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풍천김씨시조(豊川金氏),김영주(金英柱),풍천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30 17:55 수정일 : 2018-04-06 15:12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풍천김씨(豊川金氏)의 시조(始祖) 김영주(金英柱)는 누대(累代)로 풍천(豊川)에 세거(世居)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이며, 그의 10세손 우석(禹錫)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자모산성(慈母山城)에 들어갔다가 인조(仁祖)가 굴욕적인 강화(講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후세의 충신들에게 좌우명이 되었던 척화시 아래 통곡하고 있는 우석(禹錫)의 목을 치려하자 그는 꿈적도 않고 앉아 있었으며 그의 열살된 아들 응원(應元)이 아버지를 끌어안고 함께 우니 청장도 감동하여 죽이지 못했다고 한다.

인조(仁祖)는 우석(禹錫)의 충절(忠節)을 기려 정표(旌表)를 내렸고, 그의 아들 응원(應元)은 가장 어린 나이로 효(孝)의 정표를 받은 것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풍천(豊/1J)은 황해도(黃海道)에 있었던 옛 지명(地名)으로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와서 처음으로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로써 지주사(知州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태종(太宗)이 풍천(豊/1J)으로 고쳤다. 그 후 은율현(殷栗縣)과 합하여 풍율현(豊栗賢)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년(고종32) 송화군(松禾郡)으로 합하였고. 별칭(別稱)으로 서하(西河)라 불리기도 하였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천김씨(豊川金氏)는 남한(南韓)에 2,2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풍천김씨조상인물

김영철(金英哲) 1599 (선조 32) ~ 1682 (숙종 8)

1618년(광해군10) 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 : 후금) 토벌 당시 우리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해 왔을 때, 좌영장(左營將) 김응하(金應河)의 선봉으로 출전, 포로가 되어 건주의의 장수 아라라(阿羅那)의 종이 되었다.

1625년(인조 3) 탈출하여 명나라 등주(登州)에서 살다가 1631년 후 금의 후신인 청나라가 개주(盖州)를 공략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중국어에 능통했으므로 상장(上將) 임경업(林慶業) 휘하에서 수군(水軍) 5천명과 참전했으나 다시 포로가 되었다.

후에 귀국, 1658년(효종9) 조정에서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킬 군사를 모집할 때 60세의 나이로 뽑혀 20년 동안 성을 지켰다.

김응형(金應亨) 자(字)는 달부(達夫). 1660년(현종1)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도사(都事)를 지냈다.

김익침(金益忱) 자(字)는 이성(爾誠). 1721년(경종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내외직을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김익헌(金益憲) 자(字)는 이장(爾章). 1726년(영조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김재성(金載聲) 자(字)는 명원(鳴遠). 조선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김철수(金喆修) 자(字)는 재길(再吉).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김명래(金明來) 자(字)는 익보(益甫).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김옥래(金玉來) 자(字)는 성진(聖眞). 조선조(朝鮮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김상우(金相禹) 조선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