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암박씨시조(靈岩朴氏),박항(朴恒),영암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1 14:51 수정일 : 2018-03-05 15:4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영암박씨(靈岩朴氏)는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제54대 왕, 재위기간:917~924)의 장자(長子)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忱)의 10세손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좌상(左相)을 지낸 항(恒)을 중시조(中始祖)로하여 세계(世界)를 계승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중시조 항(恒)의 아들 통(通:초명은 천흘)이 고려 명종(明宗:재위기간:117~1197) 때 관직을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영암군(靈岩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영암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영암(靈岩)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서해안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마한(馬韓)에, 삼국시대에는 백제(百濟)에 속하여 월내군(月奈郡)이라 칭하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영암군(靈巖郡)이 되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낭주군(郎州郡)이라 개칭하였다가 1096년(현종 9)에 영암군으로 복칭(復稱)되었다.

그러나 「밀양박씨족보(密陽朴氏族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는 항의 자손으로 고려 고종(高宗) 때 시위장군(侍衛將軍)에 오르고 영암군(靈岩君)에 봉해진 성제(成濟)를 영암 박씨의 관조(貫祖)로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5세손 기(璣)가 충숙왕(忠肅王)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그의 손자(孫子) 위(偉)가 우왕(禑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운봉군(雲峰君)에 추봉되고, 증손 성좌(成佐)는 목은(牧隱) 이 색(李穡)의 사위로 고려 말에 좌참찬(左參贊)을 지냈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벼슬을 마다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절의를 지켰다.

성좌(成佐)의 증손으로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한 세보(世甫)는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와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고, 김종직(金宗直)‘깅굉필(金宏弼) 등과 같은 당대의 석학(碩學)들과 교유하며 문장(文章)과 청렴으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그는 연산군(燕山君)의 난정과 간신(奸臣)의 무리인 이극돈(李克墩)·류자광(柳子光)의 전횡을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으므로 기묘사화(己卯士禍) 후에 서릿발 같은 정치인적 보복에도 화(禍)를 면할 수 있었다.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우봉 현령(牛峰縣令)을 지낸 숭산(崇山)은 세보(世甫)의 손자이자 감찰(監察) 휴(休)의 아들로 황주진관 병마절제사(黃州鎭管兵馬節制使)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크게 현달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의 맏아들인 진(榛)이 진력부위로 내금위 대장(內禁衛大將)을 거쳐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을 지냈으며, 둘째 추(楸)는 황해 도사(黃海都事)를, 막내 율(栗)은 통덕랑(通德郞)으로 학정(學正)을 역임했다.

한편 여산 군수(礪山郡守)를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올랐던 배(裴:성좌의 증손, 예조 판서 징의 아들)은 직장(直長)을 거쳐 우봉 현령(牛峰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선조(宣祖)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내금위 대장(內禁衛大將)을 지낸 희길(希吉)은 임진왜란에 공(功)을 세워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로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대길(大吉)은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으로 공신(功臣)에 올라 가문의 전통(傳統)을 지켰다.

그밖의 인물로는 효성(孝誠)과 학행(學行)으로 세인(世人)의 존망을 받았던 경상(慶祥)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상춘(尙春)이 뛰어났으며, 공조 참의(工曹參議) 기영(起榮)은 학자(學者)로 이름난 기수(箕壽)·회식(晦植)·인연(仁淵)·대식(大植) 등과 함께 문맥(文脈)을 이었고, 영식(永植)은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포천(抱川)에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의절(義節)의 전통가문인 영암 박씨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암박씨(靈岩朴氏)는 남한(南韓)에 7,25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영암박씨조상인물

박통(朴 通)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영암군(靈巖君)에 봉해졌다.

박광(朴 光) 고려 원종(元宗) 때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중(侍中)을 역임하였다.

박성제(朴成濟)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시위장군(侍衛將軍)을 지냈다.

박기(朴 璣)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박이(朴 理) 고려 충숙왕 때 판서(判書)를 지냈다.

박원빈(朴元彬)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감사(監司)를 역임하였다.

박위(朴 偉)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하였고 운봉군(雲峰君)에 추봉되었다.

박성좌(朴成佐) 조선(朝鮮)에서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였다.

박봉양(朴逢陽) 조선(朝鮮) 때 예조 참의(禮曹參議)·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박징(朴 澄) 조선에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한(朴 漢) 조선 때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세보(朴世甫) 호(號)는 팔송(八松). 조선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춘추관사(春秋館事)·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하였고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과 같은 시기에 벼슬길에 올라 청렴 결백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박배(朴 裴) 조선 때 여산 군수(礪山郡守)·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박숭산(朴崇山)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우봉 현령(牛峰縣令)·황주진관병마절제사(黃州鎭管兵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박곤산(朴崑山) 조선조(朝鮮朝)에 충청도사(忠淸都事)를 지냈다.

