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전주김씨(全州金氏),전주김씨시조,김태서(金台瑞),전주김씨유래,전주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28 20:53 수정일 : 2020-04-07 15:06

전주김씨시조 및 전주김씨유래(본관)

전주김씨(全州金氏)의 시조(始祖) 김태서(金台瑞)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9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232(고종 19)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상장군(上將軍) 등을 지냈으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다.

1254(고종 4) 식읍(食邑)인 경주(慶州)가 몽고군(蒙古軍)의 병화(兵火)로 인하여 폐허(廢墟)가 되자 가족을 데리고 전주(全州)로 이거(移居)하여 살게 되었으며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고종(高宗)과 명종대(明宗代)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역임한 명신(名臣)이라고하여 완산군(完山君)에 추봉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전주(全州)로 삼게 되었다.


전주(全州)는 전라북도(全羅北道) 중앙(中央)에 위치한 도청소재재로써 고대(古代)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완선(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리우다가 서기 555(신라 진흥왕 16)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그후 경덕왕(景德王 :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 완()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400여 년간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완산부(完山府)가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는 태조(太祖)의 선조(先祖)가 살았던 고향(故鄕)이라고하여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개칭하였다가 1403(태종 3) 다시 전주부(全州府)가 되었다.


고려조에서 벌족(伐族)으로 명성을 떨친 전주 김씨(全州金氏)는 시조 태서(台瑞)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명문(名門)으로서의 기틀을 다졌는데, 장남 약선(若先)은 당대의 세도가(勢道家)인 최 우(崔 瑀)의 맏사위이며 순경태후(順敬太后 : 원종의 비)의 부친(父親)으로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고, 차남 기손(起孫)은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원종(元宗)이 즉위하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막내 경손(慶孫)은 고종(高宗) 때의 명장(名將)으로 몽고군이 칩입하자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이 되어 나가 싸워 귀주성(龜州城)을 지켰고, 1237(고종 24) 전라도 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되어 나주성(羅州城)에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平定) 시켰다.

충렬왕(忠烈王)의 총애를 받아 대장군(大將軍)에 오른 혼()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자흥(子興)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간신 송방영(宋邦英)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고 충선왕(忠宣王)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조선조에 와서는 성종(成宗) 때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을 세운 경()이 북방수어장(北方守御將)으로 <경원성주(慶源城主)>의 왕명(王命)을 받들어 아드 4형제를 데리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되어 후손들이 함경도 지방에서 크게 번성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경()입북중시조(入北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 대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낙동강(洛東江) 전투에서 공을 세운 치원(致遠)1603(선조 36)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검열(檢閱)과 감찰(監察)을 거쳐 사과(司果)로 춘추관(春秋館)의 가사관(棋士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 외 인조(仁祖) 때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응추(應秋)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이름을 떨쳤고, 약우(若愚)는 문장(文章)과 글씨로 명성을 날려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빛냈다.

전주김씨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했던 달혼(達渾)의 후손들이 경북 의성(義城)과 안동(安東) 등지에 집중세거하며, 주로 이북지방에서 성족(盛族)을 이루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김씨는 남한(南韓)56,9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전주김씨조상인물

김약선(金若先) 시호는 장익(莊翼), 평장사(平章事) 태서(台瑞)의 아들, 원종비(元宗妃) 순경태후(順敬太后)의 아버지.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지냈다.

김기손(金起孫) 1251(고종 38) 우복야(右僕射), 이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고, 원종(元宗)이 즉위하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거쳐 문하시랑동중서 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김경손(金慶孫) 1251(공종 18) 정주 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이 되어, 몽고군이 침입하자 분전 격퇴했으며, 1233(고종 20)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1237(고종 24) 전라도 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되었다. 뒤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가 되어 더욱 민심을 얻게 되자 권세를 잡은 최 항(崔 沆)의 시기로 유배되었다.

김 미(金 敉) 초명(初名)은 정()․치(). 1236(고종 23) 내급사(內給事)가 되고, 뒤에 장군(將軍)이 되었으나 무고를 입어 하동(河東)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석방되어 사공(司空)이 되었다.

김 중(金 仲) 고려 대 좌승선(左承宣)을지냈다.

김 성(金 晟) 고려(高麗) 때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역임

김신우(金信祐) 고려에서 상장군(上將軍)․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역임했다.

김 신(金 信) 고려조에 좌승선(左承宣)에 이르렀다.

