조선(朝鮮)에서 좌랑(佐郞)을 지냈다.

권징(權 澄) 자는 치원(致遠). 조선(朝鮮)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권설(權 泄) 자는 여수(汝受). 조선(朝鮮)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권징(權 徵) 1538 (중종 33) ~ 1598 (선조 31)

자는 이원(而遠), 호는 송암(松菴), 시호는 충정(忠定), 굉(硡)의 아들.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567년 주서(注書), 1568년(선조 1)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직,「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580년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좌승지(左承旨)․형조참의(刑曹參議), 1583년 충청도․강원도의 관찰사(觀察使), 1586년 형조참판(刑曹參判), 1588년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진강(臨津江)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대패, 광해군(光海君)의 분조(分朝)에 수행하여 경기도 순찰사로 군량미 조달에 공을 세웠고, 권 율(權 慄)과 함께 경기․충청․전라 3도의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과 싸웠다. 1593년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했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했다.

권익창(權益昌) 자는 무경(茂卿), 호는 호양(湖陽). 조선(朝鮮) 때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이르렀으며, 학행(學行)이 탁월(卓越)하였다.

권춘란(權春蘭) 1539 (중종 34) ~ 1617 (광해군 9)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 이 황(李 滉)의 문인. 1570년(선조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감찰(監察)․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수차 외직을 맡았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 1595년 장령(掌令)을 거쳐 1601년 청송 부사(靑松府使)가 되었으나 양친이 별세한 후부터는 사간(司諫) 등의 여러 벼슬을 거절하고 류성룡(柳成龍)과 의의(疑義)를 강구(講究)하는 등 학문에만 전심했다. 안동(安東)의 주계서원(周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권협(權 悏) 1542 (중종 37) ~ 1618 (광해군 10)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 시호는 충정(忠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상(常)의 아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춘추관(春秋館)의 벼슬을 거쳐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장령(掌令)으로 서울의 사수를 주 장했다.

1597년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때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끌어들이는데 성공, 귀국 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오르고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길창군(吉昌君)으로 봉해졌다. 1607년(선조40)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했다.

권황(權 愰) 1542 (중종 37) ~ 1640 (인조 18)

자는 사영(思塋), 호는 치암(耻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상(常)의 아들, 1576년(선조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고, 호조․형조의 좌랑(佐郞)을 지낸 후 장 악원첨정(掌樂院僉正) 등의 내직과 4군(郡) 의 수령을 지냈다.

그 후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으로 사직,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80세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권두문(權斗文) 1543 (중종 38) ~ 1617 (광해군 9)

자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 유년(有年)의 아들, 영주(榮州)출신. 1572년(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서관(校書館)에 보직된 뒤 검열(檢閱)을 거쳐 1592년(선조 25) 평창 군수(平昌郡守)가 되었다.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에게 잡혔다가 탈출, 이듬해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가 되었다. 그 후 군자시첨정(軍資寺僉正)을 거쳐 예천(醴泉)․진산(珍山)․영천(永川)․금산(錦山)․ 간성(杆城) 등의 수령을 역임, 내자시정(內資寺正)․통례원정(通禮院正)을 지냈다.

권응인(權應仁)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송계(松溪). 한리학관(漢吏學官)을 지냈다. 1562년(명종 17) 문장에 능한 일본 사신이 왔을 때 시재(詩才)가 뛰어났으므로 특명으로 선위사(宣慰使) 일행의 한 사람이 되어 이를 맞았다.

당시 송대(宋代)의 시풍(詩風)이 유명하던 문단(文壇)에 만당(晩唐)의 시풍을 받아 들여 큰 전환을 가져왔으며, 시평(詩評)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권우(權 宇) ? ~ 1573 (선조 6)

자는 정보(定甫), 호는 송소(松巢), 대기(大器)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소장학자로서 학명(學名)이 높았고, 157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뒤에 왕자(王子 : 광해군)의 사부(師傅)로 등용되었으나 이 해 죽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당상관(堂上官)에 추증, 경주의 경 광 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다.

권 종(權 悰) ? ~ 1592 (선조 25)

자는 희안(希顔), 시호는 충민(忠愍), 찬성사(贊成事) 근(近)의 후손. 효렴(孝廉)으로써 천거를 받아 개령 현감(開寧縣監)이 되었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금산 군수(錦山郡守)로 부임했다.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는 종제(從弟)인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 慄)과 연락, 군사를 이끌고 관찰사를 따라 전주(全州)에 도착, 관찰사가 그의 노령을 이유로 군사를 빼앗고 군량 관리의 임무를 맡기자 본군(本郡)에 돌아가 병졸 수백 명을 모집, 의병장(義兵將) 고경명(高敬命)․조 헌(趙 憲)에게 지원을 요청한 뒤 대거 내습해 온적과 격전 끝에 순국(殉國)했다. 금산에 순의비(殉義碑)가 세워지고, 이조 판서(吏曹 判書)에 추증되었다.

