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해평김씨시조(海平金氏),김훤술(金萱述),해평김씨조상인물,김수(金銖)

작성일 : 2017-03-30 21:20 수정일 : 2018-03-14 18:4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해평김씨(海平金氏)는 시조(始祖) 김훤술(金萱述)이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창업(高麗創業)에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해평(海平)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평 김씨는 시조 훤술(萱述)에서부터 누대(累代)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때 전직(殿直)을 역임한 태(兌)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해평(海平)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선산군(善山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파징(波澄)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신라(新羅) 때의 병정현(竝井縣)을 고려초(高麗初)에 해평군(海平郡)으로 고쳐서 복주(福州 : 안동의 옛 이름)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상주(尙州)와 선산(善山)으로 이속되었다가 1415년(태종 15)에 해평현(海平縣)으로 강등된 후 선산군(善山郡) 해평면(海平面)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일찍이 해평(海平) 문리(文里)에 자리잡고 길씨(吉氏)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해평 김씨(海平金氏)는 훤술(萱述)의 후손 영발(英發)이 길 구(吉 久)와 함께 향교(鄕校)를 설립하고 많은 학자(學者)를 길러내어 명성을 떨쳤다.

태(兌)의 9세손 김수(金銖)는 고려말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직제학(直提學)․개성부윤(開城府尹) 등의 요직을 지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내침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는 데 공(功)을 세워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지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 고려 때 대제학을 역임)과 친교를 맺고 도의(道義)를 논하며 후진양성에 힘썼고, 1624년(인조 2)에 진사(進士)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주(輳)는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오른 맹성(孟性)은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유일(遺逸)로 벼슬에 천거되어 정언(正言)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며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날려 해평 김씨(海平金氏)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해평김씨(海平金氏)는 남한(南韓)에 4,7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해평김씨조상인물

김 태(金 兌) 고려(高麗) 때 전직(殿直)을 지냈다.

김 균(金 均) 고려조(高麗朝)에 밀직(密直)을 역임하였다.

김 요(金 饒) 고려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김용선(金用宣) 고려에서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김수(金 銖) 호(號)는 송정(松亭). 고려 말 문과(文科)에 장원한 후 대사헌(大司憲)․직제학(直提學)․개성부윤(開城府尹)에 이르렀으며,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의 토벌에 공을 세워 해평군(海平君)에 봉하여졌다. 조선이 개국된 후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고, 그후 이숭인(李崇仁)과 더불어 녹봉서원(鹿峰書院)을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김복상(金福尙)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조선 때 판윤(判尹)을 역임하였다.

김존상(金存尙)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김문상(金文尙)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영달(金英達) 호(號)는 습문당(習文堂).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김세의(金世義) 조선에서 부장(部將)을 지냈다.

김정보(金廷寶)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난경(金蘭卿) 조선(朝鮮)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세영(金世榮) 조선에서 사과(司果)를 지냈다.

김세갑(金世甲) 조선조(朝鮮朝)에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김구정(金九鼎)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김동량(金東亮) 조선(朝鮮) 대 직장(直長)을 지냈다.

김재덕(金在德) 조선조에 도정(都正)을 지냈다.

김준례(金遵禮)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김맹성(金孟性) 1437 (세종 19) ~ 1487 (성종 18)

자는 선원(善源), 호는 지지당(止止堂), 준례(遵禮)의 아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에 나갔다가 1476년(성종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헌납(獻納)․정언(正言)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학덕(學德)이 뛰어났고, 시(詩)에도 능하였다.

김 경(金 璟)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 주(金 輳) 자(字)는 지원(志遠), 호(號)는 운암(雲巖). 조선 때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김계희(金季熙) 조선(朝鮮)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김응곤(金應袞) 조선조(朝鮮朝)에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김맹치(金孟耻) 조선 때 서령(署令)을 지냈다.

김응기(金應箕) 조선(朝鮮) 때 우상(右相)을 역임하였다.

김 순(金 洵)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