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함양오씨(咸陽吳氏) 시조 오광휘(吳光輝): 득관조의 휘는 광휘요 자는 유원(攸元)이며 호는 송천(松泉)이다

작성일 : 2017-04-24 14:30 수정일 : 2018-02-05 12:48

함양오씨(咸陽吳氏)의 약사(略史)

1)관향 함양(貫鄕 咸陽): 함양은 전북과 경계한 소백산맥 동부의 서부경남에 위치한 고을로 문헌상 최초의 이름은 속함(速咸)이다. 원래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완충지대로서 가야땅 이었으나 진흥왕의 정복으로 속함군이라 명명하였다가 경덕왕 때(757) 천령군(天嶺郡)이라 개칭하였다. 속현이 둘인데 운봉현(전북)과 안의현이었다, 고려 성종때(959)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되었으나 현종때(1012) 함양군(含陽郡)→인종때 “含“자를 ”咸“자로 고쳐 咸陽郡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4년 안의군 7개면을 합쳐 현함양군 영역이 되었으며 1957년 함양면과 석복면을 합쳐 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산수가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하며 인심이 순후하고 좌안동 우함양(左安東 右咸陽)이라는 말처럼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보사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도래한 동방오씨족이 처음으로 정거한 곳이 이곳 함양이다. 이런 연유로 시조공께서 함양부원군으로 봉군되고 또 이곳으로 귀거래하여 선화(仙化)하였으므로 함양을 관향으로 조종발상의 조토(祚土)로 삼게 되었다.

2) 동국오씨 소종래(東國吳氏 所從來): 오씨는 원래 토착성이나 사성(賜姓)이 아니라 중국에서 도래한 이주민의 성이다. 그러므로 분관(分貫)되기 전의 오씨를 총칭하여 동국오씨라 한다. 최초로 吳姓을 사성받은 사람은 오나라 마지막 왕 부차(夫差)의 손자 누양(縷羊)으로 위(衛)나라에 정주했을 때 위왕이 오나라에서 왔다하여 사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양 후에 전국시대 병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가 있고 오기의 후예(45세손)에 오첨(吳瞻)이 있었다.

중국의 5-6세기(418-589)는 5호16국→남북조시대(五胡十六國→南北朝時代: )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정치적 혼란을 피하여 한반도로 이주해 왔다. 그시기에 오씨족도 서해안 해남에 이주하여 반도의 서남부에 많이 살았는데, 추앙받을 대표적 상징적 인물이 강남지역에서 무역하다가 동래한(500) 오첨공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동국오씨의 상계(上系)는 오첨공을 비조로하여 연원하고 그가 동래한 지증왕(智證王) 원년(500년 庚辰)을 동래원년으로 삼고 있다. 신라에 귀속한 첨공의 아들(2세) 오응(吳膺)은 진흥왕이 가야지방을 정복한 560년대에 속함땅의 관백이 되어 현 함양땅에 정거의 터전을 잡았다. 이래 자손들은 함양을 중심으로 영․호남에 흐터져 살게 되었다.

동국오씨 상계는 무혜공(武惠公) 오첨의 한반도 서남방 동래설과 영호남 정거설을 바탕에 깔고 24세계(世系)로 계열화 되어 있다. 그중 역사상 활약한 현조들은 7세기의 오기(吳起: 三國史記 문무왕조: 화랑세기 필사본 위작논쟁에서 김씨설도 있음), 9세기의 오다련(吳多憐: 장화왕후 父), 10세기의 장화왕후(莊花王后 吳氏: 고려태조비), 11세기 여진정벌의 오연총장군(吳延寵: 예종조)등이다. 23세 오수권(守權)의 아들(24세) 현보(賢輔; 海州君), 현좌(賢佐; 高敞君), 현필(賢弼; 寶城君)공에 이르러 12세기경 각관 오씨로 분적하게 되었다.

3) 함양오씨 시조 오광휘(吳光輝): 득관조의 휘는 광휘요 자는 유원(攸元)이며 호는 송천(松泉)이다. 고려 명종조에서 고종연간에 활약하였으나 생졸년은 미상이다. 문과에 장원하여 유학진흥에 공헌하였으므로 벼슬이 상서성 좌복야(左僕射)에 이르고 흥위위(興威衛) 상장군이 되어 활약하였다. 고종초 명주(溟洲)와 삼척등지의 반적을 토멸하여 평화를 얻고 북쪽 거란의 침입을 무찌른 공적으로 추충정난광국공신(推忠靖難匡國功臣) 일등훈에 책록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진 문무겸전 입상출장(入相出將)의 대인풍이었다.

그러나 만년 치사(致仕) 낙향하여 임천(林泉)간에서 시서로 자오(自娛)하다가 천년(天年)을 다하였다. 군남(郡南) 화장산(花藏山) 남록 자자원(子坐原)에 예장하고 文度의 시호가 내리니 이로부터 자손들이 보성오씨에서 분적하여 함양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연면하였다. 묘소는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뒷산 화장산에 보존되어 있고 시조공의 신도비와 재사(齋祠) 즉, 영화재(永華齋), 회동사(晦洞祠) 및 묘정비(廟庭碑)등이 마련되어 있다.

