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태안박씨시조(泰安朴氏),박원의(朴元義),태안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3 13:48 수정일 : 2018-03-08 10:4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태안 박씨(泰安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세자(世子)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忱)의 13세손 박원의(朴元義)를 기일세(起一世)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태안박씨족보(泰安朴氏族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을재(乙材)의 현손(玄孫)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라 상서좌복야(尙書左僕야)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9형제 중 다섯째인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 백형(伯兄)인 세흥군(世興君) 원효(元孝 : 좌정승을 지냄)의 넷째 아들 희문(喜文)을 사자(嗣子)로 맞아 대(代)를 잇게 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원의(元義)를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태안(泰安)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태안(泰安)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서산군(瑞山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성대혜현(省大兮縣) 또는 성대호현(省大號縣)이었는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소태(蘇泰)로 고치고 뒤에 소주(蘇州)로 개칭하여 부성(富城 : 서산)군(郡)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연주(蓮州 : 홍주)에 예속시켰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태안(泰安)으로 고쳤고, 1416년(조선 태종 16) 군(郡)으로 승격시켰다가 1913년 서산군(瑞山郡)에 병합되어 면(面)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2세 희문(喜文)이 고려조에서 좌정승(左政丞)을 지내고 태원부원군(泰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후 희문의 아들 보규(甫圭)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학(謔)은 신호위 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을, 손자 유(蕤)는 신호위 상장군(神號衛上將軍)을 지내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상호군(上護軍) 인추(仁抽)의 아들 문거(文巨)가 뛰어났다.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문거(文巨)는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총랑(摠郞)을 거쳐 지곡주사(知谷州事)를 지냈으며,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다가 순절하여 문하시 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로 순성부원군(蓴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비(斐)가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송경(松京) 출신으로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비는 고흥 감무(高興監務) 겸 권농병마단련판관(勸農兵馬團鍊判官)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처자(妻子)를 데리고 청산현 동면 대동리(靑山縣東面大同里)에 은거(隱居)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 신창(新昌)․예산 현감(禮山縣監)에 임명하고 그를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

한편 조선조에서 통례원 봉례(通禮院俸禮)를 지낸 상덕(尙德)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자유(自유)가 김해 교수(金海敎授)를 지냈으며, 둘째 자주(自冑)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사(訓練院判事)를 역임했다.

그외 연천 현감(漣川縣監)을 지낸 안종(安宗 : 안릉 참봉 세훈의 맏아들)과 청풍 군수(淸風郡守) 안방(安邦) 형제가 유명했고, 세적(世勣)의 아들 안도(安道)는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휘하에서 진주성(晋州城) 방어에 공을 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여러 장수들과 남강(南江)에 투신,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진주(晋州)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아들 시생(始生)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여 정 구(鄭 逑)의 문인(門人)으로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던 민(敏)과 함께 태안 박씨를 대표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안 박씨(泰安朴氏)는 남한(南韓)에 6,3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태안박씨조상인물

박희문(朴喜文) 고려(高麗) 때 좌정승(左政丞)을 지내고, 태안부원군 (泰安府院君)에 봉해졌다.

박보규(朴甫圭)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박학(朴 謔) 고려조(高麗朝)에 신호위 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을 지냈다.

박유(朴 蕤) 고려 때 신호위 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하였다.

박인추(朴仁抽) 고려에서 봉선대부(奉善大夫)로 검교흥위위상호군(檢校興威衛上護軍)을 지냈다.

박문거(朴文巨)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고려조(高麗朝)에 봉상대부(奉常大夫)로 판도총랑(版圖摠郞)․지곡 주사(知谷州事) 등을 지냈다.

박비(朴 斐) 고려(高麗)말에 고흥 감무(高興監務) 겸 권농병마단련판관(勸農兵馬團鍊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상덕(朴尙德)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지냈다.

박자주(朴自冑) 조선조(朝鮮朝)에 훈련원 판사(訓練院判事)를 역임하였다.

박인(朴 氤) 자(字)는 자복(子馥), 호(號)는 호은(湖隱). 조선에서 종사랑(從士郞)에 이르렀다.

박온(朴 氳)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박승종(朴承宗) 조선(朝鮮) 때 창신 교위(彰信校尉)로 부사용(副司勇)을 지냈다.

박세훈(朴世勳) 자(字)는 충가(忠可). 조선에서 장사랑(將仕郞)으로 안릉 참봉(安陵參奉)을 지내고,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 되었다.

박세적(朴世勣)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박세기(朴世紀) 조선에서 장사랑(將仕郞)으로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을 역임했다.

박세홍(朴世弘) 조선(朝鮮) 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박희년(朴希年) 조선(朝鮮) 때 계공랑(啓功郞)으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을 지냈다.

박희춘(朴希春) 조선조(朝鮮朝)에 지릉 참봉(智陵參奉)을 지냈다.

박안방(朴安邦) 자(字)는 의경(義卿). 조선 때 청풍 군수(淸風郡守)를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박안우(朴安宇) 조선에서 밀양 훈도(密陽訓導)를 역임하였다.

박안도(朴安道) ? ~ 1593 (선조 26)

자는 유경(由卿).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향의 유함(兪晗)․이욱(李郁)과 함께 의병을 모아 유 함을 대장으로 추대,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휘하에서 진주성(晋州城)을 수비했다.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 순절(殉節)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追錄),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추증(追贈),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박민(朴 敏) ? ~ 1603 (인조 8)

자는 행원(行遠), 호는 능허(凌虛). 정 구(鄭 逑)의 문인. 장현광(張顯光)․김우옹(金宇顒) 등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여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후 진사(進士)가 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 의병장(義兵將)으로 싸우다 상주(尙州)에 이르러 화의가 성립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 진주(晋州)의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시생(朴始生) 조선에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박승명(朴承明)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