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개성왕씨시조(開城王氏),왕국조(王國祖),개성왕씨유래,개성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5 21:56 수정일 : 2018-02-13 17:33

개성왕씨시조

개성왕씨(開城王氏)는 누대(累代)에 걸쳐 송악(松嶽) 지방(地方)에 세거(世居)해 온 호족(豪族)의 집안으로서, 고려(高麗)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된 왕국조(王國祖)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의 증손(曾孫)으로서 후삼국(後三國)을 평정하고, 500년 고려왕조(高麗王朝)의 문호(門戶)를 연 태조(太祖) 왕 건(王 建)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資質)이 비범하였다. 그는 20세 때 태봉국왕(泰封國王)인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정벌(征伐)한 지방의 구휼(救恤)에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왕 건은 궁예(弓裔)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어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는데, 궁예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져 민심(民心)이 어지러워지자 918년(고려 태조 1) 신숭겸(申崇謙)․홍 유(洪 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 중신(重臣)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후 34대 왕조(王朝)에 걸쳐 4백 75년 동안 왕씨(王氏) 고려국(高麗國)의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왕업(王業)이 무너지면서 잔인한 정치적인 보복에 멸족(滅族)의 참변을 당하여 전(全)․옥(玉)․금(琴)․전(田)씨 등으로 변성(變姓)하고 혈맥(血脈)을 유지하였으며, 조선 정조(正祖) 때 와서 왕씨(王氏)로 환성(還姓)하고 송악(松嶽)의 옛 지명인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개성(開城)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려(高麗)의 수도(首都)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었다. 919년(고려 태조 1)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開城)과 송악(松岳)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황도(皇都)로,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었고,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개성왕씨는 조선조에 뼈저린 수난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것은 교서감(校書監)을 지낸 미(亹)를 시작으로 하여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흥(興)은 선비(善妃 : 우왕의 비)의 아버지로 우왕(禑王) 초에 전공(典工)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이르렀다. 강원도(江原道) 영월(寧越)까지 호송하고 돌아왔으며, 인조(仁祖) 때 부제학(副提學)에 오른 희걸(希傑)은 문장 (文章)과 글씨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의성(義城)은 선조(宣祖)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주(淸州) 전투에서 공(功)을 세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그밖에 한말(韓末)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재일(在一)은 광주고보(光州高普)에 다니면서 비밀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왕씨(開城王氏)는 남한에 22,452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개성왕씨조상인물

왕원(王 垣): 시호(諡號)는 동양(東陽), 태조(太祖)의 아들. 고려 광종(光宗) 때 사사(賜死)되었으나 두 아들과 함께 도주(逃走)하여 민간인으로 행세하였다. 후에 강 조(康 兆)가 상주하여 두 아들에게 작(爵)을 내리고 전장(田庄)을 주어 종적(宗籍)에 속하게 하였다.

왕융(王 融): 955년(광종 6) 대상(大相)으로서 진봉사(進奉使)가 되어 후주(後周)에 파견되었고,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977년(경종 2) 독권관(讀券官)이 되어 과거(科擧)를 주관했고, 성종(成宗) 때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왕동영(王同穎): 997년(목종 즉위) 합문사(閤門使)로서 거란(契丹)에 파견되어 목종(穆宗)의 즉위를 알렸고, 1009년(현종 즉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으며, 이듬해 거란군이 침입하자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예균(李禮均)과 함께 거란에 파견되어 화친을 성립시켰다. 1014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고, 1018년 거란의 제 3차 침입 때 거란(契丹)에 억류되었다.

왕이보(王夷甫): 장작소감(將作少監) 좌섬(佐暹)의 아들. 1020년(원종 11) 예부주사(禮部主事)를 거쳐 1039년(정종 5) 전중시어사(殿中寺御史)로서 동로 병마부사(東路兵馬副使)가 되고, 1053년(문종 7)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호부 상서(戶部尙書)가 되었다. 1057년 거란에 파견되어 책명(冊命)을 사례했고, 1063년 서북면 중군병마사(西北面中軍兵馬使) 겸 서경 유수사(西京留守使)가 되었다.

