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의령옥씨시조(宜寧玉氏),옥진서(玉眞瑞),의령옥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5 19:59 수정일 : 2018-02-18 22:23

의령옥씨시조

옥씨(玉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우리나라 옥씨(玉氏)의 연원(淵源)은 고구려(高句麗)의 요청에 의해 당(唐) 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 중의 한사람인 옥진서(玉眞瑞)가 신라(新羅)에서 국학 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고, 의춘(宜春 : 의령의 별칭)군(君)에 봉해져 의령(宜寧)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후손들이 고려(高麗) 때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옥여(玉 汝)를 일세조로 하는 계통과 갈라져서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옥씨(玉氏)의 본관(本貫)은 17본으로 전하나 이는 세거지명(世居地名)을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며, 현재는 의령(宜寧) 단본(單本)으로 전한다.


본관의 유래

의령(宜寧)은 경상남도(慶尙南道)의 중앙, 낙동강 하류 서안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장함현(獐含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의령으로 고쳐서 함안군(咸安郡)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에는 진주(晋州)에 편입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조(朝鮮朝)에 현(縣)으로 승격된 뒤 1895년(고종 32)에 의령군으로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의령옥씨를 대표하는 인물(人物)로는 규(珪)가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학문이 깊고 청렴결백했던 고(沽)는 조선(朝鮮) 정종(定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정언(正言)․교리(校理) 등을 역임했으며 청렴결백하여 사림(士林)에서 명망이 높았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옥씨(宜寧玉氏)는 전국에 19,0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의령옥씨조상인물

옥은종(玉恩宗): 고려(高麗) 때 창정(倉正)을 지냈다.

옥균지(玉均之): 고려 때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옥문량(玉文亮): 고려조(高麗朝)에 호장(戶長)을 지냈다.

옥전백(玉全伯): 고려 때 소윤(少尹)을 역임하였다.

옥안덕(玉安德): 고려조에 진사(進士)를 지냈다.

옥사미(玉斯美): 고려조에 감무(監務)를 역임하였다.

옥사인(玉斯仁): 고려(高麗)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옥규(玉 珪) : 시호(諡號)는 장경(莊敬).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옥고(玉 沽): 자(字)는 대수(待售), 호(號)는 응계(凝溪). 1399년(정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 사헌부(司憲府) 정언(正言)․장령(掌令),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 등을 역임했으며, 학문이 광박(廣博)하고, 청렴결백하여 당시 사림(士林)에서 명망이 높았다. 안동(安東)의 묵계서원(黙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옥여(玉 礪): 조선에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옥진휘(玉晋輝): 조선(朝鮮) 때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옥경연(玉景鍊):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옥병관(玉秉觀):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옥동규(玉東奎): 조선조에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