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상주박씨(尙州朴氏),상주박씨시조,박언창(朴彦昌),상산박씨

작성일 : 2017-04-10 14:35 수정일 : 2018-03-04 19:05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상주(尙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서쪽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진한(辰韓)의 영토였으나 185년(신라 별휴왕 2, 고구려 고국천왕 7) 사벌국(沙伐國: 혹은 사불국)으로 독립해 오다가 신라(新羅) 첨해왕(沾解王: 제 12대 왕, 재위기간: 247 ~ 261) 때 정벌되어 상주(上州)로 고쳐 군주(君主)를 두었다.

진흥왕(眞興王)이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치고 신문왕(神文王) 때 다시 사벌주(沙伐州)로 개칭되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와서 상주(尙州)로 하는 등 많은 변천을 거쳐 고려(高麗) 성종(成宗) 때 귀덕군(歸德軍)이라 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현종 3) 다시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고쳐서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가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여 관찰사(觀察使)를 두었으며 1910년 상주군(尙州郡)으로 개칭되어 함창군(咸昌郡) 일원이 편입되었고, 1988년 시(市)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상주박씨(尙州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아들인 박언창(朴彦昌)이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다. 당시 사벌주(沙伐州)는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의 각축장(角逐場)으로 화(化)하여 경명왕은 둘째 아들인 언창을 사벌방어장(沙伐防禦將)으로 삼아 사벌주의 수호(守護)를 명(命)하자, 그는 직접 군대(軍隊)를 이끌고 견훤(甄萱)을 격퇴시킨 후 지금의 사벌동(沙伐洞)과 흔국촌(欣國村)에 방위본영(防衛本營)을 두고 병풍산성(屛風山城)․이부곡산성(吏部谷山城)․자산산성(子山山城: 일명 자양산성) 등을 축조(築造), 제반군비(諸般軍備)를 강화하여 내침하는 적과 대항하였으나, 고려가 문희(聞喜: 문경)와 고창(古昌: 안동)을, 후백제 견훤은 대야(大耶: 합천)․영천(靈川: 고령)․고울(영천)․일선(一善: 선산)을 점거함으로써 신라의 국세(國勢)는 급전쇠약해져 낙동강(洛東江) 동쪽으로 축소되었다.

그에 따라 사벌주는 본국(本國)과의 교통(交通)이 두절되고 고립상태에 빠짐으로써 언창은 918년(경명왕 2) 자립으로 사벌국(沙伐國)을 세워 국도(國都)를 사벌동(沙伐洞)과 흔국촌(欣國村)에 정(定)하고 성루(城壘: 사벌왕성) 및 궁전(宮殿)을 축건하여 둔진산(屯陣山)을 군사(軍士)의 주둔지로 수비의 완벽을 기했다.

이때 견훤과 그의 아버지인 아자개(阿慈介)가 부단히 내침함에 대하여 사벌왕은 10여년 간 항거(抗拒)하였으나 927년(경순왕 3) 9월 낙동강을 도하(渡河)하여 급습해 온 견훤 군사를 맞아 싸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항전(抗戰) 13년, 재위 11년만에 패망(敗亡)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상주박씨는 사벌왕 언창(彦昌)의 아들 욱(昱)이 고려조에서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예부상서(禮部尙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가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는데, 욱의 증손 원작(元綽)이 1040년(고려 정종 6) 서면병마도감사(西面兵馬都監使)로 수질구궁노(繡質九弓弩: 화살이 잇달아 나가게 한 장치)를 비롯한 혁거(革車)․등석포(騰石砲) 등 독창적인 무기를 제작하여 신교(神巧)함에 감탄한 왕(王)으로부터 상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성걸(成傑)은 문종(文宗)때 검교태위(檢校太尉)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하였다.

그 외 고려조에서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는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번(蕃: 시중 성걸의 아들)과 정국호사공신(靖國護社功臣)에 추봉(追封)된 회절(懷節)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회절의 아들 순충(純沖)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덕천창부사(德泉倉副使)를 역임한 아들 견(甄)과 함께 대(代)를 이어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첨의정승(僉議政丞) 원정(元挺)의 아들 전은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전법총랑(典法摠郞)에 올랐으며, 그의 아우 여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원정의 증손 안신(安臣)이 태종(太宗)때 지평(持平)으로 재직시 대사헌(大司憲)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조대림(趙大臨: 태종의 딸 경정공주의 남편)을 잡아 문초하였다가 태종이 크게 노하여 극형을 받게 되었다. 수레를 타고 형장에 끌려가면서 안신은 나졸에게 기와조각을 집어 달라고 청하자 나졸이 냉소(冷笑)하며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눈을 부릅뜨며 "네가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죽은 뒤에 원귀가 되어 반드시 너에게 먼저 해를 끼칠 것이다"하니 나졸이 두려워하며 기와조각을 하나 주워다 주니, 그는 그 기와장에 시(詩) 한 수를 썼다. <네가 직책을 잘못하였으니 죽음을 달게 받을 것이나/ 임금이 간신을 죽였다는 이름을 남길까 두렵다> 이 시를 나졸에게 주어 속히 달려가서 아뢰고 오라 하였더니 나졸이 할 수 없이 가지고 가서 대궐에 올었다.

