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고흥류씨(高興柳氏),고흥류씨시조,류영,고흥류씨유래,고흥류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06 11:27 수정일 : 2018-02-23 11:21

고흥류씨시조 및 고흥류씨유래(본관)

고흥류씨(高興柳氏)는 고려 개국 후 흥양지방의 호장(戶長)이었던 류영(柳 英)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7세손 청신(淸臣 : 지추밀원사 승무의 아들)이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삼한삼중대광 도첨의 정승(三韓三重大匡都僉議政丞)에 올라 고흥부 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고흥(高興)으로 하게 되었다.

고흥(高興)은 전라남도 남동단(南東端)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초에 고이부곡(高伊部曲)이라 하였으며, 1285(충렬왕 11)에 고흥현(高興縣)이라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조선 태조조(太祖朝)에 보성군(寶城郡) 조양현(兆陽縣)으로 개편되었다가, 1441(세종 23)에는 장흥부(長興府) 두원현(豆原縣)으로 바꾸고, 보성군 남양현(南陽縣)을 분할 편입하여 흥양(興陽)이라 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1895(고종 32) ()으로 고쳤으며, 1914년 고흥군(高興郡)으로 개칭하였다.


가통(家統)을 이은 인맥(人脈)으로는 청신의 손자 장()과 탁()․준()이 유명했다. 예빈윤(禮賓尹) (氵全)의 아들인 장()은 고려 말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부모와 함께 천안(天安)으로 내려가 일찌기 할아버지 청신이 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얻어온 호도(胡桃) 번식을 적극 장려하여 오늘날 호두는 천안의 명물(名物)이 되었으며, 판밀직사(判密直司) 유기(有奇)의 아들로 고려 말에 기 재(奇才)로 많은 일화를 남겼던 탁은 <장생포곡(長生浦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렸다.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준()은 조선이 개국되자 검교참찬 문하부사로 고흥백(高興柏)에 봉해졌으며 정종(正宗)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하였다.

한편 맏아들 습()은 태종(太宗)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예() ․형()․병()․이조(吏曹)의 전서(典書)를 역임했고 세종조(世宗朝)에서는 우군원수(友軍元帥)가 되어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의 증손 충서(忠恕)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권 율(權 慄)의 막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록되어, 대를 이어 가문을 명문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구월산(九月山) ()을 토벌하여 형조판서(刑曹 判書)에 오른 세웅(世雄 : 효백의 아들)은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고, 어우야담(於于野談)」으로 유명한 몽인(夢寅)은 글씨에 도 뛰어났으며,

조선(朝鮮) 중기의 설화 문학(設話文學)의 대가(大家)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역모(逆謀)의 누명을 쓰고 <상부사(孀婦詞)>라는 시()로 인하여 아들 약(: 형조, 공조 좌랑을 역임)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임진왜란 때 한산도(閑山島) 싸움에서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된 의신(義臣)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한마교(汗馬橋)에서 전사한 춘필(春苾)이 유명했고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로 일컫어졌던 경인(景仁), 성인(成仁), 극인(克仁)은 정유재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고종(高宗) 때 명정(命旌)되어, 칠산양(七山洋)에서 일가족 이 순절한 익겸(益謙)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외 형제 호당(湖堂)으로 이름났던 숙()과 활()은 부정(不正) 몽표(夢彪)의 아들로서, 형인 숙은 대사간(大司諫)과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영주군(瀛州君)에 봉해졌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광해군(光海君)의 심복이었다는 죄목으로 청하(淸河)에 위리안치되었으며, 아두 활은 경기 도사(京畿 都事)를 지냈다.

숙은 증손 종흥(宗興)은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가 거론되자 선비들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서 그 바당함을 주장하여 회심소(回心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구국절의(救國節義)의 인맥을 전통으로 삼은 고흥 류씨는 고종 때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강렬하게 주장했던 중교(重敎)와 항일투쟁에 불구가 되었던 홍석(弘錫),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 구성에 항거했던 인석(麟錫)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했고, 병우(秉 禹)는 하동(河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日本軍)의 기관을 습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단식으로 옥사했다.

철종(哲宗) 때 가재(家財)를 털어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설립했던 중권(重權)3.1운동 때 관순(寬順)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 를 하다가 아내와 함께 순절하였으며, 중화(重和)는 의병대장(義兵大長)으로 80여 명의 동지들과 은진(恩津) 왕성골에서 왜 병을 크게 섬멸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으로 명성을 떨쳤던 영선(永善)과 함께 명문 고흥 류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흥류씨(高興柳氏)는 남한에 52,22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고흥류씨조상인물

류명단(柳明旦)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류욱(柳 昱) 상장군(上將軍) 명단(明旦)의 아들.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호부사(判戶部事)․상장군(上將軍)등에 증직되었다.

