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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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3-29 15:30 수정일 : 2018-01-09 17:22

청도김씨의 연원

청도김씨는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나와 있는 유명인물 중의 한 분인 김지대(金之岱)에 의해서 등장하였다.

김지대는 고려조 역대(歷代) 관리(官吏)중 제일가는 청백(淸白)과 공정(公正)의 인물로 알려졌던 분이다. 고려사 열전의 내용을 보면 그 분의 인품을 잘 알수 있는 내용이 있다.

고려사 열전에서 찾아보지 않더라도 그 분의 시호에서 어떠한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시호는 다음과 같다.

 

德正應和曰英, 行善可紀曰憲

덕정응화왈영, 행선가기왈헌

 

이 시호의 뜻을 풀이하면 바른 덕으로 화합을 하게 하였으니 ()이라 하고, 착한 행실을 보여서 기강이 서게 하였으니 ()이라 한다하는 것이다. 시호는 살아생전 그 분의 행적을 갖고 지어 줬던 것이고 보면 이 시호에서 보여주는 뜻으로 그 분의 인품이 가히 짐작이 된다 할 것이다.

김지대의 시호는 바로 英憲公(영헌공)인 것이다. 이 시호는 고려, 조선시대에서 어느 유명인도 갖고 있지 않는 유일무이한 시호이다.

김지대의 관직은 재상(宰相)에서 정승(政丞)의 반열에 있었다. 고려 고종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거쳐 원종때 최고위직의 하나인 태부(太傅) 벼슬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특히 김지대는 과거시험때 장원급제를 하였다. 고종 6(1219)에 있었던 과거시험이었다.

김지대는 과거시험 이전에 이미 시문(詩文)에 뛰어났던 것을 조충(趙冲) 재상이 발견한 일이 있었다.

당시 글안군 침입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나이먹은 장정들까지 총동원하는 징집령이 있었다. 여기에 김지대는 29세의 나이로 자진 입대하였다. 그 분에게는 조정대신으로 있는 부친이 있었다. 그리고 지배계급층에 속한 가문의 자제였다. 군역(軍役)을 피할 수 있는 신분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국난(國難)을 생각했다. 국정(國政)에 임하고 있는 부친의 나라 걱정을 더 한층 생각했다. 이에 군역에 자원 입대한 것이다. 여기서 그 분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던 것이다.

 

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

국환신지환 친우자소우 대친여보국 충효가쌍수

 

뜻은, 나라의 걱정은 신하의 걱정이오, 어버이의 근심은 아들이 근심할 바이요,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하면 충()과 효()를 함께 하는 것이요,하는 것이다.

이 짤막한 시가 실로 충효사상을 잘 나타낸 것임을 조충원수(趙冲元帥)는 감탄을 하였는데 조충원수가 이 시를 보게 된 것은 그가 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강동싸움에 출정시 휘하장병들을 사열하다가 눈에 띄어 발견하고 감탄했던 것이다.

당시 출정장병들은 방패에다 무섭게 보이는 괴이한 짐승의 얼굴 모습을 그리고 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유독히 시한수(詩一首)를 방패에다 써 둔 군사를 한명 본 것이다. 그 시가 바로 청년 김지대가 쓴 절묘한 충효사상의 시였던 것이다.

이 시 한편으로 조충원수에 의해 측근인물로 발탁되고 후일 조충원수가 과거시험의 수장이 되었을 때 장원으로 지명되기도 했던 것이다.

김지대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손이다. 그래서 공에게는 신라 화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신라 화랑은 충효의 표본이 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공이 고급관리가 되어 나라에 이바지한 것이 많아 나라에서는 본관을 하사하였다. 당시 하사되는 본관은, 공신에게 한 지역을 봉토(封土) 형식으로 정해 줘 그 지역에서 세금을 징수하여 자기생활에 보탬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본관을 받는 당사자의 출생지와는 상관없었다. 김지대에게 청도지역을 본관으로 갖게 한 것은 그가 신라의 옛도읍지 경주와 인접한 곳이라 공이 옛 신라인의 후예임을 감안해서 그 지역을 본관으로 갖게 한 것이다.

