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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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28 13:49 수정일 : 2018-07-26 15:17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조(始祖) 윤신달(尹辛達)은 신라(新羅)의 천년사직(千年社稷)이 기울고 후삼국(後三國)의 격동기에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창업에 훈고을 세운 명신(名臣)이다.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용연보감(龍淵寶鑑) 」 등의 문헌에 의하면 시조 신달은 경기도 파주 파평산(坡平山) 기슭에 있는〈용연지(龍淵池)〉라고 못 가운데 있던 옥함(玉函)속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가 옥함(玉函)에서 나올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고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으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파평(坡平)은 경기도(京畿道) 파주군(坡州郡)에 위치한 파평면의 옛 지명이다. 파주는 본래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때 파주사현(坡州史懸)이었는데 1398(조선 태조 7) 서원군(瑞原郡)과 파평현(坡平懸)을 병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고 하였고, 태종(太宗) 때는 교하현(交河懸)을 폐지, 이에 병합하여 도호부(都護部)로 승격하였으며, 뒤에 교하현을 다시 복구시켰으나 도호부는 그대로 두었다. 1461(세조 7)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 1895년 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하현을 폐합하였다.

씨족사 개요 

특히 시조 신달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으로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곁에서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忠諫)했으며,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벽상삼한익찬 2등공신(璧上三韓翊贊二等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을 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아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그후 신달의 현손(玄孫) ()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宣宗)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지내고, 1107(예종 2) 여진정벌(女眞征伐)에 원수(元帥)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 함주(咸州)와 영주(英州)9지구에 성()을 쌓아 참범하는 여진을 평정(平定)하고 개선했으며, 뒤에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 번() 세조(世祖)의 국구(國舅)가 되어 대사헌(大司憲)․우참찬(右參贊) 등을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의 아들 삼형제(三兄第)중 맏아들 사분(士昐)이 의정(右議政)을 지내고 영동령부사(領敦寧府事), 둘째 아들 사윤(士昀)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대제학(

提學)을 지내고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영평군에. 셋째 사흔(士昕)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름으로써 형제 정승(政丞)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사분(社昐)과 사흔(士昕)의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왕비(王妃)가 배출되니,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갈라져 정치적(政治的) 대결을 벌이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승순(承順)의 아들 곤()은 정종조(定宗朝)의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파령군(坡平君)에 봉해졌으며 1408(태종 8)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에 다녀온 후 세종(世宗) 때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올랐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삼산(三山)의 아들 호(: 곤의 손자)는 성종비(成宗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버지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진 뒤 영돈령부사(寧敦寧府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필상(弼商)은 세조(世祖) 때의 총신(寵臣)으로 도승지(都承旨)를 지낼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우참찬(右參贊)에 특진(特進)되고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를 겸하여 건주위(建州衛) 토벌에 공을 세워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조(成宗朝)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尹氏)으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약(賜藥)을 받았다. 필상(弼商) 증손(曾孫) ()1537(중종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종중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한 뒤 호조 판서(戶曹判書)․돈령부사(敦寧府事)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난「국간집(菊磵集)」을 저술했다.

목사(牧使) ()의 아들로 세종(世宗) 때 좌찬성(左贊成)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사로(師路)는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졌으며 세조(世祖)때 좌익공익(左翼功臣)에 책록되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의 아들 헌주(憲注)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후, 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파령 윤씨(坡平尹氏)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지내고 기로소(妓老所)에 들어간 강()과 그의 다섯 아들 지미(趾美)․지선(趾善)․지완(趾完)․지경(趾慶)․지인(趾仁) 형제가 크게 현달(賢達 )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그 중에서 현종(顯宗) 때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병․이․공조 판서(兵․吏․工曹判書) 등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지선(趾善)과 숙종(肅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내고 파령군(坡平 君) 에 봉해진 비경(飛卿)과 그의 손자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른 봉구(鳳九)는 학행(學行) 뛰어난〈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고, 봉오(鳳五)는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른 봉조와 함꼐 명성을 떨쳤다.

