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무안유씨시조(務安兪氏),유순직(兪舜稷),무안유씨조상인물,유천우(兪千遇)

작성일 : 2017-04-26 22:38 수정일 : 2018-03-09 14:30

무안유씨의 연원

무안유씨(務安兪氏)는 장사군(長沙君) 유순직(兪舜稷)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유순직(兪舜稷)은 고려(高麗) 예종(睿宗)때 삼중대광(三重大匡)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을 역임(歷任)하고 공훈(功勳)으로 장사군(長沙君)에 봉(封)하여 짐으로써 후손이 장사(長沙)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그 이상의 상세계(上世系)는 유실(遺失) 되어 알 수 없으므로 공(公)을 시조(始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그후 4세(世) 천우(千遇)는 고종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누진(累進)되고 충렬왕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 하였으며 무안부원군(務安府院君)에 봉(封)하여졌다.

이를 계기(契機)로 후손(後孫)이 본관(本貫)을 달리하여 무안(務安)으로 하고 공(公)에게는 문도(文度)의 시호(諡號)가 주어졌다.

무안군(務安군)의 지명(地名)은 본래 삼국(三國)시대의 물나혜군(勿奈兮郡)으로 시대(時代)에 따라 무안군(務安郡)에서 무안현(務安縣),무안부(務安府)등으로 변경되어 현재(現在)의 무안군(務安郡)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5세(世) 공(公)의 아들 영원(永元)은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등을 역임 하였으며

6세(世) 손자(孫子) 윤수(允粹)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역임 하였다.

7세(世) 증손(曾孫) 송은공(松隱公) 천(蕆)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에까지 누진(累進)하였으나 고려(高麗)가 망함에 신조불참동맹(新朝不參同盟)을 맺고 은거(隱居)생활을 하며 조선조(朝鮮朝)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직(職)을 권(勸) 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이를 고사(固辭)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서 10세(世) 역암공(易菴公) 희익(希益)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당대(當代) 역학(易

學)의 대가(大家)로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제수(除授)되고 천문(天文) 지리(地理)등 학문에 조예가 깊어 세조(世祖)의 정무(政務)에 기여(寄與) 한바 크다.

13세(世) 우산공(牛山公) 세호(世豪)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사인(舍人)․전한(典翰)을 역임 하고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에 올랐다.

그러나 공(公)은 후손(後孫)들이 당쟁파화(黨爭派禍)의 세화(世禍)를 면(免)하게 하기 위하여 영남(嶺南) 및 기호(畿湖)지방으로 각산분거(各散分居)하게 하였다.

분산계획(分散計劃)에 따라 우산공(牛山公)의 장남(長男)인 여옥(汝沃)은 영남(嶺南)지방으로 낙향(落鄕)하였으나 그 후손(後孫)의 유무(有無) 사실을 알 수 없다.

우산공(牛山公)의 차남(次男) 여정(汝貞)은 연산정난(燕山政亂)을 피하여 지금의 홍성(洪성)인 호서(湖西)지방 홍주(洪州)로 낙향(落鄕) 그지역에 정착(定着)하여 번창하게 되었으니 공(公)의 장남(長男) 덕능참봉(德陵參奉) 장(璋)의 후손이 보령파(保寧派)를 이루고 차남(次男) 성균진사(成均進士) 침(琛)의 후손이 청양파(靑陽派)를 이루었다.

우산공(牛山公)의 삼남(三男) 여흡(汝洽)은 철원(鐵原)으로 일시 낙향(落鄕)하였다가 양주(楊州)로 다시 돌아와 정착하여 그 후손이 양주파(楊州派)를 이루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안유씨는 남한에 5,8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무안유씨조상인물

高麗時代 人物(고려시대인물)

유순직(兪舜稷) : 고려(高麗)예종조(睿宗朝)때 삼중대(三重大匡)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에 오르고 공훈(功勳)으로 장사군(長沙君)에 봉(封)하여 짐으로 인하여 후손이 본관(本貫)을 장사(長沙)로 하게되었다.

공(公)의 상세계(上世系)는 사료(史料)의 유실(遺失)로 고증(考證)할수 없음에 공(公)을 시조(始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고 묘소(墓所)는 개성(開城) 삼걸리(三傑里)에서 실전(失傳)하였다.