왕유(王 裕): 시호(諡號)는 온결(溫潔). 고려 때 태자 첨사(太子詹事)를 역임했다.

왕기(王 基): 고려 현종(顯宗)의 아들로 태사(太師)․상서령(尙書令)을 지냈다. 권신들이 왕(王)을 폐(癈)하고 그를 왕(王)으로 추대(推 戴)하려 했으나 장 선(張 善)의 밀고로 좌절되고, 아들 진(璡)과 함께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왕총지(王寵之): ?~1067(문종 21). 시호(諡號)는 경숙(景肅). 현종(顯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이어 우승선(右承宣)․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지주사(知奏事)․예빈경(禮賓卿)이 되었다. 1044년(정종 10) 동북로 병마사(東北路兵馬使)․참지정사(參知政事) 김영기(金令器) 등과 함께 장주(長州)․정주(定州) 및 원흥진(元興鎭)에 성을 쌓았고, 1047년(문종 1) 중추사(中樞使)로 서북면 중군사(西北面中軍事) 겸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가 되고, 1049년 수사공(守司空)․상주국(上柱國)에 올랐으며, 이어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어 군대의 훈련에 힘썼다. 1053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1060년 수태위(守太尉), 이듬해에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 부사(判尙書吏部事)를 지낸뒤 중서령(中書令)으로 치사했다.

왕무숭(王懋崇): 1057년(문종 11) 어사대부(御史大夫), 1061년 호부 상서(戶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지중추 원사(知中樞院事), 1063년 동북면 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 1068년 판상서형 부사(判尙書形部事)가 되었다. 이듬해 거신(巨身) 등과 함께 문종(文宗)의 폐위와 평양공(平壤公) 기(基)의 추대를 모의했으나 기가 죽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071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에 이르렀으나, 1072년 앞서 추대의 모의가 드러난 안동(安東)에 유배되었다.

왕석(王 錫): ?~1087(선종 4). 1076년(문종 30) 호부 상서(戶部尙書)로서 진위사(陳尉使)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왔으며, 1081년 호부 상서(戶部尙書)․지이부사(知吏部事), 1083년 우복야(右僕射)가 되었다.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1086년(선종 3)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다.

왕국모(王國髦): ?~1095(숙종 즉위). 시호(諡號)는 경렬(景烈). 1086년(선종 3) 위위경(衛尉卿), 이어 상장군(上將軍)․직문하성(直門下省) 등을 역임하였다. 1095년(헌종 1) 권상서병부사(權尙書兵部事)로서 이자의(李資義)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권판병 부사(權判兵部事)가 되고, 이어 우복야(右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판병부사(判兵部事)․판도병마사(判都兵馬使) 등을 거쳐 수사도(守司徒)로 죽었다. 숙종(肅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 享)되었다.

왕가(王 古叚): 1098년(숙종 3) 정조사(正朝使)로 요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에 올랐고, 1100년에 상서(尙書)로서 송나라에 가서 휘종(徽宗)의등극을 축하, 휘종으로부터「태평어람(太平御覽)」1천권을 받아 이듬해 귀국했다. 1103년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1105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 이해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이부 상서(吏部尙書)․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겸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수사공(守司空), 1107년(예종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왕자지(王字之): 1066(문종 20)~1122(예종 17). 초명은 소중(紹中), 자(字)는 원장(元長), 시호(諡號)는 장순(章順),대상(大相) 유(儒)의 현손(玄孫). 서리(胥吏)에서 출발, 매부 왕국모 (王國髦)가 이자의(李資義)를 죽일 때 이에 협력, 도교령(都校令)이 되었으며, 숙종(肅宗) 때 내시(內侍)를 거쳐 전중시어사(殿中寺御事)가 되었다. 1108년(예종 3)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윤 관(尹瓘) 휘하에서 함주(咸州)․영주(英州)․사지령(沙至嶺) 등지에서 여진(女眞)과 싸워 무찔렀다. 예빈경(禮賓卿)․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전중 소감(殿中少監)이 되고,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거쳐, 1115년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사은 겸 진봉사(謝恩兼進奉使)가 되어 송나라에 가고, 이듬해 대성아악(大晟雅樂)을 가지고 귀국했다. 1117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병부상서(兵部尙書)․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이듬해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겸 지행영병마사(知行營兵馬使), 1119년 추밀원사(樞密院使)․판삼사사( 判三司事), 1122년 이부 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었다. 예종(睿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왕상필(王商弼): 초명은 수산(壽山). 고려(高麗) 때 태부소경(太府小卿)을 지냈다.

