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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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21 20:44 수정일 : 2018-08-29 14:15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유래(由來)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고려 신종(神宗)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장군(神號衛上將軍)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 하면서 후손들이 광주 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貫鄕)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본관지(本貫地)의 연혁(沿革)

순흥(順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영풍군(榮豊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흥주(興州)라 하였다가 성종(成宗) 때 순정(順政)으로 개칭하였다. 충목왕(忠穆王) 때 승격하여 순흥부(順興府)가 되었으며 1457(세조 3)에 풍기(豊基)․영천(榮川)에 나누어 편입시켰고, 숙종(肅宗) 때 다시 부로 복구하였다가 1895년 군()으로 강등, 1914년 군을 없애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각각 편입시켜 영풍군에 속한 순흥면으로 남아있다.


순흥안씨의 역사(歷史)

순흥 안씨는 일찍이 학문(學問)과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명망을 떨쳤던 시조 자미(子美)의 아들 영유(永儒)․영린(永麟)․영화(永和) 3형제 대()에서 가세(家勢)가 일기 시작하여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우리 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거봉(巨峰)으로 사림(士林)의 존망을 받았던 향(: 개명은 裕)은 상호군(上護軍) 영유(永儒)의 손자로, 1260(원종 1)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使)․상주 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역임했고, 충렬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 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白頤正)․우탁(禹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薺賢)․이 색(李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 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

(紹修書院)․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안향의 아들로 1282(충렬왕 8) 문과(文科)에 급제한 우기(于器)는 우부승지(右副承旨)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지밀직(知密直)으로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8백 권을 검열했으며,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검교 찬성사(檢校贊成事)와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등을 지낸 후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하자 형조 전서(刑曹典書)로서 벼슬에서 물러났던 안원(安瑗 : 정당문학 안원숭의 아들)은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했으나 태조(太祖)가 구도(舊都)인 개성(開城)의 유수(留守)로 있게 하고 그의 충절을 극찬하여 후에 시호(諡號)를 경질(景質)로 하사(下賜)했다. 호상한 성품으로 구김이 없었던 그는 항상 책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산골짜기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서 이첨(李詹)이 찾아가 보니 안원(安瑗)이 나무에 기대어 왼 팔에 매()를 얹어 놓고 오른 손으로 주자(朱子)가 지은「통감강목(通鑑綱目)」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고 한다.

호부 낭중(戶部郎中)에 추증된 안득재(安得財 : 문경공 영화의 아들)의 후손에서는 밀직제학(密直提學) 안석(安碩)의 아들 5형제가 뛰어났다.

1324(충숙왕 11) ()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안축(安軸)은 충혜왕(忠惠王) 때 강릉도(江陵道)를 존무(存撫)했으며「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文集)을 저술했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제현(李薺賢)과 함께 민지(閔漬)가 지은「편년강목(編年綱目)」을 개찬(改撰), 충렬․충선․충숙왕 3()의 「왕조실록(王朝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특히 그는 경기체가(景幾體歌)인「관동별곡(關東別曲)」과「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겨 문명(文名)이 높았고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안보(安輔)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동지공거(同知貢擧)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동경 유수(東京留守)를 역임했다.

안축의 아들 안종원(安宗源)은 우왕(禑王) 때 환관(宦官)들의 전횡을 시정하는데 앞장섰으며, 대사성(大司成)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판숭경부사(判崇敬府使)가 되어 순성보조공신(純誠寶祚功臣)에 책록되어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고, 청렴으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발탁된 후 공양왕(恭讓王)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로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안종원의 아들 3형제 중 막내인 안경공(安景恭)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創業)에 공을 세워 흥녕군에 봉해졌다가 태종(太宗) 때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으며, 그의 아들 안순(安純)이 세종(世宗) 때 명신(名臣)으로 유명했다.

안순이 사헌부 잡단(司憲府雜端)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궁녀 하나가 죄를 범하였으므로 태종이 대사헌 조박(趙박)에게 명하여 당장 죽이라고 하자, 안순이 죄를 밝히지 않고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상주하여 왕이 그의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안숭선(安崇善)1420(세종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올라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정벌을 주장했다. 특히 그는 준수하고 호걸스럽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재주와 학문을 인정받아 황보 인(皇甫仁) 후임으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 안문개(安文凱)의 손자 안천보(安天保 : 순흥군 안천선의 아들)는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로 세종 때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부윤(府尹) 안지귀(安知歸)의 아들 안침(安琛)은 성종(成宗) 때 이조 참판을 거쳐 연산군 때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사예(司藝) 안돈후(安敦厚)의 아들로 성종 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했던 안당(安瑭)은 장중(莊重)하여 말과 웃음이 적고, 청백하고 검소하여 바른 것을 지켜 직무를 행했으며, ()를 행함에 과단성이 있어서 임금에게 아뢰어 시행한 것이 많았다고「당적보」에 적고 있다.

연산군이 사간원(司諫院)을 없앴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대사간에 등용되어 무너지는 기강을 바로 세우고 원통한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주었으며, 이조 판서가 되자 선비를 뽑아 인재 등용에 힘썼다. 강직한 성품으로 오직 나라 일에 전념했으나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화를 입었다. 그가 일찍이 호서 안찰사(湖西按察使)로 나갈 때 시()를 짓기를

말고삐 잡으면서 천하를 맑게 하겠다던 옛 사람의 일을 내가 어찌 감당하랴(攬轡澄淸吾豈敢)

다만 충의를 가지고 내 한 몸을 꾀하지 않겠다(只將忠義爾謀身)“ 하였다.

안당(安瑭)의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자 그는 집안이 너무 성()한 것을 염려하여 벼슬에서 사직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는데, 청렴한 성품으로 녹으로 받는 것 외에는 모아 둔 재산이 없어 부인이 갑자기 죽자 장사를 치르지 못하여 남에게 빌려서 상례를 치르니 사람들이 그의 청백(淸白) 정신에 감복했다고 한다.

 

명종조에「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를 찬수(纂修)한 안위(安瑋)의 아우 안현(安玹)이 명종 때 현상(賢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청강사재록(淸江思齋錄)」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충성스럽고 청렴하여 청탁이 통하지 않았다고 하며, 등에 종기(腫氣)가 나자 의원이 말하기를 지렁이 즙을 내어서 발라야 한다고 하니, 그가 이르기를 한창 봄에 만물이 생생한데 지렁이가 비록 미물이지만 어찌 내 병을 위하여 생명 있는 것을 죽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전적(典籍) 안기(安璣)의 아들 안처순(安處順)은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인 안침(安琛)에게 의탁하여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은퇴, 다시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지냈다. 조광조(趙光祖)가 능성(綾城)에 유배되었을 때 그와 아는 체만 해도 잡혀간다 하여 모두 조광조를 피()했는데, 안처순은 멀리 구례로부터 올라와 조광조를 만나고 기묘사화로 남쪽에 유배되어 온 현량(賢良)들의 생활을 동분서주하며 구제했다.

