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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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3-31 15:48 수정일 : 2018-01-05 10:17

남씨南氏)의 연원(淵源)

남씨는 당(唐나라 봉양부(鳳陽府) 여남인(汝南人)으로 김충(金忠)이라는 분이 이부상서(吏部尙書)로서 당() 천보(天寶) 14(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4: 서기 755)에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갔다 귀로(歸路)에 태풍(颱風)을 만나 신라(新羅) 유린(有隣) (경북(慶北)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죽도(竹島)에 표착(漂着)하여 신라왕으로부터 남()이라는 성을 사성(賜姓)받고 민()이라 개명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살게하고 영의공(英毅公)을 봉한 후부터 비롯되었다. 묘소는 영양군 영양읍 일월산(日月山) ()부용봉(芙蓉峰) () 도항구(道項邱)애 있고 제향(祭享)은 음력 1010일이다.

의령남씨유래

의령남씨 관향조는 남군보(南君甫)이다. 고려조에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樞密院) 직부사(直副使)를 역임했다. 고려(高麗) 후기(後期)의 백관지(百官誌)의 기록에 의하면 형제병어(兄弟幷於) 희종고종지세(熙宗高宗之世) 이사어충렬중선조야(以仕於忠烈忠宣朝

)라하였다. 남민(南敏)의 후손(後孫) 홍보(洪甫), 군보(君甫), 광보(匡甫) 3형제(兄弟)가 있었는데 홍보(洪甫)는 영양(英陽)의 관향조로, 군보(君甫)는 의령의 관향조로, 광보(匡甫) 고성(固城)의 관향조가 되었다.

관향조가 생존한 년대는 1230년에서 1310년으로 추정되며 묘소는 경남(慶南) 의령군(宜寧君) 의령읍(宜寧邑) 서동(西洞)에 잇다. 제향(祭享)은 매년(每年) 음력 31일과 99일에 봉향된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남씨는 남한에 162,7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의령남씨조상

남익지(南益胝) : 승봉랑(承奉郞) 풍저창(豊儲倉) 부사(副使) 19917월 의령남씨대종중에서 초혼장(招魂葬)으로 시중공(侍中公) () 1()에 성분(成墳)하여 제단(祭壇)이 마련하였다.

남효윤(南孝允) : 고려(高麗) 말엽(末葉) 조의대부(朝議大夫) 신호위(神虎衛) 대장군(大將軍)으로서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에 추증(追贈)되어 의산군(宜山君)에 피봉(皮封)되었다.

남천로(南天老) :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를 역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증직(贈職)되었다.

남을번(南乙蕃) (13201395) : 고려조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조선조 개국 후 익대보조공신(翊戴補祚功臣)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특진되고 의령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경령(敬烈)아다.

남을진(南乙珍) (1331)1393)

()는 곡음(谷陰) 고려 공민왕 17(서기 1368) 현령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성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 이르렀고 조선조에 입조하지 않는 고려의 전절신(全節臣)이다.

남재(南 在)(13511419) : 초휘(初諱)는 겸()이고 자()는 구정(龜亭)이다. 고려 공민왕 191370년 진사시에 입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밀직사(密直司) 좌대언(左代言)에 이르렀다. 조선조(朝鮮朝) 개국(開國) 1등 공신으로 태종 11년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어다. 시호(諡號)는 충경(忠景)이며 태조(太祖)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남합(南 闔) (13541398) : 공민왕 23(서기 1374) 성균관시(成均館試)에 등과(登科)하여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고 판상서겸의흥삼군부도총제(判尙書謙義興三軍府都摠制)에 이르렀다. 태조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남좌시(南佐時) (13361387) : 공민왕 조 경동당겸전시(京東堂謙前試)에 등과(登科)하여 강릉(江陵)에서 왜구(倭寇)를 격퇴(擊退)하였다.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진현관(진현관(進賢館)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보()()공신(功臣)으로 의성군에 봉해졌고 시호(諡號)는 양정(良靖)이다.

남경우(南景祐) (13931467) : 대호군(大護軍)과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를 역임하고 1460년 의령군(宜寧君)에 피봉(皮封)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諡號)는 안호(安胡)아다.

남지(南 智) (13921454) : 17세에 음보(蔭補)로 감찰(監察)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31년에 우의정(右議政), 1451년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단종을 보필해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풍음(風음)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중추원(中樞院) 영사(領事)로 재직하였다 시호는 충()()이다.

남간(南 簡) (1400?) 세종(世宗) 원년(元年) 서기 1419)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고 새종 9(서기 1427) 문과에 등과하여 지평 장령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이르고 지사간원사(知司諫院)애 재직 시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남휘(南 暉) : 대종(大宗)4여 정선공주(貞善公主)와 혼인(婚姻)하여 의산위(宜山尉)가 되었다. 141818(서기 1418)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고 이듬해 판한성부사가 되고 세종 18(서기 1436)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시호(諡號)는 소간(昭簡)이다.