류승무(柳升茂)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밀직 부사(密直副使)․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등에 증직(贈職)되었다.

류청신(柳淸臣) 1257 (고종 44) 1329 (충숙왕 16)

구명(舊名)은 비(), ()는 수장(守長), ()는 신암(信庵), 시호(諡號)는 영밀(英密), 증지추밀원사(贈知樞密院事) 승무(升茂)의 아들. 18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번 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왔고, 외교(外交)에 능해 충렬왕(忠烈王)의 총애(寵愛)를 받아 낭장(郎獎)이 되었다.

()의 특명으로 고향인 고이부곡(高伊部曲)이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되고 장군(將軍)이 되었다. 이어 동지밀직(同知密直), 감찰 대부(監察大夫) 등 요직을 역임하고, 1298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광정 부사(光政副使)를 거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내고, 1308년 찬성사(贊成事)에 이어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승진, 고흥군(高興君)에 봉()해졌다,

1321(충숙왕 8)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가서 1329(충숙왕 16) 73세로 죽었다. 조선 태조(太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특증(特贈)되었다. 천안(天安)의 부조묘, 고흥(高興)의 운곡사(蕓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균(柳 均) 고흥군(高興君) 청신(淸臣)의 맏아들. 고려 때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류유기(柳有奇) 청신(淸臣)의 아들. 고려조에 전라도 진변만호(全羅道鎭邊萬戶)․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아버지를 따라 여러 차례 원()나라에 다녀왔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追贈)되었다.

류장(柳 莊) 청신(淸臣)의 장손(長孫). 고려 때 중정대부(中正大夫)․판삼사좌윤(判三司左尹) 통례문사(通禮門事)를 지내다가 고려 말기(末期)에 정국(政局)이 험난(險難)함을 보고 부모를 모시고 천안(天安)으로 낙향(落鄕)하였다.

낙향(落鄕) 후에는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힘쓰는 하편, 일찍이 조부(祖父) 청신(淸臣)이 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얻어온 호도(胡桃) 번식을 적극장려하여 선조(先祖)의 견지(遣志)를 완수(完遂)하였다.

류탁(柳 濯) 1311 (충선왕 3) 1371 (공민왕 20)

()는 춘경(春卿), ()는 성재(誠齋), 시호(諡號)는 충정(忠正), 정승(政丞) 청신(淸臣)의 손자, 음보(蔭補)로 등용, ()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고 귀국,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이 된 후 고흥군(高興君)에 봉해지고 원나라에 의해서 합포 만호(合浦萬戶)가 되었다.

충정왕(忠定王) 때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공민왕(恭愍王) 초에 전라도 만호(全羅道萬戶)로 있을 때 해고(海寇)들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으며, 장생포곡(長生浦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랐다.

1353(공민왕 2)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좌승상(左丞相)에 올라 고흥부원군 (高興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장사성(張士誠)의 토벌을 위한 원나라의 징병(徵兵)에 따라 2천 군사를 이끌고 출발했다.

난이 평정된 후 귀국하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홍건적이 칩입하자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門事) 겸 병마사(兵馬事)로서 적의 방어에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 었다.

그 후 좌정승(左政丞)․평리(評理)․좌시중(左侍中)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역임, 1369년 안극인(安克仁)과 함께 앞서 죽은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전(影殿)을 크게 신축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투옥되었으나 이 색(李 穡)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1371년 신 돈(辛 旽)이 주살(誅殺)됨에 이르러 그의 일당으로 몰려 청교역(靑郊驛)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당했다. 조선 태조 때 고흥백(高興伯)에 추봉(追封)되었다.

류준(柳 濬) 1321 (충숙왕 8) 1406 (태종 6)

시호(諡號)는 호안(胡安), 첨의정승(僉議政丞) 청신(淸臣)의 손자. 음보(蔭補)로서 부위(府衛)가 되고, 천우위 상호군(千牛衛上護軍)에 승진하여 원나라 조정의 명으로 명위장군(明威將軍)․전라도 진변만호부(全羅道鎭邊萬戶府) 다루가치를 세습(世襲)했다.

오랫동안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있었으며, 1388(우왕 14)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가 되고, 이성계가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에 승진하자 그 막하에 속했다. 1392년 조선 태조(太祖)가 즉의하자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가 되어 고흥백(高興 伯)에 봉해졌으며, 1400(정종 2)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했다.

류습(柳 濕) 1367 (공민왕 16) - 1439 (세종 21)

시호(諡號)는 양정(襄靖), 시중(侍中) ()의 아들. 음보(蔭補)로 합문 인진사(閤門引進使)가 되고, 1392년 조선 건국 후 과의상장군(果毅上張軍)에 특진, 태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예조․형조․병조․이조 등의 전서(典書)를 역임한 후 전라․충청․평안도의 도절제사(都節制事)를 지냈다.