김지대는 귀족 가문의 자제로 당시 고려의 수도 송도지역에서 태어났다. 공에게는 소시적 송도 성남(城南)에서 어떤 예언자에 의해 장차 유명인물이 될 것이란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고려사 열전에서도 그 일화가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현 경북 청도군 지역을 본관으로 하사받을 때 나라에서 제수한 봉호는 오산군(鰲山君)이다. 오산은 청도지역의 옛 지명이었다. 오산군 김지대로서 오늘날 청도김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공의 웃대는 수원김씨(水原金氏)와 계보를 같이 하였다.

김지대의 소시적 이름은 仲龍(중룡)이다. 지대(之岱)라고 이름은 과거급제후 개명한 것이다. 개명에는 그가 태산(泰山)과 같은 높고 우뚝한 인물이 될 것이라 하는데서 지었다는 얘기가 있다. ()는 태산의 뜻이다.

김지대는 4형제가 있었는데 공은 3남이었다. 그래서 ()이란 글자를 넣어 소시적 이름은 仲龍(중룡)이라 한 것이다.

공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무인시대(武人時代)로 지속되었던 최충헌(崔忠獻)이가 아들, 손자까지 3대로 역시 무인집권으로 잇고 있었는데 아들인 최우(崔瑀)의 집권시에 고급관리로서 집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관리로서 소신을 다 하였다는 것이다.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인물이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최우 다음에 최항(崔沆)이 집권하여 전횡을 부려도 그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아첨하지 않고 소신대로 공무(公務)의 도리를 다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항의 집권시는 많은 관리가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가 집권할 때 자기의 횡포를 고자질하고 자기를 천한 신분으로 비웃고 하였던 사람들을 죽이고 했던 것이다. 최항은 집권자가 되기 전에 승려의 신분으로 있었다. 승명이 만전(萬全)이었다.

김지대는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때 승려 만전이가 횡포를 부리는 것을 엄하게 다스린 적이 있었다. 그 감정으로 집권을 한 후 공을 복수하려 했으나 공이 너무나 청렴하고 공명했던 훌륭한 인물이었음에 복수를 하지 못했다.

청도김씨 시조의 인품이 그러하였으므로 후손에게 그같은 인물이 나오기도 하였다.

조선조 초기까지 공은 청도고을 사람으로부터 신()으로 모셔지기도 하였다. 이유는 그 고을에서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 청도를 본관으로 하거나 어떤 연관을 가졌던 성씨의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도김씨시조 김지대의 주요 관직

진주목사(晋州牧使)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태부(太傅)

시조 김지대의 흔적이 있는 곳

진도 용장사(珍島 龍藏寺):고려 고종때 최이(崔怡)의 무신정권시대(武臣政權時代)에 중 만전(萬全)이가 주지로 있었던 사찰이다. 중 만전은 최이의 서자(庶子)로 이 사찰의 주지로 있으면서 수하의 무리들과 함께 진도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횡포를 부렸다. 이 횡포를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부임한 공이 듣고 직접 찾아가 엄히 다스려 횡포를 막았다.

진주 촉석루(晋州 矗石樓):공이 진주목사(晋州牧使)로 부임한 후 창건하였다.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고종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북도정란비(西北道靖亂碑):함경도와 평양도 경계가 되는 황초령(黃草嶺)에 세워져 있는 비로 당시 몽고군의 침략이 잦아 지역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한 것을 공이 출진하여 인근 40여성이 몽고군에게 유린되는 것을 막았고 지역 백성들의 불안을 진정시킨 공로로 관민(官民)이 합동하여 세운 공의 공적비이다.

황초령에는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守碑)가 있던 곳이다. 순수비는 왕이 이곳까지 순시하였다는 표시로 세웠던 것인데 당시 신라의 국경이 이곳까지 미쳤다는 증거가 되는 비이다.