권 길(權 吉) ? ~ 1592 (선조 25)

자는 응선(應善).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1592년(선조 25)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 일어나자 동래부(東萊府)를 빼앗기고 도망 온 순변사(巡邊使) 이 일(李 鎰)의 군사와 합동, 상주(尙州)에 쳐들어오는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상주의 충렬사(忠烈祠) 에 제향(祭享)되었다.

권희인(權希仁) ? ~ 1593 (선조 26)

자는 사안(士安), 호는 삼암(參巖).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 류성룡(柳成龍)의 총애를 받았고, 그의 권유로 무과(武科)에 응시, 급제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막았으며,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절도사(節度使) 김 면(金 沔)의 천거로 옥천 군수(沃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웅천(熊川)에 쳐들어온 왜군을 막아 싸우다 전사했다. 문장에도 능했으며 당상 관(堂上官)에 추증되었다.

권 순(權 恂) ? ~ 1606 (선조 39)

자는 언침(彦沈), 호는 쌍천(雙泉), 부사(府使) 적(勣)의 아들. 42세때 음보(蔭補) 로 사산감역(四山監役)이 되고, 양주 목사(楊洲牧使)를 거쳐 1598년(선조31) 명나라 사신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 1601년 파주 목사(坡州牧使), 이듬해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역임, 뒤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우참찬(右參贊)에 추증되었다.

권응수(權應銖) 1546 (명종 1) ~ 1608 (선조 41)

자는 중평(仲平), 호는 백운재(百雲齋), 시호(諡號)는 충의(忠毅), 덕신(德臣)의 아 들. 신녕(新寧) 출신,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서 북변수비에 종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수군절도사 박 홍(朴 泓) 휘하에 있다가 고향에 돌아가 의병을 모집, 영천성(永川城)을 탈환하고 병마우후(兵馬虞候)가 되었다.

이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 진(朴 晋) 밑에서 군관으로 경주성(慶州城) 탈환전에 선봉(先鋒)으로 참전했으나 패배, 문경(聞慶)의 당교(唐橋) 싸움에서는 적을 격파했다.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 방어사(慶尙道兵馬節度使兼防禦使)에 특진, 1594년 충청도 방어사(忠淸道防禦使)를 겸직, 1599년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고,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 졌으며 도총관(都摠管)을 겸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 신녕의 경덕사(敬德使)에 제향되었다.

권 희(權 憘) 1547 (명종 2) ~ 1624 (인조 2)

자는 사열(思悅),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상(常)의 아들. 1568년(선조 1) 진사(進士)가 되고, 158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주서(注書)․전적(典籍)을 거쳐 각 조(曹)의 낭관(郎官), 양사(兩司)의 벼슬 등을 역임, 1592년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할 때 역대 왕의 신주(神主)와 어보(御寶)를 안전하게 모시고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했다. 1596년 종부시정 겸 집의(宗 簿寺正兼執義)로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후 호조․예조․형조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1603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충청도의 관찰사(觀 察使)를 역임, 강화 유수(江華留守)․금산 군수(錦山郡守)․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왕실(王室)의 신주(神主)를 모신 공으로 1624년(인조 2) 자헌대부(資憲 大夫)에 올랐다. 호성(扈聖)․선무(宣武)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으므로 사후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권극중(權克中) 1560 (명종 15) ~ 1614 (광해군 6)

자는 택보(擇甫), 호는 풍담(楓潭)․화산(花山), 관찰사 덕여(德輿)의 아들. 19세에 성 혼(成 渾)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1588년(선조 2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 하다가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으나 스승 성 혼이 대간(臺諫)에 의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광해군(光海君) 초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가 사퇴했다.

권덕유(權德裕) 자는 문유(文裕), 홍(弘)의 아들. 1562년(명종 17)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권덕여(權德輿) 자는 치달(致達), 호는 월담(月潭). 조선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1562년(명종 17)에 부승지(副承旨)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다.

권 전(權 銓)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다.

권 연(權 讌) 조선(朝鮮)에서 호군(護軍)을 지냈다.

권 해(權 該) 자는 의정(議正).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권 도(權 燾) 조선(朝鮮) 때 감역(監役)을 지냈다.

권세학(權世鶴) 자는 중거(仲擧), 예조 참판(禮曹參判) 지(至)의 증손(曾孫). 1558년(명종 13)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덕원 부사(德源府使)를 역임 하였다.

권 신(權 信) 자는 이립(而立). 1552년(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지(承旨)와 형조 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권 성(權 晟) 자는 성지(晟之). 1505년(연산군 1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부사(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권극의(權克義) 자는 의중(宜中). 1555년(명종 10) 승사랑(承仕郞)으로서 식년문과(式 文科)에 급제하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권경우(權慶祐) 자는 자수. 1470년(성종 1)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 하고 봉교(奉敎)․정언(正言)․검찰관(檢察官) 등을 거쳐 147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제주 경차관(濟州敬差官)․시독관(試讀官)․형조 참의(刑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우승지(右承至) 등을 역임하고, 1496년(연산군 2) 도승지(都承旨)가 되 었다. 다음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 오고, 1498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권 반(權 盼) 1564년 (명종 19) ~ ?

