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월엄씨(寧越嚴氏) ,영월엄씨시조,엄임의(嚴林義),영월엄씨유래,영월엄씨조상

작성일 : 2017-04-22 16:00 수정일 : 2018-01-07 10:56

영월엄씨시조 및 영월엄씨유래

영월엄씨(寧越嚴氏)의 시조(始祖) 엄임의(嚴林義)는 한()나라 시인(詩人) 부양(富陽 : 一名 嚴子陵先生)의 후예이며 당()나라 상국(相國) 화음(華陰)의 일족(一族)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당()나라 현종(玄宗 : 6대 임금, 재위기간 : 712756)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인근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 신라(新羅)에 동래(東來) 하였다가 본국(本國)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영월 땅인 내성군(奈城郡)에 안주(安住)한 것이 우리 나라 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조에 와서 그를 내성군(奈城君)에 추봉(追封)하고 후손들에게 영월(寧越)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자, 후손들이 그 곳에 살면서 영월(寧越)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영월(寧越)은 강원도(江原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생군(奈生郡)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영월로 고쳐서 원주(原州)에 편입 시켰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부()로 승격하고 1895(고종 32) 영월군(寧越郡)이 되었다. 특히 엄씨의 관적지(貫籍地)인 영월읍 하송리(寧越邑下松里)에는 처음 엄시랑(嚴侍郞)이 정착하면서 손수 심었던 은행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수령(樹齡)을 자랑하는 보수(寶樹)천연기념물 제76로 지정되었으며, 신기하게도 이 은행나무는 경술국치(庚戌國恥) 때와 을유해방(乙酉解放) ()에 동편의 큰 가지가 부러졌고, 625 동란 시에는 북편의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국가의 대이변(大異變)이 있을 때마다 무언(無言)의 예시(豫示)가 있었다고 한다.


영월 엄씨는 시조의 아들 3형제 대()에 와서 장남 태인(太仁)이 고향을 지키며 군기공파(軍器公派)를 이루었고, 차남 덕인(德仁)은 한양(漢陽)으로 이주(移住)하여 복야공파 파조(僕射公派派祖)가 되었으며, 3남 처인(處仁)은 함경도(咸鏡道)로 이주하여 문과공파 파조(文科公派祖)가 되어 현재 그의 후손들이 북한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대()를 거듭 하면서 참봉공계(參奉公系)․교수공계(敎授公系) 37계통으로 갈라져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특히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졌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11세손 유온(有溫:준의 아들)이 조선 창업(創業)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총제(同知總制)를 역임했고, 판관(判官) 한저(漢著)의 아들 흥도(興道)가 절행(節行)으로 뛰어났다.


숙부(叔父)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王位)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폐되었던 단종(端宗)이 화()를 당하자 명에 의하여 시신이 강물에 던져져 옥체(玉體)가 둥둥 떠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옥 같은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시신을 거두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御命)에 아무도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영월 호장(寧越戶長)이라는 미관말질(微官末職)에 있던 흥도(興道)가 관()을 마련하여 선산(先山)에 장사 지내고 좋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면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는 말을 남긴 후 영남지방으로 피했다. 후환이 두려워 세인(世人)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한 흥도의 충절은, 선조(宣祖) 때 그의 영웅성이 재 평가 되어 후손을 찾아 증손 한례(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해 주고 단종릉(端宗陵)인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였으며, 현종(顯宗)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비로소 그 후손들이 세상에 나와 벼슬에 등용되었다. 영조(英祖) 때 와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 순조(純祖)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가자(加資) 되었으며 시호(諡號)가 충의(忠毅)로 내려져,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영월 창절사(彰節祠)와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 되었다.


시조의 16세손 흔()은 중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정자(正字)를 지냈고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수찬(修撰)과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輔德)을 지냈다. 그는「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에 그 행적(行蹟)이 등재(登載)되어 영월 엄씨를 더욱 빛냈으며, “()으로 패()한 일 보며 악()으로 이긴 일을 보았는가, 이 두 즈음에 취사(取捨) 안이고 명백(明白)한 가, 평생(平生)에 악한 일 아니하면 자연유성(自然有成)하리라라는 시조(時調) 한 수가「가곡원류(歌曲源流)」에 전한다.

