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금성나씨시조(錦城羅氏),나총예,금성나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31 14:14 수정일 : 2018-03-06 20:57

득성연원(得姓淵源)

나씨(羅氏)는 본래 축륭(祝融)씨의 후예로서 본이 운성(妘.姓)이더니 춘추전국(春秋戰國)때(周平王 12年) 나 국(羅國)에 봉해져서 나씨(羅氏)라 하였다. 그 후 주공(珠公)이 한고조(漢高祖)에게 공이 있어서 예장군(豫章郡)에 봉해진 뒤에 예장나씨(豫章羅氏)가 되었다.


동도설(東渡說)

한선제(漢宣帝) 때 덕부(德富)는 중국사람으로서 덕헌(德憲), 덕공(德功) 두 형제와 더불어 동으로 마한(馬 韓)땅에 이르러 비로소 십수세를 지내다가 장언(長彦)이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 진(晋)의 효무제(孝武帝)를 섬겨 중서령(中書令)이 되었고, 그 후 7세가 모두 중국에 벼슬을 하다가 8세 지강(至强)이 당태종(唐太宗)을 섬겨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더니, 마침 고구려를 치자는 정의(廷議)를 거슬으고 동국으로 피해 와서 발라현(發羅縣)에 배를 매었다. 뒤에 신라의 좌승상(左丞相)이 되었고 자손이 발라현(發羅縣)에 세거하게 되었다.


금성나씨시조사적(始祖事蹟)

시조의 휘는 총예(聰豊) (초휘 宗禮)이다. 초보(初譜)에 삼한일등공신 대광보국 부원군(三韓一等功臣 大匡輔 國府院君)이라 하고, 고려사에 공의 십세손(十世孫) 회원대장군 군부판서 나유(懷遠大將軍 軍簿判書 羅裕)와 전 급 십일세손 양절공 나익희(傳及十一世孫 良節公 羅益禧)의 이익재 제현소찬 묘지문(李益齋 齊賢所撰 墓誌文)에 개칭삼한일등공신 (皆稱三韓一等功臣) 이라만 요약되었으나 대동보(大同譜)에는 자상히 기술되었다.


(大同譜〕 자상웅위(姿相雄偉)하고 영용다지(英勇多智)하며 유문장(有文章)하여 조년등제(早年登第)하여 위한림(爲翰林)하고 간습궁마(間習弓馬)러니. 여혜종원년갑진(麗惠宗元年甲辰,3277.944)에 어북변유공(禦北邊有 功)하고 익년(전年)에 주왕규(諒王規)하고 여정종2년(麗定宗二年)에 여박수경(與朴守卿)으로 삭평내난(削平內 亂)하여 사삼한일등공신지호(賜三韓一等功臣之號)하고 관벽상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官壁上三重大匡輔園崇祿大 夫)하며 봉금성부원군(封錦城府院君)하여 명삼일일조(命二日一朝)하니 현동국사략구본(見東國史略悟本)하다.

안가정보(接嘉靖譜)컨대 공이상(公以上)에 유선계십수위(有先系十數位)하여 지서휘여관함(只書諱與官卿)호대 이가숭실계(而家乘失系)하여 미유고실(未有考實)하니 부득상달(不得上達)하고 자공시득수계고(自公始得修系 故)로 이공기일세(以公起一世)하여 윤위동방나씨지선조(尹爲東方羅氏之先祖)이니라. 묘진도정승동(墓珍島政丞 洞)인대 실전失傳)하고 진도(珍島)에 유공묘고(有公墓故)로 인호기동왈정승동(人呼其洞曰政丞洞)하다.

[史料) 태조(3251,918)가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 기장(騎將)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고 마침내 삼한통일을 완수함에 그(羅聽禮)를 강공진(姜弓珍), 김한층(金漢忠), 천명(千明) 등과 더불어 삼한공신(三韓功臣)을 봉하였고 문종 8년(1054) 12월에 대광(大匡,正一品)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을 추증(追贈)하였다.


득관유래(得貫由來)-금성나씨유래

고려사 열정편(列傳篇)을 비롯하여 모든 문헌에 나주나씨시조는 나총례(羅聽禮)라 되어 있고, 모든 인물이 나주인(羅州人)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본래 나주인(羅州人)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조조(英祖朝) 정묘(丁卯,4080.1747)년에 무신흉변(戊申凶變)의 혐의(嫌疑)을 벗기 위하여 변의문(辨疑文)을 내고 금성나씨(錦城羅氏)로 이관(移貫)하여 금성나씨(錦城羅氏)라 부르게 되었다.