당대의 덕망높은 학자였던 심형(心衡)은 비경(飛卿)의 증손으로 영조(英祖) 때 부제학(副提學)․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속종(肅宗) 때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증()은 수차에 걸쳐 대사헌(大司憲)과 이조 판서(吏曹判書)․우의정(右議政) 등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당시 격렬한 사색 당쟁(四色黨爭)에 깊숙이 가담하여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서 송시열(宋時烈) 중심의 노론(老論)에 대항하며 이산(尼山)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종(仁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고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오른 인경(仁鏡)과 영조(英祖) 때 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이른 동도(東度)가 뛰어났으며, 학자(學者)로 명망(名望) 높은 정()과 경남(景男). ()등은 학문으로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말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이름난 준희(俊熙)와 창석(昌錫)․기섭(기燮)․해()․애경(愛卿)․석구(錫求)․현진(顯振) 등이 구국(救國)의 신념(信念)으로 항일 투쟁에 앞장섰으며,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소속으로 일본군(日本軍)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 대장 등을 폭사(暴死)시킨 의사(義士) 봉길(奉吉)은 학문(學問)고 충절의 전통 가문인 파평 윤씨의 전통을 이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평윤씨(坡平尹氏) 전국에 총 770,9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윤신달 : 893(신라 진성왕 7)~973(고려 광종 24) 일명 협신이고 시호는 소양(昭襄)이신데 파평윤씨의 시조이시다.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한 공올로 벽상삼한 익찬공신에 책훈되고 벼슬은 삼중대광태사에 이르다, 공은 944(혜종 원년)에 경주대도독에 부임하여 31년간 덕치에 힘쓰다.

윤관(尹 瓘) ?1111(예종 6)

()는 동현(同玄),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검교소부소감(檢敎小府少監) 집형(執衡)의 아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1088(선종 5) 합문 지후(閤門祗候)로 광주(光州)․충주(忠州)․청주도(淸州道) 등지에 출추사(出推使)로 파견되고, 습유(拾遺)․보궐(補闕)을 거쳐 1095(헌종 1) 좌사 낭중(左司郎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肅宗)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에 동궁 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가 되어 조 규(趙 珪)와 함께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왕의 사위(嗣位)를 알리고, 이듬해「자치통감(資治通鑑)」을 기중받고 귀국하였다. 1101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이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어사 대부(御史大夫)․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女眞)을 정벌하다가 실패했다.

그후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예종 2) 여진 정벌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했다.

이때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嶮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여이듬해 봄에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리 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 (判尙書吏部事)․지군국중사가 되었다.

이해 여진이 계속 북변 침범하자 다시 출전했으나 패전했고, 그후 여진이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교섭해 오자 조정은 지키기 어렵다 하여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강화를 한뒤 모함을 받아 패군의 책임을 지고 회군하는 도중 벼슬을 뺴앗기고 곧 공신마저 삭탈 (削奪)되었다가, 1110년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판병부사(判兵部事)․상주국(上柱國)․감수국사(監水國史)가 되었으나 우울 한 날을 보내다 죽었다. 예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윤언순(尹言純) 시중(侍中) ()의 아들. 1115(예종 10) 시어사(侍御史)로 사신이 되어 요()나라에 가서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했다. 이때 금()나라가 일어나 길이 막힌데다가 요나라 동경(東京)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영창(高永昌)에게 구금되어 그의 강압에 못이겨 표 ()를 올리고 칭하(稱賀)했다. 귀국 후에 이 일을 감우고 있다가 탄로되어 벌을 받았으며, 뒤에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다.

윤언식(尹彦植) ?1149(의종 3)

시중(侍中) ()의 아들. 인종(仁宗)을 세자(世子) 시절부터 가까이 모셔 인종(仁宗)의 즉위 후 청환직(淸宦職)을 지냈으며, 1136(인종 14) 전중감(殿重監)으로서 조제사(弔祭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 왔고, 1148(의종 2)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가 되었다.

윤언이(尹彦頣) ?1149(의종 3)

()는 금강거사(金剛居士), 시호(諡號)는 문강(文康), 시중(侍中) ()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인종(仁宗) 때 기거랑(起居郞)이 되어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 우정언(右正言) 권 적(權 適) 등과 함께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왕으로 하여금 실시케 했다.

1128(인종 6)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서 송나라에 파견되어 국교 재개를 청하고 돌아왔으며, 1132년에 국자 사업(國子司業)으로서 경연(經筵)에서 경의(經義)를 강의하고 화서대(花犀帶)를 하사받았다.

