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연일승씨시조(延日承氏),승개(承愷),연일승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1 14:07 수정일 : 2018-04-10 14:55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연일승씨(延日承氏)의 시조는 승개(承 愷)는 고려 정종(靖宗 : 제10대 왕, 재위기간 : 1034 ~ 1046)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내고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한 지장(智將)으로 명망을 떨쳣으며 평북 정주(平北定州)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전세거지(前世居地)인 연일(延日)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그의 아들 적(迪)도 대장군(大將軍)을 지냈으며, 손자 운(運)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켜서 정주(定州) 지방의 명문(名門)으로 지위를 굳혔다.

연일(延日)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군(迎日郡)의 중앙에 위치하는 읍(邑)이다. 옛날에는 영일현(迎日縣) 소재지로 읍내면(邑內面)이라고 하였으며, 1915년 서면(西面) 5개동을 합하여 연일면이라 하였고 1980 년 12월 읍으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시조의 23세손 박(撲)의 아들 진택(震澤)이 빈민구휼(貧民救恤)에 헌신하여 교동(校洞)에 공적비(功蹟碑)가 세워졌고, 후선 요신(堯臣)은 시문(詩文)에 능하여 김영록(金永錄)․홍대양(洪大洋)과 더불어 암탄(巖灘)에서 문명(文名)을 떨쳐<신안삼고사(新安三高士)>로 불리워졌다.

한편 낙행(樂行)은 박통(博通)한 학문으로 문하(門下)에서 영재(英才)를 많이 배출시켜 백당공(栢堂公) 문홍(文弘)과 함께 사림(士林)의 존망을 받았으며, 낙원(樂元)은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흥학비(興學碑)가 세워졌고 효행이 뛰어나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그밖의 인물로는 학교를 세워 후학교육에 이바지했던 국진(國鎭)과 가재(家財)를 털어 빈민을 구휼하여 공덕비(功德碑)가 세워진 계복(桂馥)이 유명했으며, 윤장(允章)의 아들 영제(永濟)는 대한독립단 외무부감(大韓獨立團外務部監)으로 활약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순절하였다.

1919년 대흉년에 사재(私財)를 털어 굶주린 군민(郡民)을 구제했던 계연(啓璉)은 3․1운동 때 일경(日警)에 의하여 훼손된 오산고교(五山高校)를 김기홍(金起鴻)․조시연(趙始淵) 등과 함께 재건하여 관서 일대에 이름을 떨침으로써 연일 승씨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일 승씨(延日承氏)는 남한(南韓)에 1,6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승적(承 迪) 고려조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승운(承 運) 시호(諡號)는 장성(章成).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다.

승영(承 英) 고려조에 보승 중랑장(保勝中郞將)을 지냈다.

승인(承 仁) 고려 때 보승 중랑장(保勝中郞將)을 역임하였다.

승수(承 壽) 고려에서 만호(萬戶)를 지냈다.

승신(承 信) 고려 충혜왕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했다.

승석형(承碩亨) 조선조에 기전랑(箕殿郞)에 올랐다.

승윤(承 胤)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승내수(承乃壽)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 軍)에 이르렀다.

승욱(承 昱) 조선에서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을 지냈다.

승호인(承好仁)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승인옥(承麟玉) 자(字)는 인보(麟甫), 조선(朝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승경항(承慶恒)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승경술(承景述) 조선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승응조(承應祚) 조선 때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승정효(承正孝) 조선조에 진사(進士)였다.

승윤(承 綸) 조선 때 사성(司成)을 지냈다.

승헌조(承憲祖) 조선에서 전적(典籍)을 지냈다.

승영제(承永濟) 1896 (건양 1) ~ 1928

윤장(允章)의 아들. 평북 정주(定州) 출진. 정주 오산중학(五山中學)에서 수학하다가 만주 집안현(輯安縣)에 망명, 의병장 조맹선(趙孟善)의 부관이 되었다. 뒤에 대종교(大倧敎)에 입문하고 1918년 신흥부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했다. 동지 김정산(金正山)․백광운(白狂雲)과 함께 산성자(山城子)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 등 항일운동에 전력, 1919년에 조맹선(趙孟善) 휘하에 들어가 대한독립단 외무부감(外務部監)으로 활동했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중대장이 되어 오광선(吳光鮮)․김창환(金昌煥) 등과 활약, 시베리아로 이동했다가 만주로 다시와서 통의부(統義府)에 참가했다.

삼원보(三源堡)의 동명학교(東明學校)에서 후배를 양성하다가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여 김창의(金昌義)․이진무(李진武) 등과 국내로 잠입,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했다.

지청천(池靑天)의 독립군에 참가,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하고 그후 이천민(李天民)과 함께 북경에 가서 의민부(義民府)를 조직, 외무책으로 둔전병제 실시에 노력, 1928년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에 피체, 사형당했다.

송치현(宋致賢) 1919년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한 후 집북지단(輯北支團)의 검독(檢督)으로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다가 밀정 최창규(崔昌奎)․엄두욱(嚴斗旭) 등에게 피체, 흥종현(興宗縣)에서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