[변의문] 나주의 나씨는 두 씨족이 있으니 , 부(羅富)를 시조로 하는 나씨는 근본이 여황인(餘艎人)이다. 여황이 나주에 혁속된 고로 나주라 이관(移貫)하고, 우리 나씨는 4세(四世)가 금성군(錦城君)이신 고로 금성(錦城)으로 관(貫)을 삼으니, 대개 연혁이 같지 않고, 실로 관(貫)이 같아서 입는 혐의를 없게 할 따름이다.

본관이 나주였다가 금성으로 옮겨진 실증[納籍記)은 肅 宗43년(1717) 이전부터 英祖5년(1729)까지 本羅)+I로 納籍했고 英祖8년(1732)부터 英祖32년(1756)까지는 本居平으로 納籍하고. 英祖35년(1759) 부터는 本錦城으로 納籍하였다.


나주고호(羅州古號)

나주는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또는 通義郡)이 신 라 때는 금성현(錦城縣 또는 錦山縣)이라 했고, 고려 초에 나주라 하다가 성종 18년에는 진해군이라고도 했고, 그후부터는 나주라 불리운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금성나씨는 남한에 51,9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금성나씨조상인물

나위(羅 位) 영동정(令同正) 득규(得虯)의 5세손, 진사(進士) 수영(守永)의 아들. 고려(高麗)때 일찍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한 후 호조 전서(戶曹典書)에제수(際授)되었으나 당시 혼정(混政)을 개탄하여 불취(不就)하고, 나주(羅州)로 은거(隱居)하니 세 인(世人)들이 금양처사(錦陽處士)라 칭(稱)하였다. 전서공파(典書公派)의 파조(派祖).

나계(羅 桂) 고려(高麗) 때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지냈다. 시랑공파(侍郞公派)의 파조(派祖).

나석(羅 碩) 고려조(高麗朝)에 통사랑(通仕郞)으로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다. 금양군파(錦陽君派)의 파조(派祖).

나세(羅 世)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한림(翰林)을 거쳐 원수(元帥)에 올라 북으로부터 내침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는데 공(功)을 세워 2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되었고,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수차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공헌하여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지고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연안군파(延安君派)의 파조(派祖).

나원(羅 源) 고려 때 통사랑(通仕郞)으로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지내다가 정국(政局)이 혼란(混亂)하자 나주(羅州)로 은거(隱居)하였다.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派祖).

나동길(羅東吉) 고려(高麗) 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의 파조(派祖).

나중우(羅仲佑) 호(號) 낙천와(樂天窩). 1362년(공민왕 1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전교시령(典校侍令) 겸 춘추관 편수관(春秋舘編修官)을 거쳐 예문관 지제고(藝文舘知制誥)를 역임하였다.

나명우(羅明佑) 조선에서 현령(懸令)을 지내고, 정종조(定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舘校理)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나진(羅 璡) 고려말(高麗末)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으나 절의(節義)를 지켜 불취(不就)하고 나주(羅州)에 은거하였다.

나신(羅 紳)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급제하여 세마(洗馬)를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나진강(羅晋康) 조선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해남 현감(海南懸監)을 역임하였다.

나치강(羅致康) 조선 때 장성(長城)과 곡성현감(谷城懸監)을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百姓)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나득강(羅得康) 자(字)는 경천(敬天). 1419년(세종 1) 문과(文科)에 급제, 녹사(錄事)․직장(直長)․박사(博士)를 거쳐 선천(宣川)등지의 현령(懸令)을 역임한 후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다.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겸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贊善)에 이르렀다.

나준(羅 俊) 1421년(세종 3) 문과(文科)에 급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나공언(羅公彦) 자(字)는 중현(仲賢), 호(號)는 화헌, 공조 전서(工曹典書) 진의 아들. 조선(朝鮮)에서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전농시정(典農寺正)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

나사고(羅師古) 1441년(세종 23) 문과(文科)에 급제,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과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나희로(羅希老)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포시 별제(司圃侍別提)를 역임하였다.

나인(羅 寅) 조선(朝鮮)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내자시윤(內資侍尹)을 거쳐 해미현감(海美懸監)을 역임하였다.

나사의(羅士義)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나영의(羅永義) 자(字)는 원섭(元燮), 호(號)는 남계(南溪), 증병조 판성(贈兵曹判書) 준(俊)의 아들.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승지(副承旨)를 지냈다.