그밖에 순흥 안씨를 빛낸 인물로는, 양성 현감(陽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와 그림으로 유명했던 안정(安珽 : 병조 좌랑 안처선의 아들)과 선조(宣祖) 때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고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오른 안자유(安自裕)가 대표적이며, 안위(安衛)는 거제 현령(巨濟縣令)이 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벽파진(碧波鎭) 전투(戰鬪)를 승리로 이끌어 선조(宣祖)로부터「무경칠서(武經七書)」를 下賜받아,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싸움에서 의병장(義兵將)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순절한 안영(安瑛 : 안처순의 증손), 역시 임란 때 남원(南原)에서 순절한 안대중(安大重)․안사오(安嗣吳)의 부자와 더불어 이름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했던 안병찬(安秉瓚)과 충주(忠州)의 황강(黃岡) 싸움에서 전사한 안승우(安承禹)가 뛰어났으며,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육성과 민족 계몽운동에 진력했다. 진사 안태훈(安泰勳)의 아들 안중근(安重根)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고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이 쇠와 같고, 의사(義士)는 위태로움에 임할지라도 기운이 구름과 같도다.”라는 유시(遺詩)를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순흥안씨(順興安氏)는 남한(南韓)520,38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안향(安 珦): 1243(고종 30)1306(충렬왕 32) 초명은 유(), ()는 사온(士蘊), ()는 회헌(晦軒),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판도 판서(版圖判書) ()의 아들, 1260(원종 1) 문과(文科)에 급제,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원종 11)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1275(충렬왕 1)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 문중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打破)했고, 판도 좌랑(版圖佐郞)․전중시 어사(殿中寺御史)를 거쳐 국자 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충렬왕 14) 우사의(右司議)가 되고 좌승지(左承旨)․정동행성 원외랑(征東行省員外郞)을 거쳐 고려유학 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왕과 공주를 扈從, 원나라에 들어가「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 쓰고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했다. 1294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서 동남도 병마사(東南道兵馬使)가 되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했고, 이어 밀직사 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 좌사(三司左使)․첨의 참리(僉議參里) 세자 이보(世子貳保)를 역임했다. 1298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하자 동경유수(東京留守)․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계림 부윤(鷄林府尹)․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고, 이해 태상왕(太上王)이 된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충렬왕이 복위한 이듬해 수국사(水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었다. 한편 문교(文敎)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했으며, 국학 대성전(國學大成殿)을 건립(建立)하여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 육경(六經)․제자(諸子)․사() 등의 서적(書籍)을 구입했다. 이로써 유학이 크게 떨치게 되어 우리 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 지칭된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했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단(長湍)의 임강성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안우기(安于器): ?1329(충숙왕 16) ()는 허중(虛中), ()는 죽옥(竹屋), 시호(諡號)는 문순(文順), 첨의중찬(僉議中贊) ()의 아들. 충렬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후 국학 제주(國學祭酒)․우부승지(右副承旨)․밀직 부사(密直副使) 등을 역임하고, 1314(충숙왕 1) 지밀직(知密直)으로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8백 권을 검열(檢閱)했다. 1316(충숙왕 3)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검교 찬성사(檢校贊成事)․판전의시사(判典儀寺使)․상호군(上護軍)에 오르고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안문개(安文凱): ?1388(충숙왕 복위 7) ()는 국평(國平), ()는 질재(質齋), 시호(諡號)는 문의(文懿). 1321(충숙왕 8) 좌대언(左代言)이 되고, 1327년 참리(參里)로서 간신을 물리치고 왕을 시종, 그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후에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에 봉해지고, 1330(충혜왕 즉위) 지공거(知貢擧), 충숙왕(忠肅王) 복위 후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안축(安 軸): 1287(충렬왕 13)1348(충목왕 4) ()는 당지(當之), ()는 근재(謹齋),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안석(安碩)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금주 록(金州司錄)․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단양부 주부(丹陽府主簿)를 지내고, 1324(충숙왕 11)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그곳 요양로 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성균 학정(成均學正)․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충혜왕(忠惠王) 때 강릉도(江陵道)를 존무(存撫)했으며, 이때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文集)을 남겼다. 1332(충숙왕 복위 1) 판전교 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당했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 이어 내시(內侍)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 판서(典法判書)․감찰대부(監察大夫)등에 등용되고, 이에 검교평리(檢校評理)로서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지내고, 1344(충혜왕 5) 지밀직사사(知密直司使)에 이어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1347년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에 참여하였다. 뒤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민지(閔漬)가 지은「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개찬(改撰)했고, 또 충렬․충선․충숙 3()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경기체가(景幾體歌)인「관동별곡(關東別曲)」「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겨 문명(文名)이 높았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진 후 죽었다.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안보(安 輔): 1302(충렬왕 28)1357(공민왕 6) ()는 원지(員之),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안석(安碩)의 아들,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 안축(安軸)의 아우. 19세에 문과 급제하고, 경주사록(慶州司錄)․수찬(修撰)․편수관(編修官)을 역임했다. 1345(충목왕 1) 원나라 제과(制科)에 합격, 요양 중서성(遼陽中書省) 조마 겸 승발가각고(照磨兼承發架閣庫)로 있다가 노모를 위해 귀국했다. 우대언 겸 집의(右代言兼執義)를 거쳐 충정왕(忠定王) 때 전법 판서(典法判書), 공민왕(恭愍王) 즉위 초에 밀직 제학 겸 감찰대부(密直提學兼監察大夫)․제조전선사(提調銓選事), 1355(공민왕 4) 동지공거(同知貢擧)․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내고 동경 유수(東京留守)가 되었다.

안목(安 牧): ?1360(공민왕 9) ()는 익지(益之), ()는 겸재(謙齋), 시호(諡號)는 문숙(文淑), 검교 찬성사(檢校贊成事) 안우기(安于器)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1330(충혜왕 즉위) 대언(代言) 이군해(李君侅) 등과 함께 인사권(人事權)을 관장했으며, 그후 밀직제학(密直提學)․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48(충목왕 4) 경사도감 제조(經史都監提調), 1352(공민왕 1) 서연관(書筵官)을 역임,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안원숭(安元崇): 시호(諡號)는 문혜(文惠). 1341(충혜왕 2) 문과에 급제한 후 대언(代言)․판서(判書)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순성군(順城君)에 봉하여졌다.