자는 중명(仲明), 호는 한호(閑戶), 화(和)의 아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조모(祖母) 슬하에서 자라며 판서 윤국형(尹國馨)의 문하에서 수학, 1594년(선조27)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교하 현감(校河縣監)을 역임하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내외직을 거쳐 1613년(광해군 5)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때 길천군(吉川君)을 습봉(襲封)했다.

그 뒤 순검사(巡檢使)로서 해방에 힘썼고, 1626년(인조 4)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토의 다과(多寡)에 따라 출부(出賦)를 공평히 하는 법을 제정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두 번 지냈으며, 서화(書畵)에도 능했다.

권 흔(權 昕) 자는 숙절(叔節). 조선조에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권 욱(權 旭) 자는 경양(景暘). 조선 때 참찬(參贊)에 이르렀다.

권 확(權 鑊) 1568 (선조 1) ~ 1638 (인조 16)

자는 사중(士重), 호는 석계(石溪), 결(潔)의 아들. 1603년(선조36)에 진사가 되 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 벼슬에 등용되었다가 검열(檢閱)에 천거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에 의해 자기 일당이 아니라 하여 기각당했다.

이위경(李偉卿) 등이 폐모론(廢母論)을 제기하자 요로(要路)에 건의하여 그들의 과거응시권(科擧應試權)을 정지케 한 것으로 중상을 받아 삭직(削職)되었다.

후에 또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으나 이이첨의 아들 홍엽(弘燁) 이 대리 시험으로 과거에 급제했음을 폭로하여 다시 삭직되었다. 1618년 폐모(廢母)의 의론 때 정청(庭請)에 불참하여 전적(典籍)으로 전직되고는 문란해지는 정치를 비관,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언(正言)에 취임, 장령(掌令)․필선(弼善)․사간(司諫)․집의(執義) 및 여러 사(寺)의 정(正)을 역임, 1626년 길주 목사(吉州牧使), 1629년 승지(承旨), 이어 호조․형조의 참의(參議), 해주․여주의 목사(牧使)를 지냈다.

권 집(權 潗) 자는 달보(達甫). 조선(朝鮮)에서 장령(掌令)을 지냈다.

권태일(權泰一) 1569 (선조 2) ~ 1631 (인조 9)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춘란(春蘭)의 아들. 내시교관(內侍敎官) 춘계(春季)에게 입양(入養). 구봉령(具鳳齡)의 문인 1591년(선조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고, 내외직을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권 필(權 韠) 1569 (선조 2) ~ 1612 (광해군 4)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벽(擘)의 아들. 정철(鄭澈)의 문인. 과거(科擧)에 뜻이 없어 시주(詩酒)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여러 문신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강화부(江華府)에 갔을 때 많은 유생이 몰려오자 이들을 가르쳤고, 이정귀(李廷龜)가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의 사신 고천준(顧天俊)을 접반하게 되어 문사를 엄선(嚴選)할 때 야인으로서 뽑혀 문명을 떨쳤다.

이에 앞서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고, 광해군 초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이 교제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광해군 비(妃) 류씨(柳氏)의 아우 류희분(柳希奮)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궁류시(宮柳詩)로써 비방하자 광해군이 대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의 시를 발견, 친국(親鞫) 받을 뒤 유 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지평(持平)에 추증. 광주(光州)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권 흥(權 興)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내고,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추증되었다.

권 위(權 暐) 자는 경휘(景輝), 준(蹲)의 5대손(五代孫).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권 서(權 恕) 조선에서 주부(主簿)를 지냈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권 눌(權 訥) 조선(朝鮮) 때 호군(護軍)을 지냈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 안천군(安天君)에 보해졌다.

권처균(權處均) 자는 사중(士中), 호는 오죽헌(烏竹軒). 조선조(朝鮮朝)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권 령(權 玲) 자는 영옥(玲玉), 호는 퇴호(退湖).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지냈다.

권 기(權 璣) 조선(朝鮮) 때 충위호군(忠衛護軍)을 지냈다.

권 리(權 理) 자는 득천(得天), 호는 괴당(槐堂). 충의위(忠義衛)․어모장군(禦侮將 軍)에 올랐다.

권 인(權 璘) 호는 남간(南澗). 조선조에 감찰(監察)을 지내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남평현감(南平縣監)을 지냈다.

권 연(權 衍) 조선조에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지냈다.

권 형(權 亨) 자는 사통(士通).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권빈기(權賓己) 극중(克中)의 아들. 조선조에 승지(承旨)를 지냈다.

권 함(權 涵) 조선조에 현감(縣監)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 하였다.

권 여(權 汝) 조선조(朝鮮朝)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냈다.

