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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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3-27 09:36 수정일 : 2018-02-24 12:18

부안(부령)김씨의 연원

부안(扶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서부(南西部) 변산반도(邊山半島)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百濟) 때에는 개화현(皆火縣)이었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에는 부령현(扶寧縣) · 계발(戒發)이라 하였으며. 서기 1414(조선 태종 14)에 보안(保安)과 부령현(扶寧縣)을 합하 여 지금의 부안현(扶安縣)으로 개칭되었다.


부안(부령) 김씨(扶安(扶寧)金氏)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의 맏아들 김일(金鎬)을 시조(始祖)로 하여 고려(高麗) 시대에서부터 부안(扶安)에 뿌리를 내렸다. 父王敬順王臣下를 모아놓고 新羅高麗讓國함이 어떠냐고 묻자 贊反兩論이 일자 이 나서 말하기를 國家 存亡은 반드시 天命이 있는 것이니 忠臣義士와 더부러 民心收捨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議論함이 옳을 것인데 어찌 千年社稷을 하루 아침에 다른 나라에 넘겨줄 수 있읍니까 하니 父王百姓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듣지 아니하고 高麗請讓하니 太子公께서는 痛突하면서 父王을 이별하고 母后竹房王后太子妃金氏 여동생 德周公主를 거느리고 따르는 忠臣義士愛國臣民과 더불어 皆骨山에 들어가 을 쌓고 麻衣草食하며 祖國 光復圖謀하고저 抗麗運動을 하시 다가 一生을 마치다.

그의 큰아들 기로(箕路)가 심산유곡인 변산에 숨어들어와 살면서 그의 후손이 부령 (부안) 땅에 뿌리를 내렸다.

그의 자손(子孫) 경수(景修)가 고려 선종(宣宗 · 13 대 왕, 재위기간 : 1084-1094) 때 처음으로 세상에 나 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후 부령(扶寧 : 부안의 예 지명)에서 정착(定着)하고. 그 의 아들 춘()이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해졌으므 로. 관향(貫鄕)을 부령(扶寧)으로 하게 되었다.


고려 때 부안 김씨(扶安金氏)를 빛낸 인물(人物)로는 1222(고종 9) 열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 진사에 오른 구()를 들 수 있다.

그는 고종(高宗 : 고려 제23대 왕, 재위기간 : 12131259)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과 제주 판관(濟州判官)을 거쳐 원종(元宗 : 24대 왕, 재위기간 : 12591274)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북정록(北征錄)」을 집필하고 40여년 간 벼슬을 역임하며 정치․외교․학문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의 아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는데, 그 중 장남 여우(汝盂)는 충렬왕(忠烈王)이 세자(世子) 때 원()나라에 4년 간 볼모(두나라 사이의 우호관계를 보증하기 위하여 사람을 담보로 잡아두는 일)로 가 있을 때 이를 호종한 공()으로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올랐고, 차남 종우(宗盂)는 수창궁(壽昌宮) 녹사(綠事)를 거쳐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을 지냈으며, 셋째 숙우(叔盂)는 서도판관(西都判官), 막내 승인(承印)은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여우(汝盂)의 두 아들 각()과 식()도 평장사(平章事)와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각각 역임하여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운강(雲江) ()가 유명했다.

1552(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그는 헌납(獻納)을 거쳐 선조(宣祖) 때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발탁된 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이 황(李 滉)․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이 이(李 珥) 등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했다.

기묘명현(己卯名賢 :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유신들) 석홍(錫弘)의 아들 해()는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인조(仁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올라 문명(文名)을 떨친 호()와 공조 참판(工曹參判) 한익(漢益)이 유명했으며, ()은 호남(湖南)의 거유(巨儒)로 일생동안 학문(學問) 연구에 전력하여 경서(經書)에 밝았고, 문하에서 많은 학자(學者)가 배출되었다.

()의 아들로「서호별곡(西湖別曲)」을 지은 상성(相誠)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후창(後滄) 택술(澤述)은 간재(艮齋) 전 우(田 愚)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조선 말기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일컬어졌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안김씨(扶安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48,961명이 부령김씨는 14,38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부안김씨조상인물

김구(金 坵) 1211(희종 7) 1278 (충렬왕 4)

초명은 백일(百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시호는 문정(文貞). 어려서부터 시문(時文)에 능했고, 고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정원부 사록(定遠府司錄)․제주 판관(濟州判官) 등을 거쳐 원종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어 원나라에 관한 문서를 맡았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다녀온 후「북정록(北征錄)」을 지었다.

1263(원종 4)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이어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 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했다.