안진(安 震): ?1360(공민왕 9) ()는 상헌(常軒). 1313(충선왕 5) 문과(文科)에 급제, 1318(충숙왕 5) 예문 검열(藝文檢閱)로서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예문 응교(藝文應敎) 총부 직랑(摠部直郞)을 역임했다. 1344(충혜왕 5)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안산군(安山君)에 봉해졌다. 1346(충목왕 2) 민지(閔漬)가 편찬한「편년강목(編年綱目)」의 개찬(改撰과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삼조 실록(三朝實錄)」편찬(編纂)에도 참여하였다. 1352(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에 관련된 혐의로 속동(贖銅)을 바쳤으며,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안준(安 俊): ()는 노포(蘆浦). 고려 말 문과(文科)에 급제, 우왕(禑王) 때 남양 부사(南陽府使)․판봉상시사(判奉常寺使)를 거쳐 1385(우왕 11)에 전라(全羅)․충청(忠淸)․경상(慶尙)․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었다.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된 후 그 일당으로 몰려 우현보(禹玄寶)․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의령(宜寧)으로 유배(流配)되었다. 이 해 조선 개국 후 충절을 가상히 여긴 태조(太祖)에 의해 예천(醴泉)에 양이(量移)되어 죽었다. 용궁(龍宮)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제향 (祭享)되었다.

안종원(安宗源): 1324(충숙왕 11)1394(태조 3) ()는 사청(嗣淸), ()는 쌍청당(雙淸堂),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의 아들. 17세에 문과(文科) 급제, 검열(檢閱)․삼사 도사(三司都事)를 거쳐 공민왕(恭愍王) 초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여 칭송을 받았고,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나갔다. 1361(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이 피난하여 죽주(竹州)에 이르렀을 때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서 관민(官民)이 도망쳐버린 책임으로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에 좌천되었다. 뒤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에 승진했으나 신 돈(辛 旽)의 미움을 받아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신 돈이 처형된 뒤에 다시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우왕(禑王) 초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류 구(柳 玽) 등과 더불어 환관(宦官)들의 횡포를 시정하려고 노력했다. 이어 대사성(大司成)․우상시(右常侍)․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판숭경부사(判崇敬府使)가 되어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이어 문하평리 겸 대사헌(門下評理兼大司憲)에 순성보조공신(純誠輔祚功臣)이 되고, 뒤에 순흥군(順興君)으로 개봉(改封), 순성익대보리공신(純誠翊戴輔理功臣)이 되었다. 최영(崔瑩)에 의해서 청렴(淸廉)으로 발탁되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가 곧 사임, 1390(공양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이듬해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피봉(皮封)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영삼사사(領三司事), 이듬해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지내고, 1394(태조 3)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안천보(安天保): 1339(충숙왕 복위 8)1425(세종 7) 시호(諡號)는 소의(昭懿), 순흥군(順興君) 천선(千善)의 아들,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 1363(공민왕 12) 별장(別將)이 된 뒤에 전객부령(典客副令)․군기시 윤(軍器寺尹)․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내고 의덕부 좌사윤(懿德府左司尹)․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역임,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이르러 면직 당하고 16년간 금()․서()로써 은둔생활을 했다. 1408(태종 8)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으로 등용된 뒤 검교 참찬(檢校參贊)․검교 찬성(檢校贊成)이 되고, 1418년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좌의정(左議政)으로 치사(致仕), 뒤에 다시 영돈령부사(領敦笭府事)로 기용되었다가 노령(老齡)으로 치사했다.

안원(安 瑗): 1346(충목왕 2)1411(태종 11) 초명은 정(), 시호(諡號)는 경질(景質), 정당문학(政堂文學) 안원숭(安元崇)의 아들. 1374(공민왕 23)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 전서(工曹典書)가 되고, 1390(공양왕 1)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을 때 천도론(遷都論)을 반대, 이를 중지케 했고, 1392(태조 1)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앞서 일어났던 이초옥사(彛初獄事)에 연루,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초 본향(本鄕)에 안치(安置)된 뒤 곧 용서받고,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인장(印章)의 하사를 사례하고「대학연의(大學衍義)」「통감집람(通鑑集覽)」「사림광기(事林廣記)」를 가져다 왕에게 바쳤다. 1404(태종 4)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1407년 대사헌(大司憲)․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내고, 이듬해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서 동서강등처 병마도절제사(東西江等處兵馬都節制使)로 나갔다.

안경공(安景恭): 1347(충목왕 3)1421(세종 3) ()는 손보(孫甫), 시호(諡號)는 양도(良度),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종원(安宗源)의 아들. 1365(공민왕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372년 산원(散員)을 거쳐 이듬해 낭장(郎將)이 되어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겸임했다. 1376(우왕 2)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로 문과(文科)에 급제, 전리사(典理司)와 전법사(典法司)의 좌랑(佐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 공양왕 때 밀직사 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에 이르렀다. 1392(태조 1) 이성계(李成桂)의 건국을 도와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이 되고, 좌대언(左代言)을 거쳐 중추원 도승지(中樞院都承旨)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전라도 관찰출척사(全羅道觀察黜陟使)․대사헌(大司憲)․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事)․보문관 학사(寶文館學士)를 역임했다. 1394(태조 3) 부친상으로 사직, 후에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지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1416(태종 16)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위계(位階)에 올라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이 되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피봉(皮封)되었다.

안조동(安祖同): 시호(諡號)는 양공(良恭). 1376(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이르렀다. 그는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이 탁월하고, 인품(人品)이 고상하므로 매헌(梅軒) 선조(先祖)와 같다하여 조동(祖同)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받았다. 1388(우왕 14) 숭인문화(崇仁門禍)를 입어 절사(節死)하였다.

안구(安 玖): 1417(태종 17) 문과에 급제한 뒤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및 예조․이조 좌랑(禮曹․吏曹佐郞)․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쳐 군자감 사(軍資監事)를 역임하였다.

안 순(安 純): 1371(공민왕 20)1440(세종 22) ()는 현지(顯之), ()는 죽계(竹溪), 시호(諡號)는 정숙(靖肅),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안경공(安景恭)의 아들. 1388(우왕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文科)에 급제, 사간원 좌습유(司諫院左拾遺)로 등용되고, 1398(태조 7) 사헌부 잡단(司憲府雜端), 이어 승정원 우대언(承政院右代言)․이조 우참의(吏曹右參議), 1409(태종 9) 동지총제(同知摠制), 이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했다. 1419(세종 1)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고, 1423년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 이어 참찬 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역임했다. 1424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호조 판서(戶曹判書), 1432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겸 판호조사(判戶曹事), 1435년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거쳐 1437년 판중추원사로서 충청도에 기근이 일어나자 도순문 진휼사(都巡問賑恤使)로 이를 잘 수습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참찬(參贊)으로 죽을 때까지 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하고 전곡(錢穀)을 관장했다. 「근재집(謹齋集)」의 부록으로 유고(遺稿)가 실려 있다.

안수기(安修己): 1419(세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거쳐 지제교(知製敎)․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을 역임하였다.