영헌공 김지대의 정난비는 고려 고종때 세워진 것으로 오랜 세월에 마모되고 파손되어 글자만 문헌상으로 남아 있다.

光祿大夫平章 英憲 諱 之岱 鰲山 恩威俱浹 朔漠

광록대부평장 영헌 휘 지대 오산 은위구협 삭막

快晴 德被萬民功致 太平

쾌청 덕피만민공치 태평

 

글 내용은, 평장사 영헌공 김지대 오산군이 은혜와 위엄을 보여 변방의 혼란을 맑게 하여 백성들은 덕을 입고 태평스러워져서 이에 공의 공적을 치하하노라 하는 것이다.

시문에 탁월했던 김지대

공은 고려조 10대 시인(詩人)으로 알려졌다. 조선 숙종때 대제학(大提學) 남용익(南龍翼)에 의해 평가되기도 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저서 동문선(東文選)에 공의 시가 수편이 실려 있다. 그 중에 의성북루객사(義城北樓客舍)라는 시가 명시(名詩)로 전해졌다.

이 시에는 어느 처녀가 실연을 하고서 광인(狂人)이 되었는데, 그 실연을 한 여자가 미쳤어도 이 시를 외우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聞韶公館後園深 中有危樓高百尺 香風十里捲

문소공관후원심 중유위루고백척 향풍십리권

 

珠簾 明月 一聲飛玉笛 烟輕柳影細相連 雨霽山光

주렴 명월 일성비옥적 인경유영세상연 우제산광

 

濃欲滴 龍荒折厞甲 枝郞 仍按憑欄尤可怕

농욕적 용황절비갑 지랑 잉안빙란우가파

 

역해하면, (문소루가 있는 공관의 후원 깊숙한 곳, 그 가운데 위태한 백척 높은 누각이 있구나. 향그러운 바람 십리에 와 주렴을 걷우고, 밝은 달빛에 날라온 한줄기 옥피리 소리여. 엷은 안개속 버들 그림자 가늘게 이어지고, 비개인 뒤 산빛은 푸른 기운이 짙구나. 오랑캐 무찔려고 달려온 무인이여, 안찰사로 와서 보니 조심스럽기 그지 없구나.)

이 시는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재직시 의성(義城)에 왔을 때 지은 것이다.

현재 의성의 문소루에 공의 시를 각판하여 걸어 놓았다.

 

동문선(東文選)에 있는 김지대의 시()

유가사(瑜伽寺). 증서해안부왕시어중선(贈西海按部王侍御仲宣), 수헐원도중(愁歇院途中), 유중화(遊中華). 기상주목사최학사(寄尙州牧使崔學士), 기경상안부한시랑(寄慶尙按部韓侍郞就), 증관반조학사(贈館伴趙學士).

 

이 중에 명시 한수를 소개하자면

花落鳥啼春睡重 烟深野闊馬行遲

화락조제춘수중 연심야활마행지

 

碧山萬里舊遊遠 長笛一聲何處吹

벽산만리구유원 장적일성하처취

 

(꽃은 지고 새는 울어 춘곤이 심한데, 아지랑이 짙은 넓은 들 말걸음은 더디구나. 푸른산 옛 놀던 곳은 만리길인데, 긴 피리 한 소리 어데서 불어오나)

 

김지대에 대한 여러 자료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사략(東國史略), 동국통감(東國通鑑), 동사요찬(東史要纂), 사계문집(沙溪文集), 보한집(補閑集),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문선(東文選), 청파극담(靑坡劇談)

 

주요 서원(書院), 재사(齋舍), 사우(祠宇)

남계서원(南溪書院)

시조 김지대(金之岱)를 추모하여 유생(儒生)들이 창건하였다. 시대는 조선조 숙종(肅宗) 28(1702)이다. 당시 창건 주요인물은 박태고(朴太古), 박상고(朴尙古), 박사고(朴師古), 이경염(李景溓)이다. 고종 8(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한동안 폐쇄되었다.