이어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에 승진,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9(세종 1) 우군원수(右軍元帥)로 쓰시마도(對馬島) 정벌에 참전했다. 고흥(高興) 운곡사(雲谷祠)에 제향되었다.

류호지(柳好池) 1462(세조 8) 무과(武科)에 급제, 1466(세조 12) 등 준시(登俊詩)에 합격(合格)했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었으며, 진도(珍島)․안성 군수(安城郡守)를 거쳐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가 되었다.

류효산(柳孝山) 1475(성종 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사도시정(司導寺正)을 거쳐 공주 판관(公州判官)․충청 도사(忠淸都事)․안악 군수(安岳郡守)등을 지냈다. 1509년 원종훈(原從勳)으로 도승지(都丞指)․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류의(柳 依) 字는 인경(仁卿). 조선 때 서예(書藝)에 특출하여 왕희지(王羲之)의 필법(筆法)을 터득했다. 1504(연산군 10)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남포(藍浦)․고성(固城)․고산(高山) 등지의 외직(外職)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모두 불망비 (不忘碑)가 세워졌다. 뒤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경력(經歷) 등을 역임하였다.

류귀산(柳龜山) ()는 경암(敬庵). 조선(朝鮮) 때 경세(經世)에 박통(博通)하여 당세(當世)의 저유(著儒)가 되었다.

류충관(柳忠寬) ()는 홍중(弘仲). 1521(중종 16) 정시문과(庭詩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敎理)를 거쳐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권간(權奸) 김안로(金安老)를 면책하여 조정을 놀라게 했다.

류충정(柳忠貞) ()는 중간(仲幹). 1534(중종 2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안(扶安)․강진(强震)․김해(金海)․장흥(長興)․온성 군수(穩城郡守)를 지냈다.

류충신(柳忠信) ()는 성중(誠仲). 1564(명종 19) 음보(蔭補)로 부사직(副詞直)이 되고, 1570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로 있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종질(從姪) 류황(柳 滉)과 함께 이순신(李舜臣)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많은 전공 (戰功)을 세웠다. 고흥(高興)의 운곡사(雲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충서(柳忠恕) ()는 추중(推仲).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는 왕()을 호종(扈從)했으며, 권 율(權 慄)의 막료(幕僚)가 되어 행주(幸州)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운 후, 독운관(督運官) 류몽사(柳夢獅)와 함께 군량(軍糧) 10여만 석()을 선천(宣川)으로 보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고, 호조 참판(戶曺參判)에 추증(追贈), 금산(錦山)의 대첩사(大捷祠)와 고흥(高興)의 운곡사(雲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의함(柳宜諴) 1523(중종 18)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삼수 군수(三水郡守)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류득춘(柳得春) 수문장(守門將)으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는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였으며, 평양성(平壤城) 싸움에서 순절(殉節)했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 호조 참의(戶曺參議)에 추증되었다.

류경(柳 經) 1506(중종 1) 박원종(朴元宗) 등과 함께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晋城大郡) ()을 추대하여 정국3등공신(靖國三等功臣)․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고 고흥군(高興君)에 봉해졌다.

류 면(柳 沔) ()는 중원(仲源). 1489(성종 20)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가평 현감(加平縣監), 영해(寧海)․면천 군수(沔川郡守) 등을 역임 하였다. 이어 덕원(德源)․부평 부사(富平府使) 등 여러 직을 거쳐 내자시정(內資寺正)이 되었다.

류연(柳 淵) ()는 정숙(靜叔). 조선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오르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송화 현감(松禾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류탱(柳 樘) ()는 대지(大支). 조선(朝鮮)에서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류주(柳 澍) ()는 시숙(時淑), ()는 한천(寒泉). 1561(명종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풍기(豊基)․청도(淸道) 등지의 외직(外職)을 거쳐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뒤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다. 나주(羅州)의 보산사(寶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온(柳 溫) ()는 기보(基甫).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天鎰)과 함께 맹약(盟約), 창의(倡義)하여 궁마양향(弓馬糧餉)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策錄)되고 주부(主簿)로 부사과(副司果)를 제수 받았다.

류은(柳 溵) ()는 심보(深甫), ()는 남호(南湖). 1576(선조 9) 별시문과(別詩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이 되어 관아(官衙)에서 죽었다. 1606 (선조 39) 선계변무(선系辨誣)의 노고(勞苦)를 포상(褒賞)하여 광국훈(光國勳)에 책록(策錄)되고 도승지(都丞指)에 추증(追贈), 나주(羅州)의 보산사(寶山祠)에 제향되었다.

류척(柳 滌)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대가(大駕)가 파천(播遷)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연(奮然)히 한산도(閑山島) 이순신(李舜臣) 진중(陣中)으로 뛰어가 방책(方策)을 협찬(協贊)하던 중 불행히 중도(中途)에서 죽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와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류순(柳 淳) ()는 호숙(灝淑), ()는 송암(松庵). 조선 때 음보(蔭補)로 사옹원 직장(司甕院直長)이 되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에 호종운향(扈從運향)의 공()으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策錄)되고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다.

