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낙안김씨시조(落安金氏),김수징(金粹澄),낙안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24 20:54 수정일 : 2018-03-21 20:0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의 후손에서 분적한 낙안 김씨(落安金氏)는 시조 (始祖) 김수징(金粹澄)이 고려 명종(明宗 : 제19대 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감무(監務 : 현령을 둘 수 없는 작은 현의 감독관)로 있으면서 국난(國難)을 평정(平定)한 공(功)으로 낙안군(落安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始 祖)로 하고 낙안(落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경주 김씨(慶州金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낙안(樂安)은 전라남도 승주군(昇州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백제(百濟) 시대에는 분차(分嵯) 또는 분사(分沙)라 불리웠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 때 분령(分嶺)으로 고쳤다가, 고려(高麗) 시대에 낙안(落安) 으로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명문(名門)의 전통을 자랑하는 낙안 김씨는 수징(粹澄)의 둘째 아들 광습(光襲)이 명종(明宗)과 신종(神宗 :고려 제20대 왕, 재위기간 : 1197 - 1204) 양조(兩朝)에게 걸쳐 벼슬을 하여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 : 군제인 육위의 종3품 벼슬), 검상(檢詳), 사인(舍人), 검교 대장(檢校大將) 등을 지내고 좌승상(左承相)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윤견(允堅)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윤견(允堅)의 차남 지겸(之謙)은 충렬왕(忠烈王 : 고려 제25대 왕, 재위기간 : 1274 - 1308) 때 문하평리(門下評 理)를 지내고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어 낙안군(落安君)에 봉해졌으며, 남남 남정(南正)은 충목왕(충목왕 : 고려 제29대 왕, 재위기간 : 1344 - 1348)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 벼슬)에 올라 크게 명성을 밀쳤다.

한편 남정(南正)의 맏아들 규(糾)는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벼슬인 제학(提學)을 역임했고, 차남 수(隨)는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낙천군(洛川君)에 봉해졌으며 문예(文藝)에 뛰어났다. 고려조(高麗朝)에서 명성(名聲)을 날린 낙안김씨는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어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하여 가문(家門)의 긍지를 심었다.

제학(提學) 규(糾)의 아들 주(湊)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정추(鄭樞) 등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유배(流配)되기도 하였으나, 우왕(禑王 : 고려 제32대 왕, 재위기간 : 1375 - 1388) 때 지신사(知申事),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문하평리(門下評理) 겸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정2품 으뜸 벼슬)에 올랐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좌복야(左僕射)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 : 조선 태조가 건국 후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임시기구)에 임명되어 종묘(宗廟), 궁궐(宮闕) 신축(新築)에 공이 컸으며, 1397년(태조 6)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이르렀고, 성곽경영(城郭經營)의 전문가로서 영남루(嶺南樓)를 창건(創建)했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태종(太宗) 때 보문각(補文閣)의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인관(仁琯)과 전라수군절제사(全羅水軍節制使) 빈길(빈吉)이 유명했으며, 화(華)는 세종(世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으나 사임하고 고향(故鄕) 으로 돌아가 학문(學問)에만 전념했다.

성종(成宗) 때의 공조 참판(工曹參判) 정익(廷益)은 충직(忠直)하고 청백(淸白)하기 로 유명했으며, 은창(殷昌)은 이천 부사(利川府使)를 거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올라, 호조 판서(戶曹判書) 여광(麗光), 영천군수(永川郡守) 여현(麗顯), 이조 참판(吏曹參判) 사남(士男), 장연 부사(長淵府使) 덕리(德利), 남양 부사(南陽府使) 여기(汝器), 양성현감(陽城縣監) 시문(時文)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려 명문의 후손임을 자랑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낙안 김씨(落安金氏)는 남한(南韓)에 4,1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 낙안김씨조상인물

김수징(金粹澄) 고려 명종조(明宗朝)의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김광습(金光襲) 시호는 문열(文烈). 고려의 명종(明宗)․신종(神宗)에 걸쳐 벼슬을 하여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검상(檢詳)․사인(舍人)․검교대장(檢校大將) 등을 지내고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다.

김윤견(金允堅) 고려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김취신(金就莘)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김지겸(金之謙)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공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김남정(金南正)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에 급제, 병부상서(兵部尙書)․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김효자(金孝慈) 고려 때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김 규(金 糾) 고려 때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역임하였다.

김 수(金 隨) 시호는 충민(忠愍). 충정왕(忠定王) 때 지군국중사(知軍國中事)․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낙천군(洛川君)에 봉해졌다.