1986년 보수공사를 하여 현재 모습을 하였다. 이후 시조 이외에 시조의 후손 원정공 김한귀(元貞公 金漢貴)와 호강공 김점(胡剛公 金漸) 3인을 배향(配享)하였다. 경남 밀양시 두곡리에 소재.

쌍수당(雙修堂)

남계서원내에 있는 당우(堂宇). 시조 김지대의 충효정신을 상징하는 당우로 유생의 강당(講堂)으로 있었다. 조선 영조(英祖) 34(1756)에 건립하고 당호(堂號)를 쌍수당이라 하였다. 쌍수당은 공의 명시(名詩) 충효쌍수(忠孝雙修)의 시에서 따와서 작명된 것이다.

염수당(念修堂)

시조 영헌공의 묘소아래 모현재(慕賢齋)가 있었다. 그러나 이 재실은 협소하다고 하여 1860년도에 재사(齋舍) 확장하여 현재와 같은 규모로 개축하였다. 염수(念修)라는 재호(齋號)는 시조의 명시 순두시(楯頭詩)에 나오는 충효쌍수(忠孝雙修)를 기려서 지었던 것이다.

오산재(鰲山齋)

고려조 명신(名臣) 김한귀(金漢貴)를 추념하여 세운 재실. 1987년에 창건되고 종친들의 교육장 및 회합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경북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소재.

매양정(梅陽亭)

조선조 을사명현(乙巳名賢)인 매양 김난상(梅陽 金鸞祥)공을 추모하여 유림과 종친들에 의해서 고종 28(1891)에 경북 영주시 가흥동에 건립한 것이다. 재사의 현판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내려준 것이다.

금포당(錦浦堂)

조선 효종(孝宗)때 무신(武臣) 김시성(金是聲)을 추모하여 세워진 당우(堂宇)이다. 경북 경산시 가양읍 남하동 소재로 헌종(憲宗) 12(1846)에 건립된 것이며 당호는 김시성의 호()를 따서 작명되었다. 공은 병자호란때 효종이 세자로서 청나라에 불모로 갈 때 호종해 갔던 공신이다. 경북 경산시 하양읍 남하동 소재.

계산서원(溪山書院)

임진왜란때 민간인 신분으로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운 남강 김응룡(南岡 金應龍), 식암 김몽룡(息巖 金夢龍), 모헌 김희방(慕軒 金希邦) 3인을 추념하여 1881년에 건립된 것이다. 1981년에 와서는 시조 김지대와 공의 후손 호강공 김점(胡剛公 金漸)도 함께 배향하였다.

김준신의사 제단비(金俊臣義士 祭壇碑)

조선 선조조 임진왜란때 민간인 신분으로 최초로 의병장이 된 김준신을 추념하여 건립된 것으로(1850년경) 지방문화재 113호이다.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476 소재.

도안서원(道安書院)

조선 정조때(1783) 유림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명망있는 학자로서 후학을 많이 배출한 김우태(金宇泰), 김시태(金時泰) 양인을 추모하여 배향한 서원이다.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소재.

성황사(城隍祠)

조선조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청도고을 주민에 의해서 세워졌다. 여기에 두 신()을 모시는 위패를 두었는데 그 두 신은 청도김씨의 시조 김지대와 공의 후손인 김한귀이다. 이 두 분은 청도고을이 빛낸 훌륭한 인물이고 하여 그분들에 의해서 고을이 잘 될것이라는 믿음에서 세워졌던 것이다. 오랫동안 폐허화된 것을 종인들과 군 당국의 협조하에 1998년에 재건되고 2002년도에 석재위패(石材位牌)와 사적비(事蹟碑)가 세워졌다. 건립이 한동안 지지부진 하였으나 당시 대종회 회장 김태우(金泰瑀)와 청도종친회 회장 김경달(金景達)에 의해 완공하고 비가 건립된 것이다. 건립될 때까지 군의회 의장 김기동(金琪東)의 협조가 컸다.