그 후 광해군(光海君) 때 북풍시(北風詩)를 지어 족질(族姪) 몽인(夢寅)에게 전하고 바로 낙향(落鄕)하여 은거(隱居)했다. 고흥(高興)의 운곡사(雲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계(柳 溪) ()는 거용(擧用). 1592(선조 25) 계부(季父)의 충서(忠恕)를 따라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을 했다. 그후 권율(權 慄)․이순신(李舜臣)의 막하(幕下)에서 활약, ()을 세우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策錄), 제주 판관(濟州判官)을 역임하였다. 고흥(高興)의 운곡사(雲谷祠), 금산(錦山)의 대첩사(大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일(柳 溢) ()는 여겸(汝謙). 조선 때 인의(引儀)를 지냈다.

류연(柳 淵) ()는 공시(公時).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버지 의신(義臣)을 따라 한산도(閑山島) 진중(陣中)에서 싸우다가 아버지가 적탄(敵彈)에 쓰러지자 부명(父命)을 받아 군졸(軍卒)을 이끌고 적()을 섬멸했으며, 아버지 시체(屍體)를 고향(故鄕)인 천안(天安)에 장사(葬事) 지내고, 3() 시묘(侍墓)를 했다. 나이 90에 이르도록 아버지가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했음을 슬퍼하여 혼인(婚姻)하지 않고 은둔(隱遁)을 자청(自請)하였다. 1742(영조 18) 명정(命旌)되었다.

류춘영(柳春英) ()는 자화(子華), ()는 죽계(竹溪). 조선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류춘발(柳春發) ()는 중화(仲華), ()는 관란(觀瀾). 1561(명종 1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가 되고, 광양(光陽)․교동(喬桐)․흥덕 군수(興德郡守) 등을 거쳐 충주(忠州), 청주 판관(淸州判官)을 역임한 후 보성 군수(寶城郡守)를 지냈으며, 1592년 접빈사(接賓使)가 되었다.

류세웅(柳世雄) 시호(諡號)는 가정(嘉靖). 조선조에 어영대장으로 구월사적(九月山賊)을 토벌했으며, 한성 판윤(漢城判尹)․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다.

류몽사(柳夢獅) ()는 서백(瑞伯). 1592(선조 25) ()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고, 그후 독운관(督運官)이 되어 10여만 석()의 군량(軍糧)을 조운(漕運)하였다.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내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류몽표(柳夢彪) ()는 응병(應炳). 조선 때 부정(副正)을 지냈다.

류몽인(柳夢寅) 1559 (명종 14) 1623 (인조 1)

()는 응문(應文), ()는 어우당(於于堂), 간재(艮齋), 묵호자(黙好子), 시호(諡號)는 의정(義貞), 사간(司諫) 충관(忠寬)의 손자, ()의 아들. 성혼(成渾)의 문인. 1582(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1593년 문학(文學)이 되었다.

선조(宣祖) 말년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좌승지(左承旨)․도승지(都丞指)를 역임, 1612(광해군 4)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고,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전임했다. 폐모론(廢母論) 때 이이첨(李爾瞻)과 대립, 이에 가담하지 않아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때 화를 면했으나 류응시(柳應時)의 고변(告變)으로 아들 약()과 함께 사형되었다.

조선 중기의 설화문학(說話文學)의 대가였으며, 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초서(草書)에 모두 뛰어났다. 정조(正組) 때 신원(伸寃)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흥양의 운곡사(雲谷祠),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 제향(祭享)되었다.

류운(柳 澐) ()는 심부(深夫), ()는 석탄(石灘). 조선 때 문장(文章)이 화미(華美)하고 금회(襟懷)가 쇄락(灑落)하며 강개(慷慨)한 지절(志節)이 있어 퇴사시(退仕時)를 짓고 고창(高창)에 은거(隱居)하였다.

류동양(柳東陽) 조선에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류동립(柳東立) 1577(선조 10)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합격하여 호조 정랑(戶曹正郞)이 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호가(扈駕)하여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류동휘(柳東輝) ()는 사명(士明). 조선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1623년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고,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강화(江華)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그 공()으로 승지(承旨)가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조카 류철견(柳鐵堅)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모집해서 여산(廬山) 등지에서 싸웠다.

류광정(柳光貞) ()는 정숙(正淑), ()는 남천정(南川亭). 조선 때 학문(學問)에 뜻이 있어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고, 형 광형(光亨)과 함께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3() 시묘(侍墓)하였다. 1592년의 임진왜란(壬辰倭亂)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창의(倡義) 모병(募兵)하여 곽재우(郭再祐) 막하(幕下)에서 활약, 만년(晩年)에서 남천상(南川上)에 정자(亭子)를 짓고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쓰니 세인(世人)이 그곳을 서당동(書堂洞)이라 일컬었고, 지금도 충효유지(忠孝遺趾)로서 전해 온다.