일찍이 예종 때 아버지 관()이 왕명을 받아 지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碑文)을 김부식(金富軾)이 함부로 고친 일이 있어, 아버지를 모욕한 김부식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차에 1133(인종 11) 김부식의 주역(周易) 강의를 문난(問難)하라는 왕명을 받고 정연한 논리로 반박하여 아버지를 위해 설분했다.

1135(인종 13) 묘청(妙淸)의 난에 원수(元帥) 김부식의 막료로 출전하여 이듬해 서경(西京)의 함락 때 공을 세웠으나 도리어 정지상과 내통했다는 김부식의 보고에 의해 양주 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겨났다.

뒤에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자 지난날 억울했던 사실을 왕에게 해명했으며, 1147(의종 1)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예종(睿宗)․인종(仁宗)․양조(兩朝)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주역(周易)」에 밝았으며, 만년에는 불교를 깊이 믿어 중 관승(貫乘)과 친교를 맺었다.

윤언민(尹彦旼) 시중(侍中) ()의 아들. 1135(인종 13) 묘청(妙淸)의 난 때는 이부 상서(吏部尙書) 김부의(金富儀)의 좌군(左軍)으로 공을 세웠으며, 1143년 상식 봉어(尙食奉御)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글씨와 그림에 능했다.

윤인첨(尹鱗瞻) 1110(예종 5)1176(명종 6)

()는 태조(胎兆), 시호(諡號)는 문정(文定), 정당문학(政堂文學) 언이(彦頣)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의종(毅宗) 때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으나 고관의 뜻을 거슬러 좌사 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좌천, 1153(의종 7)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서 사은사(謝恩 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기거주(起居注)를 거쳐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서북면 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고, 1169(의종 23)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이듬해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국자감 대사성(國子監大司成), 참지정사(參知政事)․판병부사(判兵部事)를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1172(명종 2) 동북면 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行營兵馬兼中軍兵馬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보당(金甫當)의 난 직후 이의방(李義方)으로부터 주동자의 한 사람이란 의심을 받았으나 유응규(庾應圭)의 도움으로 화를 모면했으며, 이어서 상장군(上將軍)을 겸하고 중방(重房)의 의사(議事)에 참여, 수태사(守太師) 벼슬이 내려졌다.

1174(명종 4)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난에는 원수(元帥)가 되어 삼군(三軍)을 이끌고 절령(岊嶺)에서 반군과 싸워 패퇴(敗退), 다시 기탁성(奇卓城)․진 준(陳 俊) 등과 출정하여 이듬해 서경을 평정하고 조위총을 벴으며, 전공으로 추충정란광국공신(推 忠靖亂匡國功臣)․상주국(上柱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追贈), 명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윤자연(尹自淵) 시호(諡號)는 창화(昌和).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였다.

윤지호(尹之顥) 시호(諡號)는 문화(文和).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대제학(大提學)․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다.

윤세유(尹世儒) ?1215(고종 2)

시중(侍中) ()의 손자. 1209(희종 5) 우어사(右御史)로서 좌어사(左御史) 최 부(崔傅)와 함께 왕가(王駕)를 모시고 연경궁(延慶宮)에 돌아갈 때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린 일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아 양주부사(梁州副使)로 좌천되었다.

1214(고종 1)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고, 이듬해 평소 사감이 있던 우복야(右僕射) 정 진(鄭 稹)을 반역죄로 무고했다가 유배, 이어 소환되어 오던 도중 병사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윤보(尹 珤) ?1329(충숙왕 16)

시호(諡號)는 문현(文顯). 충렬왕(忠烈王) 때 정방(政房)에 보직, 1296(충렬왕 22) 좌승지(左承旨), 1298년 충선왕(忠宣王)이 잠시 왕 위에 올라 관제를 개혁할 때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의조 상서(儀曹尙書),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를 거쳐 1321(충숙왕 8)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윤선좌(尹宣佐) 1265(원종 6)1343(충혜왕 복위 4)

()는 순수(淳叟), 시중(侍中) ()7대손. 충렬왕(忠烈王)때 문과(文科)에 장원, 비서랑(秘書郞)이 되고 충선왕(忠宣王) 초에 좌정언(左正言)․내서사인(內書舍人)을 거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되고, 성격이 강직하여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임명되고 부인(符印)을 관장했다.

