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상곡마씨(上谷麻氏),마립(麻立),마귀(麻貴)상곡마씨조상인물,회회마씨(回回麻氏)

작성일 : 2017-04-08 19:58 수정일 : 2018-04-12 10:5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대한민국에 거주한 상곡마씨는 본디 회회마씨(回回麻氏)이다. 당(唐)나라 요(堯)임금 21년(기원전 2337년) 갑자(甲子)로부터 회회마씨 시조(始祖)인 마립(麻立)공이 회회국을 세우고 왕(王)이 되었다. 그 뒤 명(明) 나라 정덕(正德) 7년(1512)에 이르러 회회국이 망하니 마씨(麻氏) 제족 모두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오직 태자(太子) 마록(麻祿)공만 홀로 살아남아 나이 겨우 7세로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시신(侍臣)한 사람이 등에 업고 안남국(安南國)으로 도망하여 교양(敎養)을 의탁하니 안남국 왕이 기꺼이 수락하였고, 록(祿)공이 성장하면서 총명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고 기질과 품성이 넓고 활달했다. 왕은 그의 장래성을 보고 예를 갖추어 사위로 삼았는데 그 때 나이 13세였다.

마록공은 자(字)가 윤집(允執), 호(號)는 지지당(知止堂)인데 가정(嘉靖) 원년(1522)에 안남국에서 중국으로 들어가 옹주 남전부(雍州 藍田府)에 우거하면서 성자(姓字)가 같은 마(麻)씨인 제(齊)나라 대부(大夫) 마영(麻嬰)공의 후손들과 심상결의(深相結義)를 맺었다. 이리하여 하북성(河北省) 상곡인(上谷人)이 되어 비로소 벼슬을 하게 되었고, 그 뒤 다시 산서성(山西省) 대동부(大同府) 우위현(右衛縣) 한진촌(漢陣村)으로 옮겨 살면서 록(祿)공이 대동참장, 선부(宣府)부총병, 포정사(布政使)를 역임하였고, 아들 형제 금(錦)과 귀(貴)를 두었는데 둘째 귀(貴)공이 동도(東渡) 상곡마씨(上谷麻氏)의 시조이다. 그의 자(字)는 명회(溟回), 호(號)는 이천(而泉) 또는 소천(小川)이요, 시호(諡號)는 중국시호 무목왕(武穆王), 조선시호 충무후(忠武侯)이고, 배위(配位)는 남전(藍田) 윤씨(尹氏)이다.

동도 상곡마씨 시조 마귀(麻貴)공은 조선 선조(宣祖) 30년(1597)에 일본이 14만 대군으로 재침입(정유재란)했을 때 동정제독(東征提督)이 되어서 용장 36명, 철기 1천명, 기병 1만 6천명, 창두(蒼頭) 8백명 등 모두 6만 6천 여명의 구원병을 지휘하여 이 나라에 와서 뛰어난 용병술로 왜적을 토격(討擊)해 국가의 위기를 구출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선조 32년(1599) 봄에 함께 참전한 손자 사인(舍人) 암(巖)공과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명(明) 나라로 갔다가 10월에 다시 서생포(西生浦)에 와서 창표당(蒼表堂)을 세우고 창표당서문을 기록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암(巖)공은 만력 47년(1619)에 준화(遵化)유격장으로 명(明)나라 와 후금(後金)과의 싸움인 심하(深河) 전쟁에 출전하여 이어 준화총병관이 되어서 경략(經略) 양호(楊鎬)와 조선의 도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후금의 누루하치(奴兒哈赤) 군대와 맹전(猛戰)하여 공적을 세우고 이도관(二道關)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아들 도지휘동지(都指揮同知) 순상(舜裳)공은 심하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적중에 있다가 6년만에 탈출하여 돌아와 남경통판(南京通判) 호부랑중(戶部郞中) 겸 조병독량사(調兵督糧使)가 되고 천계(天啓) 7년(인조 5년 「1627」) 9월에 조병독량사로서 산동성 등주(登州)의 군량미를 배에 실고 운반하면서 감독하던 중 묘도(廟島)에서 풍랑을 만나 3일 동안 사생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황해도 풍천(豊川) 초도(椒島)에 이러르니 한배에 탄 29명은 모두 빠져 죽고 순상공만 살아 남았다. 그는 명나라가 청(淸)나라에게 멸망되어서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나라에 귀화하였다. 그는 풍천에서 홍주(洪州)를 거쳐 전남 광주군 황계면(黃界面) 룡산리(龍山里)에 이주하여 상주(尙州) 함창현감 강덕룡(姜德龍)공의 딸과 혼인하고, 4년후에 아들 봉직(蓬直)공이 태어났다.

그 뒤 조선 조정에서는 제독 마귀 공에게 충무후(忠武侯)의 시호를 내리고 총병관 마암 공에게는 정헌대부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정(忠貞)의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조정의 도움으로 요녕성(遼寧省) 태안현(台安縣)에 있는 총병관 암(巖)공의 묘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압록리로 이장하였다가 다시 경남 거창군 거창읍 동변리(東邊里) 자규산(子規山) 해좌(亥坐)로 옮겨서 수호하고 있다.