1274(원종 15)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있다가 참문학사․판판도사사(參文學士․判版圖司事)가 되어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도록 건의, 궁내의 연소자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게 했다.

원종 때 이장용(李藏用)․류 경(柳 璥)과 함께 신종․희종․강종 3대의 실록(實錄)을 수찬(修撰)했고, 충력왕 때「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김종우(金宗盂)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선대부(奉善大夫)에 올랐고,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을 지냈다.

김숙우(金叔盂)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도 판관(西都判官)을 역임하였다.

김승인(金承印)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를 지내고, 봉상대부(奉常大夫)에 올라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역임하였다.

김여우(金汝盂)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러 형부 상서(刑部尙書)․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등을 지냈다.

김각(金 恪) 고려(高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합문지후(閤門祗侯) 등을 거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김식(金 軾) 고려(高麗)에서 이부 상 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김지경(金之冏) 고려 때 응양장군(鷹揚將軍)을 지냈다.

김조룡(金祖龍) 고려 때 검교소감(檢校少監)을 역임하였다.

김용수(金龍壽) 고려에서 판삼사사(判三司事)․동지밀직부사(同知密直副使)․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김연(金 延) 고려조(高麗朝)에 동지밀직부사(同知密直副使)를 역임했다.

김세영(金世英) 고려 때 한성소윤(漢城少尹)을 지냈다.

김광서(金光叙) 고려 때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를 지냈다.

김광신(金光信) 고려에서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역임했다.

김지려(金之呂) 조선 때 양온 영동정(良醞令同正)을 지냈다.

김당(金 璫) 조선(朝鮮)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김곤(金 坤) 조선 때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김자미(金自美) 조선에서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자현(金自賢) 조선 때 회인 현감(懷仁縣監)을 지냈다.

김회신(金懷愼)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평안 평사(平安評事) 등을 지냈다.

김회윤(金懷允) 조선 때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했다.

김보적(金甫赤) 조선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순손(金順孫) 조선 때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김의손(金義孫) 조선 때 사간(司諫)을 지냈다.

김직손(金直孫) 1437 (세종 19) 1493 (성종 24)

자는 자윤(子胤), 사온서 직상(司醞署直長) 회윤(懷允)의 아들. 1463(세조 8)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69(예종 1) 추장문과(秋場文科)에 급제, 1472(성종3) 검열(檢閱)로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예종실록(睿宗實錄) 」 편찬에 참여했다.

뒤에 겸교수(兼敎授)․정언(正言) 등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한산 군수(韓山郡守)를 지낸 후 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에 이르렀다.

김차손(金次孫) 조선조(朝鮮朝)에 학행(學行)이 뛰어났고, 지평(持平)을 지냈다.

김인강(金仁綱)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김의강(金義綱) 조선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윤진(金允珍) 조선에서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역임했다.

김응추(金應秋)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

김팽석(金彭石)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남원 판관(南原判官)․박사(博士) 등을 역임했다.

김석홍(金錫弘) 1473 (성종 4) 1546 (명종 1)

()는 대이(大而), ()는 옹천(甕泉). 성균관(成均館)에서 수학(修學)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에 18년 동안 은거생활을 하다 당금(黨禁)이 풀리자 정광필(鄭光弼)의 추천으로 수안군수(遂安郡守)에 이르렀다. 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김석필(金錫弼)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수찬관(修撰官) 등을 역임했다.

김석충(金錫忠)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득청(金得淸) 조선 때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을 역임.

김윤려(金潤礪) 조선 때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김훈(金 勛) 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경덕(金景德)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다.

김경장(金景章)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김응룡(金應龍)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올랐다.

김철(金 鐵) 조선에서 직장(直長)을 지냈다.

김상건(金尙乾) 조선 때 한성 판관(漢城判官)을 역임했다.

김수인(金守仁) 조선 때 수문장(守門將)으로서 임진란에 공을 세웠다.

김득인(金得仁) 인조(仁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사의(司議)를 지내고, 동생 우인(友仁)과 함께 정묘․병자호란(丁卯․丙子胡亂) 때 활약하였다.

김우인(金友仁) 조선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봉사(奉事)를 지내고, 정묘․병자호란(丁卯․丙子胡亂) 때 공()을 세웠다.

김경방(金慶邦)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

김서성(金瑞星) 1497 (연산군 3) 1548 (명종 3)

()는 응경(應卿). 병조 정랑(兵曹正郞)이었던 직손(直孫)의 후세로 벼슬은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계(金 啓) 1528 (중종 23) 1574 (선조 7)

자는 회숙(晦淑), 호는 운강(雲江), 정언(正言) 직손(直孫)의 손자. 1552(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헌납(獻納)을 거쳐 1571(선조 4)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후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내고, 1573년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발탁된 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청(金 淸)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경덕(金景德) 조선 때 응교(應敎)를 지냈다.