()의 현손 집(: 성구의 아들)은 숙종(肅宗) 때 정언(正言)과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와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낸 후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장희빈(張禧嬪)의 처벌을 주장했으며, 청렴 결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광해군(光海君)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냈으며 폐모론(廢母論)에 유생(儒生)을 이끌고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가 파직 당한 성(), 효종(孝宗) 때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나갔던 황()이 유명했고, 성의 조카 정구(鼎耈)는 효종(孝宗) 때 좌승지(左承旨)로 김자점(金自點)의 옥사에 연루 되었으나 무고함이 밝혀져 뒤에 교리(校理)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한석봉(韓石峯) 이후의 명필로 이름났던 한명(漢明)은 고금의 서법(書法)을 집대성한「집고첩(集古帖)」과「만향제시초(晩香薺詩抄)」 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엄문(嚴門)을 대표했으며, ()의 아들 경수(慶遂)는 숙종(肅宗)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여,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와서「연행록(燕行錄)」을 간행한 숙(), 순조 때 암행어사를 지낸 도(), 고종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석정(錫鼎)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세영(世永)은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신내각이 수립될 때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을 역임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한 후 군자금(軍資金)을 모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정섭(正燮)과 더불어 충절(忠節)의 전통 가문인 영월 엄씨(寧越嚴氏)를 더욱 빛냈다.

201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월 엄씨(寧越嚴氏)는 남한(南韓)139,68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영월엄씨조상

엄태인(嚴太仁): 고려(高麗) 때 검교(檢校) 군기감(軍器監) ()을 지냈다.

엄개실(嚴介實): 고려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엄광(嚴 光): 고려 때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오르고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하였다.

엄공근(嚴公瑾): 고려(高麗)에서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엄익렴(嚴益濂): 고려(高麗) 때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엄수안(嚴守安): ?1298(충렬왕 24). 영월 군리(寧越郡吏)를 거쳐, 중방(重房)의 서리(書吏)가 되고,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도병마 녹사(都兵馬綠事)가 되었다. 1268(원종 9) 주살(誅殺)된 김 준(金 俊)의 아들 주()의 반란 음모를 고변(告變), 그 공으로 낭장(郎將) 겸 어사(御使)가 되고, 이어 동경 판관(東京判官)이 되었다. 안찰사(按察使) 이숙진(李淑眞), 금주 방어사(金州防禦使) 김 훤(金 暄)과 함께 1271년 방 보(方 甫)․박 평(朴 平)․박경순(朴慶純)등의 반란을 평정했다. 1275(충렬왕 1) 중랑장(中郞將)으로 충청도 안찰사(忠淸道按察使)가 되고, 전법총랑(典法摠郞)․남경 부유수(南京副留守)를 거쳐, 1285년 남경부사(南京副使), 1290년 충청도 지휘사(忠淸道指揮使)를 지냈다. 1292년 서경 유수(西京留守)로서 서북면지휘사(西北面指揮使)를 겸했으며,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치사(致仕)했다.

엄효량(嚴孝良): 고려(高麗) 때 명천 현감(明川縣監)을 지냈다.

엄용도(嚴用度): 조선(朝鮮) 때 군기시(軍器寺) ()을 역임하였다.

엄이도(嚴以度): 조선(朝鮮) 때 군기시(軍器寺) ()을 지냈다.

엄안도(嚴安度): 조선(朝鮮) 때 군기시(軍器寺) ()에 이르렀다.

엄유온(嚴有溫): 고려조에서 동지총제(同知摠制)를 역임하였다.

엄흥도(嚴興道): 시호(諡號)는 충의(忠毅). 영월(寧越)의 호장(戶長)으로 단종(端宗)이 영월에서 죽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돌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관()을 준비, 장례를 치르고 몸을 숨겼다. 현종(顯宗) 때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그의 자손이 등용되고, 영조(英祖) 때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엄간(嚴 幹):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엄송수(嚴松壽): 조선(朝鮮) 때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엄용순(嚴用順):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칭송을 받았다.

엄 흔(嚴 昕): 1508(중종 3)1553(명종 8) ()는 계소(啓昭), ()는 십성당(十省堂), 부장(部將) 용화(用和)의 아들. 1525(중종 20) 생원(生員)이 되고, 152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검열(檢閱)․정자(正字)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이어 저작(著作)․수찬(修撰)․이조좌랑(吏曹佐郞)등을 거쳐 1541년 전한(典翰)이 되고, 뒤에 사인(舍人)이 이르렀다. 시조(時調) 1수가「가곡원류(歌曲原流)」에 전한다.