김익상(金益翔) 고려 때 공부 시랑(工部侍郞)을 역임했다.

김광리(金光利)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

김윤겸(金允兼) 고려조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역임했다.

김행경(金行敬) 고려에서 공부 시랑(工部侍郞)을 역임.

김 흔(金 琿) 시호는 충선(忠宣). 감찰사(監察使) 거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그 후 우승지(右承旨)․첨의참리(僉議參理)․시랑찬성사(侍郞贊成事)․중찬(中贊) 등을 역임하였고,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이 된 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김자흥(金自興) 1264 (원종 5) 1323 (충숙 10)

1303(충렬왕 29)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김원상(金元祥)․오현량(吳賢良)과 함께 간신 송방영(宋邦英) 일파를 제거했다. 1312(충선 4)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리르렀으며 1316(충숙 3) 의흥군(義興君)에 봉해졌다.

김자창(金自昌) 자는 자첨(子瞻). 낭장(郎將)․사재소경(司宰少卿)을내고,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대사헌(大司憲)에 올랐으며,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김자연(金子延) 1316(충숙 3)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김상선(金上璇) 고려 때 총제(摠制)를 역임했다.

김상영(金上瑛) 고려 때 총랑(摠郞)을 역임.

김상린(金上璘) 고려조에 우상시(右常侍)를 역임했다.

김 섬(金 暹) 조선 대 호조 참판(戶曺參判)을 역임했다.

김인수(金仁壽) 조선조에 평야 서윤(平壤庶尹)을 역임.

김 규(金 袿) 조선 때 병조 좌랑(兵曺佐郞)을 지냈다.

김석산(金碩山) 조선(朝鮮)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했다.

김기흥(金起興) 조선조에서 장군(將軍)을 역임.

김 경(金 敬) 장군(將軍)으로서 1480(성조 11)에 건주(建州)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을 세웠고, 그후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입북(入北)한 전주 김씨(全州金氏)의파조(派祖)가 되었으며, 승의부위(丞議副위)를 지냈다.

김 니(金 柅)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우추(金宇樞) 조선조(朝鮮朝)에 전적(典籍)을 지냈다.

김천상(金天尙)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

김경득(金慶得) 조선조에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옥춘(金玉春) 조선(朝鮮)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김명주(金明珠) 조선 대 호조참의(戶曺參議)에 이르렀다.

김귀학(金貴鶴) 조선조에 좌승지(左承旨)를 역임.

김대원(金大元)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김광철(金光哲)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曺參判)을 역임했다.

김 녹(金 錄)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극민(金克敏) 조선조에 호조 판서(戶曺判書)에 이르렀다.

김기남(金期南)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을 역임.

김경휘(金景輝) 조선(朝鮮) 때 부승지(副承旨)를 역임했다.

김기식(金基植) 조선조에 병조 참판(兵曺參判)에 이르렀다.

김갑식(金甲植) 조선 때 공조 참판(工曺參判)을 역임.

김 당(金 鐺) 조선 때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를 역임했다.

김만숙(金萬淑)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曺參議)를 지냈다.

김태돌(金泰突) 조선조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

김광복(金光福) 조선(朝鮮) 때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역임했다.

김광원(金光遠)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曺參議)를 역임.

김춘삼(金春三) 조선조에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르 지냈다.

김진평(金振平) 조선(朝鮮) 대 중추부 점지사(中樞府僉知事)를 역임했다.

김순생(金順生) 조선 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

김수항(金壽恒) 조선(朝鮮)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김호립(金豪立) 조선조에 공조 참의(工曺參議)를 역임했다.

김신운(金信運) 조선 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

김문준(金文俊) 조선 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했다.

김중대(金重大) 조선 때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지냈다.

김재일(金在一) 조선조에 중추부 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역임.

김준기(金准起) 조선 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했다.

김순창(金順昌) 조선 때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이르렀다.

김봉원(金奉元) 조선(朝鮮) 때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를 역임.

김석립(金石立) 조선조에 공초 참판(工曺參判)을 지냈다.

김성백(金成伯) 조선 때 공조 정랑(工曺正郞)에 이르렀다.

김중량(金重良) 조선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역임했다.

김진명(金振鳴) 조선조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

김덕린(金德麟) 조선 때 호조참의(戶曺參議)를 지냈다.

김인욱(金仁旭) 조선(朝鮮) 때 공조 참의(工曺參議)를 역임했다.

김진호(金鎭昊) 소전조에 공조 참의(工曺參議)를 역임.

