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나주나씨(羅州羅氏),나주나씨시조,나부(羅富),나주나씨유래,나주나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31 14:48 수정일 : 2018-01-08 18:26

나주나씨시조 및 나주나씨유래(始祖 本貫由來)

고대 중국(中國) 백익(伯益)의 후예로 전하는 나주나씨(羅州羅氏)는 시조(始祖)나부(羅富)가 강서성(江西省) 예장(豫章)으로부터 동래(東來)하여 고려조에서 정의대부(定議大夫)로 감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역임하고 나주(羅州)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부()의 후손으로 영동정(令同正)에 오른 득규로부터 기일세(起一世)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특히 일세조인 득규의 증손(曾孫) 수영(守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家門)의 중흥을 크게 이루었다.


나주(羅州)는 전라남도(全羅南道) 중서부(中西部)에 위치한 지명(地明)으로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이었으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다. 후백제의 견 훤(甄 萱)이 이 곳을 본거지로 삼았고 후에 고려(高麗) 태조 왕 건(王 建)이 점령하여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수영(守永)의 맏아들 위()는 고려 때 일찍 출사(出仕)하여 여러관직을 역임한 후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당시 혼란한 정국을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나주에 은거자정(隱居自靖)하여 금양처사(錦陽處士)로 불리워졌으며, 그의 아들 동길(東吉)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증주 목사(甑州牧使)로 나가 자손들이 그 곳에서 잉거(仍居)하면서 용강(龍岡)과 성주(成州) 등지로 이거(移居)하여 주로 관서북(關西北) 지방에 집중세게하게 되면서부터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일족(一族)을 이루었다.


수영의 둘째 아들인 계()는 고려에서 벼슬이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이르렀고, 자손들이 주로 경기도(京畿道)에세거하며 시랑공파(侍郞公派)를 이루었다. 그의 묘소(墓所)가 한양성내(漢陽城內)에 있는 것으로 기록에 전하나 실전(失傳)하여 1978년 후손들이강화군(江華郡) 하점면(河岾面) 장정리(長井里) 봉천산(奉天山) 남쪽에 6대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음력 1013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금양군(錦梁君) 파조(派祖)인 석()은 고려 때 사온서 직장으로 나라에 공()을 세워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으며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나주로부터 김제(金堤)로 이거(利居)하여 자손들이 김제파(金堤派)라고도 하였다.

그의 묘소(墓所)는 김제의 북조산(北造山)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후손들이 1954년 김제군(金堤郡) 금산면(今山面) 청도리(淸道里) 종산(宗山)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15일 향사(享祀)하고 있다.


수영(守永)의 네째 아들로 연안군파(延安君派)를 이룬 세()는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상원수(全羅道上元帥) 겸 도안무사(都按撫使)를 거쳐 나라에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고, 묘소가 실전되어 후손들이 1957년에 충남(忠南) 서천군(舒川郡) 마서면(馬西面) 옥산리(玉山里) 순제동(荀堤洞)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17일에 향사하고 있다.


수영의 막내아들로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을 지내고 나주(羅州)에 세거(世居)했던 원()은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고, 묘소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아들 진()과 함께 나주 송현(松峴)에 있으며 33일에 향사(享紗)하고 있다.

가통(家統)을 빛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조선 세종(世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贊善)을 지낸 득강(得康)과 전농시정(典農寺正)으로 공()을 세워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진 공언(公彦), 명종(明宗)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청주 판관(淸州判官)으로 나간 응허(應虛), 양천 현감(陽川懸監)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던 흡()이 유명했다.