권 승(權 昇)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권득기(權得己) 1570 (선조 3) ~ 1622 (광해군 14)

자는 중지(重之), 호는 만회(晩晦), 이조 판서(吏曹判書) 극례(克禮)의 아들. 극관(克寬)에게 입양(入養). 1589년(선조22)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모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등 정치가 어지러 워지자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을 사임하고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 공주(公州)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권응생(權應生) 1571 (선조 4) ~ 1647 (인조 25)

자는 명생(命生), 호는 노헌(魯軒), 참봉(參奉) 사의(士毅)의 아들. 1605년(선조38) 진사가 되고, 1612년(광해군 4)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현감(縣監)을 지냈다. 광해군의 폭정으로 벼슬을 사퇴하고 향리에 은퇴하여 학문 연구와 저술에 힘썼다.

권 진(權 縉) 1572 (선조 5) ~ 1624 (인조 2)

자는 운경(雲卿), 호는 수은(睡隱), 근(近)의 8대손, 현(睍)의 아들. 1597년(선조3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608년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승진, 1613년(광해군 5) 승지(承旨)로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동생 김 선(金 瑄)의 사형을 감형하라고 호소했다.

수원 부사(水原府使)․함경도 관찰사(咸慶道觀察使)․한성판윤(漢城判尹)․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1623년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어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지 않아 수차 탄핵을 받았다.

이해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대신․고관들이 모두 도주했을 때 홀로 김 유(金 瑬) 등의 추천을 받고 조정에 불리어 대궐을 호위, 많은 공을 세웠으나 그의 유능함을 질시하는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무고로 양산(梁山)에 유배되었다.

권 첩(權 怗) 1573 (선조 6) ~ 1629 (인조 7)

자는 정오(靖吾), 공조 판서(工曹判書) 징(徵)의 아들. 1606년(선조 39) 생원(生員)이 되고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고,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정청(庭請)에 불참(不參)했다.

1623년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기용되고, 이듬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

이어 부호군(副護軍)이 되었으나 앞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때의 일로 무고를 받아 한때 파직 당했다가 다시 등용,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왕을 강화(江華)에 호종(扈從), 이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후금(後金)의 침입을 알렸다. 이듬해 귀국, 경 주 부윤(慶州府尹) 을 지냈다.

권사공(權士恭) 1574 (선조 7) ~ 1619 (광해군 11)

자는 여안(汝安), 질(耋)의 아들. 1606년(선조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으며,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흥해(興海)에 유배되어 죽었다.

권 굉(權 宏) 1575 (선조 8) ~ 1652 (효종 3)

자는 인보(仁甫), 호는 진봉(震峯), 대기(大器)의 아들. 1627년(인조 5) 학행(學行)으로 추천을 받아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江華)로 종실(宗室)을 호위(扈衛), 소무(昭武)․영사(寧社)의 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부수(副率)에 이르렀으나 청나라와의 강화후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전심했다.

권 지(權 芷)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내고 임진왜란 당신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추증되어 충청 아산현 자곡(忠淸牙山縣紫谷) 수한산성(水漢山城) 아래 10여 리를 점거(占據)하였다.

권신중(權信中) 1575 (선조 8) ~ 1633 (인조 11)

조선조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권호중(權好中) 1578 (선조 11) ~ 1665 (현종 6)

조선 때 교관(敎官)을 지내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 되었다.

권이중(權履中) 1581 (선조 14) ~ 1660 (현종 1)

초명은 유중(有中), 자는 자정(子正), 호는 남애(南厓),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황(愰)의 아들. 1618년(광해군 10) 문과(文科)에 장원했으나 당시 과거제도가 문란하여 합격 증서를 교부 받지 못했다.

이에 시국을 개탄하고 고향 황산(黃山)에 돌아가 두문불출, 독서로 소일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에 여러 지방의 찰방(察訪)과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 등에 임명 되었으나 사퇴하거나 잠시 부임했다가 사임하고, 후에 감찰(監察)이 되어 사소한 사건으로 그만 두었다.

권근중(權謹中) 1586 (선조 19) ~ 1650 (효종 1)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다.

권민첨(權民瞻) 조선조에 첨정(僉正)을 지냈다.

권진기(權盡己) 자는 여당(汝堂), 1606년(선 조39) 참봉(參奉)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권경기(權儆己)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권여중(權汝中) 조선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르고, 장령(掌令)에 추증되었다.

권익경(權益慶) 시호(諡號)는 충의(忠毅).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감찰(監察)로 강도(江都)에 가서 순절(殉節)하였고, 영순군(永順君)에 추증(追贈)되었다.

권성기(權成己) 자는 성지(誠之). 1547년(명종 2)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권 형(權 詗) 자는 중오(仲悟). 1599년(선조32) 군수(郡守)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장령(掌令)을 지냈다.

권 위(權 偉)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殉節)하였다.

권 엽(權 曄)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倡義)하여 순절(殉節)하였다.

