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의흥박씨시조(義興朴氏),박을규(朴乙規),의흥박씨조상인물,박수검(朴守儉)

작성일 : 2017-04-11 20:48 수정일 : 2018-03-04 16:12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의흥박씨시조(義興朴氏 始祖) 박을규(朴乙規)는 본성(本姓)이 왕씨(王氏)로 고려의 왕족(王族)이었다.

「의흥박씨세보(義興朴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말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고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춘성 거의동(春城車衣洞)에 둔거하였다가 태종(太宗) 때 외가(外家)의 성(姓)인 박씨(朴氏)로 따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을규(乙規)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貫鄕)을 의흥(義興)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으나, 56년간의 중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후손 득서(得瑞)로부터 대(代)를 이었다.

의흥(義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군위군(軍威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의흥군(義興郡)을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안동부(安東府)에 속하게 하였고, 공양왕(恭讓王) 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현(縣)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郡)으로 승격되고, 1914년에 군위군(軍威郡)에 속한 의흥면(義興面)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득서(得瑞)의 아들 근(瑾)이 1447년(세종 2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단종(端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455년(세조 원년) 주부(主簿)에 올라 한 확(韓確)·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황수신(黃守身) 등과 더불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었고, 1464년(세조 10) 충주 판관(忠州判官)을 거쳐 성종 때 교하 현감(交河縣監)과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내고 여암 군수(靈岩郡守)로 나갔으며, 그의 아들 지홍(之洪)은 성종(成宗)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사과(司果)를 지냈다.

한편 중종(中宗) 때 충좌위 부사직(忠佐尉副司直)을 지낸 언성(彦誠:교위 질의 아들)의 아들 승종(承宗)은 통덕랑(通德郞)으로 학문(學文)과 효성(孝誠)이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때가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했다.

경심(景諶)의 아들 박수검(守儉)은 일찍이 조서윤(趙錫胤)의 문하(門下)에서 문장(文章)과 글씨를 배우고 송시열(宋時烈)에게 수학(修學)하여 현종(顯宗) 때 문과(文科)에 올랐으며,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제천(提川)에 돌아갔다가 뒤에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지낸 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에 추증되어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한 양신(良愼)과 함께 이름을 떨쳤고, 양후(良后)는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흥 박씨(義興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7,9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흥박씨조상인물

박득서(朴得瑞) 조선(朝鮮) 때 운산 유학교도(雲山儒學敎導)를 지냈다.

박근(朴 瑾) 자(字)는 자온(子溫). 1447년(세종 2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거쳐, 충주목 판관(忠州牧判官)·교하 현감(交河縣監)을 지내고 나주 목사(羅州牧使)·영암 군수(靈岩郡守)·소격서령(昭格署令)에 이르렀다.

박기(朴 琦) 조선조(朝鮮朝)에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박지홍(朴之洪)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사과(司果)를 거쳐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박질(朴 桎) 자(字)는 자산(子山).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돈용교위(敦勇校尉)에 이르렀다.

박언성(朴彦誠) 자(字)는 화보(和甫). 조선(朝鮮) 때 충좌위 부사직(忠佐尉副司直)을 역임하였다.

박언겸(朴彦謙) 자(字)는 보원(甫元). 조선 때 승의부위(承義副尉)에 올랐다.

박승종(朴承宗) 조선조(朝鮮朝)에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박응정(朴應楨) 조선 때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다.

박응상(朴應祥) 자(字)는 광세(光帶). 조선 때 순릉 참봉(順陵參奉)을 지냈다.

박호준(朴好俊) 조선조(朝鮮朝)에 첨지(僉知)·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박호선(朴好善) 자(字)는 덕호(德浩).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사직(龍釀衛副司直)을 역임하였다.

박경심(朴景諶) 자(字)는 정경(鄭卿).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박수검(朴守儉) 자(字)는 양백(養伯), 호(號)는 임호(林湖), 경심(景諶)의 아들. 어려서 조석윤(조석윤(趙錫胤)에게 문장과 서예를 배우고, 후에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修學), 육경·사자(六經四子)를 비롯한 여러 서적을 탐독하고 특히 역사에 조예가 깊었다. 1662년(헌 종 3) 진사(進士)가 되고, 167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제천(堤川)에 돌아갔다가 1694년(숙종 20)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관직에 올라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고, 이조 참판(吏曹參判)·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에 추증되었다.

박만영(朴萬英) 자(字)는 군거(君擧). 조선(朝鮮) 때 만년(晩年)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안이 첨사(安義僉使)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양욱(朴良旭) 자(字)는 여무(汝武), 사예(司藝) 수검(守儉)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追贈)되었다.

박양후(朴良后) 초명(初名)은 양상(良相), 자(字)는 중보(重甫), 호(號)는 무은(霧隱). 조선조(朝鮮朝)에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높았던 학자로 벼슬은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