또한 풍덕 군수(豊德郡守) (),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지내고 판서에 추증된 치온(致溫),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거쳐 무장 현감(茂長縣監)으로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된 덕신(德愼), 인조(仁祖) 때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에 오른 덕헌(德憲), 정묘호란 때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군량조달에 힘썼던 위소(緯素) 등이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나씨(羅州羅氏)는 남한(南韓)96,0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나주나씨조상인물

나위(羅 位) 영동정(令同正) 득규(得虯)5세손, 진사(進士) 수영(守永)의 아들. 고려(高麗)때 일찍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한 후 호조 전서(戶曹典書)에제수(際授)되었으나 당시 혼정(混政)을 개탄하여 불취(不就)하고, 나주(羅州)로 은거(隱居)하니 세 인(世人)들이 금양처사(錦陽處士)라 칭()하였다. 전서공파(典書公派)의 파조(派祖).

나계(羅 桂) 고려(高麗) 때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지냈다. 시랑공파(侍郞公派)의 파조(派祖).

나석(羅 碩) 고려조(高麗朝)에 통사랑(通仕郞)으로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을 세워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다. 금양군파(錦陽君派)의 파조(派祖).

나세(羅 世)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한림(翰林)을 거쳐 원수(元帥)에 올라 북으로부터 내침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되었고,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수차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공헌하여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지고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연안군파(延安君派)의 파조(派祖).

나원(羅 源) 고려 때 통사랑(通仕郞)으로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지내다가 정국(政局)이 혼란(混亂)하자 나주(羅州)로 은거(隱居)하였다.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派祖).

나동길(羅東吉) 고려(高麗) 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의 파조(派祖).

나중우(羅仲佑) () 낙천와(樂天窩). 1362(공민왕 1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전교시령(典校侍令) 겸 춘추관 편수관(春秋舘編修官)을 거쳐 예문관 지제고(藝文舘知制誥)를 역임하였다.

나명우(羅明佑) 조선에서 현령(懸令)을 지내고, 정종조(定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舘校理)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나진(羅 璡) 고려말(高麗末)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으나 절의(節義)를 지켜 불취(不就)하고 나주(羅州)에 은거하였다.

나신(羅 紳)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급제하여 세마(洗馬)를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나진강(羅晋康) 조선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해남 현감(海南懸監)을 역임하였다.

나치강(羅致康) 조선 때 장성(長城)과 곡성현감(谷城懸監)을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百姓)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나득강(羅得康) ()는 경천(敬天). 1419(세종 1) 문과(文科)에 급제, 녹사(錄事)․직장(直長)․박사(博士)를 거쳐 선천(宣川)등지의 현령(懸令)을 역임한 후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다.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겸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贊善)에 이르렀다.

나준(羅 俊) 1421(세종 3) 문과(文科)에 급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나공언(羅公彦) ()는 중현(仲賢), ()는 화헌, 공조 전서(工曹典書) 진의 아들. 조선(朝鮮)에서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전농시정(典農寺正)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

나사고(羅師古) 1441(세종 23) 문과(文科)에 급제,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과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나희로(羅希老)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포시 별제(司圃侍別提)를 역임하였다.

나인(羅 寅) 조선(朝鮮)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내자시윤(內資侍尹)을 거쳐 해미현감(海美懸監)을 역임하였다.

나사의(羅士義)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나영의(羅永義) ()는 원섭(元燮), ()는 남계(南溪), 증병조 판성(贈兵曹判書) ()의 아들.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승지(副承旨)를 지냈다.

나치온(羅致溫) 조선조(朝鮮朝)에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서 선공감역(善工監役)에 천거되어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나보중(羅甫重) 조선 때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으로 문장(文章)과 덕행이 뛰어났다.

나문서(羅文緖) 조선에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영산 현령(靈山懸令)을 지냈다.

나은(羅 殷)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회양(淮陽)과 이천(伊川) 등지의 부사(府使)를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나익상(羅益相) ()는 묵암(黙庵).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추증되었다.

나순경(羅順經) ()는 송암(松庵). 조선에서 중추원 판사(中樞院判事)를 지냈다.

나맹례(羅孟禮) ()는 덕재(德齋). 조선(朝鮮) 때 등과(登科)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대구 부사(大丘府使)를 역임하였다.

나자강(羅自康) 조선 태종(太宗) 대 문과(文科)에 급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무안 현감(務安懸監)과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하였다.

