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무안박씨시조(務安朴氏),진승

작성일 : 2017-04-10 08:22 수정일 : 2018-03-04 20:4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무안박씨시조(務安朴氏 始祖) 진승(進昇)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섯째 아들인 완산대군(完山大君) 언화(彦華)의 5세손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자패주(國子祭酒)를 지냈으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무안(務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므로 후손들이 그에 살면서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무안(務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무안(務安)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서부에 위치한 지명 (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물아혜군(勿阿兮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무안군(務安郡)으로 개칭하였고, 994년(고려 혜종 1) 물량군(勿良郡)으로 고쳤으며 성종(成宗)때는 다시 무안으로 고쳐 나주에 소속시켰다.

그 후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고, 1391년(공양 왕 3) 성산극포권농방어사(城山極浦勸農防禦使)를 겸하였다가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두었다.

1895년에 군(郡)이 되었으며 1897년 무안부(務安府)로 승격, 1914년 목포부(木浦府)를 독립시키고 나머지 지방은 무안군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을 일으킨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 진승의 아들 섬(遠)이 남행(南行)하는 현종(顯宗)을 호종(區 從)하여 호종공신으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으며 문종조(文宗朝)에는 각상(各床)에 도형(圖形)되었고, 섬의 6세손 문오(文晤)는 정승(政丞)에 올라 가세(家勢)를 중흥시켰다.

한편 현감(縣監) 세렴(世廉)의 아들 의장(毅長)이 일찍이 유일재(惟一齋) 김연기(金彦璣)에게 글을 배우고 문무(文武)를 겸비했으며,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50여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의 아우 홍장(弘長)은 대구부사(大邱府使)로 황신과 더불어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가 갖은 굴욕을 받으면서도 죽기를 결심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던 현신(現身)이었다.

현령(縣令) 인호(仁毫)의 아들 인(璘)은 임진왜란 때 왕 (王)을 평양(平壤)에 호종하여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의 군기시판관을 지냈으며, 숙종(肅宗)때 시인(詩人)으로 학명이 높았던 창하(昌夏: 형조좌랑 규의 아들)는 많은 고율시(古律詩)를 남겼다.

창하의 아들 징(澄)은 숙종 때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며 청렴하기로 유명했고, 그의 아우 호(浩)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하여 예학(禮學)을 정립했으며, 백응은 명종조에서 진원현감(珍原縣監)을 지내다가 낙향(落鄕)하여 부춘동(富春洞)에 정사(正史)를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군수(郡守)를 역임했던 도욱(道郁) · 경행(敬行)과 학자(學者)로 이름난 정걸(廷杰)이 유명했고, 두성(斗星)은 한말(韓末)에 한글 점자(點字)를 창안하여 “맹인들의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안박씨는 남한(南韓)에 90,78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