엄성(嚴 惺): 1575(선조 8)1628(인조 6). ()는 경보(敬甫), ()는 동강(桐江), 평시서 직장(平市署直長) 인달(仁達)의 아들. 1612(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어 설서(說書)를 겸임, 이듬해 검열(檢閱)을 지내다가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유생(儒生)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여 파직 당했다. 그 후 벼슬을 단념하고 양산(梁山)에 머물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사관(史官)이 되고, 1625년 사간(司諫)을 거쳐 부교리(副校理)․전적(典籍)․집의(執義) 등을 역임, 1627년 부응교(副應敎)에 이르렀다.

엄황(嚴 愰): 1580(선조 13)1653(효종 4). ()는 명보(明甫), 무과(武科)에 급제,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1606(선조 39) 남해 현령(南海縣令)이 되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都事)로 비변사(備邊司) 낭관(郎官)을 겸임했다. 그 후 안동 판관(安東判官)․함안 군수(咸安郡守) 등을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이어 평산(平山)과 의주(義州)의 부윤(府尹)을 지내며 북변의 방위를 담당했다. 뒤에 전라도 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를 거쳐 1648(인조 26) 홍청도 수군절도사(洪淸道水軍節度使)를 역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부총관(副摠管)을 겸했으며, 1652(효종 3)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엄정구(嚴鼎耈): 1605(선조 38)1670(현종 11) ()는 중숙(重叔), ()는 창랑(滄浪),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의 아들. 1630(인조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고, 정언(正言)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설서(說書)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왕을 호종(扈從)했다. 이듬해 돌아와 지평(持平)이 되고, 1638년 충청도 염문사(廉問使)를 거쳐 수찬(修撰)․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이어 수찬(修撰)․의성 현령(義城縣令) 등을 역임, 1648년 이조(吏曹) 정랑(正郞)에 올랐다. 1651(효종 2) 좌승지(左承旨)로 재직 중 김자점(金自點)이 처형되고 그 일당이 제거될 때, 평소에 그와 안면이 있었다 하여 극형(極刑)을 선고받았으나 좌의정 한흥일(韓興一)이 과거 그가 김자점 일당의 천거를 거부한 사실을 들어 구명(救命)을 호소, 면천(沔川)에 부처(付處)되는 것으로 그쳤다. 그 뒤 등용되어 태복시(太僕寺)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거쳐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에 이르렀다.

엄경중(嚴慶重):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엄집(嚴 緝): 1635(인조 13)1710(숙종 36). ()는 경지(敬止), ()는 만회(晩悔), 시호(諡號)는 정헌(貞憲), 성구(聖耈)의 아들. 1673(현종 1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78(숙종 4)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부교리(副校理)․사간(司諫)․집의(執義)․승지(承旨) 등을 역임, 1696년 개성부(開城府) 유수(留守)에 올랐다가 1698년 도승지(都承旨)에 전임했다. 1701년 공조(工曹) 판서(判書)로서 장희빈(張禧嬪)의 처벌을 주장했고, 이듬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러 병으로 사퇴했다.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만년에 병이 들었으나 약을 쓰지 못하던 중, 이 사실이 좌의정 서종태(徐宗泰)에 의해 알려지자 임금이 하사한 약으로 치료했다.

엄경수(嚴慶遂): 1672(현종 13)1718(숙종 44). ()는 중성(仲成), ()는 부재(孚齋), 예조판서 집()의 아들. 1705(숙종 31) 진사(進士)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716(숙종 42)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등용되고, 이해 교리(校理)로서 관작(官爵)이 추탈(追奪)된 윤 증(尹 拯)을 변호하는 상소를 하여 삭출(削黜)당했다.

엄한명(嚴漢明): 1685(숙종 11)1759(영조 35). ()는 도경(道卿), ()는 만향재(晩香齋), 의길(義吉)의 아들. 초서(草書)․예서(隸書)에 뛰어나고 특히 쌍구전묵(雙鉤塡墨)에 능했다. 고금의 서법(書法)을 모사(模寫),「집고첩(集古帖)」을 만들었으며, 많은 비갈(碑碣)을 써서 한 호(韓 濩) 이후의 제 1인자라는 찬송을 받았다. 그 이름이 청나라에 알려져 옹정제(雍正帝)가 사신을 통해 비단 1 ()과 경화문(景化門)이란 3자를 하사했다.