권대임(權大任) 1595 (선조 28) ~ 1645 (인조 23)

자는 홍보(弘輔), 예조 판서(禮曹判書) 협(悏)의 손자. 선조의 딸 정선옹주(貞善翁主)와 결혼하여 길성위(吉城尉)에 봉해졌고, 1636년(인조 14) 길성군(吉城君)을 습봉(襲封)했다. 글씨를 잘 썼다.

권 담(權 譚) 조선에서 판관(判官)과 현령(縣令)을 지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하였다.

권 화(權 和) 조선조에서 판관(判官)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권극정(權克正)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권위중(權偉中) 조선 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권 조(權 慥) 조선에서 현령(縣令)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권 경(權 憬) 조선조(朝鮮朝)에 익위(翊衛)를 지내고,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권경중(權景中)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내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권정중(權正中) 조선조에 감찰(監察)을 지냈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권 해(權 海) 자는 심원(深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권 하(權 厦)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감사(監司)를 지냈다.

권 가(權 可) 조선에서 충의위 호군(忠義衛護軍)을 지냈다.

권신요(權信堯) 자(字)는 사수(士秀). 음보(蔭補)로 화순 현감(和順縣監)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권 척(權 滌) 조선 인조(仁祖) 때 좌익공신(左翊功臣)에 책록되고, 군기판관(軍器判官)을 역임하였다.

권인준(權仁俊) 조선(朝鮮)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권 동(權 洞) 조선에서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권순중(權順中) 조선조에 감역(監役)을 역임하고,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권익중(權益中) 조선조(朝鮮朝)에 역전삼읍(歷典三邑)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권 욱(權 昱) 자(字)는 광언(光彦). 1555년(명종 10) 진사(進士)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권 협(權 鞈) 자(字)는 여명(汝明), 호(號)는 초루(草樓), 관찰사(觀察使) 벽(擘)의 아들, 필(鞸)의 형. 한양 출신. 시문(詩文)에 능하여 문명이 높았으며 음보(蔭補)로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지냈다.

아우 필(鞸)이 당시 집권당인 대북(大北) 일파의 음모로 유배가던 도중 죽자 벼슬에서 은퇴, 1618년(광해군 10) 대북 일당들이 강에서 주유(舟遊)함을 보고 뛰어들어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키고 정권을 농단하는 처사를 꾸짖어 화를 당할 뻔했다.

권 돈(權 焞) ? ~ 1639 (인조 17)

자는 이원(而原). 1603년(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612년(광해군 4) 경주 통판(慶州通判)을 지냈으며, 이듬해 강화(江華)에 유폐(幽閉)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독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다고 핑계하여 이를 거절 했다. 후에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있을 때 매관 매직이 성행하는 등 정계가 문란함을 개탄하고 사임했다.

권 임(權 恁) 1600 (선조 33) ~ 1654 (효종 5)

자는 화숙(和叔), 호는 퇴암(退庵), 응생(應生)의 아들. 1645년(인조 23)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후에 사직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성리학(性理學)의 연구로 일생을 보냈다.

권 시(權 諰) 1604 (선조 37) ~ 1672 (현종 13)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 좌랑(佐郞) 득기(得己)의 아들. 1636년(인조 14) 천거로 대군 사부(大君師府)에 누차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효종(孝宗) 즉위 후 특별 유시로 불렀으나 굳이 사양 했다.

1659년(효종 10)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윤선도(尹善道)가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생명을 걸고 서인을 공격하는 태도를 가상하다고 했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 낙향 도중 광주(廣州)의 선영(先塋)에 머물러 살았다.

1668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공주(公州)에 돌아 갔다.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기호학파(畿湖學派)로서 예론(禮論)에 밝았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공주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권 영(權 坽) 1604 (선조 37) ~ 1675 (숙종 1)

자는 자고(子高), 호는 우곡(愚谷), 우승지(右承旨) 확(鑊)의 아들. 1628년(인조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전적(典籍)․정언(正言)․지평(持平)을 역임,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때 병으로 아산(牙山)에 은거했다.

1641년 장령(掌令), 1651년(효종 2)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이듬해에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 후 다시 장령으로 윤선도(尹善道)를 규탄 하다가 파면되었다.

복직하여 문학(文學)․사예(司藝)․헌납(獻納)․필선(弼善)․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1654년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661년(현종 2) 간성 군수(杆城郡守)가 되고, 1663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고, 병조 참의(兵曹參 議)․우승지(右承旨)․좌승지(左承旨) 등을 역임 후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권순장(權順長) 1607 (선조 40) ~ 1637 (인조 15)

자는 효원(孝元),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형조 참판(刑曹參判) 진기(盡己)의 아들. 1624년 진사(進士)가 되고, 음보(蔭補)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건원릉 참봉(建元陵參奉)․빙고 별제(氷庫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江華)로 피난, 수성(守城)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듬해 정월, 성이 함락되자 좌의정 김상용(金尙容)등과 함께 스스로 분사(焚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처(妻)와 누이동생은 목매어 자결, 아우 순열(順悅)․순경(順慶)은 전사(戰死)했다. 지평(持平)에 추증(追贈), 자손은 녹용(祿用)케 되었고,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권흥익(權興益) 1608 (선조 41) ~ 1655 (효종 6)

자는 명래(明來), 호는 사물재(四物齎), 사예(司藝) 칭(稱)의 아들. 1633 (인조 11) 진사(進士)가 되고, 163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청주 판관(淸州判官)에 이르렀다. 초서(草書)를 잘썼다.

