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남양송씨시조(南陽宋氏),송규(宋奎),송제(宋悌)

작성일 : 2017-04-18 18:47 수정일 : 2018-02-27 14:27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源)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의 당성군(唐城郡)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수주(水州: 수원)와 인주(仁州: 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조(朝鮮朝)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대부면은 부평군(富坪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그 후 수원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었으며, 후에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수원읍은 수원시(水源市)로 승격되었다.

남양송씨시조(南陽宋氏) 始祖) 송규(宋奎)는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난신(亂臣)의 참소를 입고 926년(후당 명종 원년, 신라 경애왕 3) 동료 7학사(七學士)와 함께 동래하여 경순왕(敬順王)의 후대(厚待)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며 기울어가는 국운(國運)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혼신을 다했으나 마침내 신라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남양 송주동(南陽宋主洞:화성군 남양면 송림리)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송규(宋 奎)를 시조로 받들고 남양(南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 말에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내고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진 세보(世輔)를 파조(派祖)로 하는 도촌파(道村派)와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으로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오른 공절(公節)을 파조로 하는 안서파(上西派)로 각각 종파(宗派)를 이루어 기일세(起一世)하여 왔으며, 그후 안서파 공절의 증손인 천생(天生)의 아들로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낸 안례(安禮)를 파조로 하는 서호파(西湖派)로 갈라져서 남양송씨의 3대 인맥(人脈)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남양군 세보(世輔)의 아들 경화(景華)가 고려조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손자 백문(伯文)은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문하시랑 (門下侍郞)을 지낸 공절(公節)의 아들 침(琛)과 손자 인(寅)이 유명했다.

천성(天性)이 온후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했던 침(琛)은 문과에 급제하여 감사(監司)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남양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인(寅)은 공양왕(恭讓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개성 두문동(開城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후에 경북 고령(高靈)의 송림촌(松林村)에서 은거하면서 은행나무를 심고 호(號)를 행정(杏亭)이라 하며 평생동안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낸 천생(天生: 인의 아들)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한 세충(世忠:천생의 현손)이 유명했으며, 천생의 현손(玄孫) 승주(承周)의 아들 6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15세 때 경사(經史)를 읽어 주위를 놀라게 했던 인(仁: 승주의 맏아들)은 예도(禮道)에 밝아 유교(儒敎) 활동에 기여했으며 벼슬은 내금위(內禁衛)에 머물렀다. 한편 인(仁)의 아우로 무과(武科)에 급제한 지(智)는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가 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염(恬), 족인(族人) 선(瑄)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여 흥양현(興陽縣)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송제(悌)는 선조(宣祖) 때 봉 상시 첨정(奉常寺僉正)에 천거되어 남포(藍浦)와 당진 현감(唐津縣監)을 지낸 명장(名將)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휘하에 2백 명을 거느리고 영남(嶺南) 일대에서 전공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치고, 절도사(節度使) 황 진(黃 進) 장군과 합류하여 진주성(晋州成)을 지키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비장한 각오를 하고는 조카 덕린(德 麟:지의 아들)과 덕이(염의 아들)를 시켜 <내 몫까지 부모님 잘 모셔주시옵고 나의 뼈를 촉석루 아래에 거두어 주십시오> 라는 편지를 형님에게 부친 다음 왜적과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왜적들도 이 제(悌)의 충절에 감탄하여 “참다운 의사(義士)”라 하며 그의 시신을 거두어 진주성(晋州城) 남쪽에 가매장하고 “조선의사 송제의 무덤” 이란 표찰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선조(宣祖)로부터 “용호장군(龍虎將軍)”이란 호를 하사(下賜)받았던 덕일(德馹: 인의 아들)은 제(悌)의 조카로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갈 때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했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진도군수(珍島郡守)로서 당포대첩(唐浦大捷)에 일등공훈을 세웠으며,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있을 때는 정병 7백을 이끌고 심하(深河)의 여진족 (女眞族)을 토벌하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에 올랐으나 여진(汝眞)의 잔당 고면을(古丏乙)의 야습에 분전하다가 이마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고향에 충신정려(忠臣旌閭)가 세워졌다.

그밖의 인물로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회령포(會寧浦)에서 조전(助戰)하고 좌수영(左水營)으로 적을 추격하여 당사도(唐笥島)와 칠산해(七山海)에서 적선(敵船)을 대파시켰던 영(瑛: 응상의 아들)의 노량(露梁) 싸움에서도 대승을 거두어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구(球)도 병란에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으로 고금도(古今島)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어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인 구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양송씨(南陽宋氏)는 남한(南韓)에 총 4,104가구, 18,7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11,04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