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고령신씨,고령신씨시조,신성용

작성일 : 2017-04-21 15:39 수정일 : 2018-01-07 14:29

고령신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고령신씨의 역사는 고려 중엽에 시작된다. 그 까닭은 모든 문적에 시조께서 고려때에 과거에 급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조를 고려의 고종이나 원종시대의 사람으로 본다면 고령신씨의 역사는 700년이 넘는 오래된 성씨축에 듭니다. 시조의 선조는 신라때의 공족(귀족)이었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은 지방에서 세력을 누리던 공족들을 호장으로 임명하여 그 지방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 관례에 따라 시조 신성용(成用)께서도 호장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검교군기감을 지내며 이름과 세력을 떨치게 되었고 고려중엽과 조선조에 명성을얻어 종세가 번창해 오늘에 이른 우리나라에서도 몇 않되는 명가의 전통을 갖고 있는 씨족입니다. 또한 시조께서 경상북도에 위치한 옛 대가야국의 중심지였던 고령지방에 터를 누리셨기에 우리 씨족은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2세는 정순대부 좌우위 상호군 강승(康升)이고, 3세는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 인재(仁材)와 시중 인기(仁杞)이며, 4세는 중현대부 감문위 대호군 사경(思敬), 상호군 사금(思襟)입니다.

4세조까지의 종세는 명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고, 족보에서도 단손으로(3세에는 형제분) 이어져 와 크게 번창하였다고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5세조 순은공 덕린(德隣)은 고려조에서 간의봉익대부 예의판서 겸 보문각 제학이며, 그 덕과 학문이 높아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교은 정이오 등과 육은(六隱)으로 추앙받았고, 그 아드님인 호촌공 포시(包翅)와 함께 고려가 멸망하였을 때 조선조에 항거하여 두문동에 들어가 저항한 72()으로 숭앙받고 계신 분이며, 우리 고령신씨의 번영은 이 어른때부터 그 기반이 다져졌다고 말할 수 있다.

6세조 호촌공 포시(包翅)는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고려가 곧 멸망하였으므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아버님이신 순은공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항거하였다가 세종조에 이르러서야 공조참의를 지낸 분이다.

7세조에는 첫째분이 공조좌참판 및 집현전 제학인 암헌공 장()이고, 둘째분이 사간원 정언을 지내신 정은공 평()이며, 셋째분이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신 감찰공 제()이다.

현재의 우리 고령신씨는 대부분 위 세분의 자손들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각파를 논할때는 삼대파로서 암헌공파, 정은공파, 감찰공파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3세조때 둘째 아들인 시중공 인기(仁杞)의 자손이 7세조에 4(, , , )이 있었으나, 그 자손이 크게 번창하지 못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므로 삼대파외의 시중공파로서 분류되어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령신씨는 남한에 129,7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