권순창(權順昌) 1609 (광해군 1) ~ 1687 (숙종 13)

자(字)는 성지(聖之), 군수(郡守) 경기(傾己)의 아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45년 빙고 별좌(氷庫別坐), 1646년 영국원종공신(英國原從功臣)이 되었고, 내외직을 거쳐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지냈다.

철원 부사(鐵原府使) 때 포도(捕盜)의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첨지 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동지충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권상길(權尙吉) 1610 (광해군 2) ~ 1674 (현종 15)

자는 자정(子貞), 호는 남곡(南谷)․근리재(近裏齋), 찬(瓚)의 아들. 1635년(인조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 화의를 주장하는 최명길(崔鳴吉) 등 대 신들을 참(斬)할 것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61년(현종 2)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이 되어 부임 도중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보고 분개, 집으로 되돌아가 종적을 감추었다. 순조(純祖) 때 정경대부(正卿大夫)에 추증(追贈) 되었다.

권극명(權克明) 자(字)는 회보(晦甫). 1624년(인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권 심(權 沈) 자(字)는 공윤(公潤). 1624년(인조 2) 현감(縣監)으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응교(應敎)를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권직기(權直己) 자(字)는 이경(而敬), 호(號)는 명고(鳴皐). 1581년(선조 14)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권위기(權爲己) 자(字)는 학고(學古), 호(號)는 백저(百渚). 1586년(선조 19) 현감(縣監)을 지내고, 승지(承旨)에 추증(追贈)되 었다.

권 보(權 俌)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권 선(權 僎)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권임중(權任中) 자(字)는 경용(景用). 1633년(인조 11) 도사(都事)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권 준(權 濬) 자(字)는 도보(導甫). 1613년(광해군 5)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 科)로 급제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권 식(權 拭) 자(字)는 자경(子儆), 호(號)는 국헌(菊軒). 1641년(인조 19) 호군(護軍)으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권 우(權 寓) 1610 (광해군 2) ~ ?

자는 자명(子明), 호는 동곡(東谷), 확(鑊)의 아들. 1629년(인조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봉교(奉敎)를 거쳐 1636년(인조 14)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정언(正言) 등 청환직(淸宦職)을 역임, 1650년(효종 1) 춘추관 편수찬(春秋館編修撰)으로「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집의(執義)․보덕(輔德)․사간(司諫)을 거쳐 1653년 사인(舍人)․승지(承旨), 1657년 대사간(大司諫)․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1659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1662년 예조 참판, 이듬해 도승지(道承旨)․강화 유수(江華留守), 1665년 장악원정(掌樂院正), 3년 후 부호군(副護軍), 1671년 판결사(判決事), 이듬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지내고 1674년 사은부사(謝恩府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권대운(權大運) 1612 (광해군 4) ~ 1699 (숙종 25)

자는 시회(時會), 호는 석담(石潭), 판서 협(挾)의 손자, 사어(司禦) 근중(謹中)의 아들. 1642년(인조20) 진사(進士)가 되고, 164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사인(舍人)․헌납(獻納)․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670년(현종 11) 호조판서에 이어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고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예조 판서가 되고, 병조 판서․우의정․좌의정(左議政)을 지낸 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南人)이 실각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영일에 부처(付處)된 뒤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풀려 나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삭출(削黜) 당한뒤 안치(安置)되 었다가 이듬해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어 죽었다.

권 격(權 格) 1620 (광해군 12) ~ 1671 (현종 12)

자는 정숙(正叔), 호는 육유당(六有堂), 부사(府使) 성원(聖源)의 아들. 1650년(효종 1) 진사시(進士詩)을 거쳐 이듬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후 사간(司諫)․집의(執義)에 오르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오래 있었다.

1660년(현종 1)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충청도 및 황해도의 도사(都事),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 강릉 부사(江陵府使)등 주로 외직에 있었다.

권대재(權大載) 1620 (광해군 12) ~ 1689 (숙종 15)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돈간재(敦艮齋)․용문(龍門), 판서(判書) 협(悏)의 손자, 위중(偉中)의 아들. 1653년(효종 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당후가관(堂後假官)을 지냈으며, 165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 科)로 급제, 전적(典籍)․병조 좌랑(兵曹佐郞)․창평 현감(昌平 縣監)․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공주 현감(公州縣監)․대구 판관(大邱判官) 등을 역임했다.