그 때 성석린(成石璘)․하 윤(河 崙)․ 권 근(權 近) 등이 구명운동을 하여 그는 죽음을 면하고 귀양 갔다가 세종(世宗)때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이창(以昌)은 태종(太宗)때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평안감사(平安監司)에 이르렀고, 성품이 강개(慷慨)하여 바른말을 잘했다.

당시 중국으로 가는 사신(使臣)들이 평안도 고을에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건량(乾糧)을 가져가는 관습이 있어, 이창은 그 폐단을 간언(諫言)하여 이를 엄하게 다스리는 기강을 세웠다.

문종(文宗)때 평안 감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북경(北京)에 갈 때 길이 멀므로 부득이 많은 양미(糧米)를 준비해 가지고 가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돌아올 때 의주(義州)에서 잡혀 신안관(新安館)까지 오다가 밤중에 찼던 칼을 빼어 스스로 목과 배를 찔러 거의 죽게 되었다. 서장관(書狀官) 이익(李翊)이 곧 가서 보니 그는 "노신(老臣)이 본디 오명(汚名)이 없었으므로, 행여 충성을 다할까 하여 당초에 양미를 정수(定數)대로 가지려 하였던것인데 통역의 무리가 하는 말이, '지금은 마침 장마가 시작되어 팔참(八站)에 들어서서 수재를 만나 중도에 막혀서 양미가 떨어지면 굶어 죽을테니 더 가져가야 하오' 하기에, 나도 그럴까 하여 쌀 40말을 더 갖고 간 것이며, 장차 그 연유를 아뢰려 했는데 이미 국법을 범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뵈며, 동렬대신(同列大臣)들을 보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며, 또 계속하여 "의주에 도착했을 때 이 결심이 이미 정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을 호송하는 중국인들이 많았으므로 타국사람에게 알려서는 안되겠기에 여기 와서 이렇게 하게 된 것이다"하고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세종조(世宗朝)에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을 지낸 사화(士華)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인 세훈(世勳)은 중종(中宗)때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鄕里)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진력했으며, 그의 아우 세희(世熹)는 1514년(중종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여러 관직을 지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생을 마쳤다.

막내 세후(世煦)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우고 중종(中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광양현감(光陽縣監)과 공조정랑(工曹正郞)을 거쳐 명종(明宗)때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 수군 절도사를 지냈다.

예의판서(禮儀判書) 돈(惇: 상산부원군 여의 손자)의 아들 양생(良生)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고, 그의 현손(玄孫) 광보(光輔: 장사랑으로 부장을 역임)․광필(光弼: 정선 군수와 파주 목사를 역임)․광좌(光佐: 문의 현령과 선공감정을 지냄)․광우(光佑)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특히 막내 광우(光佑)는 중종(中宗)때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재령군수(載寧郡守)로서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로 봉산(鳳山)의 동선역(洞仙驛)에 귀양갔다가 돈의문(敦義門) 밖에서 죽었다.

앞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을 때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과 함께 대궐 마당에 들어가서 울부짖으니 중종(中宗)이 하교하기를 "학생들이 대궐에 들어와서 호곡한다는 것은 천고에 없는 일이다"고 하자, 여러 학생 가운데서 광우가 뛰어나와 크게 소리쳐 아뢰기를 "한(漢)나라때 관서공자(關西孔子)로 불리우던 양진(楊震)이 죄를 받을 때 태학(太學)의 학생 3천 명이 대궐을 지키며 호곡한 일은 있사옵니다마는 전하께서 오늘날 하시는 일은 정말 천고에 없었던 일이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몰아내게 하자 그는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도 옷을 찢어 머리를 동여매고 의정부 행랑에 나와 앉아서 조광조의 구명소(救命疏)를 올렸다.

광우의 아들 3형제 중 척암 김근공(金謹恭)의 제자였던 맏아들 수(受)가 주역(周易)에 능통하여 학명(學名)이 높았으며, 막내 의(宜)는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역임하여 부사(府使)를 지낸 아들 은생(殷生)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인 상주 박씨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국에 상주박씨는 25,238명이 상산박씨는 7,9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