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울산오씨시조(蔚山吳氏),오연지(吳延祉),울산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4 14:07 수정일 : 2018-04-05 12:1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울산오씨 시조는 학성군(鶴城君) 오연지(吳延祉)이다.「울산오씨족보(蔚山吳氏族譜)」에 의하면 오연지(吳延祉)는 고려(高麗) 때 군기감(軍器監)을 지내고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동남 변경(東南邊境)에 출몰한 왜구(倭寇)를 토평(討平)하여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울산(蔚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울산(蔚山)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동해안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新羅) 굴아화촌(屈阿火村)인데 파사왕(婆裟王)이 현(縣)을 두었고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은 하곡(河曲)으로 개명(改名)하여 임관(臨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태조(太祖)는 흥려부(興麗府)로 승격시켰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397년(태조 6) 진(鎭)을 두었고 1413년(태종 13)에는 진(鎭)을 파(罷)하고 울산(蔚山)으로 개칭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1599년(선조 32) 부(府)로 승격하였고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어 1931년 울산면이 울산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62년 읍이 울산시(蔚山市)로 승격하였다.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蔚山光域市)로 승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 오연지의 손자 수천(受天)이 고려(高麗)에서 정의대부(正義大夫)로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지냈으며, 증손 식(湜)이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형조 참의(刑曹參議)․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를 거쳐 경주 부윤(慶州府尹) 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5세손 흠로(欽老)는 세종(世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제용 판관(濟用判官) 및 황주 판관(黃州判官)을 지냈다. 이 괄(李 适)의 난 때 왕(王)을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策錄)된 도남(道男)과 장사랑(將仕郞) 적남(迪男), 그리고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경사(經史)에 깊은 조예가 있어 덕망(德望)이 높았던 탁(琢) 등이 유명하였다.

이외에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환(瓛),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른 필제(必濟),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른 찬웅(贊雄), 그리고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한 병규(炳奎) 등이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산오씨(蔚山吳氏)는 전국에 3,0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울산오씨조상인물

오현을(吳賢乙): 고려조(高麗朝)에 승선(承宣)을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오수천(吳受天): 고려 때 정의대부(正義大夫)로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오식(吳 湜): 자(字)는 위숙(渭叔), 호(號)는 임계(臨溪), 시호(諡號)는 정간(靖簡). 1402년(태종 2)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1406년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거쳐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가 되어 수조법(收租法)을 계청(啓請)하여 이를 시행(施行)케 하였다. 또한 제주(濟州)를 대정(大靜)․선의(旋義)․양현(兩縣)으로 나눌 것을 계청(啓請)하여 허락을 얻었으며, 그후 형조 참의(刑曹參議)․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등을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 겸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오흠로(吳欽老): 자(字)는 중안(仲安), 호(號)는 망천(輞川). 길 재(吉再)의 문인(門人).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오달민(吳達民): 자(字)는 상지(尙之). 조선조(朝鮮朝)에 하동 현감(河東縣監)을 역임하였다.

오달정(吳達貞): 자(字)는 상문(尙文), 호(號)는 간은(澗隱), 김숙자(金叔滋)의 문인. 조선조(朝鮮朝)에 성현 찰방(省峴察訪)을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만경(萬頃)․임피(臨陂)의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오달선(吳達善): 자(字)는 상무(尙武). 세조(世祖) 때 산음 현감(山陰縣監)을 지냈다.

오환(吳 瓛): 조선조(朝鮮朝)에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였다.

오탁(吳 琢): 호(號)는 양성재(養性齋). 1480년(성종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82년(성종 13) 문과에 급제한 후 은율 현감(殷栗縣監)에 이르렀으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인 관계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풀려나 황계(黃溪)에 돌아와 경사(經史) 연구에 전념하였다.

오경(吳 璥): 조선(朝鮮) 때 선교랑(宣敎郞)으로 경흥 교수(慶興敎授)를 지냈다.

오침(吳 琛): 조선에서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거쳐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냈다.

오사의(吳士誼): 중종(中宗) 때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를 거쳐 판관(判官)을 지냈다.

오해(吳 海): 조선 선조조(先祖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양위 좌부장(龍驤衛左部將)을 지내고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오언기(吳彦麒): 조선조에 강원 감사(江原監司)를 지냈다.

오희열(吳希說): 조선에서 음사(蔭士)로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오희윤(吳希尹): 조선(朝鮮) 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역임하였다.

오술남(吳述男): 조선(朝鮮) 때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를 지냈다.

오도남(吳道男):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亂) 때 왕(王)을 공주(公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오천근(吳天根): 자(字)는 숙도(叔度), 호(號)는 기민와(旡悶窩). 조선(朝鮮)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오세기(吳世起): 자(字)는 현여(顯汝).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오필제(吳必濟): 자(字)는 여즙(汝楫).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오찬웅(吳贊雄): 자(字)는 자정(子正). 조선(朝鮮)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오병규(吳炳奎): 자(字)는 사빈(士彬), 호(號)는 당괴당(堂槐堂). 조선조(朝鮮朝)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