김 주(金 湊) ? ~ 1404(태종 4)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문과(文科)에 급제, 비서감승(秘書監丞)을 거쳐 우왕 때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지신사(知申事)․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을 역임하고, 공양왕 초기에 문하평리(門下評理) 겸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393년 좌복야(左僕射)로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 되었다.

김 미(金 彌) 조선 때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김인관(金仁琯) 조선 태종(太宗) 때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하였다.

김빈길(金빈吉) 자(字)는 대건(大建), 호(號)는 죽강(竹岡), 시호(諡號)는 양혜(襄惠). 1394년(태조 3) 전라 수군절제사(全羅水軍節制使) 및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고 세자 사부(世子師傅)가 되기도 하였다.

김가외(金可畏) 조선 때 통례문사(通禮門事)․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한제(金漢磾) 조선 때 낙천군(洛川君)에 봉해졌다.

김 회(金 璯)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김 호(金 浩) 조선 때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김중의(金仲義) 조선 때 충주 판관(忠州判官)을 역임하였다.

김 융(金 융) 조선 때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였다.

김중문(金重文) 조선 때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역임하였다.

김 화(金 華) 조선 세종(世宗) 때 문과에 금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정익(金廷益) 조선에서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成宗) 때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은주(金恩柱)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 위(金 瑋) 조선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김정손(金貞孫) 조선 때 삼척 부사(三陟府使)를 역임하였다.

김은창(金殷昌) 조선 때 이천 부사(利川府使)를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김남수(金南粹)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김만천(金萬薦)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김여광(金麗光) 조선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여현(金麗顯) 조선 때 영천 군수(永川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사남(金士男) 조선 때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언희(金彦希) 조선 때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김후생(金厚生)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 난(金 蘭) 조선 때 자인 현감(慈仁縣監)을 역임하였다.

김덕리(金德利) 조선 때 장연 부사(長淵府使)를 역임하였다.

김후립(金厚立) 조선 때 봉산 군사(鳳山郡守)를 역임하였다.

김현급(金賢岌)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김경충(金景忠) 조선 때 비안 현감(比安縣監)을 역임하였다.

김경효(金景孝) 조선 때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을 역임하였다.

김진인(金進仁)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취인(金就仁)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김여징(金汝徵) 조선 때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여기(金汝器) 조선 때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역임하였다.

김여진(金汝振) 조선 때 고양 군수(高陽郡守)를 역임하였다.

김건준(金建俊) 조선 때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김 흘(金 紇) 조선 때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김국형(金國衡) 조선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김유경(金惟鏡)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국빈(金國賓) 조선 때 삭녕 군수(朔寧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재영(金再英) 조선 때 신천 군수(信川郡守)를 역임하였다.

김덕흥(金德興) 조선 때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을 역임하였다.

김시문(金時文) 조선 때 양성 현감(陽城縣監)을 역임하였다.

김만종(金萬鍾)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김유택(金有澤) 조선 때 양천 현령(陽川縣令)을 지냈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김한일(金漢鎰) 조선 때 옥천 군수(沃川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성오(金成五)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김중오(金重五)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김시일(金時一)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시각(金時珏) 조선 때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역임하였다.

김중현(金重鉉)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경현(金京鉉) 조선 때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다.

김석현(金錫鉉) 조선 때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김삼현(金參鉉)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김 서(金 瑞)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한석(金漢錫)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득언(金得彦) 조선 때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철순(金哲淳) 조선 때 태능 참봉(泰陵參奉)을 지냈다.

김응섭(金應燮) 조선 때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김우섭(金宇燮) 조선 때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김영섭(金榮燮) 조선 때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역임하였다.

김이찬(金履粲) 조선 때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김이순(金履珣) 조선 때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김익현(金益顯) 조선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문현(金文顯) 조선 때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역임하였다.

김기현(金箕顯) 조선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김명헌(金命顯) 조선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김진관(金振寬) 조선 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진묵(金振黙)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재항(金在沆) 조선 때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김재열(金在悅) 조선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김정원(金珽元) 조선 때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였다.

김재소(金在韶) 조선 때 곽산 군수(郭山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재하(金在夏)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김재준(金在準)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재규(金在奎)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김재익(金在翼)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재호(金在瑚) 조선 때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을 역임하였다.

김재선(金在璇) 조선 때 용인 현감(龍仁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상흠(金商欽) 조선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김기흠(金琪欽) 조선 때 비서승(秘書丞)을 역임하였다.

김정흠(金正欽) 조선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창석(金昌錫)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김태석(金台錫) 조선 때 평창 군수(平昌郡守)를 역임하였다.

김형석(金亨錫)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김홍석(金弘錫)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김영두(金永斗)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