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비안손씨시조(比安孫氏),손을구(孫乙口),비안손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8 16:11 수정일 : 2018-04-19 11:4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비안손씨(比安孫氏)는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 구례마(俱禮馬)의 후손(後孫)으로 전하나 고증(考證)할 자료가 없으며, 시조(始祖)는 고려 때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한 손을구(孫乙口)로 보첩(譜牒)에 기록되어 있다.「병산손씨세보(屛山孫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약관(弱冠)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북변(北邊)에 침입한 외적(外敵)을 토벌(討伐)하는데 훈공(勳功)을 세워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다고 한다. 그러나 병란(兵亂)으로 인하여 상계(上系)의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조선 세조(世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도총관(都摠管)을 지내고 비안(比安)의 도락촌(道樂村)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한 안무(安懋)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본관(本貫)을 비안(比安)으로 하게 되었다.

비안(比安)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비옥(比屋)과 안정(安貞) 두 현(縣)의 합명(合名)인데, 비옥현(比屋縣)은 본래 신라(新羅)의 아화옥현(阿火屋縣)을 경덕왕(景德王) 때 비옥현으로 개명하였다. 한편 안정현(安貞縣)은 본래 신라의 아시혜현(阿尸兮縣)을 경덕왕이 안현현(安賢縣)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기에 안정현으로 개칭한 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두 현을 합해서 비안현이라 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그 후 현서면(縣西面)은 예천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의성군에 병합되어 지금은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이 되었다.

그후 비안 손씨는 도총관 안무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顯達) 하여 가문(家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

조선 세조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평시서령(平市署令)을 지낸 상(庠)은 목민관(牧民官)에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대서성(大司成)을 지낸 식(湜 : 일세조 안 무의 손자)과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도사(都事)를 역임한 조의 형제가 유명했다.

한편 음관(蔭官)으로 부사직(副司直)에 올랐던 승렬(承烈)의 아들 새(璽)는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으며, 증손(曾孫) 윤업(胤業)이 뛰어났다.

일찍이 고응경(高應擎)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닦았던 윤업은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생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 준(李 埈) 등과 함께 도의(道義)를 교유하며 예학(禮學)을 강론(講論)하여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그의 둘째 아들 계창(啓昌)이 봉렬대부(奉烈大夫)로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에, 셋째 이창(以昌)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각각 추증되어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그 외 익진(翼振 : 극창의 현손)의 아들 흥조(興祖)가 순조(純祖)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러 벼슬을 사임하고 향리(鄕里)로 돌아와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귀와(龜窩) 김 굉(金 宏) 등과 더불어 예학(禮學)을 강론(講論)하며 여생을 보냈고, 통덕랑(通德郞) 덕항(德恒)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쳐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비안손씨(比安孫氏)는 남한(南韓)에 2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비안손씨조상인물

손홍(孫 弘) 조선조(朝鮮朝)에 생원(生員)을 지냈다.

손휴(孫 庥)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역임하였다.

손상(孫 庠) 조선 세조조(世祖朝)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평시서령(平市署令) 재직때 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손식(孫 湜) 조선(朝鮮) 때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손조(孫 澡) 조선조에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손승렬(孫承烈) 조선 때 음직(蔭職)으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손준(孫 晙) 조선조(朝鮮朝)에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손새(孫 璽) 조선에서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다.

손경지(孫景智) 자(字)는 명숙(明叔).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르고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손윤업(孫胤業) 자(字)는 자술(子述), 호(號)는 허제(虛齊).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었고 예학(禮學)에 밝은 학자였다.

손계창(孫啓昌) 자(字)는 경보(慶輔). 조선(朝鮮) 때 봉렬대부(奉烈大夫)로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에 추증(追贈)되었다.

손이창(孫以昌) 자(字)는 성보(盛甫). 조선(朝鮮) 때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손흥조(孫興祖) 자(字)는 창숙(昌叔), 호(號)는 만와(晩窩). 1804년(순조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이어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손홍조(孫弘祖) 조선조(朝鮮朝)에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손덕항(孫德恒)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오르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