양주 추원단(追遠壇)에는 시조(始祖) 장사군(長沙君)부터 9세(世)까지의 위패(位牌)가 배향(配享)되어있다.

유천우(兪千遇) : 1209년(熙宗5)에 출생, 초명은 양(亮)이고 개명(改名)은 증(証)이며 자(字)는 일지(一之), 호(號)는 퇴사재(退思齋), 시호(諡號)는 문도(文度)이다.

고종(高宗)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병부시랑(兵部侍郞)을거쳐 1260년(元宗元年)에 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에 지주사(知奏事)를 겸임함으로써 전선(銓選)을 맡게 되었다.

이어 원종조(元宗朝)에서 지공거(知貢擧)를 비롯하여 좌승선(左丞宣),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지문하성사 참지정사(知門下省事 參知政事),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다.

1275년(忠烈王元年) 관제 개편(官制改編)에 따라 참문학사(參文學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써 원(元)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가 1276년(忠烈王2) 2월에 귀국하여 공로(功勞)로 무안부원군(務安府院君)의 봉작(封爵)과 무안(務安)을 식읍(食邑)으로 받게 되었으니 이를 계기로 후손(後孫)이 본관(本貫)을 달리하여 무안(務安)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公)은 그해 6월에 졸(卒)하였으며 공(公)에게 문도(文度)로 증시(贈諡)되었다.

유영원(兪永元) : 고려조(高麗朝)에서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로 이부상서(吏部尙書)․좌복야(左僕射) 상주국(上柱國) 겸(兼) 태학사(太學士), 전공시랑(典工侍郞)등을 역임하였다.

유윤수(兪允粹) : 고려조(高麗朝)에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겸(兼)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역임(歷任)하였다.

유천(兪蕆) : 1332년(壬申) 송경(松京)에서 출생. 호(號)는 송은(松隱)으로 천성(天性)이 결백강직(潔白剛直) 준수(俊秀)하며 학문(學文)을 좋아하고 또한 효 성(孝誠)이 지극하며 지절(志節)이 매우 강하였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고려조(高麗朝)예의판서(禮儀判書)로 누진(累進)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의 국세(國勢)가 쇠퇴하여 감에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정포은(鄭圃隱)등 제사(諸士)와 더부러 국세(國勢)부흥(復興)에 진력(盡力) 하였으나 끝내 고려조(高麗朝)는 망(亡)하고 말았다.

공(公)은 망국(亡國)을 개탄(慨歎)하고 3일간이나 통곡(痛哭)하며 사원(士園)에서 신조불참동맹(新朝不參 同盟)을 맺고 만수산(萬壽山)에 은거(隱居)하였다.

이태조(李太祖)가 등극(登極)하여 전일의 우의(友誼)를 잊지 못하여 누차 승사(承使)를 보내어 조선조(朝鮮朝) 예조판서(禮曹判書)직을 권(勸)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이를 고사(固辭)하고 망국고신(亡國孤臣)의 애절(哀切)함을 다음과 같은 귀산사(歸山詞)의 시(詩)를 남기고 금천(金川)땅으로 옮겨 은거(隱居), 두문불사(杜門不仕)하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하면서 자손(子孫)에게 일러 조선조(朝鮮朝) 불사(不仕)를 유훈(遺勳)하였으며 1401년(太宗元年)에 70세로 졸(卒)하였다.

공(公)의 위패(位牌)는 의정부시(議政府市) 민락동 삼귀마을에 경기도지방문화재(京畿道地方文化財) 제42호로 지정(指定)된 사우(祠宇) 송산사(松山祠)와 양주(楊州) 추원단(追遠壇)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 松隱公 歸山詞十韻 -

勛華世降兮여 牧野車還이로다.

我心不貳兮여 雲浮鄕關이로다.

我去何處兮여 去路漫漫이로다.

欲蹈東海兮여 更登西山이로다.

海闊山高兮여 風淸月寒이로다.

盧彼淨潔兮여 常掩松關이로다.

江鷗伴我兮여 山鶴識顔이로다.

身布首葦兮여 故國衣冠이로다.

溪流獨淸兮여 垂我釣閒이로다.

吾寧泯沒兮여 不傳人間이로다.

