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경주빙씨시조(慶州冰氏),빙여경(冰如鏡),경주빙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7 15:04 수정일 : 2018-04-17 11:4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우리나라 빙씨(冰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명(明)나라 출신인 빙여경(冰如鏡)이 1465년(명나라 헌종 성화 1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연학사(文淵學士)와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내각한림(內閣翰林)에 이르러 1467년(세조 13) 왕명(王命)으로 8학사와 더불어 동래(東來)하여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경주빙씨족보(慶州冰氏族譜)」에 의하면 세조(世祖)가 그를 국빈(國賓)으로 예우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벼슬을 내린 후 경주부원군(慶州府院君)에 봉했으므로 관향(貫鄕)을 경주(慶州)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 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 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경주(慶州)를 단본(單本)으로 하는 빙씨(冰氏)는 그후 시조 여경의 아들 청(淸)이 1507년(중종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거쳐 강동 부사(江東府使)로 나갔다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규현(奎 鉉)이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중화 부사(中和府 使)를 거쳐 황해도 수사(黃海道水使)를 지냈고, 차남 규서(奎서)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조선 선조(宣祖) 때 등과(登科)했던 성의(珹儀 : 시조 여경의 현손)는 교리(校理)와 문천 군수(文川郡守)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올라 가문(家門)의 전통을 이었으며, 그의 아들로 선조 때 덕원 부사(德源府使)를 지낸 홍일(弘日)과 삼척 부사(三陟府使) 겸 영장(榮將)으로 무명(武名)을 떨쳤던 황일(璜一)이 유명했다.

한편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에 급제한 신민(信敏 : 부사 황일의 아들)은 응교(應校)를 시작으로 벼슬에 나가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치적(治績)을 올렸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한익(漢益)과 예봉(禮鳳) 부자(父子)가 이름났다.

그외 삼척 영장(三陟營將)을 지낸 주서(珠瑞 : 두익의 아들)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올랐던 여옥(麗玉)이 유명했고, 호조 참판(戶曹參判) 상택(祥澤)은 동부승지(同副承旨) 종문(種汶), 예조 좌랑(禮曹佐郞) 종찬(鍾瓚),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종박(鍾博)․병순(炳淳) 등과 함께 경주 빙씨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빙씨(慶州氷氏)는 남한(南韓)에 7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경주빙씨조상인물

빙청(冰 淸) 자(字)는 사명(思明), 호(號)는 동계(東溪), 시호(諡號)는 충경(忠敬). 1507년(중종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정언(正言)․강동 부사(江東府使)․좌승지(左承旨)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빙규현(冰奎鉉) 자(字)는 중여(重汝), 호(號)는 소계(小溪), 시호(諡號)는 무의(武毅). 1532년(중종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중화 부사(中和府使)․황해 수사(黃海水使) 등을 역임하였다.

빙규서(冰奎鉏) 자(字)는 보여(寶汝), 호(號)는 한어(漢漁). 조선조(朝鮮朝)에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역임하였다.

빙경(冰 瓊) 자(字)는 광형(光炯), 호(號)는 후계(後溪). 조선(朝鮮) 때 음직(蔭職)으로 금천 군수(金川郡守)를 지냈다.

빙진(冰 瑨) 자(字)는 광지(光之), 호(號)는 한사(漢沙). 조선조(朝鮮朝)에 음직(蔭職)으로 장령(掌令)․덕원 부사(德源府使)을 역임하였다.

빙형(冰 珩) 조선조(朝鮮朝)에 춘천 부사(春川府使)을 역임하였다.

빙구(冰 球) 조선 때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빙성의(冰城義) 자(字)는 윤수(允秀), 호(號)는 삼사재(三思齋). 1576년(선조 9)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교리(校理)․문천 군수(文川郡守)을 거쳐 좌승지(左承旨)을 역임했다.

빙여의(冰呂義) 자(字)는 양수(陽秀), 호(號)는 직암(直庵).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을 지냈다.

빙황일(冰璜一) 자(字)는 호중(浩中), 호(號)는 의헌(毅軒). 1597년(선조 30)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삼척 부사(三陟府使) 겸 영장(榮將)을 지냈다.

빙계일(冰啓一) 조선(朝鮮) 때 진사(進士)였다.

빙기일(冰琪一) 조선에서 군수(郡守)을 역임하였다.

빙신민(冰信敏) 자(字)는 운직(云直), 호(號)는 돈수(遯叟). 1612년(광해군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응교(應校)․안주 목사(安州牧使)을 역임하였다.

빙한익(冰漢益) 자(字)는 하섭(河涉), 호(號)는 쌍귀암(雙龜庵).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빙창민(冰昌敏) 조선에서 참봉(參奉)을 지냈다.

빙예봉(冰禮鳳) 자(字)는 문현(文見), 호(號)는 명계(明溪). 조선조(朝鮮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빙주서(冰珠瑞) 조선때 삼척 영장(三陟營將)을 역임했다.

빙창옥(冰昌玉) 자(字)는 문여(文汝), 호(號)는 귀운(龜雲). 조선(朝鮮)에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다.

빙여옥(冰麗玉) 자(字)는 옥여(玉汝), 호(號)는 덕헌(德軒).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부호군(龍양衛副護軍)에 이르렀다.

빙수덕(冰洙德) 자(字)는 덕견(德堅), 호(號)는 애일헌(愛日軒). 조선조(朝鮮朝)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빙득천(冰得天) 자(字)는 여청(汝淸), 호(號)는 죽계(竹溪).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되었다.

빙상택(冰祥澤) 자(字)는 내백(乃白), 호(號)는 명헌(明軒). 조선(朝鮮)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빙종문(冰鍾汶) 자(字)는 화인(華仁). 조선조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

빙종찬(冰鍾瓚) 자(字)는 대언(大彦), 호(號)는 신암(信菴). 조선에서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빙종박(冰鍾博) 자(字)는 덕현(德鉉). 조선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빙병순(冰炳淳) 자(字)는 병렬(炳烈), 호(號)는 화운(華雲). 조선(朝鮮)에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