청도김씨조상인물

고려 조선조 주요인물

김한귀(金漢貴):고려조(충목왕공민왕) 감찰지평(監察持平), 대장군(大將軍), 감찰대부(監察大夫), 개성부윤(開城府尹), 밀직부사(密直副使) 등 역임.

시호 원종공(元貞公), 고려 명현선원각(名賢善元閣)2위 봉향(奉享)되어 있음.

김한룡(金漢龍):고려조(총목왕공민왕)전첨(典籤),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지제고(知制誥),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등 역임. 공민왕 호종공신(扈從功臣).

김인(金潾):고려 공민왕비(恭愍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의 행수별장(行首別將), 지제고(知制誥)등 역임. 정몽주(鄭夢周)와 과거동방(科擧同榜).

김희(金禧): 고려조(공민왕우왕)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대사헌(大司憲) 등 역임. 정몽주(鄭夢周)와 과거동방(科擧同榜). 당시 최연소(19)로 급제.

김점(金漸):조선조(태조세종) 대호군(大護軍), 호조판서(戶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등 역임. 시호 호강공(胡剛公), 태종 넷째 후궁 숙공궁주(淑恭宮主)의 부().

김흡(金洽):조선조(태종세종)직제학(直提學) 역임.

김유손(金裕孫):조선조(태종세종) 호군(護軍), 절충장군(折衝將軍), 나주목사(羅州牧使) 역임.

김의손(金義孫):조선조(세종세조)공주목사(公州牧使), 예조참판(禮曹參判) 역임. 공주김씨(公州金氏) 관조(貫祖)가 됨.

김호우(金好雨):조선조(성종중종)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역임.

김영우(金靈雨):조선조(성종중종) 선공감정(繕工監正) 역임.

김우(金瑀):조선조(중종) 이조판서(吏曹判書) 역임.

김응길(金應吉):조선조(연산군중종) 병조판서(兵曹判書) 역임.

김승한(金承漢):조선조(연산군중종) 파주목사(坡州牧使) 역임.

김난상(金鸞祥):조선조(중종선조) 정언(正言),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대사간(大司諫)등 역임.

김삼락(金三樂):조선(인조명종) 인조조 기묘별시(己卯別試) 급제, 진주목사 등 역임.

김진선(金振先):조선조(선조) 임진왜란 문무겸비한 충신이고 명궁사(名弓士). 김해부사(金海府使) 역임.

김극유(金克裕):조선조(선조) 임진왜란때 원종2등 공신(原從二等功臣). 선략장군(宣略將軍), 양산군수(梁山郡守) 역임.

김준신(金俊臣):조선조 선조 임진왜란때 최초 의병장. 순조조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증직. 상주시 충의단(忠義壇) 배향되었음.

김응룡(金應龍):조선조(선조)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됨.

김시성(金是聲):조선조(인조효종) 용천(龍川), 강계(江界)의 부사(府使), 함경도병마사(咸鏡道兵馬使)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역임.

김정호(金正浩):조선말 지리학자(地理學者), () 고산자(古山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청구도(靑丘圖)등 지도 다수 편찬.

정부인 청도김씨(貞夫人 淸道金氏):세종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한 김점(金漸)의 여식(女息)으로 청주한씨(淸州韓氏)의 문중으로 출가하여 아들 5명을 두었는데 모두 무과(武科) 벼슬에 급제시켜 당상관(堂上官:3품 이상) 오르게 한 장한 어머니로 세조(世祖)로부터 정녕택주(貞寧宅主)의 작위와 함께 매년 세미(歲米)를 받음.

 

청도김씨의 분파

고려조 명신 원정공 김한귀(元貞公 金漢貴)의 직계로서 계보(系譜)는 다음과 같다.

김인(金潾)김점(金漸)김유손(金裕孫)김호우(金好雨)김생수(金生水)김맹전(金孟全)김승한(金承漢)의 아들 5명에 의해 지역별로 분파를 이루었다.