나효신(羅孝信) 1492(성종 2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마(洗馬)를 거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나안세(羅安世) ()는 덕여(德輿), ()는 건계(建溪). 1507(중종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올라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지냈다.

나숙담(羅叔聃)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괴산 군수(槐産郡守)를 지냈다.

나준언(羅俊彦) ()는 행정(杏亭).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나경우(羅景宇) ()는 창순(昌順). 조선조(朝鮮朝)에 봉직랑(奉直郞)으로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을 역임하였다.

나경주(羅景宙)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나계조(羅繼祖) 의주부윤(義州府尹) 자강(自康)의 아들. 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나승조(羅承祖) 조선 때 승훈랑(承訓郞)으로 영변 교수(寧邊敎授)를 지냈다.

나윤보(羅允寶) 1535(중종 30) 진사(進士)에 올랐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나응허(羅應虛) ()는 장원(章元), ()는 행정(杏亭). 1537(중종 32)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 되고, 1546(명종 1) 사헌부 감찰(司 憲府監察)을 거쳐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라 청주 판관(淸州判官)을 지냈다.

나세언(羅世彦)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삼화 현령(三和縣令)을 지냈다.

나윤철(羅允哲) ()는 경암(敬菴). 조선조(朝鮮朝)에 진천(鎭川)․용인(龍仁) 등지의 현감(縣監)을 지냈다.

나윤명(羅允明) ()는 회원(晦元), ()는 경재(敬齋). 1535(중종 30) 문과(文科)에 올라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역임하였다.

나신유(羅伸維) ()는 군소(君素). 조선 (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지내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나천두(羅天斗) ()는 추백(樞伯).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나치화(羅致華) ()는 경석(景錫). 조선(朝鮮)에서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나일손(羅逸孫) ()는 안지(安之), ()는 금강(錦江). 조선(朝鮮)에서 선무랑(宣務郞)으로 전위사 직장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나현손(羅晛孫) 조선(朝鮮) 때 음성 현감(陰城懸監)을 지냈다.

나경손(羅景孫)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나성손(羅誠孫) 조선 때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지냈다.

나사양(羅士良) ()는 심보(心甫), ()는 존천와(尊天窩). 1588(선조 21) 동몽교관(童蒙敎官) 및 고원 군수(高原郡守)를 거쳐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를 지냈다.

나명선(羅明善) 조선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예빈시 판관(禮賓寺判官)을 역임하였다.

나흡(羅 恰) ()는 춘중(春中).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지내고, 양천 현감(陽川懸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나순(羅 恂) ()는 자신(子信). 명종(明宗)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풍덕군수(豊德郡守)를 지냈다.

나윤덕(羅潤德)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양위 부사직(龍驤直)을 지냈다.

나사영(羅士英) ()는 여연(汝延) 조선 선조(宣祖) 때 승사랑(承仕郞)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나창(羅 昶) ()는 언명(彦明), ()는 지재(止齋). 1510(중종 5)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 지평(持平)․헌납(獻納)을 거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지내고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나질(羅 晊) ()는 백승(伯昇). 1528(중종 23)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나요(羅 曜) ()는 숙명(淑明). 1513(중종 8) 문과(文科)에 급제, 선교랑(宣敎郞)으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등을 역임하였다.

나찬(羅 纘)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혜산 첨사(惠山僉使)와 통영 이후(統營虞侯)를 역임하였다.

나수의(羅守義)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나민례(羅敏禮) ()는 선경(善卿).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承文院敎理)를 지냈다.

나홍지(羅弘智) ()는 이명(以明).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나진도(羅進道) ()는 명부(勉夫). 선조 (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를 역임하였다.

나사도(羅思道) ()는 득부(得夫). 조선조(朝鮮朝)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나신도(羅伸道) ()는 입부(立夫), ()는 월곡(月谷). 1594(선조 27) 무과(武 科)에 급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함경도병마우후(咸鏡道兵馬虞侯)를 지냈다.

