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7-04-18 01:35 수정일 : 2018-04-19 12:1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섭씨(葉氏)는 중국(中國) 남양(南陽 : 하남성 여남도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송나라 고종(高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섭공제(葉公濟)가 장차 정란(政亂)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주 잠(朱 潛)․조 창(趙 昶)․진조순(陳祖舜)․주세현(周世顯)․유응규(劉應奎)․두행수(杜行秀)․도성하(陶成河) 등 7학사(七學士)과 더불어 동래(東來)하여 전라도 금성(全羅道錦城)으로 들어와 능주(綾州)를 거쳐 담양(潭陽)에 이거(移居)한 것이 우리 나라 섭씨(葉氏)의 시초(始初)가 된다.
그후 고려 고종(高宗)이 그에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의 벼슬을 내렸으나 불취했고, 원(元)나라 사신(使臣)이 그의 종적을 탐색하므로 화(禍)를 피하여 경상도 경주 연해(慶尙道慶州沿海)를 지나 강원도 강릉 인계(江原道江陵仁溪)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하니 세인들은 그를 만오선생(晩悟先生)이라 일컬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 공제(公濟)가 처음 들어온 담양(潭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선조(宣祖)들의 직첩(職牒)과 예조(禮曹)에 제출한 입안(立案) 등 모든 문서(文書)에 관향(貫鄕)이 경주(慶州)로 기록 되어 있어 본관을 경주(慶州)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 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 사로(斯盧), 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 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섭씨의 본관은 경주 외에도 공촌(公村 : 수원지방)․처인(處仁 : 용인지방)․회미(澮尾 : 옥구지방)․인의(仁義 : 태인지방)․니파산(泥波山 : 만경지방)․해평(海平 : 선 산지방)․충주(忠州) 등 7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경주 섭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인물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섭씨는 시조의 아들 근실(根實)이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지종성군사(知鍾城郡事)를 역임했고, 손자 후춘(後春)은 충선왕(忠宣王) 때 등과(登科)하여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충숙왕조(忠肅王朝)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일장(日長 : 사헌부 규정 후춘 의 아들)은 함주 별장(咸州別將)이 되어 말갈(靺鞨)의 침입을 토벌하는데 선봉장(先鋒將)으로 나가 성무산(城茂山)에서 대첩(大捷)을 거두고 정순대부(正順大夫)로 의흥위 대호군(義興衛大護軍)에 올라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의 칭호와 함께 담양(潭陽)과 강양(江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아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민수(敏秀)는 충목왕(忠穆王) 때 효행 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에 판전객시사(判典客시事)를 지냈던 기량(起良 : 민수의 맏아들)은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이를 개탄하여 김용장(金用莊) 등 7인과 함께 성거산(聖居山)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키니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팔판사동(八判事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기량(起良)의 현손 평중(平仲 : 공주 판관 찬의 아들)이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가 단종(端宗)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같이 오대산(五臺山)에 올라가 영월(寧越)을 향해 망배(望拜)하며 통곡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천지(千枝)는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등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 겸 지제교(知製敎) 에 특별히 기용되었다.
그외 문정왕후(文貞王后)의 수렴청정(垂廉聽政)으로 권신들의 전횡이 심해 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산수(山水)를 편력했던 죽림거사(竹林居士) 취영(翠永)과 아버지의 병환 때 손가락을 깨물어 간호했던 장권(章權)이 유명했고, 방화(芳華)는 순조(純祖) 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여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농기(濃起), 비서원승(秘書院丞) 농환(濃煥) 등과 함께 경주 섭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섭씨(慶州葉氏)는 남한(南韓)에 7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경주섭씨조상인물
섭근실(葉根實) 자(字)는 태연(泰然). 1291년(충렬왕 17) 문과(文科)에 급제,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지종성군사(知鍾城郡事)를 역임했고, 선정(善政)을 칭송하는 비(碑)가 세워졌다.
섭후춘(葉後春) 자(字)는 중원(仲元), 군사(郡事) 근실(根實)의 아들. 1313년(충선왕 5) 문과(文科)에 급제,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을 지냈다.
섭일장(葉日長) 1310 (충선왕 2) ~ 1350 (충정왕 2)
자(字)는 윤여(潤餘),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 후춘(後春)의 아들. 1335년(충숙왕 복위 4)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함주 별장(咸州別將)으로 나가 때마침 관북(關北) 지방에 대거 침입한 말갈(靺鞨)의 병력을 물리치는데 선봉장(先鋒將)으로 공(功)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의 호(號)과 함게 정순대부(正順大夫)로 의흥위 대호군(義興衛大護軍)에 올라 강양(江陽)과 담양(潭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았다.
섭민수(葉敏秀) 자(字)는 신유(愼有), 호(號)는 취죽헌(翠竹軒). 1346년(충목왕 2) 진사(進士)에 합격,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당시의 풍습이 부모의 상기(喪期)를 짧게 치렀는데 그는 부모상에 3년을 여막에서 치르면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엄수했다.
