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무송유씨시조(茂松庾氏),유금필(庾黔弼),유순유(庾筍悠)

작성일 : 2017-04-27 10:25 수정일 : 2018-02-26 12:54

무송유씨시조

유씨(庾氏)는 본래 중국(中國)계통으로 한(漢)나라 말기와 진(晋)나라 초기에 유순유(庾筍悠)가 우리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건너와 정착하여 살면서부터 유씨(庾氏)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후 후손(後孫) 유금필(庾黔弼)이 정서 대장군(征西大將軍)․도통 대장군(都統大將軍)을 역임하면서 고려 개국(高麗開國)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 통합삼한익찬공신(三重大匡統合三韓翊贊公臣)으로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조상의 세거지(世居地)인 평산(平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유금필(庾黔弼)의 5세손 녹숭(祿崇)이 고려 숙종(肅宗) 때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 빈객(太子賓客)․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무송(茂松)에 세거(世居)하게 되자 무송(茂松)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무송(茂松)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茂長面)에 두었던 통일신라 때의 행정구역명으로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무송현으로 개명하였으며, 1417년(태종 17) 장사현(長沙縣)과 합하여 무장현(茂長縣)이라고 일컫다가 몇 차례의 변천을 거쳐 고창군(高敞郡)에 편입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무송유씨(茂松庾氏)의 대표적 인물(人物)로는 금필(黔弼)의 손자 방(方)이 고려 성종(成宗) 때 거란군(契丹軍)의 침입을 격퇴하여 전공을 세우고 현종(顯宗) 때 병부 상서(兵府尙書)겸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또한 예종(睿宗)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른 녹숭(祿崇)의 아들 필(弼)이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고 손자 응규(應奎)가 군기감(軍器監)을 거쳐 공부 낭중(工部郎中)에 올랐으며 청렴하기로 이름 높아 「여옥군자(如玉君子)」라 불렀다.

응규의 아들 자량(資諒)은 고종(高宗) 때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여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지낸 석(碩), 우승선(右承宣) 경현(敬玄) 등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서는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을 지낸 귀산(龜山)과 태종(太宗)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오산(鰲山),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득시(得時), 그리고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한 순도(順道) 등이 유명하였다.

이외에도 시인(詩人)이자 바둑 국수(國手)였던 찬홍(纘洪)과 독립운동가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여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도모한 광복투사 장순(昌淳) 등이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송유씨(茂松庾氏)는 남한(南韓)에 12,4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무송유씨조상인물

유금필(庾黔弼) ?~941(태조 24) 시호(諡號)는 충절(忠節). 923년(태조 6) 마군 장군(馬軍將軍)으로서 골암진(鶻巖鎭)에 침입한 북번(北番)을 격퇴했고, 925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서 연산진(燕山鎭)에 침입한 후백제의 장군 길 환(吉 奐)을 살해 후 임존군(任存郡)을 공격,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해 조물군(曹物郡)에서 견훤군(甄萱軍)을 대파(大破)했고, 928년에 청주(淸州)에서 백제군과 싸워 김 훤(金 萱)․애 식(哀 式) 등의 군사를 몰아내고 독기진(禿岐鎭)까지 추격, 대승했다.

931년(태조 14) 무고를 받아 곡도(鵠島)에 유배, 이듬해 견훤군에 대우도(大牛島) 침범 소식을 듣고 자진 출전, 적을 격퇴했다.

933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이 되어 의성부(義城府)를 지키면서 후백제군의 신라 침범을 격퇴, 이듬해 운주(運州) 싸움에서 백제군을 대파하여 웅진(熊津) 이북 30여 성을 항복시켰다.

935년(태조 18) 도통 대장군(都統大將軍)으로서 후백제군에게 유린당한 나주(羅州) 40여 군(郡)을 진무(鎭撫), 이듬해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태사(太師)에 추증(追贈), 태조(太祖)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무성묘(武成廟)에 제향(祭享)되었다.

유방(庾 方) ?~1038(정종 4) 성종(成宗) 때 낭장(郎將)으로 서북면(西北面)의 안융진(安戎鎭)을 수비 중 993년(성종 12) 소손녕(蕭遜寧)이 거느린 거란군(契丹軍)이 침입하자, 전공을 세웠다. 목종(穆宗) 때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 왕을 호종했고, 1011년(현종 2)에 병부 상서(兵府尙書) 겸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이해 참지 정사(參知政事)․서경유수(西京留守) 겸 서북면 행영도병마사(兼西北面行營都兵馬使)가 되었다.

1016년 형부 상서(形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 1019년 천승현 개국남(千乘縣開國男)에 봉해지고, 1022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승진, 이듬해 서북면행영 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를 거쳐 태자 태보(太子太保), 1025년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를 지냈고 1027년(현종 18)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했다.

유행간(庾行簡) ?~1009년(목종 12) 위위소경(衛尉少卿) 품렴(稟廉)의 아들. 목종의 총애를 받아 합문사인(閤門舍人)이 되어 유충정(劉忠正)과 함께 왕의 측근자로서 권세를 부렸다. 1009년(목종 12) 강 조(康 兆)가 목종을 폐하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세울 때 김치양(金致陽)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유손(庾 孫) 고려(高麗)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유고만(庾高滿) 고려(高麗) 때 수사도(守司徒)를 역임하였다.

유석(庾 晳) 1086년(선종 3) 청주(淸州)․전주(全州)에 홍수가 났을 때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서 수재민 구호에 힘썼다.이듬해 위위소경(衛尉少卿)으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요(遼)나라에 다녀왔으며, 1096년(숙종 1) 공부상서(工部尙書)․삼사사(三司 使)로서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겸했다.