김치성(金致成) 조선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역임했다.

김석부(金錫富) 조선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냈다.

김한지(金漢地) 조선 때 비안 현감(庇安縣監)을 역임.

김숙형(金淑亨) 조선조에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역임했다.

김천서(金天瑞) 조선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김봉기(金逢夔) 조선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역임.

김한원(金漢遠) 조선조에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했다.

김현징(金賢澄) 조선 때 영변 부사(寧邊府使)를 지냈다.

김덕보(金德寶) 조선 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

김은동(金殷東) 조선조(朝鮮朝)에 공조 참의(工曺參議)를 역임했다.

김 이(金 頤) 조선(朝鮮)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김효범(金孝範) 조선 때 공조 좌랑(工曺佐郞)을 역임했다.

김운벽(金運壁) 조선조에 예조 좌랑(禮曺佐郞)을 역임했다.

김운성(金運聖)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

김운관(金運寬) 조선 때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해다.

김신묵(金信黙) 조선조에 사재소감(司宰少監)을 지냈다.

김득인(金得仁) 조선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역임.

김만의(金萬義) 조선 때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을 역임했다.

김 봉(金 鳳) 조선 때 용인 현감(龍仁縣監)․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역임했다.

김 용(金 瑢) 조선(朝鮮) 때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使)를 역임했다.

김홍렬(金弘烈) 조선조에 호조 참판(戶曺參判)을 역임.

김창진(金昌鎭) 조선 때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를 지냈다.

김언룡(金彦龍) 조선 때 양덕 현감(陽德縣監)을 역임했다.

김익련(金益鍊) 조선조(朝鮮朝) 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냈다.

김덕채(金德彩)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김쾌징(金快澄)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을 역임.

김경익(金景益) 조선조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했다.

김도선(金道善) 조선때 호조 참판(戶曺參判)을 지냈다.

김상묵(金相黙) 조선조에 무과(武科)에 급제, 순장(巡將)을 역임.

김대빈(金大斌)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다.

김성철(金聖哲) 조선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김성휘(金成輝) 조선조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

김윤대(金允大) 조선 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했다.

김이명(金以鳴)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김정흥(金廷興) 조선조(朝鮮朝)에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세남(金世南) 조선 때 양덕 현감(陽德縣監)을 지냈다.

김관신(金寬信)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역임.

김양문(金良文) 조선조에 오위 부총관(五衛副摠管)을 역임했다.

김대철(金大哲) 조선(朝鮮) 때 호조 참판(戶曺參判)을 역임.

김상륜(金尙倫) 조선조에 오위장(五衛將)을 역임.

김치련(金致璉) 조선 때 의금부사(義禁府事)를 역임했다.

김승현(金昇鉉)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

김한철(金漢哲) 조선조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다.

김종혁(김종혁) 조선 때 양덕 현감(陽德縣監)을 역임했다.

김구정(金玖正) 조선조에 양덕 현감(陽德縣監)을 역임.

김처암(金處巖) 조선(朝鮮) 때 강동 군수(江東郡守)를 지냈다.

김명정(金明鼎) 조선조에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종철(金宗喆) 조선(朝鮮)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

김주선(金珠善) 조선 때 호조 참의(戶曺參議)를 역임했다.

김만경(金萬鏡)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김시경(金時鏡)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曺參判)을 역임.

김교흥(金喬興) 조선조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김중걸(金仲桀) 조선(朝鮮) 때 호조 참의(戶曺參議)에 이르렀다.

김장복(金張福) 조선 때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김득곤(金得坤) 조선조에 오위장(五衛將)을 역임.

김성률(金誠律)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계춘(金啓春) 조선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김양복(金良福)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김인욱(金仁旭)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김연모(金淵模)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

김세문(金世文) 조선조에 전주 판고나(全州判官)을 지냈다.

김태흥(金泰興) 조선 때 순찰사(巡察使)를 역임했다.

김수산(金秀山)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

김신형(金愼亨) 조선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김응추(金應秋) 인조(仁祖) 때 이 괄(李 适)의 난()과 안현(鞍峴) 싸움에서 공을 세워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 功臣)이 되고 부사과(副司果)에 올랐다.

김여상(金麗祥) 조선 때 철산 군수(鐵山郡守)를 역임했다.

김유공(金有孔) 조선 때 이원 현감(利原縣監)을 역임했다.

