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절강시씨시조(浙江施氏),시문용(施文用)

작성일 : 2017-04-21 15:21 수정일 : 2018-04-06 16:46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절강(浙江)은 중국 동남부 동해 연안에 위치하여 양자강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으며 전당강에 의하여 동서로 나 누어져 항주를 성도로 하고 있다. 시씨는 본래 중국 오흥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주나라 경왕(敬王 : 제26대 임금, 재위기간: BC 519 - 476) 때 성유(聖儒)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시지상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시씨의 연원은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명군의 유격종군으로 참전했던 무장(武將) 시문용(施文用)이 전쟁이 끝나고 명군이 철수될 때 어깨의 큰 부상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경북 성주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되며, 전해지는 관향은 절강단본이다.

그 후 문용(文用)은 창녕장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슬하에 아들 영건(永建)과 영달(永達)을 낳아 절강시씨의 양대산맥 을 이루게 하였고, 본향지인 중국 절강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으며, 광해군 때 당시 영의정(領議政)이었던 정인홍(鄭仁 弘)의 추천으로 첨지중추부사(余知中樞府使)에 올랐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정인용이 실각되자 성주로 돌아와 학문연구에 전력했다.

특히 문용은 의학과 병법에 조예가 깊어 『병학기정』과 『의 복결유』 · 『감여지남』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문하에서 훌륭한 학자를 많이 배출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인조가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서울 송파구 송파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터)에 수항단을 쌓고 청나라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한 후, 청태종이 조선에 남아있는 명나라 유민들을 모두 체포하여 강제 송환을 시키려 할 때 문용은 성 주군 용암면 문명동 군성산 기슭에 은거하며 청나라에 망한 무국 명나라의 재기를 기원했다.

영조대에 이르러 당시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임진왜란 참전용사) 후손들의 생활상을 조사하여 왕에게 보 고하자 영조는 문용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하고 그 후손들에게 조세의 부역을 면하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대표적인 인물

가맥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조 때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지낸 유정(有鼎)과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유영(有榮)이 유명했으며, 한익(漢翼)은 정조 때 무과에 급제 하고 훈련원 침정 (訓鍊院儉正)에 올라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던 치황(致fl) . 정석(廷錫) · 영석(暎錫) · 민식(敏植)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쳐 절강시씨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절강시씨는 남한에 2,0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