나의손(羅儀遜) ()는 예극(禮克), ()는 영모당(永募堂). 조선조(朝鮮朝)에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나애남(羅愛男) ()는 후지(厚之), ()는 춘헌(春軒). 조선 인조(仁祖) 때 무과(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나여즙(羅汝緝) ()는 계백(繼伯). 조선(朝鮮) 선조조(宣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나수성(羅守誠) ()는 인부(仁夫). 1594(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역임하였다.

나정언(羅廷彦) 1580(선조 13) 무과(武科)에 급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진주 목사(晋州牧史)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 참판(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使)에 추증되었다.

나충국(羅忠國) 조선(朝鮮) 선조조(宣祖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 부호군을 역임하였다.

나중상(羅仲祥) ()는 여경(汝慶). 조선(朝鮮) 때 계공랑(啓功郞)으로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을 지냈다.

나사항(羅士恒) ()는 여경(汝慶). 조선(朝鮮) 때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거쳐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였다.

나사음(羅士愔) ()는 자정(子靖). 조선 때 용양위 좌부장과 주부(主府)를 지내고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었다.

나사선(羅士愃) ()는 중묵(仲黙). 조선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주목사(星州牧使)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지냈다.

나사돈(羅士惇) ()는 중후(仲厚).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나사침(羅士忱) ()는 중부(仲孚), ()는 금호(錦湖). 선조(宣祖)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이성 현감을 지냈다.

나사척(羅士愓) ()는 중구(仲苟). 조선조에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나치온(羅致溫) 조선 때 학행(學行)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천거되어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나형(羅 珩) ()는 공보(公寶), ()는 월재(月齋). 광해군(光海君) 때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하였다.

나성(羅 晟) ()는 사명(士明). 조선(朝鮮) 때 선무랑(宣務郞)으로 율봉도 찰방(栗峰道察訪)을 역임하였다.

나효윤(羅孝胤) 조선 때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역임하였다.

나효원(羅孝元) 조선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나수창(羅繡昌) 조선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나필해(羅弼諧) ()는 명숙(明淑). 인조(仁祖) 때 생원(生員)으로 장릉 참봉(章陵參奉)을 거쳐 내자시 봉사(內資寺奉事)를 역임하였다.

나필한(羅弼漢) ()는 천균(天均).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나순민(羅舜民) ()는 명보(明甫). 조선 현종(顯宗)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을 지냈다.

나성보(羅成輔) ()는 명보(明甫). 조선 때 봉정대부(奉政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나훤(羅 暄) ()는 형일(亨一). 조선조(朝鮮朝)에 선교랑(宣敎郞)으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지냈다.

나덕명(羅德明) ()는 극지(克之), ()는 소포. 선조(宣祖) 대 진사(進士)에 올라 박 순(朴 淳)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義禁府徒事)를 역임하였다.

나덕준(羅德峻) ()는 대지(大之), ()는 금암(錦岩). 조선(朝鮮) 때 사포서 별좌(司圃署別坐)를 거쳐 선교랑(宣敎郞)으로 보은 현감(報恩懸監)을 지냈다.

나덕윤(羅德潤) ()는 유지(有之), ()는 금봉(錦峰). 조선 때 현릉 참봉(顯陵參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내고, 청암도 찰방(靑岩道察訪)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한 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에 추증되었다.

나덕신(羅德愼) ()는 택지(擇之).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 영암군수(靈岩郡守)를 거쳐 무장 현감(茂長懸監)을 지내고 선무원종1등공신(宣武願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나덕헌(羅德憲) ()는 헌지(憲之), ()는 장암(將岩),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부안 현감(扶安懸監)을 지내고 의주 판관(義州判官), 길주(吉州)․정주 목사(定州牧使), 창성 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 하였다.

1624(인조 2) 안현(鞍峴)에서 이 괄 (李 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이듬해 진무원종1등공신(振武願從一等功臣)에 오르고 이어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안반사(按伴使)가 되었으며 교동 도호부사(喬桐都護府使)에 이르렀다.