유서(兪 瑞) : 호(號)는 죽촌(竹村) 고려말(高麗末)에 중현대부비순위대호군(中顯大夫備巡衛大護軍)을 역임 하고 신조(新朝)에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제수(除授)하였으나『우리집안은 신조(新朝) 불참(不參) 이어늘 어찌 친의(親意)를 어기고 취사(就仕)하랴』 하고 신병을 빙자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또한 효성(孝 誠)이 지극하여 세인(世人)의 칭송이 대한하였다.

후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조선시대 인물(朝鮮時代 人物)

유정(兪 定) : 조선조(朝鮮朝)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군기사사(判軍器寺事)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고 가정대부(嘉靖大夫)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의 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추증(追贈)되었다.

유희익(兪希益) : 자(字) 이염(而濂), 호(號) 역암(易菴) 인공(公)은 1450년(世宗32)에 연소(年少)한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1456년(世祖元年)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삼사이랑(三司吏郞)을 역임하였으며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계(昇階)하였다.

역학(易學), 성리학(性理學)에 정통(精通)하였고 천문(天文), 지리(地理), 수학(數學)등 학문(學文)에 조예가 깊어 세조(世祖)의 정무(政務)에 보필(輔弼)한바 커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제수(除授)하였다.

또한 인지의(印地儀,一名 窺衡) 발명(發明)에 기여한 바 커 세조(世祖)가 역암(易菴)이라 사호(賜號)하였다.

그 당시 유학계(儒學界)에서는 훈구파(勳舊派),절의파(節義派),사림파(士林派),청담파(淸談派)등 으로 분파(分派)하여 혼란기(混亂期)를 맞으니 공(公)은 이를 피(避)하여 첨일정(瞻日亭)을 짓고 그곳에서 역학(易學) 성리학(性理學) 및 천문학연구(天文學硏究)에만 전념(專念)하여 사계문장(斯界文章)으로 진세(振世)하고 후학도(後學徒) 지도(指導)에 정진(精進)하였다.

유자겸(兪自謙) :자(字)는 우덕(友德)이고 성균진사(成均進士)로서 예의범절(禮儀凡節)이 바르고 문장학행(文章學行)의 고매(高邁)함에 군자(君子)의 집안이라고 세인(世人)의 칭송(稱頌)을 받았다.

유한필(兪翰弼) : 자(字)는 양중(良仲)이며 한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한바 있고 봉열대부(奉列大夫)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歷任) 하였다.

유세호(兪世豪) : 자(字)는 사언(士彦),호(號)는 우산(牛山)으로 명종(明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전한(典翰)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에 올랐다.

학문(學文)으로 현달(顯達) 하면서도 학파대립(學派對立)에 외면(外面)하여 사화(士禍)를 면(免)하게 되고 자손(子孫)에게 일러 붕당(朋黨)을 멀리하게 함으로써 당쟁파화(黨爭派禍)의 화(禍)를 모면(謀免)하게 하는 등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높아 세칭(世稱) 우산선각사(牛山先覺士)라 하였다.

유여정(兪汝貞) : 자(字)는 계열(季烈),호(號)는홍은(洪隱)으로 1468년(世祖13)에 출생 연소(年少)한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승의랑(承議郞)으로부터 봉정대부(奉正大夫)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까지 승계(昇階)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朝廷)의 정세(政勢)가 심히 불안(不安)하자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고 역암공(易菴公)이 지은 첨일정(瞻日亭)에서 성리학(性理學)과 천문학(天文學)을 연구(硏究)하다가 연산정란(燕山政亂)이 일어나자 이를 피(避)하여 두 아들을 데리고 호서(湖西)의 홍주(洪州)로 낙향(落鄕)하여 강당(講堂)을 짓고,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전력(全力)을 기울였다.

공(公)의 장남(長男) 덕능참봉(德陵參奉) 장(璋)의 후손(後孫)이 보령파(保寧派)를 이루고 차남(次男) 성균진사(成均進士) 침(琛)의 후손(後孫)이 청양파(靑陽派)를 이루었다.

유여흡(兪汝洽) : 자(字)는 흡지(洽之)이며 관직(官職)은 수의부위(修義副尉)로 삼형제 각산분거(各散分居)의 계획(計劃)에 따라 철원(鐵原)으로 일시 낙향(落鄕)하였다가 양주(楊州)로 다시 돌아와 후손(後孫)이 양주파(楊州派)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