박율산(朴律山) 조선 때 건원릉 태봉(健元陵泰奉)을 지냈다.

박진(朴 榛) 조선(朝鮮)에서 내금위장(內禁衛將)·훈련도정(訓練都正)을 역임하였다.

박유인(朴有仁)조선조에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박장(朴 蔣) 조선(朝鮮)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집의(執義)를 지냈다.

박추(朴 楸) 조선에서 내금위장(內禁衛將)·황해도사(黃海都事)를 지냈다.

박율(朴 栗)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학정(學正)을 역임하였다.

박자형(朴自亨) 조선 때 송화 현감(松禾縣監)을 역임하였다.

박형손(朴亨孫) 조선조(朝鮮朝)에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지냈다.

박팽로(朴彭老) 조선에서 훈련판관(訓練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우(朴 祐)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박여신(朴汝信) 조선(朝鮮)에서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역임하였다.

박성룡(朴成龍)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부호군(龍釀衛副護軍)을 지냈다.

박준량(朴俊亮)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준필(朴俊弼) 자(字)는 준명(俊明). 조선조(朝鮮朝)에서 용양위 부호군(龍釀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성남(朴成楠) 조선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박인춘(朴仁春) 조선(朝鮮) 때 우봉 현령(牛峰縣令)을 지냈다.

박계백(朴啓伯) 조선조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釀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승영(朴承英) 초휘(初諱)는 명익(明益).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박두성(朴斗星) 자(字)는 이실(而實). 조선에서 승의교위 부사정(承義校尉副司正)을 지냈다.

박지문(朴之文) 초휘(初諱)는 성문(成文), 호(號)는 모현당(慕賢堂). 조선조(朝鮮朝)에 덕망있는 학자(學者)로 널리 알려졌다.

박상눌(朴尙訥) 자(字)는 내언(내言), 호(號)는 겸재당(謙齋堂). 조선 때문명(文名)있는 학자(學者)였다.

박사석(朴士碩)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박민동(朴敏東) 자(字)는 겸숙(謙叔). 조선(朝鮮)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 부호군(龍釀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기환(朴基煥) 초휘(初諱)는 성환(成煥), 자(字)는 덕유(德維). 조선조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박상원(朴相元) 자(字)는 태화(泰和). 조선 때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냈다.

박사효(朴師孝) 초휘(初諱)는 민행(敏行), 자(字)는 중눌(仲訥). 조선(朝鮮)에서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역임하였다.

박경유(朴慶裕) 자(字)는 중욱(仲郁). 조선 때 전력부위(展力副尉)·내금위장(內禁衛將)을 역임하였다.

박세검(朴世儉) 자(字)는 문경(文卿). 조선에서 훈련판관(訓練判官)·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박환(朴 桓) 자(字)는 군백(君栢).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등을 역임하였다.

박대길(朴大吉) 조선 때 훈련판관(訓練判官)을 지냈고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冊錄) 되었다.

박국길(朴國吉) 조선(朝鮮) 때 남해 현감(南海縣監)을 지냈다.

박희길(朴希吉)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원종이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冊錄) 되었다.

박우(朴 祐) 조선(朝鮮) 때 승훈랑(承訓郞)을 지냈다.

박수(朴 秀) 조선조에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박순년(朴舜年) 조선 때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역임하였다.

박정록(朴廷祿) 자(字)는 정보(廷甫), 호(號)는 양수헌(養睡軒). 조선 때의 학자로서 덕망과 학식이 높아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박인걸(朴仁傑) 조선 때 양천 현감(陽川縣監)을 역임하였다.

박태수(朴台壽) 자(字)는 덕문(德文). 조선조(朝鮮朝)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종묘령(宗廟令)을 역임하였다.

박진문(朴進文) 호(號)는 매헌(梅軒). 조선 때 학자였다.

박흥의(朴興義) 조선(朝鮮)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박종석(朴宗碩) 자(字)는 치현(致賢), 호(號)는 신암당(愼菴堂). 조선조에 교관(敎官)을 지냈다.

박태형(朴泰亨) 자(字)는 방숙(芳淑), 호(號)는 연파당(蓮坡堂). 조선 때 덕망높은 학자였다.

박경상(朴慶祥) 자(字)는 양연(良然), 호(號)는 정재당(靜齋堂). 조선에서 학문에 뜻을 두었던 학자였다.

박효근(朴孝根) 자(字)는 순집(順執).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광정(朴光廷) 자(字)는 정숙(情叔).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박광렬(朴光烈) 자(字)는 자진(子眞). 조선에서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박찬(朴 鑽) 자(字)는 도일(道一), 호(號)는 용은당(龍隱堂). 조선 때 문명있는 학자였다.

박용(朴 鏞) 자(字)는 유선(有善), 호(號)는 용암(龍岩). 조선조(朝鮮朝)에 전라도 관찰부주사(全羅道觀察府主事)를 지냈다.