숙종(肅宗) 즉위 초에 형조 참의(型曹參議)에 이어서 승지(承旨)를 거쳐 경상도순무사(慶尙道巡撫使)․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 을 지내고, 1679년 송시열(宋時烈)을 엄중 처벌케 하려다가 광주(光州)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영변(寧邊)에 이배(移配)되었다가 1683년 방환(放還), 1687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등용, 제학(提學)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권호윤(權豪胤) 1623 (인조 1) ~ 1684 (숙종 10)

자는 경준(景俊), 호는 동빈(東濱), 장악원 판사((掌樂院判事) 몽협(夢協)의 아들. 1640년(인조 18) 권시에게 수학(修學), 1642년 생원(生員)이 되고 1659년(효종 10) 경릉 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 하지 않았으며 이해 효종(孝宗)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 상(服喪) 문제가 일어나자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 : 만1년)을 반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3년설 을 주장하는 상소를 하여 과거 응시(科擧 應試) 자격을 박탈당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했다. 글씨를 잘 쓰고 천문․수학에도 정통했다. 영조(英祖) 때 집의(執義)에 추증(追贈)되었다.

권시경(權是經) 1625 (인조 3) ~ ?

자는 계상(季常), 호는 칠휴(七休), 시호(諡號)는 정간, 순장(順長)의 아들. 음보(蔭補)로 함흥 판관(咸興判官)이 되고 1675년(숙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1682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 었다.

1689년 승지(承旨)로서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삭직(削職)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 뒤에 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이르 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권 의(權 誼) 자(字)는 정보(正甫). 1616년(광해군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권 완(權 岏) 자(字)는 자고(子高), 호(號) 는 포옹(逋翁). 조선 때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안원군(安原君)에 봉(封)해졌다.

권백시(權伯時)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권필경(權必經) 자(字)는 자상(子常).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권 유(權 攸) 자는 백도(伯道), 호는 돈고(豚高). 조선에서 부위(副尉)를 지냈다.

권 침(權 鈂) 자(字)는 문경(文卿). 1579년(선조 12) 군기부정(軍器副正)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권 강(權 崗) 자는 자옥(子玉). 조선조(朝 鮮朝)에서 우윤총관(右尹摠管)을 지냈다.

권 집(權 潗) 자는 경첨(景瞻). 조선에서 현령(縣令)을 지내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로되었다.

권 주(權 柱) 조선조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권효성(權孝誠) 자(字)는 명달(明達). 조선 때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효(孝)로써 정령(旌閭)가 세워졌다.

권 흔(權 俒) 자(字)는 완중(完仲), 조선조(朝鮮朝)에서 사마 판관(司馬判官)을 지냈다.

권 영(權 咏) 자(字)는 수부(守夫). 조선에서 별좌(別坐)를 지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殉節)하였다.

권 준(權 儁) 조선(朝鮮) 때 도정(都正)을 지냈다.

권 휴(權 休) 자(字)는 양중(揚仲). 조선 때 사직(司直)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다.

권 홍(權 鴻) 조선조에 사과(司果)를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권대유(權大有)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권대평(權大平) 조선조(朝鮮朝)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권 준(權 俊) 조선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고, 부인열행(婦人烈行)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권 심(權 諗) 조선(朝鮮) 때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권순선(權順善) 자(字)는 선지(善之). 1614년(효종 6) 판관(判官)을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권순구(權順久) 자(字)는 성칙(聖則). 1618년(광해군 10)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 었다.

권 열(權 說) 자(字)는 열경(說卿). 1666년(현종 7)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권 성(權 誠) 자(字)는 식경(植卿). 1618년(광해군 10) 사마(司馬)를 거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이르렀다.

권 지(權 趾) 1639년(인조 17) 식년문과(式 年文科)에 생원과(生員科)로 급제하여 사부(師傅)를 지냈다.

권 집(權 諿) 자(字)는 사화(士和). 1639년(인조 17)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우윤(右尹)을 지냈다.

권 양(權 讓) 자(字)는 예경(禮卿). 1656년(효종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로 급제하여 사간(司諫)을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권두추(權斗樞) 자(字)는 여망(汝罔). 1655년(효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 로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권 박(權 搏) 자(字)는 천유(天遊). 조선 때 군수(郡守)에 올랐다.

권 간(權 旰) 자(字)는 회숙(晦叔). 조선(朝鮮) 때 정랑(正郞)을 역임했다.

권 오(權 悟) 자(字)는 복초(復初). 1645년(인조 23) 통덕랑(通德郞)으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직강(直講)을 지냈다.

권 기(權 愭) 자(字)는 이경(以敬), 호(號) 는 병암(屛巖). 조선(朝鮮)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권 유(權 惟)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권 규(權 珪) 자(字)는 덕장(德章), 호(號)는 남록(南麓). 1675년(숙종 1)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 후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권 우(權 佑) 조선(朝鮮) 때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권시태(權時泰)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권 연(權 燕) 조선조에 교관(敎官)을 지냈다.

권 봉(權 封)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주부(主簿)를 지냈다.