류성인(柳成仁) ()는 사수(士壽), ()는 돈헌(遯軒). 조선 때의 사(義士)였다.

류극인(柳克仁) ()는 사임(士任), ()는 학재(學齋). 1594(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가 되고 1597년 정우재란(丁酉再亂)에 백형(伯兄) 류경인(柳景仁), 중형(仲兄) 류성인(柳成仁)과 함께 우치(牛峙)에서 역전(力戰)하다가 백형은 전사(戰死)하고, 중형이 부상(負傷)하니 더욱 분전(奮戰)하여 적()을 수없이 참살(慘殺)하였다. 이로 인해 세인(世人)들이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라 일컬었고, 1881(고종 18) 명정(命旌)되었다.

류익겸(柳益謙) ()는 사수(士受).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다시 칠산양(七山洋)에서 싸우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형세(形勢)가 기울자 처() 송씨(宋氏), 아들 집약(潗瀹), 며느리 정씨(丁氏)․김씨(金氏) 등 일가족이 모두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殉節)했다.

류의신(柳義臣) ()는 언정(彦正), ()는 송정(松亭). 1583(선조 16) 무과(武科), 1591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봉장(先鋒將)으로 가덕포(加德浦)와 웅천포(熊川浦) 싸움에서 공()을 세워,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의천거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가 되고, 이어 첨정(僉正)이 되었다. 한산도(閑山島)싸움에서 전사(戰死),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에 책록(策錄)되고,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 되었다.

류춘필(柳春苾) ()는 단구(丹邱). 154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읍(井邑)․거의(擧擬)․여산(礪山)에서 군량(軍糧)을 모아 통영(統營)으로 보냈다.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한마교(汗馬橋)에서 싸우다 전사(戰死)했다. 정읍(井邑)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희진(柳希津) ()는 택민(澤民), ()는 신암(信巖). 조선 때 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동지(同志)들과 의곡(義穀) 5백 석()을 모아 강화(江華)로 조운(漕運)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義兵)을 모아 적()과 싸워 많은 공()을 세우고, 복병(伏兵)에게 습격을 받아 전사(戰死)했다. 1798(정조 22)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追贈), 정읍(井邑)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경인(柳景仁) ()는 사영(士榮), ()는 송은(松隱).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류국주(柳國柱)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류국추(柳國樞) ()는 중일(仲一).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류광(柳 洸) ()는 무숙(武叔). 1590(선조 23)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이 되고, 1616(광해군 8) 문과(文科)에 급제 하여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 등을 거쳐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류영해(柳永海) ()는 심원(深源), ()는 모정(茅亭).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계부(季父) 류익겸(柳益謙)과 함께 격문(檄文)을 보내 창의(倡義)하여 고경명(高敬命), 곽재우(郭再祐) 등에게 무기(武器)를 조달(調達)해 보냈다.

의곡(義穀)을 모아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보낸 공()으로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다. 1612(광해군 4) 폐모론(廢母論)이 나오자 극간(極諫)하다가 회령(會寧)으로 유배(流配)되었다.

류오(柳 澳) ()는 중원(仲源), ()는 계정(溪亭).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부모 형제(父母兄弟)가 모두 해상(海上)에서 순절(殉節)하고, 왜구(倭寇)에게 생포(生捕)되어 쓰시마도(對馬島)에 유폐(幽閉)되었다가 풀려 나왔다.

고향(故鄕)에 돌아와 조고(組考) ()의 영정(影幀)과 고비(考妣)의 신주(神主)를 추조(追造)하고 3년상(年喪)을 추복(追服)하니, 세인(世人)들이 그 효()를 칭송했다. 1887(고종 24)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류경지(柳敬地) ()는 백후(伯厚). 조선 때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류광춘(柳光春) 1594(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노성(魯城), 태인(泰仁) 등지의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에 책록(策錄)되고,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올랐다.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추증(追贈)되었다.

류숙(柳 潚) 1564 (명종 19) ?

()는 연숙(淵淑), ()는 취흘(醉吃), 부정(副正) 몽표(夢彪)의 아들. 1588(선조 2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9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608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사서(司書), 수찬(修撰), 응교(應교), 장악원정(掌樂院正), 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영주군(瀛州君)에 봉해지고 대사간(大司諫)․형조 참판(刑曹參判)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광해군 때 역신(逆臣)의 심복이었다는 죄로 청하(淸河)에 위리안치(圍籬安置)뒤에 숙부(叔父) 몽인(夢寅)의 역모 사건(逆謀事件)에 연좌, 다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 제향(祭享)되었다.

