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이천서씨,이천서씨시조,서신일

작성일 : 2017-04-17 18:17 수정일 : 2018-01-03 11:00

득성 연원

서씨(徐氏)라는 성()을 얻게 된 연원은 하나의 정설로 굳히지 못하고 세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즉 기준설(箕準說), 여수기설(余守己說), 여융설(餘融說)이 그것이다.

(1) 기준설은 기자의 40세손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천(利川)의 서아성(徐阿城)에서 살았으므로 그 후손들이 그 지명을 따서 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2) 여수기설은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예맥(濊貊)의 추장인 여수기(余守己)의 아홉 아들이 각기 여러 고을의 장()이 되어 많은 치적을 쌓았으므로 백성들이 여() 자에 중인변(?)을 붙여서 서()씨의 성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3) 여융설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왕자인 융()이 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금자광록대부의 벼슬을 받고 여()자를 서()자로 고쳐 썼다는 설이다.

이천서씨(利川徐氏)는 일반적으로 기준(箕準)설을 따르고 있다.

이천서씨시조에 얽힌 설화

서씨의 대종(大宗)인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시조인 서신일(徐神逸)은 신라 효공왕(孝恭王: 신라 제 52대왕으로 재위기간은 897~912) 때 벼슬이 아간(阿干: 이제현의 익재남고에 의하면 왕족이 아닌 일반인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인 6두품)에 이르렀으나 신라의 국운이 다함을 예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利川)의 효양산(孝養山) 기슭에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스스로 처사(處士)라 칭하고 후진을 훈도하면서 여생을 지냈다.

나이 74세에 상처하고 외로히 지내니 아우 신통(神通)이 그의 아들 목()으로 양자로 들이기를 청함에 공이 가로되 천륜(天倫)을 빼앗음은 인정(人情)이 아니다하고 끝까지 듣지 않으니 제자들이 간()하기를 재취하여 농장(弄璋: 득남)을 기도하심이 좋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합천 홍찬(洪贊)의 딸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느날 산곡간에서 지팡이를 짚고 거닐고 있었는데 홀연히 사슴이 화살을 맞고 달려오므로 화살을 뽑고 약을 바르고 짚 덤불에 숨겨주었다. 사냥꾼이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얼마 있다가 사슴을 자연으로 돌려주었다. 그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그대가 살려준 사슴은 나의 아들이라, 그대가 살려주었으니 마땅히 그대의 자손으로 하여금 정승이 대대로 있게 하여 은덕에 보답하리라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곧 태경(胎慶)이 있어 나이 80에 한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2세조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이러헌 기록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등에 전한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천서씨는 남한에 199,7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