안숭선(安崇善): 1392(태조 1)1452(문종 2) ()는 중지(仲止), ()는 옹재(雍齋),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안순(安純)의 아들. 1411(태종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계성전 직(啓聖殿直), 감찰(監察)을 거쳐 1420(세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지평(持平)에 등용되었다. 1424년 이조 정랑(吏曹正郞), 1427년 형조 좌랑(刑曹佐郞), 1433년 지신사(知申事) 등을 역임하고, 1437년 세종(世宗)이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할 때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서 정벌을 적극 주장했고, 이해 대사헌(大司憲),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냈다. 1444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거쳐 1445년 병조 판서(兵曹判書)․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고려사(高麗史)」의 수찬(修撰)에 참여했다. 1448년 병조 판서로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할 때 정실로 인사문제를 취급한 것이 문제되어 진천현(鎭川縣)에 부처(付處)되었다가 뒤에 풀려 나와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근재집(謹齋集)」부록에 유고(遺稿)가 실려 있다.

안질(安 質): 1423(세종 5)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직제학(直提學)․대사간(大司諫)․지제교(知製敎)․승지(承旨) 등을 지냈다.

안지귀(安知歸): 1432(세종 14)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안관후(安寬厚): ()는 율보(栗甫). 1447(세종 29) 문과에 급제한 후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평시서 주부(平市署主簿)․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냈다. 그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도승지(都承旨)를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안중후(安重厚): 1447(세종 29)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修撰)․교리(校理)․연안 부사(延安府使)를 거쳐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지냈다.

안근후(安謹厚): ()는 방경(方敬). 1460(세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송화 현감(松禾縣監)을 역임하였다.

안돈후(安敦厚): ()는 가화(可化). 조선 때 사예(司藝)를 지냈다.

안귀행(安貴行): ()는 백산(白山). 1444(세종 26) 문과에 급제한 후 양성 현감(陽城縣監)에 이르렀으나 단종(端宗)의 왕위(王位)를 세조(世祖)가 찬탈(簒奪)하자 이를 개탄(慨嘆)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남원(南原)에 은거(隱居)하였다. 수 차례 장령(掌令)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충절(忠節)을 지켰다. 대사간(大司諫)에 추증(追贈), 남천사(藍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안숭효(安崇孝): ?1460(세조 6) ()는 계충(季忠), ()는 한백당(寒栢堂),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안순(安純)의 아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장령(掌令)․호조 참의(戶曹參議)․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덕녕 부윤(德寧府尹)을 역임,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가 1455(세종 1)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2등이 되고, 이듬해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 참판(工曹參判)․인순 부윤(仁順府尹)․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호조 참판(戶曹參判) 등을 지냈다. 1460년 충청도 지방에 홍수가 들어 백성의 고통이 극심해 특명으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부임, 유민(流民)을 진휼(賑恤)하고 탐관(貪官)을 숙청(肅淸)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안호(安 瑚): 1437(세종 19)1503(연산군 9) ()는 가헌(可獻), 전주 부윤(全州府尹) 안지귀(安知歸)의 아들. 1459 (세조 5) 진사(進士)가 되고, 1466(세조 1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이듬해 사관(史官)으로 양성지(梁誠之)․박안성(朴安性) 등과 함께 여러 문헌 가운데 표시된 중요 지명을 뽑아 지도를 작성해「북정록(北征錄)」에 삽입했다. 1472(성종 3) 행지평(行持平)․사인(舍人)․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 1488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대사간․좌부승지(左副承旨)․병조 참지(兵曹參知)를 역임, 1490년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어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494년 수 전주부윤(守全州府尹)을 지내고, 1498(연산군 4) 형조 참의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502년 예조 참의가 되었다.

안 선(安 璿): 1440(세종 22)1498(연산군 4) ()는 국진(國珍), 전주 부윤(全州府尹) 지귀(知歸)의 아들. 일찍부터 학문을 즐겼으나 과거(科擧)에 낙방(落榜), 1465(세조 11) 추천을 받아 중부 녹사(中部綠事)에 보직되고 이어 지평(持平)․통주군수(通州郡守)․장령(掌令)․평양 서윤(平壤庶尹) 등을 역임했다. 1488(성종 19)에 김석(金석)을 무고한 죄로 파직, 그후 다시 기용되어 전옥서 주부(典獄署主簿)를 거쳐 만경 현감(萬頃縣監)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에 이르렀다.

안임(安 琳): ()는 행음(杏陰). 1477(성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대교(待敎)로 옥당(玉堂)에 뽑혔으며 박사(博士)․예조 좌랑(禮曹佐郞)․정언(正言)․지제교(知製敎)․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를 거쳐 1482(성종 13)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이르렀다.

안만철(安萬哲): 조선(朝鮮) 때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안침(安 琛): 1444(세종 26)1515(중종 10) ()는 자진(子珍), ()는 죽창(竹窓)․죽계(竹溪), 시호(諡號)는 공평(恭平), 부윤(府尹) 안지귀(安知歸)의 아들. 1462(세조 8) 중형(仲兄) 안선(安璿)과 함께 사마(司馬) 양시(兩詩)에 합격, 1466년 고성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정자(正字)․감찰(監察)을 거쳐 1471(성종 2) 신설(新設)된 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되었다. 이어 부수찬(副修撰)․정언(正言)․이조 정랑(吏曹正郞)․예문관(藝文館) 교리(校理)․응교(應敎)․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거쳐 1481년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이 되고, 1484년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이어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를 역임, 1493년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고,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1498(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류되어 한때 좌천되었다. 이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대사헌(大司憲), 1500년 경사도 병마절도사, 2년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1506년 평안도 관찰사를 지내고, 1514년 공조 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필법(筆法)은 송설체(松雪體)로서 해서(楷書)에 능했다.

안당(安 瑭): 1460(세조 6)1521(중종 16) ()는 언보(彦寶), ()는 영모당(永慕堂), 시호(諡號)는 정민(貞愍), 사예(司藝) 안돈후(安敦厚)의 아들. 1480(성종 11)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1481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사관(史官)에 보직되고, 1499(연산군 5)에 사성(司成)으로「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내고, 1507(중종 2) 이 과(李 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려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이 되었다. 1509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호조와 형조․공조의 판서(判書)를 거쳐 1515년 이조 판서(吏曹判書), 1518년 좌찬성(左贊成)에 이어 이조 판서, 같은 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519년 좌의정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화()를 입게 된 유신(儒臣)들을 힘써 구출하려다가 도리어 파직되고, 이듬해 작위(爵位)를 빼앗겼다가 1566년 추복(追復)되었다.

안처성(安處誠): 1477(성종 8)1517(중종 12) ()는 성지(誠之), ()는 죽계(竹溪), 판서 안침(安琛)의 아들. 1495(연산군 1) 진사(進士)가 되고, 150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주서(注書)가 되고, 1506(중종 1) 수찬(修撰), 그후 부교리(副校理)․지평(持平)을 거쳐 1510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1512년 대간(臺諫)으로서 부적당하다는 탄핵을 받아 응교(應敎)에 전적(轉籍), 이듬해 전라․충청도의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고, 뒤에 군자감 정(軍資監正)이 되었다. 글씨에 뛰어났다.