시조공은 아들 넷이 있었는데 백(伯) 열(列)은 산관(散官)이요, 중(仲) 홍예(洪芮)는 함양군(咸陽君)울 습봉하였으며, 숙(叔) 양예(良芮)는 한림학사이고, 계(季) 완(完)은 흥양으로 분관되었다. 음덕입어 창성한 예손들은 오늘날 40여종파로 분파되어 영호남에 산거하고 있다. 2015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함양오씨는 남한에 35,8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함양오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오홍예(洪芮: 2世): 고종조 정의대부로 비서성소감(秘書省少監)을 거쳐 금자광록 대부 개부이(開府儀)로 훈업을 계승하고 함양군(咸陽君)을 습봉하여 명문의 터전을 다졌다.

오현석(玄碩: 4세): 호는 삼세당으로 충렬왕조 문과에 등제, 은청광록대부로 이부 상서를 역임하였다.

오일악(一鶚: 5세): 호는 휴재(休齋)로 공민왕조 예부작랑(禮部直郞)에서 누진하여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문장이 뛰어나 많은 발원문(發願文)을 국왕에게 받치는 국왕 측근이었으나 신돈파로 몰려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향리로 은퇴하였다.

오상덕(尙德: 6세): 호는 두암(杜菴)으로 공민왕조 소부사소감(少府寺少監)을 역임 하고 유학진흥과 풍속교정에 힘써 대유로 추앙되었으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남원으로 은퇴하여 불사이군하엿다. 조선시대 아들 7형제가 외숙 황희(黃喜)의 인도로 높은 관직에 나갔으므로 이조판서가 증직되고 남원 술산사(述山祠)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 인물

오치선(致善: 7世): 호는 수심재(修心齋)로 외숙 황희의 권유로 세종때 출사하여 소윤(少尹)때 아우 치행(致行)과 함께 좌익원종공신에 훈록되었으며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오경지(敬之: 7世): 판서공 봉길(逢吉)의 아들로 호는 성와(惺窩). 세종2년(1420) 대과(大科)에 등제하여 왜국 회려사(回禮使)의 서장관으로 활약하였으며 누진하여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오응(凝: 8세): 호는 금남재(錦南齋)로 세종3년(1421)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을 떨쳤다. 부승지, 한성좌윤, 함길도․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한후 남원에 금남재를 지어 수장처로 삼았다.

오상문(尙文: 7세): 자는 선찬(先贊)으로 문종1년(1451) 문과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흥양현감, 의정부 사인(舍人)을 역임한 후 향리 거창으로 은퇴하여 시문에 열중하였다.

오능(凌: 8世): 자는 허수(虛受)로 성종14(1483) 문과등제, 사간원 헌납, 선산부사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선산부사시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다.

오건(健; 12世): 호는 덕계(德溪)요 자는 자강(子强)으로 산청(山淸)에 살았다. 극 진한 효성으로 명종으로부터 복호(復戶)의 은전을 입었다. 남명 조식(曺植)의 수무인이요 퇴계 이황(李滉)의 고제(賜祭文 제찬)로 명종13년(1558) 대과에 급제하였다. 삼사(三司) 및 이조정랑(吏曹正郞)등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知制敎 兼 經筵侍講官)으로 도학정치를 실현코자 학문과 도덕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명종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마지막으로 치사하였다. 이조정랑 때 김효원(金孝元)을 후임으로 추천하였으나 외척들에 의하여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이 좌절되자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남명․퇴계가 서거한 후 향리에서 문인들의 교학에 여생을 받쳤다. 문인 한강 정구(鄭逑)등이 산청에 서계서원 (西溪書院)을 창건하여 배향(1620)하였는데 숙종3년(1677)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덕계선생문집」 6책과 「역년일기」(歷年日記)등이 남아 있다.

오한(僩: 12世): 오건의 종제로 호는 수오당(守吾堂)이다. 조식선생의 고제로 “안성이 간결하고 행위가 간결하여 남주제1인(南州第1人)”이라 칭송반은 학자이다. 향인의 추중으로 서호사(西湖祠)에 제향하였으나 훼철된 후 서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수오당실기」가 전한다.

오희남(希南: 1543-1593): 자는 열초(悅初)로 거창의 충렬사이다. 문무를 겸비한 걸인으로 용사(龍蛇)의 난때 창의하여 진주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자 그곳으로 가 수문장으로 용전분투하다가 성의 함락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하고 병조참의를 증직하였으며 진주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하였다.

오빈(玭: 1547-1593): 호는 성산(聖山)으로 선조23년(1590) 문과 증광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기 되었다. 임란이 발발하자 창의하여 고경명(高敬命)휘하에서 싸우다가 계사년 진주성전투에 참전하여 혈투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조정에서는 충신 장사랑(忠臣將仕郞)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고향에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 진안의 대한이산묘 영모사(大韓이山廟 永慕祠)에 배향되어 있다.