류활(柳 活) ()는 원숙(原叔), ()는 태우(泰宇). 1606(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이르렀다. 1623년 숙부(叔父) 몽인(夢寅)의 일에 연루되어 보성(寶城)에 배되었다. 그후 풀려나와 경기도사(京畿都事)가 되었으나 사퇴했다.

류찬(柳 澯) ()는 영숙(永叔). 조선 때 노모(老母)를 봉양하기 위하여 세자익위사위수(世子翊衛司衛수)가 되었는데 마침 폐모 사건(廢母事件)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후 광해조(光海朝)의 절신(節臣)이라 하여 헌직을 주려 했는데 숙부(叔父) 몽인(夢寅)의 일에 연루되어 고흥(高興)으로 유배, 후에 철원(鐵原)으로 옮겼으며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1795(정조 19)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류약(柳 瀹) 1580 (선조 13) 1623 (인조 1)

()는 약이( ), 참판(參判) 몽인(夢寅)의 아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용양위 부사과(龍 衛副司果)가 되고, 1613(광해군 5)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5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겸설서(兼說書), 검열(檢閱),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 이듬해 헌납(獻納)으로 문고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 이어 교리(校理), 공조 좌랑(工曹佐郞), 형조 좌랑(刑曹佐郞) 등을 지냈다.

1617년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로 폐모론(廢母論)을 주장,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후 아버지와 함께 사형되었다. 1794(정조 18) 신원(伸寃)되었다.

류우장(柳友樟) ()는 이건(而建), ()는 수의부(守議富). 1613(광해군 5) 폐모사건(廢母事件)이 일어나자 과거(科擧) 볼 것을 단념하고 자취를 감추었다가 1623(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이 되고, 1637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임금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통곡(痛哭)하고 돌아와 양이시(攘夷詩)를 지었다.

류경원(柳慶元) ()는 선량(善良). 1603(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봉사(奉事)를 거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가 되었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을 일으킬 기미를 보이자 헌책(獻策)하였으나 주장(主將)이 듣지 않았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갔다.

류동인(柳東仁) ()는 선영(善榮). 1603(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병절 교위(秉節校尉), 발포 만호(鉢浦萬戶)에 이르고, 1624년 이 괄(李 适)의 난()에 장 만(張 晩)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웠고, 그후 향리(鄕里)로 돌아가 금서(琴書) 자적(自適)하였다.

류철견(柳鐵堅) ()는 여수(汝壽), ()는 양곡(暘谷). 조선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류여회(柳汝檜) ()는 용직(龍直),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사(義士)들을 규합(糾合)하여 모병(募兵), 수량(輸糧)한 공이 커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등용되었다. 고창(高敞)의 벽산사(碧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시번(柳時蕃) ()는 진숙(晋叔), ()는 송재(松齋).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 아우 시발(時發), 시화(時華)와 함께 동지(同志)를 모아 공주 행재소(公州行在所)에 호종(扈從)했으며,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모곡유사(募穀有司)가 되어 군량수집(軍糧收集)에 공()이 컸기 때문에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임명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류지태(柳之泰) ()는 내보(來甫), ()는 반죽재(伴竹齋).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근에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義兵) 과 군량(軍糧)을 모았다.

여산(礪山)을 거쳐 청주(淸州)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해서 그대로 진군(進軍)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隱居)했다. 수직(壽職)으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 되고,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추증(追贈) 되었다.

류영징(柳榮徵) ()는 여휴(汝休), ()는 돈와(遯窩).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류흥우(柳興雨) ()는 성로(城露).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수의부위(修義副尉)에 오르고, 1742(영조 18) 효자(孝子)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류필원(柳必源) ()는 원백(源伯), ()는 일평(一萍).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1722(경종 2) 나라에서 효자(孝子)로 정려(旌閭)를 내렸고, 1889(고종 26)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曺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류혜원(柳惠源) ()는 원중(源仲), ()는 허재(虛齋). 어려서부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그 고을 원(군수)이 그곳을 효평(孝坪)이라 칭()하고, 1722(경종 2) 효자(孝子)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1829(순조 29) 도내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창효사(彰孝祠)에 제향(祭享)되었다가 용강사(龍岡祠)로 이향(移享)되었다. 1890(고종 27)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追贈)되었다.

류종흥(柳宗興) ()는 진보(振甫), ()는 월곡(月谷), 부제학(副提學) ()의 증손, 최서림(崔瑞林)의 문인. 1689(숙종 15)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될 때 여러 선비들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서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속에서 살다가 1694(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南人)들이 숙청됨으로써 왕비가 환궁하자 시()를 지어 기쁨을 표한 후에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류윤흥(柳胤興) ()는 술경(述卿). 조선(朝鮮) 때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류동기(柳東起) ()는 군서(君瑞).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류덕휴(柳德庥) ()는 자윤(子潤), ()는 삼애(三涯). 조선 때 효자(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았다.