안찬(安 瓚): ?1519(중종 14) ()는 황중(黃中). 의술과 성리학에 정통했으며, 1517(중종 12) 전의감 제조(典醫監提調) 안당(安瑭)의 천거로 전의감 주부(主簿)가 되었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교분이 두터워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입은 유림(儒林)들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가 장류(杖流)되어 가던 도중 연서역(延曙驛)에서 죽었다. 산수화(山水畵)를 잘 그렸다.

안처겸(安處謙): 1486(성종 17)1521(중종 16) ()는 백허(伯虛), ()는 겸재(謙齋)․근재(謹齋)․허재(虛齋), 좌의정(左議政) 안당(安瑭)의 아들. 1519(중종 14) 아우 안처근(安處謹)과 함게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다. 1521년 기묘사화(己卯士禍 : 1519)를 일으킨 심정(沈貞)․남곤(南袞) 등의 숙청과 경명군(景命君)의 추대를 모의했다는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아우 안처근 및 안형(安珩)․황현(黃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안위(安 瑋): 1491(성종 22)1563(명종 18) ()는 백진(伯珍),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안순필(安舜弼)의 아들. 1521(중종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42년 장령(掌令)이 되고, 1546년 청홍도 관찰사(淸洪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555년「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를 찬수(撰修)했다. 1560년 호조 판서가 되고, 다시 병조 판서를 지냈다. 군략가(軍略家)로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면서 진()을 설치하고 변방을 지키는 데 공이 컸다.

안처순(安處順): 1493(성종 24)1534(중종 29) ()는 순지(順之), ()는 기재(幾齋)․사재당(思齋堂), 전적(典籍) ()의 아들. 남원(南原) 출신.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인 판서 침()에게 위탁, 1513(중종 8)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정자(正字)를 지내고, 1518년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가 되었으나 모친 부양을 위해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다.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를 면하고 은퇴했다가 1533(중종 28) 전적(典籍)으로 기용된 뒤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에 이르렀다. 남원(南原)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안처선(安處善): ()는 선지(善之). 조선(朝鮮) 때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안처근(安處謹): ()는 정부(靜夫). 조선조에 박사(博士)를 지냈다.

안정(安 珽): 1494(성종 25)? ()는 정연(挺然). ()는 죽창(竹窓)․식창(拭瘡), 판서 안침(安琛)의 손자, 좌랑(佐郞) 안처선(安處善)의 아들. 1516(중종 11)에 생원(生員)이 되고,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에 보직되었으나 이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투옥(投獄)되었다. 뒤에 풀려나 검열(檢閱)․주서(注書)․전적(典籍) ․양성 현감(陽城縣監) 등을 역임,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 길주(吉州)에 유배, 다시 곤양(昆陽)에 이배(移配)되었다. 1537년 풀려 나 다시 양성 현감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그림은 매죽(梅竹)을 잘 그렸다.

안 현(安 玹): 1501(연산군 7)1560(명종 15) ()는 중진(仲珍), ()는 설강(雪江), 시호(諡號)는 문희(文僖), 순필(舜弼)의 아들. 1521(중종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서관 권지 부정자(校書館權知副正字)가 되고 1524년 검열(檢閱), 1528년 주서(注書)에 재직 중 좌랑(佐郞) 박광우(朴光祐)의 무고로 삭직(削職)당하고 투옥되었다가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다. 이어 대교(待敎)․봉교(奉敎), 1533년 지평(持平), 이듬해 응교(應敎)․장령(掌令)․사간(司諫) 등을 역임, 1535년 집의(執義)로 경차관(敬差官)을 겸했다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46(명종 1)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다음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판윤(判尹)에 승진, 1551년 병조 판서․우참찬(右參贊), 다음해 호조 판서, 1553년 이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 1555년 좌찬성(左贊成)을 역임, 1558년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의방(醫方)에도 정통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안자유(安自裕): 1517(중종 12)1588(선조 21). ()는 계홍(季弘), 참찬(參贊) 안숭선(安崇善)의 현손(玄孫), 안임(安恁)의 아들. 1556(명종 1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58년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1561년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어 지평(持平)․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병조 좌랑․헌납(獻納)․사인(舍人) 등을 역임했다. 1569(선조 2) 집의(執義)가 되고, 1571년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지제교 겸 경연시강관(知製敎兼經筵寺講官)으로「명종실록(明宗實錄)」편수에 참여, 1574년 좌부승지(左副承旨)로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1576년 황해도 관찰사, 1582년 대사헌, 1584년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후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안종도(安宗道): ()는 관부(貫夫), ()는 세한재(歲寒齋). 1555(명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였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안명세(安名世): 1518(중종 13)1548(명종 3) ()는 경응(景應), 부호군(副護軍) 안담(安燂)의 아들. 박영(朴英)의 문인. 1544(중종 3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주서(注書)․정자(正字)를 역임했다. 1548(명종 3)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이 을사사화(乙巳士禍 : 1545)를 일으켜 현신(賢臣)들을 많이 숙청한 사실을 사관(史官)으로서 그 정상을 빠짐없이 시정기(時政記)에 적어 놓은 것이 누설되어 그들의 무고로 사형(死刑)을 당하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었다가 1568(선조 1) 신원(伸寃)되었다.

안 위(安 衛): 1563(명종 18)? ()는 대훈(大勳). 무과(武科)에 급제, 찰방(察訪)에 보직되었다가 1597(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거제 현령(巨濟縣令)이 되어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벽파진(碧波鎭) 싸움에서 대승, 이순신의 포계(襃啓)로 선조로부터「무경칠서(武經七書)」를 하사(下賜) 받았다. 후에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에 오르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으나 1601년 반란을 꾀한 정여립(鄭汝立)의 조카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74세의 몸으로 왕을 호종(扈從)하기 위해 상경 도중 화의가 성립되자 돌아갔다. 김제(金堤)의 학당사(學堂祠)에 제향되었다.

안홍국(安弘國): ?1597(선조 30) ()는 신경(藎卿), 시호(諡號)는 충현(忠顯), 찬성사(贊成事) 안문개(安文凱)의 후손. 1583(선조 16) 무과(武科)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에 선전과(宣傳官)으로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扈從)하였고, 소식이 두절된 삼남(三南)의 각 진()을 다니며 왕의 지시를 전달, 이해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先鋒將) 등으로 전공을 세웠다. 1597년 보성 군수(寶城郡守)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삼도(三道)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원 균(元 均)의 휘하에 중군(中軍)으로 참전, 안골포(安骨浦)․가덕도(加德島)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다 다시 안골포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순천(順天)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안영(安 瑛): ?1592(선조 25) ()는 원서(元瑞), 교리(校理) 안처순(安處順)의 증손자. 남원(南原) 출신.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에 있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상경 도중 고경명(高敬命)이 거느린 의명(義兵)에 가담, 여러 곳에서 활약하고, 금산(錦山) 싸움에서 용전 끝에 전사했다.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에 추증(追贈),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祠) 남원(南原)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안신손(安信孫): ()는 후원(厚源), ()는 풍와(楓窩).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倭軍)에 대항하였고,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성묘(聖廟)를 수호하는데 힘썼다.