오익창(益昌: 1557-1640): 호는 사호(沙湖)로 고창군 무장(茂長)에 살았다. 무장에 서 창의하여 피란민과 민간선박을 동원하여 이순신통제사에게 군량미, 의복등을 공급하는 등 큰공을 세웠다. 발탁되어 형조․공조좌랑을 역임하고 익사원종공신(翼社原從功臣)이 되었으나 만년 향리에서 학문에 힘썼다. 향유의 추중을 받아 무장 죽산사(竹山祠)의 주벽으로 배향되었으며 「사호선생문집」 2권이 있다.

오극성(克成: 1559-1617): 호는 문월당(文月堂)으로 영양(英陽)에 살았다. 무과출신인 공은 임란이 발발하자 두아우 윤성(允成), 득성(得成)과 함께 창의하였다. 선전관으로 특제되어 권율장군 휘하에서 활동하고 황간(黃澗)현감으로 선정을 베풀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통제사 막하에서 분전하였다. 군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영양 임고서원(臨皐書院)에 배향, 또 대구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봉안되어 있다.「문월당선생문집」상하권이 있다.

오장(長: 1565-1616): 호는 사호(思湖). 산음(山陰)의 절기지사로 문장과 글씨의 대가이다. 임란이 발발하자 당숙 오현(吳俔)과 함께 산음의 기병유사(起兵有司)가 되어 800의병을 소모하고 초유사 김성일 막하에서 군기를 협의하고 진안현감으로 발탁되어 호남 10군열병을 인솔하여 진주 제석산성(帝錫山城)을 쌓는 활약을 하였다.

광해2년(1612) 대과에 등제하여 정언(正言)이 제수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영창대군의 증살을 규탄하던 절기지사 동계 정온(桐溪 鄭縕)이 제주도로 유배당하자 영남유림을 대표하여 신구동계소(伸救桐溪疎)란 상소문을 제찬하였다가 적신을 두둔하였다는 죄명으로 황해도 토산(兎山)으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원사하였다. 인조반정후 좌승지가 증직되고 산청 서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또한 대구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봉안되어 있다. 사호선생문집(思湖先生文集) 4권이 있다.

오찬조(纘祖: 1572-1630): 호는 영회정(永懷亭)으로 남원에 살았다, 선조26년(1593) 무과에 등제한 공은 임란때 동관(潼關)을 사수하고 정유재란때 남원이 함락되자 의병장 조경남(趙慶男)과 함께 중군선봉장이 되어 호남 각처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의 포양장계로 공은 어모절충장군에 오르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케 되었다,

오전( 전 :1581-1630): 호는 절암(節菴)으로 무장에 살았다. 광해7년(1615) 대과에 급제하여 광양현감, 의정부 사인(舍人)을 역임하였으나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곡을 모아 충의를 다하였다. 친환으로 인하여 경직에서 용담현감으로 나와 효성을 다하니 공의 충효행을 추앙한 향인들이 죽산사(竹山寺)에 배향하였다.

오세웅(世熊: 1633-1685): 호는 운담(雲潭)으로 운봉에 살았다, 호남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문인들의 교학에 힘썼다. 공의 학행과 효행을 추중한 향인들은 덕림사(德林祠)를 세워 제향하였다. 「운담집」 상하권이 있다.

3)근대인물

오석준(錫浚: 1864-1859): 호는 물와(勿窩)로 영양의 항알 독립토사이다. 1911년 파리장서운동(長書運動)에 참여하고 1919년 영양의 3․1만세운동을 선창주도하다다 군민 136면과 함꼐 체포되어 안동, 대구, 서대문형무소를 옮겨가며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는등 평생을 조국광복애 투신하였다. 옥중에서 집필한 음설록 물와유고등이 있다. 건국훈장 애국장과 독립운동유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오기열(基烈: 1889-1950): 호는 둔암(遯菴)으로 진안의 독립애국지사이다. 약과의 나이로 정미호남창의동맹(1907)에 참여, 1919년 진안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생활, 1921년 전북군무총장(軍務總長)으로 독랍청년군을 조직하였다가 다시 1년의 옥고를 치르는 형극의 길을 걸었다. 광복후 진안의 제헌국회의원이 되어 반민특위 조사․ 징계위원으로 활약하였으나 6․25동란때 광주에서 순국하였다. 국민훈장무궁화장과 독립운동유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오재균(栽均: 1908-1982): 호는 포상(浦上)으로 고창사람으로 풍미양행(豐美洋行)을 경영한 실업가이다. 목포신문사장, 6․25동란시 목포해상방의대장등을 역임. 부산에서 풍미양행을 경영하며 문화재위원으로 학술지 발간과 종사(宗事)성취에 전력을 쏟았다.

오규환(珪煥: 1916-1993): 호는 소광(昭光)으로 산청에 살았다. 인간문화재요 대유학자이다. 선고와 함께 향교재단을 설립하여 산청명륜중학(山淸明倫中學校)을 설립하고 산청문화원 이사장을 역임. 지리산평화제 문화상과 평화대상을 수상하였다. 「인생궤도」, “덕계 오건의 인간상” 등 저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