류이택(柳以澤) ()는 윤경(潤卿). ()는 두봉(斗峯). 조선(朝鮮)의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다.

류간(柳 諫) ()는 여직(汝直). 1707(숙종 33) 별시문과(別詩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순천(順天), 종성(鍾城) 등지의 군수(郡守)를 지내며 치적(治績)을 남겼고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류건(柳 謇) ()는 여정(汝正). 1729(영조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조 참의(兵曹參議),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류진한(柳振漢) ()는 중백(重伯). ()는 만화당(晩華堂). 15세에 경서(經書)와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고 시문(時文)에 뛰어났다. 당시 영상(領相)이 누차 보기를 청했으나 거절하고, 영회당(英會堂)을 짓고 오직 후진육성(後進育成)에만 힘썼다.

류종극(柳宗極) ()는 공여(拱汝). 조선 때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지체(志體)를 겸양(兼養)했다. 부친상(父親喪)을 만나 장지(葬地)를 미처 정하지 못했는데 밤에 문득 대호(大虎)가 뜰로 들어왔다. 주선(周旋)하는 사람들이 대경실색(大驚失色)했지만 뜰에 나가 뜻을 살피니 등에 업히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등에 업히자 덕암원 봉상(德岩圓峰上)에 이르러 장지(葬地)를 지점(指點)하는 것이었다. 그 곳에 안장(安葬)하고 3년을 하루 같이 시묘(侍墓)하니 효자(孝子)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특제(特除) 받았다.

류빈현(柳彬賢) ()는 군성(君聖), ()는 일사(一沙). 품성(稟性)이 단정(端正)하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1887(고종 24)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류세기(柳世箕) ()는 양수(), ()는 수한(睡漢). 조선 때 효자(孝子)였다.

류영일(柳榮日) ()는 산립(山立), ()는 백의(白衣). 조선 때 학자(學者)였다.

류영보(柳榮補) ()는 흥숙(興叔). 1812(순조 1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기린 찰방(麒麟察訪)과 무안 현감(務安縣監) 등의 외직(外職)을 거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장악원정(掌樂院正), 대사간(大司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다.

류영하(柳榮河) 1787 (정조 11) 1868 (고종 5)

()는 선여(善汝), ()는 보산(甫山), 우의정 관()의 아들. 이 항(李 恒)의 문인. 1819(순조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헌종(憲宗) 때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거쳐 1858(철종 9)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고종(高宗) 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승진,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임했다.

류영오(柳榮五) ()는 숙도(叔陶), ()는 율리(栗里), 1803(순조 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이 되고, 시폐(時弊)를 상소(上疏)했다가 신지도(新知島)로 유배(流配)되었으나 곧 풀려 양근산(楊根山)에서 이항로(李恒老)와 더불어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는데 힘썼다. 전적(典籍), 지평(持平),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류택(柳 澤) ()는 사윤(士潤). 조선 때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류성(柳 醒) ()는 경수(敬叟), ()는 사이당(四二堂). 1807(순조 7) 생원(生員)이 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친환(親患)에는 꿈에 신방(神方)을 얻어 완쾌(完快)시키기를 누차 했다. 1855(철종 6) 효자(孝子)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류원순(柳源淳) ()는 자승(子勝), ()는 청송당(靑松堂). 조선 때 음보(蔭補)로 충무위 사용(忠武衛司勇),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고, 만년에는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썼다.

류병욱(柳秉郁) ()는 내근(乃根), ()는 경봉(警峰). 조선 때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1887(고종 24) 나라에서 효자(孝子)로 정려(旌閭)를 명()하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에 추증(追贈)되었다.

류중교(柳重교) 1821 (순조 21) 1893 (고종 30)

()는 치정(致政), ()는 성재(省齋),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양근(楊根) 출신. 5세 때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업, 그후 김평묵(金平黙) 문하로 옮기고, 21세 때 이항로의 명으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수정했다.

1876(고종 13)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881년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소론(疏論)이 일어나자 김평묵과 함께 구법보수(舊法保守)와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열렬히 주장했다. 뒤에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설악산(雪嶽山)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항로의 설을 따라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하였으나, 만년에는 한원진(韓元震)의 호론(湖論)을 지지, 심즉기(心卽氣)의 학설을 옹호함으로써 스승 이항로의 학설에 반기를 들었다. 죽은 후 제학(提學)에 추증(追贈), 고산(高山)의 삼현서원(三賢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류홍석(柳弘錫) 1841 (헌종 7) ?

강원도 춘성(春城) 출신. 1895년 류인석(柳麟錫)과 함께 충북 제천(堤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한때 만주 봉천(奉天)에 피신하고 1897(광무 1)에 귀국, 진위대 특무(鎭衛隊特務) 민긍호(閔肯鎬), 이강년(李康 )과 함께 재기하려다가 실패했다. 다시 1천명의 의병을 일으켜 가평(加平)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중국에 망명, 요동(遼東) 회인성(懷仁城)에서 병사했다.