남곤(南 袞) (14711527) 성종 25(서기 1494년 문과에 등과(登科)하여 부제학 좌부승지가 되었다. 뒤에 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중종18(서기 1523)에 영의정에 올랐다. 심정 등과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꾸민 것으로 세인의 욕을 먹었다. 문경(文景)이란 시호를 받았으나 선조(宣祖) 원년(元年)(서기 1568)에 삭탈관직(削奪官職) 되었다.

남이(南 怡) (14411468) 태종의 부마 의산의의 장손(長孫)으로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이시애 난을 평정하고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1468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유자광의 무고로 주살(誅殺)되었다. 순조 18(서기 1818) 복관복작(復官復爵)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 ()는 백공(伯恭)이고 호()는 추강(秋江)이다. 성종조에 18세 소년으로 소능(昭陵:단종 어머니 능)을 복능(復陵)하라고 상소하다 성종이 듣지 않자 세상을 등지고 각처를 돌아다녔다. 뒤에 모명(母命)으로 응시하여 진사에 입격하였다. 창렬사(昌烈祀:생육신 사당)에 배향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남효의(南孝義) (14741551) ()는 지제(志齊)이다. 중종 11(서기 1511) 별시문과에 등과(登科)하여 1535년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고 1549년 한성(漢城)판윤(判尹)이 되었다. 기로소(耆老所) 들었다.

남새건(南世健) (14821552) 중종 19(서기 1524) 문과에 등과하여 형조정랑 지평, 교리 장령을 거쳐 대사성 대사간, 예조참의 평조참판 관찰사 대사헌 동지중추부사 동지경연, 성균관사 경기도 감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남응운(南應雲) (15091587) 자는 치원(致遠)이고 호는 국창(菊窓)이다. 중종 30(서기 1535)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등과하여 승정원 주서, 장령, 성균관 사성(司成). 이조(吏曹)참의(參議) 황해 경기도 관찰사 공조참판 역임하였음

남응룡(南應龍) (15141553) 자는 경림(景霖) 호는 이낙당(二樂堂)이다. ()과 함께 일성문과에 등과하여 직제학(直提學)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남언경(南彦經) (15281594) 자는 시보(時甫) 호는 동강(東岡)이다. 지평 장령을 거쳐 전주부윤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양근 미원서원(迷源書院)에 배향되었다.

남유(南 瑜) (15521594) 자는 명망(明望)이다.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우영장(右營將)을 겸하고 남해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공훈을 세워 병조판서와 의정부좌의정에 증직되고 의천부원군(宜川府院君)에 충신(忠臣)의 정려(旌閭)도 내렸다.

남이신(南以信) (15621608) 자는 자유(子有) 호는 직곡(直谷)이다. 선조 23(서기 1590) 문과에 등과하여 병조좌랑, 승지, 병조참판, 경기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증직(贈職)되었다.

남이웅(南以雄) (15751648)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이다. 선조 39(서기 1606)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하고 왕자(王子)사부(師傅)를 거쳐 1613년 문과에 등과하여 교리(敎理) 응교(應敎)를 지내고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진무공신(振武功臣)이 되었다.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피봉되고 이어 경기감사 경상도관찰사 형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남이공(南以恭) (15651640) 자는 자안(子安) 호는 설찬(雪纂)이다. 선조 23(서기 1590) 문과장원하여 암행어사를 거쳐 지평, 정언을 거치면서 소북(小北)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형조, 예조참의를 거쳐 대사헌 이조판서가 되었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었다.

남이흥(南以興) (15761627)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이다. 충청 경상도 병마사를 거쳐 안주목사로 재임시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일등공신(振武一等功臣)이 되었다. 평안도 병마사로 정묘호란 시 자결(自決) 순절(殉節)하고 좌의정에 증직되었다. 의천부원군(宜川府院君)에 피봉(皮封)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충신(忠臣)의 정려도 내려지고 안주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남두병(南斗柄) (16031663) 자는 관직은 통제사 공조참판 어영대장을 역임하였다.

남이성(南二星) (16251683) 자는 중휘(仲輝) 호는 의졸(宜拙)이다. 현종 3(서기 1662) 문과에 등과하여 예조참의를 거쳐 대사관과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남노성(南老星) (16031667) 자는 명서(明瑞) 호는 운곡(雲谷)이다. 인조 14(서기 1636) )문과 중시에 갑과에 등과하여 도승지와 예조참팡을 역임했다.

남선(南 銑) (15821654) 자는 택지(擇之) 호는 회곡(晦谷)이다. 인조 7(서기 1629) ) 문과에 등과하여 병조참의를 거쳐 7도 관찰사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선발(選拔)되었다. 시호(諡號) 정민(貞敏)이다.