왕충(王 沖): ?~1159(의종 13). 시호(諡號)는 강렬(剛烈). 1139년(인종 17)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1141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이듬해 이부 상서(吏部尙書)가된 뒤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고, 11 49년(의종 3)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했다.

왕서(王 恕): 시호(諡號)는 양양(襄陽), 신종(神宗)의 아들. 고려조(高麗朝)에 덕양후(德陽候)에 봉(封)해졌다.

왕식(王 軾): 1147년(의종 1) 진봉사(進奉使)로서 금(金)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149년 중서사인(中書舍人), 1151년 좌간의(左諫議)로서 정 서(鄭 叙)․정 함(鄭 諴)을 탄핵하여 정 서를 동래(東萊)에유배, 어사대부(御史大夫)․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왕세경(王世慶): 1122(예종 17)~1185(명종 15). 초명은 굉(肱).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경산 부사(京山府使)를 지낸 후 재상(宰相) 이지무(李之茂)의 장수(長壽)를 빌기 위한소문(疏文)을 작성했다가 문장력을 인정받아 국학 학유(國學學諭)에 임명되었다. 동문원 녹사(同文院錄事)를 거쳐 1170년 의종(毅宗)이 내쫓기고 명종이 즉위한 뒤 금나라에서 순문사(詢問使)가 자주 왔을 때 지은 사명(詞命)이 왕의 마음에 들어 감문위 녹사(監門衛錄事)가 되었다. 좌정언(左正言)․기거주(起居住)․중서사인(中書舍人)․간의(諫議)․이부 시랑을 거쳐 사재경(司宰卿)으로 간의(諫議)를 겸직했다.

왕준명(王濬明): 1211년(희종 7) 내시 낭중(內侍郎中)으로 참정(參政) 우승경(于承慶)․추밀(樞密) 사홍적(史弘績)․장군 왕 익(王 翊) 등과 함께 권신 최충헌(崔忠獻)의 제거를 모의, 승도(僧徒)들을 이끌고 수창궁(壽昌宮)을 습격하여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유배되었다 .이를 계기로 최충헌은 희종(熙宗)을 폐(廢)하고 한남공(漢南公) 정(貞 : 강종)을 세웠다.

왕해(王 諧): ?~1246(고종 33) 예빈경(禮賓卿) 유(唯)의 아들. 어려서 문과(文科)에 급제,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내며 법을 지켜 굽힘이 없었다. 고종(高宗) 때 소부 소감(小府少監)을 거쳐 경상도 안무사(慶尙道按撫使)로 있을 때 권신(權臣) 최 우(崔 瑀)의 아들인 만종(萬宗)․만전(萬全) 형제가 쌀50여만 석을 백성들에게 놓아 가혹하게 이식을 받아들이므로 백성들은 나라에 바칠 조세(租稅)도 내지 못하게 되자, 세금을 바치기 전에 사채(私債)를 독촉하는 자를 처벌하겠다는 포고를 내림으로써 만종 등의 횡포를 견제했다. 그후 진주 부사(晋州副使)가 되어 잘 다스려 동경 유수(東京留守)로 전임되었으나 진주 백성들의 청으로 1년간 더 유임했다.

왕규(王 珪): 1142(인종 20)~1228(고종 15). 초명은 승로(承老), 자(字)는 숙개(叔玠), 시호(諡號)는 장경(莊敬), 문하시중(門下侍中) 충(沖)의 아들. 7세에 세자의 학우(學友)가 되었으며, 의종(毅宗) 때 처음으로 군기 주부(軍器主簿)가 되었다. 이어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을 지내고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전중시 어사(殿中寺御史)로 있었으나 마침 어머니를 보러 귀향했으므로 화를 면했고, 명종(明宗) 대 남경 유수(南京留守)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176년(명종 6) 생일회사사(生日回謝使)로서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판합문사(判閤門事)가 되었다. 1202년(신종 5)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1205년(희종 1)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했다.

