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단양우씨시조,우현

작성일 : 2017-04-26 11:40 수정일 : 2018-04-11 20:0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우씨(禹氏)는 중국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우왕(禹王)의 원손(遠孫) 우현(禹玄)이 고려 때 우리나라에 와서 단양(丹陽)에 대대로 살아 온데서 우(禹)씨 곧 단양우씨(丹陽禹氏)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씨(姓氏)의 기원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전설적 연원(淵源)을 확인할 만한 자료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역사학계(歷史學界)의 연구 결과를 미루어 보면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연원은 이러한 전설보다도 신라 말 고려 초에 단양(丹陽)지역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던 호족(豪族)이 우(禹)라는 성 (姓)을 자칭(自稱)하거나 왕(王)으로부터 하사(下賜)받은 데서 비롯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여겨진다.

그것은 통일신라 초기까지만 해도 왕족이나 일부 귀족들만이 지녔던 성(姓)들이 통일신라 말기~고려 초기에 이르면서 지방의 지배층이나 전공자(戰功者)들에게 까지 널리 확산되어 갔다는 성씨(姓氏)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시조(始祖) 현(玄)할아버지께서 고려 초기에 지방 호족 (豪族)들에게 준 향직(鄕職)인 호장(戶長) · 정조호장(正朝戶長)이나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족보(族譜)에 기록되어 있는 점이 결부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양(丹陽) 지역의 지배자였던 현(玄) 시조가 고려 왕실과 충성 관계를 맺은 데서 향직(鄕職)이 주어졌고, 또 이를 전후로 하여 사회 지배층으로 인정된 데서 지배층들만이 지녔던 성(姓)올 갖게 되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6세 중대(仲大)에 이르러 단양우씨(丹陽禹氏)가 단양(丹陽)지방에 세력기반을 둔 관료가문(官僚家門)으로 확고하게 자리잡는 모습에서도 뒷받침된다. 족보에 따르면 중대(仲大)는 향공진사(鄕貢進士)로 과거에 합격하여 (고려 고종16년 1229) 문하시중(門下侍中)에 까지 오르고 그 아들 5형제가 또한 모두 등과(登科)하고 현달(顯達)하면서 중대(仲大)때까지 독자(獨子)로만 이어오던 가문(家門)이 크게 번성하는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관료가문(家門)으로서의 단양우씨(丹陽禹氏)가 성립되는 모습도 보이는 것이다. 중대(仲大)때 아들 5형제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한 것을 기념하는 석비(石碑)를 단양(丹陽)에 건립한 것이나 중대(仲大)가 돌아간 뒤 시조(始祖) 이하 5대(代)의 묘를 중대의 묘와 함께 단양 금수산(丹陽 錦緯山)남쪽에 마련한 것들도 지배층으로서의 우씨(禹氏)의 확립을 알리는 일이라 하겠다. 고려 관료가문의 하나로 성립된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이후 중대(仲大)의 장남 평장사 천규(平章事 天珪)와 3남 시중 천석(侍中 天錫)의 자손을 중심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천규(天珪)의 아들 문희공(文僖公) 탁(倬)과 천석(天錫)의 아들 좌대언 칭(左代言 個) 밀직부사 팽(密直副使 伻)이 그 중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偁(칭)의 장자 적성군 길생(赤城君 吉生)이 탁(倬)에게 입양(入養)되어 종계(宗系)를 잇는 족보(族譜)와 탁(倬)의 친자(親子) 참의 원광(恭議 元光)이 종계(宗系)를 잇는 족보(族譜) 그리고 길생(吉生)이 탁(倬)의 친자(親子)로 되어있는 족보가 함께 전하고 있어 종통(宗統)의 승계에 혼란을 빚고 있다. 조선 중엽에도 그 시비(是非)가 일어나 조정(朝廷)에서까지 논의된 끝에 일단 길생(吉生)의 출계 승계가 인정되기는 하였으나 아직껏 그 시비(是非)는 끊이지 않고 있다(高宗己丑1889年 王命條). 우리 문중(門中)의 화합일치(和合一致)를 위해서도 분명하게 해결되어야 할 하나의 과제라 하겠다.

여하튼 6世(仲大) 이후 11.12世에 이르기까지 고려 후기 약 150년간에 길진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대번영(大繁榮)은 조선 초 · 중엽에 이르러 점차 각 가계별(家系別)로 계파(系派)를 형성 하였다. 길생(吉生)의 아들인 층정공(忠靖公) 현보(玄寶)의 아들 5형제 즉 대제학 홍수(洪壽) · 예안군 흥부(洪 富) · 안정공 홍강(洪康) · 집의공 홍득(洪得) · 판서공 홍명(洪命)을 각기 파조(派祖)로 하는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예안군파(禮安君派), 안정공파(安靖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와 참의 원광(元光) · 봉상시정 원명(元明)을 각기 파조(派祖)로 하는 참의공파(참議公派), 봉상정공파(奉常正公派) 그리고 칭(偁)의 아들 참판 국진(國珍)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강 공파(文康公派), 칭의 제(弟) 팽(平)의 손자 정평공 인렬(仁烈), 문숙공 희렬(希烈)을 각기 파조(派祖)로 하는 정평공파(靖平公派), 문숙공파(文肅公派)들이 그것이었다. 가장 번성해온 대파(大派)는 조선 초기 왕조확립에 기여한 예안군(禮安君)의 파(派)와 안정공(安靖公)의 파(派)였다.

한편 문중의 번성은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世居地)에 따라 본관을 달리하는 양상도 보여 왔다. 강주(剛州) · 영천(永川) · 경주(慶州) · 남양(南陽) · 달성(達城) · 목천(木川) · 안동(安:東) · 안양(安養) · 영주(榮州) · 예안(禮安) · 진양(晋陽) · 평택(平澤) · 한양(漢陽)등 10여개의 본관(本貫)이 그러한데 이들은 대개 세거지에 따른 표현일 뿐이어서 오늘날에는 거의 단양(丹陽)으로 귀일(歸一)되어 있다. 다만, 목천우씨(木川禹氏)의 경우는 그 시조 중상(仲祥)이 백제 유민(遺民)으로 고려 태조에게 우성(牛姓)을 하사(下賜) 받았는데 뒷날 이를 우(禹)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양 우씨(禹氏)와는 혈통을 달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단양(丹陽)

단양(丹陽)은 본래 고구려 적산현(赤山縣)이 신라 때에 는 내제군(奈堤郡)의 고을이었고 고려 초에 단산현(丹山縣)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원주(原州)에 속하였다가 뒤에 충주(忠州)에 소속되었다. 합단(哈丹)의 난(병자호란)에 고을 사람이 적을 막아서 그 공을 포상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승격되어 군이 되니 조선시대 때 이에 근거하여 지금 충청북도로 소속시켰다.

충청북도의 단양군의 군청소재지로 읍이며 중앙선 철도의 주요역으로 담배 인삼 목화 소 임산 축산의 집산지이며 단양군(丹陽郡)은 충청북도 한 군으로 관내에 2읍 5면 3 출장소가 있으며 북은 강원도 영월군, 동은 영월군과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 남은 영주시와 예천군(體泉郡)과 문경시(聞慶市), 서는 제천시(堤川市)에 접하였다. 명승고적으로는 남한강 상류의 기암절벽으로 된 구담봉 옥순봉 삼선암 사인암 도담삼봉 등 단양 팔경을 비롯하여 일광굴(日光屈) 고수동굴 온달성(溫達城)등이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단양우씨는 남한에 191,2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