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나주오씨시조(羅州吳氏),오숙규(吳淑珪),나주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4 12:57 수정일 : 2018-02-19 14:4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나주(羅州)는 전라남도(全羅南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 발라군(發羅郡)인데 통일신라시대에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錦城)이라 하였고, 고려 태조(太祖) 때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나주오씨세보(羅州吳氏世譜)」에 의하면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중엽에 진사(進士)를 지낸 오숙규(吳淑珪)이며,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언(偃)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선조(先祖)들의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인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

언(偃)의 4세손인 자치(自治)는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된 뒤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고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

또한 선조(先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겸(謙)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남원부사(南原府使)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이르고 금양군(金陽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주사고(全州史庫 : 실록을 보관하던 서고)의 실록(實錄)을 병화(兵火)로부터 잘 보존하는데 공(功)이 큰 희길(希吉)과, 학행(學行)이 뛰어났던 효석(孝錫) 등이 가문(家門)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오씨(羅州吳氏)는 남한(南韓)에 18,1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나주오씨조상인물

오언(吳 偃) 고려조(高麗朝)에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였다.

오제(吳 偍) 고려(高麗)에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시중(侍中)을 역임하였다.

오탁진(吳卓眞) 자(字)는 숭정(崇靖), 호(號)는 송은(松隱). 고려 때 학행(學行)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천거되었으나 불취하였다

오계진(吳季眞)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추증되었다.

오중달(吳仲達) 자(字)는 가원(可遠), 호(號)는 남강(南江).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성균관 제주(成均館祭酒)를 거쳐 보문각(寶文閣)․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으나 조선 태조(太祖)가 등극하자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오맹손(吳孟孫) 자(字)는 정조(正祖). 조선에서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오숙손(吳叔孫) 자(字)는 승조(承祖), 호(號)는 정재(靜齋). 조선조(朝鮮朝)에 개성부 소윤(開城府少尹)․충주 목사(忠州牧使) 등을 지냈다.

오수손(吳秀孫) 자(字)는 영조(永祖). 조선 때 음보(蔭補)로 좌랑(佐 郞)․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역임하였다.

오신교(吳愼交) 조선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역임하였다.

오필상(吳弼相) 자(字)는 우생(佑生). 조선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오세상(吳世相) 자(字)는 익신(益臣), 호(號)는 퇴암(退菴). 조선(朝鮮)때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거쳐 춘추관 수찬(春秋館修撰)을 역임하였다.

오한상(吳漢相) 자(字)는 청신(淸臣), 호(號)는 석천(石川). 조선조에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추증되었다.

오자치(吳自治) 시호(諡號)는 양평(襄平).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올랐으며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내고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

오첩(吳 牒)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오언도(吳彦都) 자(字)는 대훈(大勳), 호(號)는 월계(月溪). 조선에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봉상시정(奉常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오세한(吳世翰) 조선조(朝鮮朝)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오겸(吳 謙) 1496(연산군 2)~1582(선조 15)

자(字)는 경부(敬夫), 호(號)는 지족암(知足庵)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부사(府使) 세훈(世勳)의 아들. 류 우(柳 藕)의 문인. 1522년(중종 17) 진사(進士)가 되고, 153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헌납(獻納)․장령(掌令)․집의(執義)․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역임했다.

1547년(명종 2)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고, 1550년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경주부윤(慶州府尹)․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1557년 호조 참판(戶曹參判), 1559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승진, 뒤에 이조․병조․호조의 판서(判書)․대사헌(大司憲)․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다.

1564년 우찬성(右贊成)이 되고, 이듬해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며,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1571년(선조 4) 좌찬성(左贊成)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명종실록(名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오희도(吳希道) 자(字)는 득원(得原), 호(號)는 명곡(明谷). 조선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오희길(吳希吉) 자(字)는 길지(吉之), 호(號)는 도암(韜庵), 언기(彦麒)의 아들. 김인후(金麟厚)․기효간(奇孝諫)의 문인. 1589년(선조 22) 천거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全州)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태조의 영정(影禎)․제기(祭 器)와 역대의 실록(實錄)을 내장산(內藏山)에 봉안하고 이듬해 7월까지 지켰다.

임진왜란으로 다른 사고(史庫)의 실록이 모두 없어졌으나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이 보존됨으로써, 난(亂) 후에 다시 여러 벌 만들어 오늘날 실록을 볼 수 있게 한 공로자이다. 난이 끝나자 폐정(弊政)의 쇄신과 인심 수습책을 상소, 선조의 동의를 얻고, 사근도찰방 (沙斤道察訪)을 거쳐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이르렀다. 고창(高敞)의 월계정사(月溪精舍)에 제향(祭享)되었다.

오득린(吳得鄰) 자(字)는 필방(弼邦), 호는 구암(구岩),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 무관으로서 옥포․당포․ 노량 대첩에 참전하여 공을 세움,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락원정(장락원정)을 지냈다.

오이정(吳以井) 1579(선조 12)~1615(광해군 7)

자(字)는 명중(明仲), 호(號)는 장계(藏溪), 검열(檢閱) 희도(希道)의 아들. 정홍명(鄭弘溟)의 문인. 1590년(선조 23)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학문에만 전심하는 한편 거문고를 즐겼다.

오이규(吳以奎) 자(字)는 빈중(贇中), 호(號)는 지천(支川). 조선 효종(孝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학문(學問)과 효행(孝行)으로 이름났다.

오이익(吳以翼) 자(字)는 자서(子叙), 호(號)는 석문(石門). 1652년(효종 3)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좌랑(兵曹佐郞) 겸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함평 현감(咸平縣監)을 지낼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오효석(吳孝錫) 1620(광해군 12)~ 1696(숙종 22)

자(字)는 선이(善詒), 호(號)는 생로당(生老堂)․대명동인(大明洞人), 이구(以久)의 아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했다 하여 비관하고 나주(羅州)에 은거했다. 학행(學行)이 뛰어났고, 송시열(宋時烈)과 교제가 있었다.

오석하(吳碩夏) 조선(朝鮮) 때 직강(直講)을 지냈다.

오현주(吳鉉冑) 조선조(朝鮮朝)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오정원(吳鼎源) 자(字)는 군포(君포), 호(号)는 만범(만범), 조선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 경주부윤, 대사간(大司諫)을 역임 하였다.

오한원(吳翰源) 자(字)는 공예(公예), 호(号)는 산운관(山雲館), 조선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 개성유수, 호조참판을 역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