왕중선(王仲宣): 고려 때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왕열(王 烈): 자(字)는 맹부(孟夫). 고려(高麗) 때 보승 낭장(保勝郎將)에 이르렀다.

왕창(王 淐): 시호(諡號)는 안경(安慶). 고종(高宗)의 아들. 1255년(고종 42) 몽고(蒙古)에 건너가 교섭하여 몽고군을 이끌고와 의주(義州)․정주(靜州)의 경계에 주둔케 하였다. 1269년(원종 10) 임연(林衍)이 왕(王)을 폐(癈)하고 그를 왕위에 올렸으나 그해 11월에 원종(元宗)이 복위하였다.

왕제(王 濟):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을 지냈다.

왕희(王 僖): ?~1263(원종 4). 덕양후(德陽候) 서(恕)의 아들. 1257년(고종 44) 몽고의 차라다이(車羅大)가 쳐들어와 안북부(安北府 : 안주)에 주둔하고 고려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왕자(王子)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때 우선 차라다이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둔소(屯所)에 파견되어 차라다이를 설득하여 봉주(鳳州)로 후퇴하게 했다. 1260년(원종 1) 즉위사(卽位使)로 몽고에 다녀온 후에 영안공(永安公)으로 봉해졌다.

왕유소(王惟紹): 충렬왕(忠烈王) 초기에 낭장(郎將)이 되어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원(元)나라에 다녀왔으며, 1302년(충렬왕 28) 밀직부사(密直副使)․좌상시(左常侍)를 역임하고, 1305년(충렬왕 31) 지도첨의사사(知道僉議司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왕석(王 碩): 중랑장(中郞將)으로서 1339년(충숙왕 8) 조 적(曺 頔)의난 때 충혜왕(忠惠王)을 시종(侍從), 그 공으로 1342년(충혜왕 복위 3) 2등공신이 되고, 1343년 충혜왕이 원나라 게양(揭陽)으로 유배되자, 1344년(충목왕 즉위) 충혜왕의 폐신(嬖臣)이었다 하여 금주로(金州路)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났으며,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기 전 연경(燕京)에서 그를 시종한 공으로 1351년(공민왕 즉위) 2등공신이 되었다.

왕자(王 梓): 초명은 용(龍), 시호(諡號)는 안정(安靖).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 1363년(공민왕 12) 김 용(金 鏞)이 원(元)나라에 있는 덕흥군(德興君) 혜(譓)를 왕으로 영립(迎立)하기 위해 공민왕(恭愍王)이 흥왕사(興王寺)의 행궁(行宮)에 있는 틈을 타 부하를 시켜 왕을 시해케 하였는데 침전관(寢殿官) 이강달(李剛達)이 왕을 업고 도주하였고, 그는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왕중귀(王重貴): ?~1369(공민왕 18). 정승(政丞) 후(煦)의 아들. 공민왕(恭愍王) 초에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1356년(공민왕 5) 기 철(奇 轍) 등이 제거(除去)될 때 유배되었다가 1364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신 돈(辛旽)에 의해 파직, 이어 국가의 비밀을 원나라에 누설했다는 무고로 또 유배, 곧 풀려 나와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다. 1369년 북원(北元)의 조서(詔書)를 갖고 귀국한 서원군(瑞原君) 노은(盧訔)이 당시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쓰고 있던 조정에 의해 문초당할 때 고문에 못 이긴 그의 거짓 진술로 북원과 밀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효수(梟首)당했다.

왕복명(王福命):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홍건적(紅巾賊) 격파에 공을세워, 1363년(공민왕 12) 판사(判事)로서 2등공신이 되고, 1365년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다. 우왕(禑王)이 즉위한 후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지고, 1378년(우왕 4) 평리(評理)로서 양광․전라․경상도 원수(楊廣․全羅․慶尙道元帥)가 되어 장단(長湍)에서 왜구(倭寇)를 격파했다.

