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금성범씨시조(錦城范氏),범승조(范承祖),금성범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5 17:25 수정일 : 2018-03-22 12:0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범씨(范氏)는 중국(中國) 고평(高平 : 산 서성 기영도에 속해있는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원(元)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범승조(范承祖)가 고려(高麗) 충렬왕비(忠烈王妃)인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하여 나주(羅州)에 터를잡은 것이 우리나라 범씨의 시초가 된다.

그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학자(學者)로서 고령에 올 때 북송(北宋)의 대학자(大學者) 정이천(程伊川)이 지은「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사서집주 (四書集註)」․「백가예설(百家禮說)」등 많은 문헌을 가지고 들어와 널리 보급했으며, 그의 아들 유수(有脽)가 충숙왕(忠肅王)때 문하 시랑(門下侍郞)으로 여진 정벌(女眞征伐)에 공(功)을 세워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금성으로 삼게 되었다.

범씨의 본관(本貫)은 금성(錦城)․광주 (光州)․안주(安州)등 3본이 문헌에 전해 지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현재는 금성범씨 단본(單本)으로 하고 있다.

금성(錦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중서부(中西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을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에 경덕왕(景德王)이 금성(錦城 : 일명 금산)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1011년(고려 현종 2) 거란(契丹)의 2차 침입때 현종(顯宗)이 이곳에 피난갔다가 돌아와 목(牧)으로 승격되고, 조선(朝鮮) 세조(世祖)때 진(鎭)을 두었으며, 1981년 7월에 영산읍과 나주읍을 통합하여 금성시 (錦城市)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호남(湖南)의 선비 가문으로 일컬어진 금성 범씨는 시조의 증손(曾孫) 세동(世東) 이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함께 개성(開城) 근처 두문 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그의 학문과 인품을 아껴 여러차례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며, 태종(太宗)은 대사성(大司成)을 제수하여 뜻을 같이 할 것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나주로 낙향 하여 은거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의 6세손 가용 (可容)․가종(可鍾) 형제와 전창(傳昌)․천배(天培) 부자(父子)가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뛰어난 학문과 고명한 인품으로 호남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천배(天培)의 손자 기생(起生 : 만암 홍로의 맏아들)과 기봉(起鳳) 형제는 임진 왜란때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고종후(高從厚)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晉州成)싸움에서 장렬하게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이조 참의(吏曹 參議)와 좌승지(左承旨)추증되어 충절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외 후손 경문(慶文)이 영조(英祖)때17세로 <사문(辭文)>을 지었고, 순조 (純祖) 때는「검암산인시집(儉巖山人詩 集)」을 저술하여 문벌가문(文伐家門)의 전통을 지켰으며, 임헌회(任憲晦)의 문하 (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한 양성당(養性堂) 윤덕(潤德)은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훌륭한 인재(人才)를 많이 배출시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인 구

근대에 와서 금성범씨는 광주(光州)를 비롯한 전라도와 서울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당시 1,373명, 1975년에는 243가구로 집계되었으며, 2015년에는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3,6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금성범씨조상인물

범유수(范有脽)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고려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다.

범후춘(范後春) 호(號)는 후재(後齎). 고려때 통례문 통찬(通禮門通贊)을 지냈다.

범세동(范世東) 자는 여명보(汝明甫), 호는 복애(伏崖), 시호는 문충(文忠). 공민왕때 덕녕부윤(德寧府尹)․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지냈고, 고려가 망해감을 보고만수산(萬壽山)에 은거하고, 조선개국 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널리 퍼뜨렸다. 개성(開城)의 표절사(表節祠)․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光州)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졌다.

범정(范 程) 자는 인촌(仁村), 호는 후애(後崖).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범석희(范錫熙) 자는 승락(丞洛), 호는 운애(雲崖). 고려 때 참지(參紙)를 지냈다.

범가용(范可容) 호(號)는 학봉(鶴峰).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유명(有名)하였다.

범가종(范可鍾) 호(號)는 만취당(娩翠堂). 조선(朝鮮)에서 검상(檢祥)을 지냈다.

범전창(范傳昌) 자(字)는 준학(埈學), 호(號)는 심암(心菴).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범천배(范天培) 자(字)는 근심(根深), 호(號)는 용계(龍溪). 조선조(朝鮮朝)에 학자 (學者)로 후진 교육(後進敎育)에 힘썻다.

범순(范 淳) 호(號)는 송와(松窩).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다.

범기생(范起生) 자(字)는 원보(元甫), 호(號)는 죽천(竹川). 성혼(成渾)의 문인(門人). 지용(智勇)이 절륜(絶倫)하고 충의심(忠義心)이 투철하였다.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고종후(高從厚)와 함께 창의(倡義)하여 진 주(晉州) 싸움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 선무 원종훈(宣武原從勳)에 오르고, 광주(光州) 복룡사(伏龍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범기봉(范起鳳) 자(字)는 원유(元有), 호(號)는 성와(省窩). 1592년(선조 25) 임진 왜란(壬辰倭亂)때 형(兄) 기생(起生)과 함께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 하였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追贈),광주(光州) 복룡사(伏龍祠)에 제향 되었다.

범태운(范泰雲) 자(字)는 준태(埈泰), 호 (號)는 죽계(竹溪).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범진후(范振厚) 자(字)는 군평(君平), 호(號)는 양성재(養性齋). 조선(朝鮮)의 의사(義士)로 명성을 떨쳤다.

범양환(范亮煥) 자(字)는 혜일(惠一), 호(號)는 만회(晩悔). 조선때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지냈다.

범석보(范碩普) 자(字)는 명거(明擧), 호(號)는 전재(全齋). 조선(朝鮮) 때 효자 (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았다.

범석인(范碩仁) 자(字)는 중숙(仲淑), 호(號)는 운재(雲齋). 조선조에 시부(詩賦)에 능(能)하였고 경학(經學)에 정통(精通) 하였으며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범기호(范淇浩) 자(字)는 상삼(相三), 호(號)는 휼애당(恤愛堂). 경의(經義)에 박통(博通)하였고, 성품(性品)이 인자(仁慈)하여 기사흉년(己巳凶年)에 경재휼빈(傾財恤貧)하였다.

범재준(范再駿) 자(字)는 인헌(仁憲), 호는 심재(心齋). 조선(朝鮮)때 학자(學者)였다.

범윤덕(范潤悳) 자(字)는 덕중(德重), 호(號)는 양성당(養性堂). 조선조(朝鮮朝)에 학자(學者)로 유명(有名) 하였다.

범윤기(范潤琦) 자(字)는 찬도(贊道), 호(號)는 서헌(瑞軒).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