남훤(宣羽) (16091656) 자는 백도(伯圖) 호는 창명(滄溟)이다. 인조 14(서기 1636) 문과에 등과하여 정언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이다. 효종 2(서기 1651) )진사시(進士試)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효종 7(서기 1656) 문과에 등과하여 대사간 승지를 거쳐 전라감사 대사성 형조판서 도승지 대제학 우상 좌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숙종 22(서기 1696)에 영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고 숙종(肅宗)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남용익(南龍翼) (16281692) 자는 운경(雲卿)이고 호는 호곡(壺谷)이다. 19세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21세에 문과에 등과하여 효종 7(서기 1656) 중시(重試)에 장원(壯元)하고 좌찬성과 양관의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시호(諡號)00이다.

남익훈(南益薰)(16401693) 자는 훈중(薰仲)이고 호는 파은(坡隱)이다. 현종 13(서기 1672) 문과에 등과하여 이조참판 경상 함경감사를 역임하고 좌성에 증직(贈職)되었다.

남연년(南延年) (116531728) : 자는 수백(壽伯)이요 호는 현암(玄岩)이다. 숙종(肅宗) 2(서기 167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령원 판관을 거쳐 도총부(都摠府) 경력(經歷), 청주(淸州) 영장(營將) 겸 토포사(討捕使)되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벌(討伐)하여 병조판서로 특증(特贈)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남유상(南有常) (16961728) 자는 길재(吉哉)이고 호는 태화(泰華)이다.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하고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사부(師傅)가 되어 숙종실록(肅宗實錄)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여 부사정(副司正)을 역임하였다.

남유용(南有容) (16981773) 자는 덕재(悳哉)이고 호는 뇌연(雷淵)이다. 영조 16(서기 1740) 문과에 등과(登科)하고 형조(刑曹)참의(參議) 대사성(大司成) 형조판서(刑曹判書) 봉조하(奉朝賀)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을 역임(歷任)하고 영의정이 증직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청(文淸)이다.

남공철(南公轍) (17601840) 자는 원평(元平)이요 호는 금릉(金陵)이다. 정조 16(서기 1792) ) 문과에 등과하여 대사헌(大司憲)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 이조(吏曹) 및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기로소(耆老所)에 봉조하(奉朝賀) 시호는 문헌(文獻)이고 익종(翼宗)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남정철(南廷哲) (18401916) 자는 치상(穉祥)이요 호는 하산(霞山)이다. 고종 19(서기 1882)증광(增廣)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고 예조, 공조참의를 거쳐 도승지, 예조판서, 내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907년에 장례원경(掌禮院卿)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 1909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애국가(愛國歌)를 지었고 덕수궁(德壽宮) 정문(正門) 현판(懸板) 대한문(大漢門)도 공의 유필(遺筆)이다.

남병철(南秉哲) (18171863) 자는 자명(子明)이요 호는 규제(圭齊))이다. 헌종 3(서기 1837) 식년 문과에 등과(登科)하여 병조정랑 공조 및 예조참의 도승지 전라감사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한 천문학자(天文學者)이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남상길(南相吉) (병길(秉吉)(18201869) 자는 자상(子裳)이요 헌종 14(서기 1848) 증광별시에 등과(登科)하여 성균관 대사성 지중추부사 지춘추관사 도총관 예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남일우(南一祐) (18371886) 자는 백경(伯敬)이요 청종10(서기 1859) 문과에 등과하여 한림(翰林)과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했다.

남형우(南亨祐) (18731943) 자는 성칠(聖七)이요 호는 수석(瘦石)이다. 00전문교 법률교수로 1909년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창원군 의거의 원동력이 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역임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을 수훈했다.

남상목(南相穆) (18761908) 자는 문일(文一) 1905년 의용사를 모집하여 의병장(義兵將)이되어 판교(板橋)의 일본(日本) 헌병대(憲兵隊)와 교전(交戰)하고 음성(陰城)에서 일병(日兵)과 격전(激戰)을 하였으나 패하여 숨어 있다가 체포(逮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殉國)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獨立) 유공자(有功者)로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수훈(受勳)하였다.

남상덕(南相悳) (18811907) 자는 인옥(仁玉) 한말(韓末) 조일신협약(朝日新協約)에 따라 군대(軍隊)가 해산명령(解散命令)이 내리자 분개(憤慨)하여 일군과 전투를 하다 장렬(壯烈)히 전사(戰死)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2년 건국훈장(建國勳章) 복장(複章)을 수훈(受勳)했다.

남송학(南松鶴) (19041962) 일명(一名) 우현(禹鉉) 0대 민의원을 역임하였다.

남경우(南慶祐) (19151993) 자는 백선(伯善)이고 호는 관제(寬齊)이다. 광주(廣州) 교육장(敎育長) 국민훈장(國民勳章) 수훈(受勳) 의령남씨대종회 초대에서 3대 연임하였다.

남광우(南廣祐) (19201997) 호는 난정(蘭貞) 문학박사(文學博士) 인하대 교수, 교육대학원장 국민훈장 수훈(受勳).0대 의령남씨대종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