이듬해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科擧)를 관장하고, 1100년 상서우복야 겸 태자빈객(尙書右僕射兼太子賓客)이 되었다.

유녹숭(庾祿崇) ?~1114(예종 9) 자(字)는 귀수(龜壽), 시호(諡號)는 안정(安貞). 1099년(숙종 4)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1102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서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 빈객(兼太子賓客)․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 예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유필(庾 弼) ?~1155(의종 9) 시호(諡號)는 공숙(恭肅). 학행(學行)으로 이름나 등용되고, 1143년(인종 21) 사신으로 금나라에 판견되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했다. 이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비서감(秘書監)을 역임. 1147년(의종 1)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이부 시랑(吏部侍郞)이 되고, 1151년(의종 5)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환관(宦官) 정함(鄭 諴)을 탄핵 , 파직시켰다.

참지정사(參知政事)․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어 보문각제거(寶文閣提擧)․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수국사(修國史)․태자 태자(太子太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판이부사(判吏部事)에 이르렀다. 의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유응규(庾應圭) 자(字)는 빈옥(賓玉). 음보(蔭補)로 내시(內侍)를 거쳐 참관(參官)이 되고 남경(南京)을 잘 다스린 뒤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후에 공부 낭중(工部郎中)으로 사신(使臣)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와 군기감(軍器監)에 오르고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을 겸했다.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명(王命)으로 선론(宣論)에 노력, 여러 성(省)을 차차 귀순케 하고 다시 공부 낭중(工部郎中)이 되었다.

유자량(庾資諒) 자(字)는 침연(湛然). 음보로 수궁서승(守宮署丞)이 된 후 대락서승(大樂署丞)을 거쳐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치적(治績)을 세웠다. 그 후 상의봉어(尙衣奉御)․호부 낭중(戶部郎中)․어사잡단(御史雜端)․대부소경(大府少卿) 등을 거쳐 지삼사사(知三司事)․판대부사재사(判大府事宰事)․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고 고종초(高宗初)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유석(庾 碩) 1216년(고종 22)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을 거쳐, 1235년(고종 22) 안동인(安東人)이 몽고병을 인도하여 동경(東京)으로 향할 때 충청주도 안찰사(忠淸州道按察使)로 동남도 지휘부사(東南道指揮副使)를 지내고 내시소부감(內恃小府監)을 거쳐 안동 도호부사(安東都護府사)가 되었다. 뒤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어 임기가 끝났으나 백성들의 간청으로 다시 3년을 유임하고 돌아왔다.

유홍(庾 弘)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유경현(庾敬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227년(고종14)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관장했으며, 상서(尙書)․우승지(右承至)․어사대사(御史臺事)를 거쳐 우승선(右承宣)이 되었다.

유권(庾 權) 고려(高麗)에서 군자감 판사(軍資監判事)를 역임하였다.

유귀산(庾龜山) ?~1457(세조 3) 호(號)는 송사(松沙), 좌찬성(左贊成) 당(鐺)의 아들. 음보(蔭補)로 임관(任官)되어 1402년(태종 2) 판내자시사(判內資寺事)․안변부사(安邊府使), 1404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제주 안무진제사(安撫賑濟使)가 되어 기민(飢民)을 구제했다. 이해 첨총제(僉摠制)로 선위사(宣慰使)를 겸하고, 1408년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이 되었다. 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와 함께 상왕(上王) 단종의 복위 음모에 관련된 혐의로 사형되었다.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유오산(庾鰲山) 호(號)는 죽사(竹沙). 조선 때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태종(太宗) 때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으며 1545년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관직을 버리고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추진(推進)하다가 탄로되어 옥사하였다. 숙모전(肅慕殿)에 제향(祭享)되었다.

유득시(庾得時) 조선(朝鮮)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유순도(庾順道) 호(號)는 학봉(學峯). 조선(朝鮮)에서 좌참찬(左參贊)을 지냈다.

유덕명(庾德明)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유지(庾 智) 조선에서 사간(司諫)을 지냈다.

유옥로(庾玉輅) 조선(朝鮮)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유득화(庾得和) 조선조(朝鮮朝)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유식(庾 軾) 호(號)는 덕곡(德谷).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유영룡(庾泳龍) 자(字)는 운로(雲路), 호(號) 낙와(洛窩). 조선(朝鮮)에서 감찰(監察)을 지냈다.

유천적(庾千積) 조선(朝鮮)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유한부(庾漢阜) 자(字)는 후지(厚之).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유찬홍(庾纘洪) 자(字)는 술부(述夫), 호(號)는 춘곡(春谷).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시문(詩文)을 잘 했고, 당대 바둑의 국수(國手)였다. 역관(譯官)으로서 동지사(冬至使)를 수행했으며, 벼슬은 사역원판관(司譯院判官)에 이르렀다.

유세신(庾世信) 호(號)는 묵준당(黙駿堂). 영조(英祖) 때 가인(歌人)으로서,「악부(樂府)」에 시조 약간 수가 전해진다.

유인엽(庾仁燁)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유한종(庾漢鍾) 자(字)는 진홍(振弘). 조선조(朝鮮朝)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유경구(庾敬求) 자(字)는 의백(義伯), 호(號)는 입신재(立身齋). 조선(朝鮮) 때 의사(義士)였다.

유창순(庾昌淳) 충남 천안(天安) 출신. 1913년에 풍기(豊基)에서 채기중(蔡基中)․김상옥(金相玉) 등과 광복단(光復團)을 조직, 국권 회복을 도모했고, 1917년 칠곡(漆谷)의 친일 부호(親日富豪) 장승원(張承遠) 살해계획에 가담, 이해 12월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