1남 김요산(金樂山):남하(南河), 여천(麗川), 당림(棠林), 두곡(杜谷), 동산(銅山), 사인(舍人), 초계(草溪), 송북(松北), 동면(東面), 어은(於隱), 내동(乃洞), 청양(靑陽), 예산(禮山), 서곡(西谷), 북지(北旨), 청송(靑松), 동곡(東谷), 읍동(邑東)

2남 김의산(金義山):죽산(竹山), 교항(矯項), 은산(殷山), 합천(合川), 이천(利川), 충무(忠武)

3남 김차산(金次山):능주(稜州), 보성(寶城), 해남(海南), 운봉(雲峰), 담양(潭陽), 김제(金提), 구례(求禮), 나곡(羅谷), 장재(長才).

4남김연산(金連山):오산(鰲山), 화양(華陽), 대현(大峴).

5남 김적산(金籍山):은진(恩津), 기장(機張).

김생수(金生水)의 차남 맹석(孟碩)의 계보로 있는 지역의 거연파(巨淵派)가 있다.

김맹전(金孟全)의 차남 김승중(金承重)의 직계손으로 있는 지역의 파는 재령(載寧), 옥애(玉崖), 현천(玄川), 마곡(馬谷), 용진(用珍), 석성(石城), 송화(松禾).

김호우(金好雨)의 차남 김승신(金承信), 김승비(金承庇)의 계보인 지역의 파는 덕암(德岩), 마전(麻田)이 있다.

김유손(金裕孫)의 차남 김화우(金和雨)의 계보는 통천(通川), 태인(泰仁), 백화(百花)의 파가 있다.

김유손(金裕孫)3남 김희우(金喜雨)의 계보는 장수(長水), 김포(金浦), 고양(高陽), 연백(延白), 범곡(範谷), 작사(雀沙), 문덕(文德)의 파가 있다.

김유손(金裕孫)4남 김시우(金時雨)의 계보는 우일(雨日), 은진(恩津), 금곡(金谷), 부안(扶安), 구랑(九郞), 서동(書洞), 흥정(興政), 묵곡(墨谷), 흥정(興井), 자인오산(慈仁鰲山), 대명(大鳴), 관상(官上), 초읍(草邑), 양정(楊亭), 달천(達川)의 파가 있다.

김유손(金裕孫)5남 김영우(金靈雨)의 계보는 장재(長才), 가교(柯橋), 임천(林川), 신창(新昌), 안협(安峽), 선단(仙壇), 여주(麗州), 교동(喬洞), 금당(金堂), 풍덕(豊德), 익산(益山), 고천(古川), 선산(善山), 예천(醴川), 개성(開城), 한저(閒渚), 가주(佳州), 안심(安心), 온양(溫陽)의 파가 있다.

김점(金漸)의 차남 김의손(金義孫)의 계보에는 광승(光升), 두암(斗岩), 월평(月坪), 자풍(自豊), 방축(方築), 구적(九積), 검산(劍山), 월영(月影), 화산(花山), 나대(羅帶), 궁월(弓月), 용복(龍栿), 개명(開明), 외오산(外鰲山), 내오산(內鰲山), 삼가(三嘉)의 파가 있다.

김점(金漸)3남 김경손(金敬孫)의 계보에는 적산(笛山), 덕은(德殷), 금산(琴山), 운월(雲月)의 파가 있다.

김희보(金希輔)를 계보로 하는 파는 판곡(板谷), 영동(令洞), 공성(功城)이 있다.

김흡(金洽)을 계보로 하는 파는 도화(道化), 입석(立石), 양곡(陽谷)이 있다.

김포(金泡)를 계보로 하는 파는 봉산(鳳山), 용정(龍井), 두면(斗面)이 있다.

원정공 김한귀(元貞公 金漢貴)의 제() 김한경(金漢慶)을 계보로 하는 강동파(江東派)가 있고, 역시 원정공 김한귀의 제 김한룡(金漢龍)을 계보로 하는 보령파(保寧派)가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청도김씨는 전국에 91,2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