안사오(安嗣吳): ()는 선술(善述).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부친(父親) 안대중(安大重)과 함께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남원(南原) 여원산(女院山)에서 왜적(倭敵)에 대항하다 순절(殉節)하였다.

안사제(安嗣俤): () 여원(汝源), ()는 청류재(聽流齋), 1582(선조 15)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정의 판관(靖義判官)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안사오(安嗣吳), 조경남(趙慶男) 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병(倭兵)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또한 다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니 안신손(安信孫)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토적(討賊)하는데 많은 공적을 쌓았다.

안지(安 志): ()는 사상(士尙), ()는 농애(農厓), 안명세(安名世)의 조카. 선조(宣祖) 때 학자로 9세에 이미「주역(周易)」에 통했고, 시문에 뛰어났다.

안덕린(安德麟): 1563(명종 18)1609(광해군 1) ()는 인서(仁瑞), ()는 사촌(沙村), 판서 안숭선(安崇善)6대손, 호군(護軍) 안총(安聰)의 아들. 류성룡(柳成龍)․정구(鄭逑)의 문인. 1591(선조 24) 성균관 장의(成均館掌議)로 대신들의 실책을 상소하여 조정을 소연케 했다. 1603(선조 3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풍기(豊基)에서 학문을 닦으며 이 황(李 滉)의 향약(鄕約)을 수명(修明)하고, 후배와 함께 향풍(鄕風)의 쇄신에 힘썼다. 풍기의 숭현사(崇賢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안몽윤(安夢尹): 1571(선조 4)1650(효종 1) ()는 상경(商卿), 직장(直長) 세복(世復)의 아들. 음보(蔭補)로 군직(軍職)에 올라 1592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전주(全州) 분조(分朝)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과(宣傳官)이 되었다. 1599(선조 32) 부장(部將)으로 창덕궁(昌德宮)을 호위했으며, 1601년 남포 현감(藍浦縣監), 1604년 옥구 현감(沃溝縣監)을 역임했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 원수(元帥) 장 만(張 晩)의 전부 우협장(前部右協將)으로 군량 보급에 힘쓰고 안현(鞍峴) 싸움에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으로 순양군(順陽君)에 봉해졌으며, 중화 부사(中和府使)․인동 부사(仁同府使)․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부총관(副摠管) 등을 지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안영남(安潁男): ?1641(인조 19). ()는 여오(汝吳), 참의(參議) 요경(堯卿)의 현손(玄孫), 목사(牧使) ()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를 거쳐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정주 목사(定州牧使)로서 능한산성(凌漢山城)을 수비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자결했다.

안극함(安克諴): ?1641(인조 19) ()는 자성(子誠), 병조 참판(兵曹參判) ()의 아들. 1625(인조 3) 무과(武科)에 급제,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이 입(李 立)과 함께 소위포(少爲浦)에서 항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어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을 도와 활약, 그 공으로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이 되고, 모문룡의 주청으로 명나라로부터 의병장의 은자패(銀子牌)1천 석의 쌀을 하사 받았다. 1641년 최효일(崔孝一)․차예량(車禮亮) 등과 함께 청제(淸帝)를 죽이고 명나라를 도울 것을 모의, 먼저 최효일․차예량 두 사람을 등주(登州)에 보내고 후에 도강(渡江)하려다가 조선인으로 청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던 정명수(鄭明壽)에게 발각, 서울로 잡혀와 처형(處刑)되었다.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 의주(義州)의 백마산성사(白馬山城祠)와 현충사(顯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안경달(安景達): ()는 이회(而會), ()는 풍계(楓溪).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미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끝내 울분을 견디지 못해 화병(火病)으로 죽었다. 그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남천사(藍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안응창(安應昌): ()는 흥숙(興叔), ()는 우졸재(愚拙齋), 안몽윤(安夢尹)의 아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음보(蔭補)로 부사(府使)에 이르고, 학문으로 천거를 받아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追贈), 순원군(順原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안명로(安命老): 1620(광해군 12)?. ()는 덕수(德叟), 안종우(安宗遇)의 아들. 1650(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664(현종 5)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병서(兵書)「연기신편(演機新編)」을 저술, 서천 군수(舒川郡守)․장연 부사(長淵府使)를 역임했다. 숙종(肅宗) 초우통례(右通禮)를 거쳐 봉상시 정(奉常寺正)이 되었다가 1680(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변방(邊方)에 유배,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안재도(安載道): ()는 면숙(勉淑), ()는 백계(白溪). 조선(朝鮮)때 학자(學者)로 명성을 얻었다.

안연석(安鍊石): 1662(현종 3)1730(영조 6) ()는 보천(補天), ()는 보만당(保晩堂), 중현(重鉉)의 아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05(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폐정(弊政)의 시정과 구민책(救民策)을 건의하여 실시케 했으며,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역임했다.

안 야(安 埜): ()는 미한정(迷閑亭). 1728(영조 4) 무신란(戊申亂)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남원(南原)에서 함양(咸陽) 사이와 남원에서 구례(求禮) 사이에서 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追贈)되고, 관곡서원(館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안중관(安重觀): 1683(숙종 9)1752(영조 28) ()는 국빈(國賓), ()는 회와(悔窩)․가주(可洲).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세자익위사 위수(世子翊衛司衛率)가 되었고,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거쳐 홍천(洪川)․제천(堤川)의 현감(縣監) 등을 역임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문학(文學)․경제학(經濟學)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안세갑(安世甲): 1693(숙종 19)1763(영조 39) ()는 여주(汝冑), ()의 후손. 1717(숙종 4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유(學諭)를 거쳐 경양도 찰방(慶陽道察訪)․전적(典籍)을 지내고, 1725(영조 1) 직강(直講)으로 소론(少論)의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을 논척(論斥)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 나와 사예(司藝)가 되고, 맹산 현감(孟山縣監)을 거쳐 1728년 이인좌(李麟左)의 난이 평정된 뒤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그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사직했다가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안명열(安命說): 1697(숙종 23)? ()는 몽뢰(夢賚), ()는 수심암(睡心庵), 시휘(愼鰴)의 종손(從孫). 1717(숙종 43) 역과(譯科)에 급제, 역관(譯官)으로 여러 차례 중국에 왕래했으며, 관직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글씨에 뛰어나 북경(北京)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안 집(安 亻集): 1703(숙종 29)? ()는 덕취(德聚), ()는 상산(橡山), 진사(進士) 수성(壽成)의 아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도사(都事)를 지내다가 1738(영조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740(영조 16) 지평(持平)이 되고, 이어 정언(正言)․장령(掌令)등을 역임했다. 1746(영조 22)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수찬(修撰)․헌납(獻納)․승지(承旨)를 지내고, 1754년 대사간(大司諫)이 된 뒤 1757년 고부사(告訃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고, 1764년 대사간으로 빈대(賓對)에 불참(不參)하여 흥덕 현감(興德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774(영조 50) 등준시(登俊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안겸제(安兼濟): ()는 달부(達夫). 1756(영조 3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한 후 참판(參判)․감사(監司) 등을 역임하였다.