왕방(王 昉): 우왕(禑王) 때 순안군(順安君)에 봉해졌다. 1389년(공양왕 1) 고주사(告奏使)로서 명나라에 들어가 왕의 즉위를 알리고 이듬해 돌아와 윤 이(尹 彝) 이 초(李 初)가 명나라에서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를 제거하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보고하여 이 초(彝 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왕미(王 亹): 고려 때 교서감(校書監)을 지내고 제용감 정(濟用監正)․전교서 판교(典校書判校)에 추증(追贈)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왕씨(王氏) 성(姓)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죽이므로 그는 어머니의 성(姓)으로 변성(變姓)하여 충주(忠州)에서 숨어살았다. 이때 이웃 아이들과 놀다가 성이 왕씨(王氏)임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마침 태종의 꿈에 고려 태조(太祖)가 나타나 왕씨를 함부로 살해한다고 호통치므로 태종이 크게 뉘우쳐 방면(放免)하였다. 이때부터 고려 태조(太祖)의 후손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

왕흥(王 興): ?~1401(태종 1). 선비(善妃 : 우왕의 비)의 아버지. 우왕(禑王) 초에 전공 판서(典工判書), 1387년(우왕 13)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으며, 1391년(공양왕 3) 이 초(彝 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청주(淸州)에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고, 1399년(정종 1) 대궐문 앞을 말 타고 지나간 일로 문하부(門下府)로부터 조정을 모욕했다는 탄핵을 받고 개성(開城)에 안치(安置)되었다. 1401년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왕강(王 康): ?~1394(태조 3) 고려 왕실(王室)의 원친(遠親). 1371년(공민왕 20) 회시(會試)에 합격했으나 연소한 것으로 의심을 받아 다음 시험인 전시(殿試)가 정파(停罷)되었다. 뒤에 문과(文科)에 급제, 동진사(同進事)가 되고, 성균관(成均館) 직학(直學)․강녕부 승(江寧府丞)을 거쳐, 1374(공민왕 23) 대군시학(大君侍學)․주부(主簿)를 역임했으며, 우왕(禑王)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성균관(成均館) 제주(祭酒)로서 서북면 안무사(西北面按撫使)가 되어 유리인(流離人)들을 안집(安集)했다. 1390년(공양왕 2)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서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수군도체찰사(慶尙道水軍都體察使) 겸 방어영전 염철사(防禦營田鹽鐵使)가 되고, 예조(禮曹) 판서(判書)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 겸 전라․경상․양광삼도수군도체찰사(全羅․慶尙․楊廣三道水軍都體察使)가 되어 염철(鹽鐵)․조전(漕轉)․초토(招討)․영전(營田)․선성(繕城)의 일을 겸하여 조운(漕運)의 공이 많았고, 어염(魚 鹽)의 이(利)로 국가의 재정(財政)을 튼튼히 했다. 태안(泰安)과 서주(瑞州) 접경인 탄포(炭浦)에 운하(運河)를 파서 안흥량(安興梁)의 험로 4백여 리를 통하는 조운을 편리케 하려 했으나, 바닥에 암석이 있고 조수(潮水)가 공사를 방해하여 이루지 못했다. 1392년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이 되고 이해 조선 개국(開國)으로 거제(巨濟)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追錄)되었으나, 1394년 다시 대간(臺諫)․형조(刑曹)의 탄핵으로 공주(公州)에 유배, 이어 왕씨 일족이 화를 당할 때 살해되었다.

왕안덕(王安德): ?~1392(태조 1). 시호(諡號)는 정양(貞襄). 공민왕(恭愍王) 때 안 우(安 祐) 등을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여 1363년(공민왕 12) 2등공신에 오르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죽자 이인임(李仁任)을 도와 강녕대군(江寧大君 : 우왕)을 옹립(擁立)했으며, 판사사(判司事)를 거쳐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올랐다. 1377년(우왕 3) 양광도 도원수(楊廣道都元帥)로 왜구(倭寇)에게 패전(敗戰), 1383년 양광도 조전원수(楊廣道助戰元帥), 1385년 다시 양광도 도원수 등으로 왜구와 싸워 공을 세우고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양광도 도원수로서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의 예하에 있었고, 이해 창왕(昌 王)이 즉위하자 육도 도통사(六道都統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양광도 도둔곶(都屯串)에 침입한 왜구에게 대패했다. 1389년(공양왕 1)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이듬해 강원군 (江原君)에 봉해졌다.