김익복(金益福)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치원(金致遠) 조선 때 부사(府使)․도승지(都承旨)를 역임.

김해(金 垓) ()는 여후(汝厚), ()는 퇴우당(退優堂). 조선 때 음보(蔭補)로 직장(直長)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위하는 호성원종(扈聖原從)이 되었고, 그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활약하였다.

김화(金 澕) ()는 도원(道源), ()는 재간당(在澗堂). 이 괄(李 适)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김지백(金之白) ()는 춘암(春岩). 김 집(金 集)의 지제로 참봉(參奉)을 지냄.

김지순(金之純) ()는 진경(眞卿), ()는 담암(淡庵). 학문에 어려서부터 뛰어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향리에 우거하며 모든 관직을 사임(辭任)하였다.

김택삼(金宅三) 호는 농암(聾岩). 주부(主簿)가 되었으나 부안(扶安)에 은거하며 독서를 즐겼다. 부안 유천서원(柳川書院)에서 배향되었다.

김현(金 灦) 조선조(朝鮮朝)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역임했다.

김익(金 瀷) 1746 (영조 22) 1809 (순조 9)

자는 이정(而靜), 호는 정일우수(精一迂叟). 초야에 묻혀 일생을 학문 연구에 전심, 경서(經書)에 밝았다. 당대 호남의 거유(巨儒)로 문하에서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김지성(金之聲)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역임.

김택(金 澤) 조선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

김일좌(金日佐)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지냄.

김성연(金聖淵)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대(金 垈) 조선 때 현감(縣監)․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

김동직(金東稷) 조선에서 장령(掌令)을 지냈다.

김규하(金圭夏)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

김한익(金漢益)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양묵(金養黙) 조선조에서 정언(正言)을 지냈다.

김한정(金漢鼎) 조선(朝鮮)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냈다.

김상래(金尙萊) 조선(朝鮮) 때 정언(正言)을 역임.

김헌제(金櫶濟) 조선 때 지평(持平)을 역임.

김용현(金龍玹) 조선에서 문과에 급제하고 주서(注書)를 지냈다.

김태지(金兌之) 조선(朝鮮) 때 사과(司果)를 역임.

김관(金 琯) 조선 때 만호(萬戶)를 역임.

김우선(金友善)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

김여(金 餘) 조선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

김인(金 麟) 조선에서 만호(萬戶)를 지냈다.

김응정(金應貞) 조선조(朝鮮朝)에 만호(萬戶)를 역임.

김봉수(金鳳壽) 조선 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승지(承旨)를 역임.

김윤(金 胤)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해(金 海)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수휘(金守輝) 조선(朝鮮)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

김정우(金廷佑) 조선 때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김성흘(金聲迄)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김수관(金守瓘)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김수철(金秀喆)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정만(金廷萬)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김기원(金期遠) 조선에서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극신(金克新) 조선 때 병마 우후(兵馬虞候)를 역임.

김홍성(金弘晟) 조선때 부호군(副護軍)역임.

김태검(金泰儉) 조선에서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올랐다.

김세정(金世挺) 조선 때 주부(主簿)를 역임.

김거(金 琚) 조선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의건(金儀乾) 조선에서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몽두(金夢斗) 조선(朝鮮) 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김호발(金虎發) 조선조(朝鮮朝)에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세망(金世望)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효증(金孝曾)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

김기룡(金起龍) 조선(朝鮮) 때 주부(主簿)를 역임.

김하운(金夏雲)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

김수한(金受漢)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

김신일(金信鎰) 조선에서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광수(金光洙) 조선 때 충익장(忠翊將)을 지냈다.

김한두(金漢斗) 조선(造船) 때 감찰(監察)을 역임.

김환감(金煥鑑) 조선에서 우후(虞候)를 지냈다.

김낙귀(金洛龜) 조선 때 순천 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하였다.

김련(金 鍊)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

김형갑(金炯甲) 조선조(朝鮮朝)에 도정(都正)을 지냈다.

김진위(金振위) 조선 때 사과(司果)를 역임.

김성탁(金聲逴) 조선에서 예빈첨정(禮賓僉正)을 지냈다.

김연(金衍) 조선 때 호조 좌랑(戶曹左郞)을 역임.

김발(金潑)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수강(金守剛)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순(金循) 조선 때 훈련주부(訓鍊主簿)를 역임하였다

김현식(金賢植) 조선 때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