엄륜(嚴 綸): 조선(朝鮮)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엄숙(嚴 璹): 1716(숙종 42)1786(정조 10) 초명(初名)은 인(), ()는 유문(孺文), ()는 오서(梧西), 시호(諡號)는 숙헌(肅憲), 수찬(修撰) 경수(慶遂)의 아들. 1753(영조 2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75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교리(校理)․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을 역임, 1771년 형조(刑曹) 참판(參判)이 되었다. 1773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그 동안의 일기(日記)를 간행했다. 뒤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엄계응(嚴啓膺): 1737(영조 13)1816(순조 16). ()는 치수(稚受), ()는 약오(藥塢)․연석(燕石), 한명(韓明)의 아들. 그림에 뛰어났으며 글씨와 시()에도 능했다. 벼슬은 동지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엄경하(嚴慶遐): 조선조(朝鮮朝)에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엄우(嚴 瑀): 조선(朝鮮) 때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엄사만(嚴思晩): 조선(朝鮮)에서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엄치욱(嚴致郁): 조선(朝鮮) 때 화가(畵家)로 명성을 얻었다.

엄기(嚴 耆): 조선(朝鮮)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엄돈영(嚴敦永): 조선(朝鮮) 때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엄도(嚴 燾): 1777(정조 1)?. ()는 진여(晋汝), 판서 숙()의 손자, 사헌(思憲)의 아들. 사면(思勉)에게 입양(入養). 1813(순조 1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22년 교리(校理)로서 전년(前年)에 죽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빈궁(殯宮)을 옮겨야 한다고 직언(直言)했다. 후에 암행어사(暗行御史)․부시관(副試官)․부수찬( 副修撰) 및 예방승지(禮房承旨) 등을 거쳐 헌종(憲宗) 때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엄석정(嚴錫鼎): 1801(순조 1)1875(고종 12) ()는 대우(大友), ()는 가당(稼堂), 참판(參判) ()의 아들. 1828(순조 28) 진사(進士)가 되고, 헌종(憲宗) 때 당진 현감(唐津縣監)을 거쳐 1844(헌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철종(哲宗) 때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거쳐, 1872(고종 9)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뒤에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엄세영(嚴世永): 1831(순조 31)1899(광무 3) ()는 윤익(允翼), ()는 범재(凡齋), 시호(諡號)는 숙민(肅敏), 석우(錫愚)의 아들. 1864(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74년 전라우도 암행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가 되고 승지(承旨)를 거쳐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에 승진, 1884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이듬해 인천 부사(仁川府使)로 감리인천구통상사무(監理仁川口通商事務)가 되고, 1893년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이듬해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나자 삼남 염찰사(三南廉察使)로 나가 혼란한 민심을 수습했고, 이해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신내각 이 수립될 때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이 되었다.

엄인섭(嚴仁燮):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가 전제덕(全齊德)의 의병부대에 가입, 1908(융희 2) 좌군 영장(左軍領將)이 되어 우군(右軍) 영장(領將) 안중근(安重根)과 함께 경흥(慶興)에 들어와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 수명을 사살하고 이어 국경지대의 여러 수비대를 습격, 전과를 올렸으나 많은 부하를 잃고 철수했다. 뒤에 시베리아에서 농업을 종사했다.

엄순봉(嚴舜奉): ?1938. 일명(一名) 형순(亨淳), 경북 영양(英陽) 출신. 1933년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 청년부장(靑年部長)이 되고, 재만 조선인 무정부주의자연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한 후에 백정기(白貞基)․정화암(鄭華岩) 등과 상해(上海)로 갔다. 1934년 상해 조선인 거류민회 회장인 친일파 이영로(李榮魯)를 살해하여 1936년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엄정섭(嚴正燮): 1885(고종 22)1960. 충청도 중원(中原) 출신. 1916년 박상진(朴尙鎭)․임세규(林世圭) 등과 대구에서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군자금(軍資金) 모집과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듬해 이종국(李鍾國)의 배반으로 광복회에 검거선풍이 불자 김홍경(金弘卿)․김세진(金世鎭) 등으로 이름을 바꾸고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광복회(光復會) 사건으로 총독부의 궐석(闕席) 재판(裁判)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