나치온(羅致溫) 조선조(朝鮮朝)에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서 선공감역(善工監役)에 천거되어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나보중(羅甫重) 조선 때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으로 문장(文章)과 덕행이 뛰어났다.

나문서(羅文緖) 조선에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영산 현령(靈山懸令)을 지냈다.

나은(羅 殷)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회양(淮陽)과 이천(伊川) 등지의 부사(府使)를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나익상(羅益相) 호(號)는 묵암(黙庵).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추증되었다.

나순경(羅順經) 호(號)는 송암(松庵). 조선에서 중추원 판사(中樞院判事)를 지냈다.

나맹례(羅孟禮) 호(號)는 덕재(德齋). 조선(朝鮮) 때 등과(登科)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대구 부사(大丘府使)를 역임하였다.

나자강(羅自康) 조선 태종(太宗) 대 문과(文科)에 급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무안 현감(務安懸監)과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하였다.

나효신(羅孝信) 1492년(성종 2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마(洗馬)를 거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나안세(羅安世) 자(字)는 덕여(德輿), 호(號)는 건계(建溪). 1507년(중종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올라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지냈다.

나숙담(羅叔聃)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괴산 군수(槐産郡守)를 지냈다.

나준언(羅俊彦) 호(號)는 행정(杏亭).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나경우(羅景宇) 자(字)는 창순(昌順). 조선조(朝鮮朝)에 봉직랑(奉直郞)으로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을 역임하였다.

나경주(羅景宙)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나계조(羅繼祖) 의주부윤(義州府尹) 자강(自康)의 아들. 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나승조(羅承祖) 조선 때 승훈랑(承訓郞)으로 영변 교수(寧邊敎授)를 지냈다.

나윤보(羅允寶) 1535년(중종 30) 진사(進士)에 올랐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나응허(羅應虛) 자(字)는 장원(章元), 호(號)는 행정(杏亭). 1537년(중종 32)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 되고, 1546년(명종 1) 사헌부 감찰(司 憲府監察)을 거쳐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라 청주 판관(淸州判官)을 지냈다.

나세언(羅世彦)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삼화 현령(三和縣令)을 지냈다.

나윤철(羅允哲) 호(號)는 경암(敬菴). 조선조(朝鮮朝)에 진천(鎭川)․용인(龍仁) 등지의 현감(縣監)을 지냈다.

나윤명(羅允明) 자(字)는 회원(晦元), 호(號)는 경재(敬齋). 1535년(중종 30) 문과(文科)에 올라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역임하였다.

나신유(羅伸維) 자(字)는 군소(君素). 조선 (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지내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나천두(羅天斗) 자(字)는 추백(樞伯).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나치화(羅致華) 자(字)는 경석(景錫). 조선(朝鮮)에서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나일손(羅逸孫) 자(字)는 안지(安之), 호(號)는 금강(錦江). 조선(朝鮮)에서 선무랑(宣務郞)으로 전위사 직장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나현손(羅晛孫) 조선(朝鮮) 때 음성 현감(陰城懸監)을 지냈다.

나경손(羅景孫)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나성손(羅誠孫) 조선 때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지냈다.

나사양(羅士良) 자(字)는 심보(心甫), 호(號)는 존천와(尊天窩). 1588년(선조 21) 동몽교관(童蒙敎官) 및 고원 군수(高原郡守)를 거쳐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를 지냈다.

나명선(羅明善) 조선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예빈시 판관(禮賓寺判官)을 역임하였다.

나 흡(羅 恰) 자(字)는 춘중(春中).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지내고, 양천 현감(陽川懸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나순(羅 恂) 자(字)는 자신(子信). 명종(明宗)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풍덕군수(豊德郡守)를 지냈다.

나윤덕(羅潤德)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양위 부사직(龍驤直)을 지냈다.

나사영(羅士英) 자(字)는 여연(汝延) 조선 선조(宣祖) 때 승사랑(承仕郞)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나창(羅 昶) 자(字)는 언명(彦明), 호(號)는 지재(止齋). 1510년(중종 5)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 지평(持平)․헌납(獻納)을 거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지내고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나질(羅 晊) 자(字)는 백승(伯昇). 1528년(중종 23)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나요(羅 曜) 자(字)는 숙명(淑明). 1513년(중종 8) 문과(文科)에 급제, 선교랑(宣敎郞)으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등을 역임하였다.