 

류인석(柳麟錫) 1841 (헌종 7) 1915

()는 여성(汝聖), ()는 의암(毅庵). 이항로(李恒老), 류중교(柳重교)의 문인. 1876(고종 13)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을 체결할 때 문하(門下)의 유학생들을 이끌고 상소하여 이를 반대 하였고, 1894(고종 31)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親日內閣)이 조직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忠州), 제천(堤川) 등지에서 싸워 부패한 관리를 죽였으나 관군에 패전, 단양(丹陽)으로 퇴거했다.

관군의 감시를 피해 만주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하여 은신중, 고종의 유지(諭旨)로 한때 귀국했다가 1898(광무 2) 다시 만주에 갔다. 1909(융희 3) 블라디보스톡에서 13도 의군도총재(義軍都總栽)에 추대, 이상설(李相卨) 등과 두만강 연안으로 쳐들어 오려고 기도 했으나 일본의 외교적 절충으로 러시아관헌에 피체, 뒤에 석방되어 1910년 한일 합방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 했다.

봉천성 관전현(奉天省寬甸縣)에서 병사했다. 한말이 거유(巨儒)인 이항로의 학통(學統)을 계승한 학자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류병우(柳秉禹) 1849 (헌종 15) 1910 (융희 4)

()는 해사(海史). 전라도 정읍(井邑) 출신. 1906(광무 10) 김상기(金相璣), 김병균(金秉均) 등과 함께 하동(河東)에서 의병을 일으켜 백낙귀(白洛龜)를 대장으로 삼고 순천(順天)을 점령하했으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퇴, 정읍으로 철수하여 재기를 꾀하다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죄수 30여 인을 이끌고 탈옥, 일본 각 기관을 습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다시 체포되어 4일 동안 단식 끝에 옥사했다.

류상준(柳相浚) ()는 백명, ()는 경당(敬堂), 조선(朝鮮)의 학자(學子)로 문명(文名)이 높았다.

류중권(柳重權) 1863 (철종 14) 1919

충남 천안(天安) 출신. 1911년 가재(家財)를 털어 천안에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설립했다. 3.1 운동 때 딸 관순(寬順)과 아오내(병川)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하다가 일본관헌에게 아내와 함께 살해되었다.

류중화(柳重和) ()는 치복(致福). 1905(광무 9) 보호조약(保護條約)이 체결(締結)되자, 1906년 가산(家産)을 전부 팔아 병기(兵器)를 장만하고, 동지(同志) 80여 명을 모아 스스로 대장(大將)이 되어 친일파(親日派)인 일진회(一進會) 익산지회장(익山支會長)을 죽이고, 금마(金馬), 고산(高山) 주둔 일본 헌병대(日本憲兵隊)를 기습했다.

190810월 은진왕성(恩津王城)골에서 왜병을 크게 무찔렀으나 이듬해 2월 첩자의 밀고(密告)로 체포되어 금마 헌병대(金馬憲兵隊)에서 죽었다.

류영선(柳永善) 1893 (고종 30) 1961

()는 희경(橲卿), ()는 현곡(玄谷). 12세 때부터 성리학자(性理學者)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배우고, 을사국치(乙巳國恥)로 정국이 어지럽자 스승을 떠나 서해절도(西海絶島)인 계화도(繼華島), 왕등도(王嶝島), 고군산(古群山) 등지에 은거(隱居), 20여년 간 학문의 진리(眞理)를 탐구하여 구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특히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만년에 고향(故鄕)인 전북 고창 주곡리(全北高敞蛛谷里) 외화동(巍華洞) 백운산(白雲山)아래에 정사(精舍)를 건립(建立)하고 2만여 권의 책을 서장, 후진 교육(後進敎育)에 진력, 그 문도(門徒)가 천여명(千餘名)에 달했다. 고창 외화동(高敞巍華洞) 용암사(龍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지성(柳志聖) ()는 명화(明化), ()는 수당(遂堂). 항일정신(抗日精神)이 강()한 한말(韓末) 때의 의사(義士)이다.

류관순(柳寬順) 1904 (광무 8) 1930

중권(重權)의 딸, 충남 천안(天安) 출신. 1916년 이화학당(梨花學堂) 교비생으로 입학했으나 19193.1운동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귀향, 고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천안(天安)․연기(燕岐)․청주(淸州)․친천(鎭川) 등지의 학교, 교회를 방문하면서 시위운동(示威 運動)을 협의해다.

191931일 아오내(병川) 장터에서 수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행렬을 지휘하고 만세를 부르다가 진압차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공주(公州) 검사국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심법원(覆審法院)에 항소하여 서울로 호송되었다. 7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옥주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