왕화(王 和): 고려조에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졌다.

왕승귀(王承貴): ?~1394(태조 3). 1378년(우왕 4)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1383년 밀직상의(密直商議)로서 김화(金化)․평강(平康)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격파했다. 1389년(창왕 1) 양광도 절제사(楊廣道節制使)가 되어 이듬해 또 왜국을 격파, 뒤에 청주 절제사(淸州節制使)를 지냈으며,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 일파에게 살해될 때 그 일파로 몰려 원지(遠地)에 유배, 뒤에 풀려났다. 이해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올랐으나, 1394년(태조 3) 대간(臺諫)․형조(刑曹)의 탄핵으로 합포(合浦)에 유배, 이어 왕씨 일족이 화를 당할 때 살해되었다.

왕승보(王承寶): ?~1394(태조 3). 1383년(우왕 9) 밀직상의(密直商議)로서 김화(金化)․평강(平康) 등지에서 왜구(倭寇)를 격파, 이듬해 서해도 상원수(西海道上元帥)로 장연(長淵)에서 왜구에게 대패했다. 1387년 임주(林州)․한주(韓州)․서주(西州)․홍산현(鴻山縣)에 쳐들어온 왜구와 싸워 패전했고, 조선 건국 후 1394년(태조 3) 대간(臺諫)․형조(刑曹)의 탄핵을 받아 영흥(永興)에 유배, 이어 왕씨 일족이 화를 당할 때 살해되었다.

왕보(王 寶): 조선(朝鮮) 때 계림 부윤(鷄林府尹)을 지냈다.

왕방연(王邦衍): 사육신(死六臣)에 의해 단종 복위 사건이 발각된 뒤 1457년(세조 3) 폐위된 상왕(上王) 노산군(魯山君 : 단종)이 강원도 영월(寧越)로 유배될 때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로서 호송했다.

왕희걸(王希傑): ?~1553(명종 8). 일명 시걸(時傑), 자(字)는 사웅(士雄), 부사(府使) 무(懋)의 아들. 1534년(중종 29) 생원(生員)이 되고,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1545(인종 1)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1546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갔다. 1550년 비변사 낭관(備邊司郎官)이 되고 이듬해 자산 군수(滋山郡守), 이어 사인(舍人)․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천거되었으나 병사했다. 일찍이 이 황(李 滉)․노수신(盧守愼)․홍 섬(洪 暹)등 명유(名儒)와 교류했으며, 문장․글․글 씨․그림에 모두 뛰어났다.

왕의성(王義成): 자(字)는 덕보(德甫), 호(號)는 서강(西岡), 득인(得仁)의 아들. 벼슬은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다시 청주(淸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순조(純祖)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 贈), 남전사(藍田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왕태(王 太): 일명 한상(漢相), 자는 보수(步廋), 호는 수리(數里). 한미(寒微) 한 집안의 출신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나 영조(英祖)․정조(正祖) 때 천수경(千壽慶)을 중심으로 장 혼(張 混)․조수삼(趙秀三)․차좌일(車佐一)․김낙서(金洛瑞)․박윤묵(朴允黙) 등과 송석원 시사(松石園詩社)의 일원으로 시를 읊엇으며, 윤행임(尹行恁)의 추천으로 왕 앞에서 시를 지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조령 별장(鳥嶺別將)에 이르렀다.

왕재일(王在一): 1903(광무 7)~1960. 광주(光州) 출신. 1926년 광주고보(光州高普)에 다니면서 비밀단체 성진회(醒進會)를 조직, 총무(總務)로 있다가 1929년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에 가담하여 4년간 복역했다. 1936년 전남 농민회(全南農民會) 사건으로 다시 3년 6개월간 옥고(獄苦)를 치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