김일형(金日亨)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김광후(金光垕) 조선조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

김경해(金慶海) 조선 때 훈련원 판고나(訓鍊院判官). 첨정(僉正) 등을 역임했다.

김극익(金克益)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오위장(五衛將)을 역임.

김형남(金衡南) 조선조에 무산 첨절제사(茂山僉節制使)를 지냈다.

김효정(金孝貞) 조선 때 죽산 부사(竹山府使)를 역임.

김 계(金 啓) 조선 때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김익겸(金益謙)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했다.

김진호(金振浩)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순민(金舜敏)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후근(金垕根) 조선 때 훈도(訓道)를 지냈다.

김인무(金仁武)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한중(金漢仲)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정온(金定瑥)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

김기욱(金基郁) 조선조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오위장(五衛將). 부령 도호부사(富寧都護府使) 겸 부령진 병마 첨절제사(富寧鎭兵馬僉節制使) 등을 지냈다.

김광인(金光仁)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

김계선(金繼善)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김천택(金天澤)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기성(金基成) 조선조에 양용 현령(陽用縣令)을 지냈다.

김형집(金衡執)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재유(金在裕)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춘학(金春鶴)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

김 소(金 韶) 조선조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김언유(金彦裕)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했다.

김일성(金逸聲)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김정열(金鼎說)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를 역임.

김 의(金 義)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흥귀(金興龜)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승재(金承載)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

김영재(金永載)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김세한(金世漢) 조선 때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냈다.

김기룡(金起龍) 조선조에 호군(護軍)을 역임했다.

김인필(金仁弼)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

김필성(金弼成) 조선에서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냈다.

김우정(金禹廷) 조선 때 강동 현감(江東縣監)을 역임했다.

김난변(金蘭邊) 조선 때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냈다.

김응연(金應淵) 조선조에 벌등진 병마동첨절제사(伐登鎭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

김원보(金元甫)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연모(金應淵)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

김경록(金京祿) 조선조에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를 지냈다.

김봉지(金奉芝)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종전(金宗典)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

김우덕(金禹德)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천진(金天振)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광진(金光振)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용연(金龍淵)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충극(金忠極) 조선 때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냈다.

김현명(金顯命)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봉정(金鳳禎) 조선조에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종헌(金宗軒)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시권(金時權) 조선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

김태권(金泰權) 조선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

김진권(金晋權)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병하(金秉夏) 조선조에 돈령부 도사(敦寧府都事)를 역임했다.

김석우(金錫禹) 조선 때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

김한근(金漢近)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기장 현감(機張縣監)을 역임.

김이호(金利浩) 조선조에 무과(武科)에 급제,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김영정(金永貞) 조선 때 의흥 현감(義興縣監)을 역임.

김병찬(金秉瓚)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사과(司果).수문장(守門將) 등을 역임했다.

김능하(金能夏) 조선 때 홍원 현감(洪原縣監)을 역임.

김여황(金礪晃) 조선조에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다.

김 원(金 源) 조선 때 안주 병마절도사(安州兵馬節度使)를 역임.

김응시(金應試)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했다.

김응철(金應喆) 조선조에 오위장(五衛將)을 역임.

김장운(金章雲)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김차란(金次蘭)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태종(金泰宗)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성흡(金聲洽)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

김명철(金明哲)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영길(金永吉)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창해(金昌海)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부사과(副司果)를 역임.

김종각(金宗珏)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김종건(金宗建)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세득(金世得) 조선조에 창덕궁 위장(昌德宮衛將)을 역임.

김광호(金光灝)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김광준(金光俊) 조선 때 훈벌진 첨절제사(訓伐鎭僉節制使)를 역임했다.

김유문(金有文)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약우(金若愚) 호는 희안(希顔). 조선 때 통영군수(統營郡守)를 역임했으며, 학문(學問)에 능했고 글씨에도 뛰어 났다. 저서로 시집(詩集) 「자소(自笑)」가 남아 있다.

김성진(金聲振) 자는 선명(善鳴). 1679(숙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전적(典籍)을 지 냈다.

김성택(金聖澤) 1897 (고종 34) ?   평남 안주 출신.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만주(滿州)로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입단, 이듬해 6월 광복군 총영암살대원(光復軍總營 殺隊員)으로 동년 9월, 자성 군수(慈城郡守) 및 장연군수(長淵郡守) 등 악질주구(惡質走狗)를 사살하고 미국 국회의원단 내한을 기회로 왜기관(倭機關)을 파괴하고자 하다가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