안관제(安寬濟): ()는 율향(栗鄕). 1759(영조 3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보직되고 후에 교리(校理)를 지냈다.

안성빈(安聖彬): ()는 질부(質夫). 1763(영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옥당(玉堂)에 뽑혔고, 삼사(三司)․승지(承旨)를 거쳐 함경도(咸鏡道)․평안도 감사(平安道監司)에 이르렀다.

안대제(安大濟): ()는 성숙(聖叔).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안정현(安廷眩): 조선조(朝鮮朝)에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안석경(安錫경): ?1782(정조 6) ()는 숙췌(叔萃)․자화(子華), ()는 삽교(霅橋), 안중관(安重觀)의 아들. 원주(原州) 출신. 영조 때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받아 참봉(參奉)이 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안기영(安驥泳): 1819(순조 19)1881(고종 18) ()는 덕보(德步), 안경위(安景緯)의 아들. 1857(철종 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66(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때 순무영 종사관(巡撫營從事官)으로 프랑스군에 보내는 글을 기초했고, 1871년 남양 부사(南陽府使), 1873년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안병찬(安秉瓚): 1854(철종 5)1921 ()는 치규(穉圭), ()는 규당(規堂). 홍주(洪州) 출신. 1894(고종 31) 홍주 교임(洪州校任)이 되고, 이듬해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김한복(金漢福)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재판장 이범진(李範晋)의 심문에 조리 있는 답변을 하여 석방된 후 홍릉 주사(洪陵主事)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905(광무 9) 법부 주사(法部主事)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했고, 이듬해 민종식(閔宗植)과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투옥, 9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변호사가 되어 1909(융희 3) 안중근(安重根)의 공판에 무료로 변호를 담당,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안동현(安東縣)에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으나 체포되어 평양(平壤)에 이송되었다. 옥고 중 병으로 보석이 되자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탈출, 홍통구(弘通溝)에서 김승만(金承萬) 등과 대한청년 연합회를 결성, 총재로서 많은 독립단원을 훈련시키고, 1920년 일본군에 다시 체포되어 관전현의 지사(志士) 황조안(黃祖安)의 알선으로 석방되어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법무차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안중식(安中植): 1861(철종 12)1919 ()는 심전(心田).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을 거쳐 양천(陽川)․통진(通津)의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산수(山水)․인물(人物)․화조(花鳥)의 그림을 잘 그렸고,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예서(隸書) 등 여러 가지 글씨에 뛰어났다. 일찍이 조석진(趙錫晋)과 함께 관비생(官費生)으로 중국에 유학, 1918년에는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조직, 회장이 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에도 능했다.

안승우(安承禹): ?1896(건양 1). ()는 계현(啓賢), ()는 하사(下沙). 지평(砥平) 출신. 류중교(柳重敎)의 문인. 1895(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제천(堤川)에서 이춘영(李春永)과 의병을 일으켜 맹영재(孟永在)의 의병 4백 명과 합류 이듬해 류인석(柳麟錫)의 휘하에 들어가 중군(中軍)이 되어 활약하던 중 충주(忠州)의 황강(黃岡) 싸움에서 전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안창호(安昌浩): 1878(고종 15)1938 ()는 도산(島山), 안흥국(安興國)의 아들. 평남 강서(江西) 출신.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 1895년 상경하여 1897년 구세학당(救世學堂)을 졸업하고 조교(助敎)로 있으면서 예수교에 입교하는 한편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했다. 1899년 강서(江西)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고, 1902년 도미(渡美), 초등학교를 다닌 후 이듬해 이산(離散)된 재미교포들의 권익 보호와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공립협회(共立協會)를 만들었다. 1907년 귀국,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민족 각성 운동을 전개,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 정주(定州)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웠으며,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기관지로 사용하고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과 평양에 도자기 회사를 세웠다. 1909(융희 3)에는 박중화(朴重華)․최남선(崔南善)․김좌진(金佐鎭)․이동녕(李東寧) 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결성하고 이듬해 북경(北京)을 경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1912년 미국에서 해외동포를 총망라한 대한인 국민총회(大韓人國民總會)를 조직, 총회장에 선임되고, 이듬해 로스앤젤레스에 청년학우회의 후신으로 흥사단(興士團)을 결성했다. 31 운동 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무총리 서리, 노동 총판을 역임하며「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했고, 흥사단 극동 임시위원부를 만들어 임시정부 육성과 민족계몽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1년 분열된 임시정부 내각통일에 힘쓰다가 실패하자 인책사직(引責辭職)하고 이듬해 서울에다 수양동지회(修養同志會)의 결성을 지시, 1923년에 국민대표회가 결렬 된 후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을 결성하여 이상촌(理想村)의 건설을 계획했다. 1925년 다시 미국에 돌아가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이듬해 만주 길림(吉林)에서 독립군 단체의 행동 통일을 토의하던 중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28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여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선언하고 이듬해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대전(大田)에서 66개월 동안 옥고를 치룬 뒤 가출옥하여 대보산(大寶山)에 들어가 휴양하다가 1937년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듬해 병보석(病保釋)되어 경성대학병원에 입원중 간경화증(肝硬化症)으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안중근(安重根): 1879(고종 16)1910 아명은 응칠(應七), 교명(敎名)은 도마, 진사(進士) 안태훈(安泰勳)의 아들. 황해도 해주(海州) 출신.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승마(乘馬)․궁술(弓術)을 익혀 문무(文武)를 겸했다. 1895년 천주교(天主敎)에 입교,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경영하던 석탄 상점을 팔아서 1907년 남포(南浦)에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운 후에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08(융희 2)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군 사령(俄領地區軍司令)의 직책을 맡아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慶興)까지 쳐들어와 일본군과 싸웠다. 1909(융희 3)에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등과 러시아 장상(藏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오는 이또오(伊藤博文)의 저격을 결의,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하얼빈 역에 잠입, 권총으로 이또오를 사살한 후 하얼빈 총영사 가와까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 이사(滿鐵理事) 다나까(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가 1910년 여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으며 재감 중(在監中)에 집필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은 해박한 사적감각(史的感覺)으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안명근(安明根): 안중근(安重根)의 종제(從弟). 신천(信川) 출신. 어렸을 때부터 안중근의 감화를 받고 항일운동에 투신. 이승훈(李昇薰)․김구(金九) 등과도 교유(交遊)가 있었다. 한일합방 후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남만주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계획, 황해도의 부호들에게서 자금을 염출(捻出)하다가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데라우찌(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계획하고 191012월 선천역(宣川驛)에서 거사하려다 피체, 일본경찰은 이를 계기로 애국지사의 체포를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0년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만주에 망명,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길림성(吉林省)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안 무(安 武): 1883(고종 20)1924 본명은 병호(秉鎬). 경성(鏡城) 출신. 1899년 구() 한국군 진우대(鎭衛隊)에 들어갔다가 경성교련관양성소(京城敎鍊官養成所)를 졸업, 진위대 교련관이 되었다. 1907년 군대해산으로 퇴직, 경성학교 체조교사가 되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 간도(間島)로 망명, 대한국민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이 되었다. 31 운동 후 독립군사령부(獨立軍司令部)를 창설, 군무위원(軍務委員) 및 사령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군비를 확장했다. 그후 도독부군(都督府君)과 합류하여 부관(副官)이 되고, 1920년 일본 제19사단 소속부대와 봉오동(鳳梧洞) 부근에서 접전하여 일본군 120명을 사살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2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밀산(密山)으로 이동,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조직에 참가했다가 이듬해 국민군(國民軍)을 인솔하고 러시아의 자유시(自由市)로 들어가 고려군정의회(高麗軍政議會)와 합류했다. 1923년 국민군사령관(國民軍司令官)으로 북경(北京)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 이듬해 용정(龍井)에 본부를 두고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대의 습격으로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용정(龍井) 자혜병원(慈惠病院)에서 치료를 거절하고 죽었다.