권세경(權世經) 자는 백상(伯常). 1626년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권시현(權始顯) 호(號)는 율호(栗豪), 처균(處均)의 증손(曾孫). 인조(仁祖) 때 첨지 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권도경(權道經) 자(字)는 자상(子常), 순창(順昌)의 아들. 조선 현종(顯宗) 때 경상․영흥․전라 병사(慶尙․永興․全羅兵使)를 지냈으며 원종공신(願從功臣)에 책록(策錄) 되었다.

권 수(權 脩) 자(字)는 영숙(永叔), 호(號)는 칠설(漆卨), 현(晛)의 아들. 조선 때 황해․경상 도사(黃海․慶尙都事)를 역임하였다.

권 유(權 愈) 1633 (인조 11) ~ 1704 (숙종 30)

자는 퇴보(退甫), 호는 하곡(霞谷), 목사(牧使) 훈(勛)의 손자, 승지(承旨) 형(詗)의 현손(玄孫). 1665년(현종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대사간(大司諫)․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등 요직을 역임했다.

지경연사(知經莚事)에 올랐으나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西人)이 정권을 장악할 당시 유배되었다가 1697년 풀려나온 후 등용되지 못했다. 시문(詩文)에 능했고, 예문관 대제학 때「인경왕후지(仁敬王后誌)」를 저술했다.

권 해(權 瑎) 1639 (인조 17) ~ 1704 (숙종 30)

자는 개옥(皆玉), 호는 남곡(南谷), 호조 판서 대재(大載)의 아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74년 고부사(告府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9년(숙종 5)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허 목(許 穆)이 영의정 허 적(許 積)의 아들 견(堅)의 불법한 행위를 공격한 사건의 여파로 청남(淸南)․탁남(濁南)의 당파싸움이 벌어지자 도승지(都承旨) 민 암(閔 黯)에 의해 청남인 허 목의 당으로 몰려 아버지는 광주(光州), 그는 청도(淸道)로 유배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대사간(大司諫)에 복관(復官), 대사성(大司成)․대사헌(大司憲)․부제학(副提學)․승지(承旨)․형조 참의(刑曹參議)를 거쳐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에 또 유배, 1697년 석방, 예안(禮安)에서 여생을 보냈다. 문장․글씨에 뛰어났고 평양 부윤(平壤府尹)에 재임시 평북 영변(寧邊)의「보현사 영암대사 석종비(普賢寺靈巖大師石鐘碑)」를 찬(撰)하고 썼다.

권상하(權尙夏) 1641 (인조 19) ~ 1721 (경종 1)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齎), 시호(諡號)는 문순(文純), 집의(執義) 격(格)의 아들. 1660년(현종 1)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스승으로 학문에 전심,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다.

앞서 1659년의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 문제(服喪問題)로 추죄(追罪)를 받게 된 송시열이 1675년(숙종 1) 덕원부(德源府)에 유배되고 남인(南人)들이 득세하게 되자, 청풍(淸風)의 산중에서 학문에 힘쓰며 제 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하는 한편 정주(程朱)의 서적을 교정 했다.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어 사사(賜死)당하게 되자, 달려가서 이별을 고하고 스승의 의복과 책을 유품(遺品)으로 받았고, 유언에 따라 만동묘(萬東廟)를 청주(淸州)에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향하고 숙종(肅宗)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좌․우의정(左․右議政)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모두 사양했다. 이 이(李 理)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송시열(宋時烈)에게 계승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지도자로서 이 이의 기발이승일도서(氣發理乘一途設)을 지지했으며, 그이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 간(李 柬)이 인물성 편재문재(人物性偏在問題)로 논쟁을 하자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동일하다는 이 간의 학설(學說 : 낙론)에 대해 인과 물은 성이 각기 다르다는 한원진의 학설(學說: 호론)을 지지함으로써 논쟁이 더욱 확대되어 기호학파는 마침내 양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충주(忠州)의 누암서원(樓巖書院), 청풍(淸風)의 황강서원(黃岡 書院), 정읍(井邑)의 고암서원(考巖書院), 성주(星州)의 노강서원(老江書院), 보은(報恩)의 산앙사(山仰柌), 예산(禮山)의 집성사(集成柌) 송화(松禾)의 영당(影堂) 등에 제향(帝鄕)되었다.

권극휴(權克休) 자(字)는 시원(時遠). 1657년(효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감찰(監察)을 지냈다.

권 환(權 渙) 자(字)는 중장(仲章), 호(號)는 제남(濟南). 1668년(현종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관서․영남 어사(關西․嶺南御使)․황해 관찰사(黃海觀察使)․송도유수(松都留守)․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권 선(權 愃) 자(字)는 화중(和仲). 1669년(현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권만제(權萬濟) 자(字)는 세경(世卿). 1669년(현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사예(司藝)를 지냈다.

권성구(權聖矩) 1642 (인조20) ~ 1709 (숙종35)

자는 서여(恕余), 호는 구소(鳩巢), 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