나찬(羅 纘)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혜산 첨사(惠山僉使)와 통영 이후(統營虞侯)를 역임하였다.

나수의(羅守義)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나민례(羅敏禮) 자(字)는 선경(善卿).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承文院敎理)를 지냈다.

나홍지(羅弘智) 자(字)는 이명(以明).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나진도(羅進道) 자(字)는 명부(勉夫). 선조 (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를 역임하였다.

나사도(羅思道) 자(字)는 득부(得夫). 조선조(朝鮮朝)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나신도(羅伸道) 자(字)는 입부(立夫), 호(號)는 월곡(月谷). 1594년(선조 27) 무과(武 科)에 급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함경도병마우후(咸鏡道兵馬虞侯)를 지냈다.

나의손(羅儀遜) 자(字)는 예극(禮克), 호(號)는 영모당(永募堂). 조선조(朝鮮朝)에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나애남(羅愛男) 자(字)는 후지(厚之), 호(號)는 춘헌(春軒). 조선 인조(仁祖) 때 무과(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나여즙(羅汝緝) 자(字)는 계백(繼伯). 조선(朝鮮) 선조조(宣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나수성(羅守誠) 자(字)는 인부(仁夫). 1594년(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역임하였다.

나정언(羅廷彦) 1580년(선조 13) 무과(武科)에 급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진주 목사(晋州牧史)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 참판(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使)에 추증되었다.

나충국(羅忠國) 조선(朝鮮) 선조조(宣祖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 부호군을 역임하였다.

나중상(羅仲祥) 자(字)는 여경(汝慶). 조선(朝鮮) 때 계공랑(啓功郞)으로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을 지냈다.

나사항(羅士恒) 자(字)는 여경(汝慶). 조선(朝鮮) 때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거쳐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였다.

나사음(羅士愔) 자(字)는 자정(子靖). 조선 때 용양위 좌부장과 주부(主府)를 지내고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었다.

나사선(羅士愃) 자(字)는 중묵(仲黙). 조선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주목사(星州牧使)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지냈다.

나사돈(羅士惇) 자(字)는 중후(仲厚).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나사침(羅士忱) 자(字)는 중부(仲孚), 호(號)는 금호(錦湖). 선조(宣祖)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이성 현감을 지냈다.

나사척(羅士愓) 자(字)는 중구(仲苟). 조선조에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나치온(羅致溫) 조선 때 학행(學行)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천거되어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나형(羅 珩) 자(字)는 공보(公寶), 호(號)는 월재(月齋). 광해군(光海君) 때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하였다.

나성(羅 晟) 자(字)는 사명(士明). 조선(朝鮮) 때 선무랑(宣務郞)으로 율봉도 찰방(栗峰道察訪)을 역임하였다.

나효윤(羅孝胤) 조선 때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역임하였다.

나효원(羅孝元) 조선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나수창(羅繡昌) 조선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나필해(羅弼諧) 자(字)는 명숙(明淑). 인조(仁祖) 때 생원(生員)으로 장릉 참봉(章陵參奉)을 거쳐 내자시 봉사(內資寺奉事)를 역임하였다.

나필한(羅弼漢) 자(字)는 천균(天均).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나순민(羅舜民) 자(字)는 명보(明甫). 조선 현종(顯宗)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을 지냈다.

나성보(羅成輔) 자(字)는 명보(明甫). 조선 때 봉정대부(奉政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나훤(羅 暄) 자(字)는 형일(亨一). 조선조(朝鮮朝)에 선교랑(宣敎郞)으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지냈다.

나덕명(羅德明) 자(字)는 극지(克之), 호(號)는 소포. 선조(宣祖) 대 진사(進士)에 올라 박 순(朴 淳)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義禁府徒事)를 역임하였다.

나덕준(羅德峻) 자(字)는 대지(大之), 호(號)는 금암(錦岩). 조선(朝鮮) 때 사포서 별좌(司圃署別坐)를 거쳐 선교랑(宣敎郞)으로 보은 현감(報恩懸監)을 지냈다.

나덕윤(羅德潤) 자(字)는 유지(有之), 호(號)는 금봉(錦峰). 조선 때 현릉 참봉(顯陵參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내고, 청암도 찰방(靑岩道察訪)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한 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에 추증되었다.