시조 마귀(麻貴)공의 10세 종손 하백(夏帛)공은 철종 원년(1850) 가을 진주(晋州)에서 합천군 가회면 오도리(吾道里)를 경유해 합천군 봉산면 거안촌(巨安村)으로 이주하였다가 철종 4년(1853) 봄에 다시 봉산면 송림(松林)1리로 옮겼다. 그 뒤 그는 시조공을 추모하는 사당을 건립하기 위하여 조정에 상소를 올리었다. 조정에서는 마제독공의 위대한 공적을 알고 철종 6년(1855) 봄부터 사당건립에 대한 지원을 하였고 또한 합천군 수령 정영기(鄭永期), 송일준(宋一儁)공과 지역 사림들의 협조를 받아 철종 7년(1856) 가을에 강덕산 아래 황강이 내려다 보이는 송림(松林)1리에 사당을 준공하고 선무사(宣武祠)란 현판을 달아 선조 임금께서 하사한 마제독 진상(眞像)과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춘․추로 향사를 올리었다.

그러다가 통정대부 하백(夏帛)공의 아들 곽산군수 두원(斗元)공이 관직을 사임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각지방을 순방하고 있을 때 순종 4년(1910)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을 발표하고 양위조서(讓位詔書)를 내린 이후 가을에 왜놈 수십명이 송림리에 와서 일본의 대업을 성공 못하도록 한 원적(怨敵)이라 하며 선무사를 불태웠다. 이때 선무사에 봉안한 유상(遺像)은 간신히 옮겨 화재를 모면하였다. 그후부터 후손들은 학식이 부족하고 소요자금을 조달할 능력이 없어 선무사를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정유재란 이후 진충보국(盡忠報國)하며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린 상곡마씨는 경남 합천군 봉산면 송림리에 시조인 충무후 제독 이천 마선생의 묘단소를 설치해 수호하고, 하사받은 영정(진상)과 위패는 상곡마씨 대종가에 봉안하고 춘․추로 숭모제를 간략하게 행하며 선생을 1세로 해서 세계(世系)를 이어가며, 본관은 중국의 관향인 상곡을 따르고 원조(元祖) 역시 상조(上租)인 회회국왕 마립(麻立)으로 하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상곡마씨는 2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상곡마씨조상인물

조선시대(朝鮮時代)

마승은(麻承恩) 자(字) 일현(日賢). 호(號) 백천(白泉), 정유재란(1597년)때 요동(遼東)에서 왜적을 방비한 총병관.

마암(麻巖) 자(字) 리광(里光). 호(號) 동천(東泉), 시호(諡號) 충정(忠貞) 정유재란에 참전하고 그 뒤 심하(深河) 전쟁에서 후금(後金)의 누루하치 군대와 맹전하다가 순절하였다.

마순상(麻舜裳) 자(字) 우수(禹繡). 호(號) 삼강(三江), 남경통판(南京通判) 호부랑중(戶部郞中) 겸 조병독량사(調兵督糧使)를 지냈으며, 천계(天啓) 7년(仁祖 5) 9월에 귀화하여 조선의 상곡마씨 조상이 되었다. 그 뒤 황해도 풍천(豊川)에서 전남 광주 용산(龍山)리로 이주하여 주민들에게 양잠사육과 목화재배 기술을 가르쳐 농가 소득증대에 기여했다.

마하백(麻夏帛) 자(字) 시가(時可). 호(號) 송호(松岵) 또는의제(宜齋), 헌종 8년(1842) 7월에 무과병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기장(機張)현감, 훈련원판관, 통정대부 후주(厚州)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공은 천품이 순후하고 자질이 정수(精粹)하여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질로 문장에 뛰어났다. 조정에서 삼(麻)은 여름 비단이란 뜻으로 하백(夏帛)이란 이름을 내리고 비단에는 베틀이 제격이라면서 경남 양산 기장(機張)현감을 제수하였다.

공은 기장현감에 부임해서 관물(官物)을 도적하여 숨기는폐단을 바로 잡고 개혁하는 절목(節目) 9개항을 제정하여 관리(官吏)와 부호(富戶)들이 바르게 실천하도록 했으며, 항상 청백리 정신으로 위민선정을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서 가난한 생활로 선무사(宣武祠)를 수호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고을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마두원(麻斗元) 자(字) 기오(基五). 호(號) 귀은(歸隱), 고종 11년(1874) 5월에 무과병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훈련원 첨정, 통정대부 곽산(郭山)군수, 강화부(江華府)중군, 어영청(御營廳)천총(千總)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광무원년(1897)에 관직을 버리고 민종식(閔宗植)과 의병 동지를 규합하고, 광무 3년(1899) 1월 1일(음력 무술(1898)년 11월 20일)에 독립협회안에 있는 역적을 색출하여 해당한 죄에 따라 처단하라는 상소를 했으며 1913년 3월에 대구 박상진(朴尙鎭), 우재룡(禹在龍), 권녕만(權寧萬), 김경태(金敬泰)동지 등과 합세하여 광복단원을 확장하였다. 그 뒤 1919년(己未)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4월 10일 봉산면 송림리 앵두만등에서 수백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의거 주모자로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끌려가 한달간 옥고를 치루고 1920년 6월 2일 별세하였다.

마기원(麻綺元) 자(字) 기호(基浩). 호(號) 성룡(聖龍), 고종22년(1885) 3월에 무과병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훈련원참군, 병마절제도위 등을 지냈다.

마형국(麻亨國 「希國」) 자(字) 준명(俊明). 호(號) 일송(一松), 통정대부 곽산군수 마두원(麻斗元)공의 맏아들로서 광무(光武) 4년(1900) 10월에 칙명(勅命)으로 통정대부 정3품부호군(副護軍)이 되었고, 그 뒤 부인 밀양인 박한재(朴漢宰) 여사와 합심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에게 자금을조달하며 광복단원확장에 적극 협조했다. 그리고 용주지역에 농업용수개발과 거창지역 광산개발사업 등에 앞장서 일 하였으며 지역 주민들의 생활불편과 억울한 일도 해결하여 주는 봉사정신이 투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