박효진(朴孝進) 자(字)는 윤선(允善).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다.

박효술(朴孝述) 자(字)는 계선(啓善).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박효연(朴孝連) 자(字)는 유선(有善). 조선에서 재릉 참봉(齋陵參奉)을 지냈다.

박경인(朴慶寅) 자(字)는 양중(良仲). 조선 때 학자였다.

박종건(朴宗建) 자(字)는 영보(永輔). 조선조에 무훈련봉전(武訓鍊奉專)을 지냈다.

박상춘(朴尙春) 자(字)는 진수(進秀).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박귀익(朴貴益) 자(字)는 내창(乃昌). 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박성위(朴成位) 조선(朝鮮) 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박태징(朴泰徵)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박여상(朴梠相) 자(字)는 경여(敬汝). 조선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역임하였다.

박지경(朴祉敬) 자(字)는 유문(幼文), 호(號)는 순한당(淳翰堂). 조선조(朝鮮朝)에 문명(文名) 있는 학자(學者)로 널리 알려졌다.

박흥립(朴興立) 조선 때 훈련판관(訓練判官)을 지냈다.

박기영(朴起榮) 조선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회식(朴晦植) 자(字)는 경춘(景春), 호(號)는 만송(晩松). 조선(朝鮮)때 교관(敎官)을 지냈다.

박응규(朴應奎) 자(字)는 길보(吉甫), 호(號)는 송운(松雲). 조선 때 학자로 널리 알려졌다.

박정연(朴政淵) 자(字)는 운서(雲瑞). 조선에서 정릉 참봉(貞陵參奉)을 지냈다.

박경연(朴慶淵) 자(字)는 운상(雲祥). 조선조에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박대연(朴大淵) 자(字)는 덕오(德五), 호(號)는 금석(錦石). 조선(朝鮮) 헌종(憲宗)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박위명(朴煒明) 자(字)는 영문(永文). 조선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박면호(朴冕鎬) 자(字)는 주경(周卿), 호(號)는 서호당(西湖堂). 조선에서 교관(敎官)을 지냈다.

박기수(朴箕壽) 자(字)는 춘범(春範). 조선조(朝鮮朝)에 덕망있는 학자였다.

박원식(朴元植) 자(字)는 선지(善之).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박시형(朴時亨)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박호식(朴浩植) 자(字)는 선양(善養), 호(號)는 귀암(龜岩). 조선 때 문명(文名) 있는 학자(學者)였다.

박창식(朴昌植) 자(字)는 성원(聖元), 호(號)는 은암당(隱岩堂). 조선(朝鮮) 때 교관(敎官)을 지냈다.

박인연(朴仁淵) 자(字)는 우천(禹天), 호(號)는 일성당(日省堂). 조선조에 학자(學者)로 널리 알려졌다.

박대식(朴大植) 자(字)는 원백(元伯). 조선 때 敎官)을 지냈다.

박선(朴 鐥) 조선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박완진(朴完鎭) 자(字)는 원순(元淳), 호(號)는 부암(富岩).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박집(朴 鏶) 조선(朝鮮) 때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지냈다.

박효민(朴孝敏)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박동규(朴東奎) 자(字)는 군삼(君三), 호(號)는 천암당(泉庵堂). 조선에서 덕망있는 학자(學者)였다.

박동한(朴東瀚) 자(字)는 춘겸(春兼), 호(號)는 송운당(松雲堂). 조선조(朝鮮朝)에 문명(文名) 있는 학자(學者)로 널리 알려졌다.

박용(朴 鎔) 자(字)는 성원(聲遠), 호(號)는 송은(松隱).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박보순(朴輔淳) 자(字)는 준필(俊弼), 호(號)는 모은(茅隱).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사(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박동규(朴東奎) 자(字)는 성강(性綱), 호(號)는 해정당(海亭堂). 조선조에 학자(學者)로 명성을 떨쳤다.

박근식(朴根植) 자(字)는 자정(子貞), 호(號)는 운봉(雲峯). 조선 때 용양위 부호군(龍釀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회서(朴會瑞)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박갑민(朴甲民) 조선조에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다.

박원록(朴源祿) 조선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박근완(朴根完) 자(字)는 윤식(允植). 조선에서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하였다.

박근성(朴根盛) 자(字)는 치원(致元).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釀衛副護軍)을 지냈다.

박동근(朴東根)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박성채(朴聖采) 자(字)는 문숙(文叔), 호(號)는 소송(小松).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박용(朴 鏞) 자(字)는 상오(相五), 호(號)는 금재(錦齋). 조선조에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다.

박승렬(朴承烈) 호(號)는 금원당(錦園堂). 조선(朝鮮)에서 덕망높은 학자(學者)였다.

박성원(朴聖源) 자(字)는 성여(聖汝), 호(號)는 송헌(松軒). 조선 때 통사랑(通仕郞)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