나성진(羅星軫)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나재흥(羅再興) ()는 호산(湖散).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충청도 병마우후(忠靑道兵馬虞候)를 역임하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나이례(羅以禮) 조선에서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나윤소(羅允素) 조선조(朝鮮朝)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나계소(羅繼素)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나위소(羅緯素) 1583 (선조 16) 1667 (현종 8)

()는 계빈(季彬), 현감(縣監) 덕준(德峻)의 아들. 1616(광해군 8) 생원(生員)이 되고, 1623(인조 1)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낸 후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군량조달에 힘썼다.

임기를 마치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어 기주관(記注官)을 겸 임, 이어 내외 벼슬을 지낸 뒤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나회소(羅繪素) 조선(朝鮮) 때 부사(府事)를지냈다.

나의소(羅宜素) 조선조에서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나학소(羅鶴素) 조선 때 예조 좌랑(禮曹佐 郞)을 지냈다.

나중소(羅仲昭) ()는 포석(抛石). 경기도출신. 구한말 진위대 부위(鎭衛隊副尉)를 지내다가 한일합방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김좌진(金佐鎭)․서 일(徐 一)․현천묵(玄天黙) 등과 길림성 왕청현(吉林省汪淸縣)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창설 하여 참모장이 되었으며,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사관양성소를 설치했다.

이듬해 참모장으로서 대장(隊長) 김좌진, 연성대장(鍊成隊長)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러시아 흑하(黑河)로 철수했다. 19253월 신민부(新民府) 참모 위원장을 목릉현(穆陵縣)에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간부양성에 힘쓰다가 돈 화현(敦化縣)에서 병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단장(單章)이 수여 되었다.

나창헌(羅昌憲) 희천(熙川) 출신.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청년외교단원(靑年外交團員) 및 대동단원(大同團員)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상해(上海)에 건너가서 1922년한국 노병회(韓國勞兵會)의 이사(理事)․교육부원(敎育部員), 1924년에는 학무 위원․교민단의 사원(僑民團議事員), 1925년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 탄핵안 제안의원, 이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임시정부 내무부 차장 등을 역임하고 병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나정귀(羅正龜) 평북 태천(泰川) 출신.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관전현(寬甸縣)에서독립단(獨立團) 토벌대장이 되어 활약했다.그 뒤 백세창(白世昌)과 일본의 앞잡이 보민회(保民會)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본국에 압송, 서울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병사했다.

나종길(羅鍾吉) 191931 운동 때 전남(全南) 광양(光陽)에서 민중의 선봉(先鋒)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그 공은 선양하고 후진의 애국심(愛國心) 교화(敎化)의 상징으로 광양군(光陽郡) 일곱 의사(義士)31 운동 기념비(紀念碑)가 광양(光陽)에 세워졌다.

나학도(羅學道) 평남 순천(順川)에서 상무사(商務社) 사장으로 있다가 1909(융희 3)일본 재무서(財務署)에서 시장세(市場稅)를 징수하자 최봉환(崔鳳煥)과 의논, 상민회(商民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철시(撤市) 등으로 세금의 납부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듬해 1월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려는 일본 재무서원과 충돌, 상민회 회원을 인솔하고 무력으로 항쟁하다 폭동․방화․살인범으로 기소되었다

나철(羅 喆) 1863 (철종 14) 1916

초명은 인영(寅永)호는 홍암(弘巖). 전라남도 출신. 벼슬이 부정자(副正字)에 이르렀으나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분을 품고 매국 대신을 암살하려다발각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그후 특사로 풀려나와 1909(융희 3) 115일 중광절(重光節)에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하고 음력 315일을 단군승천기념절(檀君昇天記念節)로 삼고 대제(大祭)를 거행했다. 1916년 구월산(九月山)의 삼성사(三聖祠)에 가서 일본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련 단장(鄲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