나덕신(羅德愼) 자(字)는 택지(擇之).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 영암군수(靈岩郡守)를 거쳐 무장 현감(茂長懸監)을 지내고 선무원종1등공신(宣武願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나덕헌(羅德憲) 자(字)는 헌지(憲之), 호(號)는 장암(將岩),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부안 현감(扶安懸監)을 지내고 의주 판관(義州判官), 길주(吉州)․정주 목사(定州牧使), 창성 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 하였다.

1624년(인조 2) 안현(鞍峴)에서 이 괄 (李 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이듬해 진무원종1등공신(振武願從一等功臣)에 오르고 이어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안반사(按伴使)가 되었으며 교동 도호부사(喬桐都護府使)에 이르렀다.

나성진(羅星軫)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나재흥(羅再興) 호(號)는 호산(湖散).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충청도 병마우후(忠靑道兵馬虞候)를 역임하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나이례(羅以禮) 조선에서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나윤소(羅允素) 조선조(朝鮮朝)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나계소(羅繼素)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나위소(羅緯素) 1583 (선조 16) ~ 1667 (현종 8)

자(字)는 계빈(季彬), 현감(縣監) 덕준(德峻)의 아들. 1616년(광해군 8) 생원(生員)이 되고, 1623년(인조 1)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낸 후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군량조달에 힘썼다.

임기를 마치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어 기주관(記注官)을 겸 임, 이어 내외 벼슬을 지낸 뒤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나회소(羅繪素) 조선(朝鮮) 때 부사(府事)를지냈다.

나의소(羅宜素) 조선조에서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나학소(羅鶴素) 조선 때 예조 좌랑(禮曹佐 郞)을 지냈다.

나중소(羅仲昭) 호(號)는 포석(抛石). 경기도출신. 구한말 진위대 부위(鎭衛隊副尉)를 지내다가 한일합방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김좌진(金佐鎭)․서 일(徐 一)․현천묵(玄天黙) 등과 길림성 왕청현(吉林省汪淸縣)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창설 하여 참모장이 되었으며,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사관양성소를 설치했다.

이듬해 참모장으로서 대장(隊長) 김좌진, 연성대장(鍊成隊長)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러시아 흑하(黑河)로 철수했다.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 참모 위원장을 목릉현(穆陵縣)에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간부양성에 힘쓰다가 돈 화현(敦化縣)에서 병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단장(單章)이 수여 되었다.

나창헌(羅昌憲) 희천(熙川) 출신.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청년외교단원(靑年外交團員) 및 대동단원(大同團員)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상해(上海)에 건너가서 1922년한국 노병회(韓國勞兵會)의 이사(理事)․교육부원(敎育部員), 1924년에는 학무 위원․교민단의 사원(僑民團議事員), 1925년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 탄핵안 제안의원, 이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임시정부 내무부 차장 등을 역임하고 병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나정귀(羅正龜) 평북 태천(泰川) 출신.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관전현(寬甸縣)에서독립단(獨立團) 토벌대장이 되어 활약했다.그 뒤 백세창(白世昌)과 일본의 앞잡이 보민회(保民會)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본국에 압송, 서울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병사했다.

나종길(羅鍾吉) 1919년 3․1 운동 때 전남(全南) 광양(光陽)에서 민중의 선봉(先鋒)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그 공은 선양하고 후진의 애국심(愛國心) 교화(敎化)의 상징으로 광양군(光陽郡) 일곱 의사(義士)의 3․1 운동 기념비(紀念碑)가 광양(光陽)에 세워졌다.

나학도(羅學道) 평남 순천(順川)에서 상무사(商務社) 사장으로 있다가 1909년(융희 3)일본 재무서(財務署)에서 시장세(市場稅)를 징수하자 최봉환(崔鳳煥)과 의논, 상민회(商民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철시(撤市) 등으로 세금의 납부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듬해 1월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려는 일본 재무서원과 충돌, 상민회 회원을 인솔하고 무력으로 항쟁하다 폭동․방화․살인범으로 기소되었다

나철(羅 喆) 1863 (철종 14) ~ 1916  초명은 인영(寅永)호는 홍암(弘巖). 전라남도 출신. 벼슬이 부정자(副正字)에 이르렀으나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분을 품고 매국 대신을 암살하려다발각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그후 특사로 풀려나와 1909년(융희 3) 1월 15일 중광절(重光節)에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하고 음력 3월 15일을 단군승천기념절(檀君昇天記念節)로 삼고 대제(大祭)를 거행했다. 1916년 구월산(九月山)의 삼성사(三聖祠)에 가서 일본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련 단장(鄲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