섭기량(葉起良) 자(字)는 낙선(樂善), 호(號)는 송암(松菴). 고려말에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내다가 고려의 운이 다함을 비관, 김용장(金用莊) 등 7인과 함께 성거산(聖居山)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키니 후인(後人)들이 그곳을 팔판사동(八判事洞)이라 일컬었다.
섭인(葉 寅) 자(字)는 명수(明壽), 호(號)는 매와(梅窩). 조선 때 좌령호군(左領護軍)을 지냈다.
섭문(葉 汶) 자(字)는 화준(華俊). 조선조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섭찬(葉 贊) 자(字)는 극지(克之), 호(號)는 미산(薇山).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섭평중(葉平仲) 자(字)는 선익(善益), 호(號)는 국사(菊史).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분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단종(端宗)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같이 오대산(五臺山)에 올라 영월(寧越)을 향해 망배하며 통곡했다. 승정원 우승지 (承政院右承旨)에 추증되었다.
섭천지(葉千枝) 자(字)는 문현(文賢), 호(號)는 만취당(晩翠堂). 1485년(성종 16) 진사(進士)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등 여러 내외직을 역임하다가 연산군(燕山君) 때 정치가 문란함을 개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특별히 기용되어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겸 지제교(知製敎)에 올랐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섭취영(葉翠永) 자(字)는 공측(公測), 호(號)는 죽림거사(竹林居士). 1545년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문정왕후(文貞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됨을 이용하여 권신들이 권력을 멋대로 부리므로 장차 사화(士禍)가 일어날 것을 예견, 영달(榮達)을 단념하고 담양(潭陽)으로 남하하여 산수를 편력하다가 무령(武靈 : 영광)의 삼계(森溪)에 정착했다.
원향(原鄕)인 강릉(江陵)이 천여리가 되므로 자주 내왕하지 못하고 집 뒷산에 망향이대(望鄕二臺)를 쌓아 매달 삭망마다 올라가서 강릉(江陵)을 바라보고 내려왔는데 현재도 그 터가 남아있다. 노직(老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첩이 내려졌다.
섭홍윤(葉弘允) 자(字)는 윤선(潤宣).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섭봉윤(葉奉允) 자(字)는 세삼(世三).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섭장권(葉章權) 자(字)는 종범(鍾凡), 호(號)는 모와(慕窩). 효성이 출천하여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잘 받들었다. 아버지의 병환 때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려 3일간 연명시키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전후 6년을 여막에서 거상(居喪)했다. 나이 60이 넘도록 성묘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아서 유림의 공의로 여러 차례 천거했다.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첩이 내리고, 1875년(고종 12) 정려와 복호(復戶)의 은전이 내렸다.
섭도동(葉都東) 자(字)는 득지(得知), 호(號)는 죽헌(竹軒),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장권(章權)의 아들. 어려서부터 학문(學問)과 효우(孝友)가 뛰어나 추앙을 받았으나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뜨니 사우(士友)가 심히 애석하게 여겼다.
그의 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남편이 병석에 눕자 정한수로 하늘에 치성드리고, 다리의 살을 도려내어 죽을 끓여 먹이는 등 백방으로 병간호를 하다가 남편이 죽자 상기(喪期)를 마친 후 유서를 안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사림(士林)에서 수 차례 포양(褒揚)했고, 고종(高宗) 때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섭무신(葉茂新) 자(字)는 격민(激民), 호(號)는 화전(禾田).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섭경국(葉景國) 자(字)는 보일(甫一). 조선(朝鮮) 순조조(純조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섭방화(葉芳華) 자(字)는 이선(以善), 호(號)는 애련거사(愛蓮居士). 조선(朝鮮) 순조(純祖)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섭농엽(葉濃燁) 자(字)는 광서(光瑞), 호(號)는 만운(晩雲). 선영을 위한 정성이 지극하여 8대조 장권(章權)의 효행과 7대조모 인동장씨(仁同張氏) 부인의 열행(烈行)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고종(高宗)이 행차하는 연 앞에서 쟁을 치고 진정하여 정려의 특명을 받았다.
섭농기(葉濃起) 자(字)는 광인(光仁). 조선(朝鮮)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섭농영(葉濃影) 자(字)는 춘수(春守). 조선(朝鮮) 고종조(高宗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섭농환(葉濃煥) 자(字)는 영수(永壽), 호(號)는 일신재(日新齋). 조선조(朝鮮朝)에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역임하였다.
섭해모(葉海模) 자(字)는 정언(正言). 조선(朝鮮) 때 외부주사(外部主事)를 지냈다.
섭송모(葉松模) 자(字)는 동식(東植), 호(號)는 창애(蒼崖). 한말(韓末) 때 중학교(中學校) 교관(敎官)을 지냈고, 한일합방 후 일제가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물리치고 호적(戶籍) 편제도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