안희제(安熙濟): 1885(고종 22)1943 ()는 백산(白山). 경남 의령(宜寧) 출신.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졸업한 후 동래(東萊) 귀명학교(龜明學校), 의령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창설했다. 1909(융희 3) 서상일(徐相日)․신성모(申性模)․박중화(朴重華) 등과 항일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남북 만주․시베리아를 유랑, 각지 독립군 기지를 돌아보고 3년 후 귀국,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경영, 무역업에 종사하는 한편 그 곳을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의 연락처로 삼았다. 1925년 운영 난에 처한 <중외일보(中外日報)>를 인수하여 <중앙일보(中央日報)>로 개칭,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만주로 망명,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건립, 교포의 생활안정과 청소년 후진 교육에 힘썼다. 한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총본사 전강(總本司典講)․교적간행 회장(敎籍刊行會長) 등을 역임하다가 1942년 일본 경찰에 잡혀 9개월만에 병 보석이 되었으나 이듬해 목단강(牧丹江) 병원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안세환(安世桓): 1887(고종 24)1926 평남 순안(順安) 출신, 숭실중학(崇實中學)을 졸업, 숭실전문학교에 재학중 1911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抗訴審)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후 평양에서 기독교서원(基督敎書院) 총무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과 종교활동을 했다. 1919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이승훈(李昇薰)을 도와 활약하다가 투옥, 출옥 후 정신이상이 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안재홍(安在鴻): 1891(고종 28)1965 ()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平澤) 출신.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경과(政經科)를 졸업, 1916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 그후 다시 귀국하여 중앙고보(中央高普) 교감, 기독교 교육부 간사를 역임했다. 31 운동 때 만세운동을 지휘하고 이어 대한청년 외교단을 조직,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다가 잡혀 3년간 복역했다. 1923년「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하여 이사(理事)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 겸 주필로 10년간 재직, 또한 물산장려회(物産獎勵會) 이사로 국산품 장려운동을 창도(唱導)했다. 1925년 신간회(新幹會) 총무가 되었으나 일본 관헌에게 피체, 8개월간 복역, 1936년 임시정부와의 내통(內通)이 발각되어 2년간 복역(服役)했고,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1년간 수감되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19459월에 탈퇴, 국민당(國民黨)을 조직하여 당수에 취임했다. 이어 한독당(韓獨黨) 중앙위원을 지내고 1946년 한성일보사 사장․비상국민회의 위원․민주의원 의원․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위원․남조선 과도(過渡) 입법위원을 역임하고, 이해 미군정청(美軍政廳) 민정장관이 되었다. 대한민국 수립으로 퇴임, 다시 한성일보사 사장을 지낸 후 1950년 평택에서 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사변 중 납북되어 평양에서 죽었다. 한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정교를 거쳐 대형(大兄)이 되고 원로원 참의(元老院參議)를 지냈다.

안창남(安昌男): 1900(광무 4)1930 서울 출신. 목사(牧師)의 아들로서 미동소학교(渼洞小學校)를 졸업하고 미국인 비행사 스미스의 시범 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1918년 도일(渡日), 오오사까 자동차학교(大阪自動車學校)를 거쳐 아까바네 비행기 제작소(赤羽飛行機製作所)에서 비행기 제작법을 배웠고, 다시 오꾸리 비행학교(小栗飛行學校)에서 조종술을 배운 다음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1921년 비행사 시험에 합격, 이해 도오꾜오(東京) 오오사까 간 우편 비행기의 조종사가 되었다. 이듬해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후원으로 고국 방문비행을 하여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그후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이상재(李商在) 등의 주선으로 상해(上海)로 탈출, 여운형(呂運亨)의 소개로 산서성(山西省)에 가서 염석산(閻錫山) 장군 휘하의 태원비행학교(太原飛行學校) 교관이 되었으며, 뒤에 중국의 혁명전선(革命戰線)에 참가했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안익태(安益泰): 1905(광무 9)1965 평양 출신.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를 수료, 일본 구니다찌음악학교(國立音樂學校)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1 930년 도미(渡美),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학교에 입학, 뒤이어 신시내티 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공을 전공했다. 1936년 유럽에 건너가고, 이듬해 비엔나에서 리히아르트 쉬트라우스에게 사사(師事), 영국 민요를 따라 부르던 애국가를 새로이 작곡하고, 1939년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에 들어갔다. 그후 지휘자로서 각국을 순례, 교향악단을 지휘했으며 스페인 여자 타라베라와 결혼, 스페인 국적을 얻어 마드리드 마욜카 교향악단의 상임(常任) 지휘자가 되었다. 1957년 귀국하여 자작곡 <강천성악(降天聲樂)> <한국환상곡(韓國幻想曲)> 등을 지휘, 1961년에 다시 귀국하여 1963년까지 3회에 걸쳐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개최했다. 생전에 영국의 로이얼 필하모니, 이탈리아의 로마 교향악단을 비롯, 각국의 유명한 2백여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196574일 런던 로이얼 알버어트 뉴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초청지휘자로 취후 작품인「애()! 강상(江上)의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연주하고 이해 917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죽었다. 1957년 문화포상(文化褒賞)을 받고,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文化勳章大統領章)이 추서(追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