이듬해 감찰 집의(監察執義)로서 왕에게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진강(進講) 했고, 심양왕(瀋陽王) ()를 왕위에 앉히기 위한 간신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의 서명(署名) 위협을 솔선 거절 함으로써 대간(臺諫)들이 이에 따르게 되어 왕위 찬탈의 위기를 모 면케 하는 데 성공했다.

충숙왕(忠肅王)의 귀국 후 판전교(判典校)를 거쳐 민부 전서(民部典書)로서 한양윤(漢陽尹)이 되고, 1335(충숙왕 복위 4) 계림윤(鷄林尹)에 이어 첨의평리(僉議評理)․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지내고 치사(致仕)했다. 경학(經學)에 밝고 노자(老子)․장자(莊子)․형명(刑名)의 학()도 연구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윤계종(尹繼宗) 고려조(高麗朝)에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고, 딸이 충혜왕(忠惠王)의 비()가 되어 충목왕(忠穆王)을 낳았다.

윤안적 : 대언공이라 하다. 공은 문현공의 둘째 아드님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언에 이르다. 배는 장흥임씨(長興任氏)로서 그 아버지는 병부상서 급(伋)이다. 공의 묘소는 실전되고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 일명 시묘동에 단을 모시고 시사를 받들고 있다.

윤안숙(尹安淑) 시호(諡號)는 양간(良簡). 고려(高麗) 충정왕(忠定王)때 좌리공신(左理功臣)에 책록되었고, 삼사 좌사(三司左使)․첨의찬 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윤안비(尹安庇)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문하시랑(門下侍郞)․찬성사(贊成事)․태위(太尉) 등을 지냈다.

윤해(尹 侅) 1307(충렬왕 33)1376(우왕 2)

()는 자기(子奇),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후손, 소부시윤(小府寺尹) ()의 아들. 1320(충숙왕 7) 음보(蔭補)로 주릉직(周陵直)이 되었고, 1340(충혜왕 복위 1) 흥위위 정용호군(興威衛精勇護軍), 이어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친어군 호군(親御軍護軍)․삼사 좌윤(三司左尹)을 거쳐 1349(충정왕 1) 대간(臺諫)에 등용 되었다.

판소부시윤(判小府寺尹)․지전법사사(知典法司事)․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수주 목사(遂州牧使)를 역임하고,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을 복주(福州)에 호종(扈從),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 되었으며, 1364년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1372(공민왕 21) 전법 판서(典法判書), 2년 후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윤척(尹 陟) ?1384(우왕 10)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안숙(安淑)의 아들. 1350(충정왕 2)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1363(공민왕 12) 군부 판서(軍簿判書)로서 앞서 홍건적(紅巾賊)의 난 당시 경성(京城 : 개성) 수복의 공으로 2등공신에 올랐으며, 우왕(禑王) 때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윤승순(尹承順) ?1392(태조 1)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 상호군(上護軍) 조 인(趙 璘) 등과 함께 신 돈(辛 旽)을 살해하려고 모의 하다가 누설되어 1367(공민왕 16)에 유배되었다. 1371(공민왕 20) 신 돈이 주살(誅殺)된 뒤에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이 되고 뒤에 왜구(倭寇)를 막아 누차 공을 세웠다.

1389(창왕 1) 문하평리(門下評理)로 권 근(權 近)과 함께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왕()씨로 공민왕의 후사(後嗣)를 정하라는 명제(明帝)의 지시를 전함으로써 창왕(昌王)이 폐위되고 정창군(定昌君) (: 공양왕)가 즉위하였고, 그후 판개성부사(判開城府 事)를 역임하였다.

윤승례(尹承禮)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윤호(尹 虎) ?1393(태조 2)

()는 중문(仲文), 시호(諡號)는 정후(靖厚), 파평군(坡平君) ()의 아들. 글씨와 바둑에 능했으며, 공민왕과 내기 바둑을 두면서 지은 시가 화근이 되어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로 좌천되었으나, 전략에 밝아 왜구(倭寇)를 소탕, 그 공으로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1381(우왕 7) 다시 왜구를 격퇴했고, 1385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앞서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때의 공으로 1390(공양왕 1)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록, 1392년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이해 조선이 건국 되자 태조(太祖)를 도운 공으로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이 되어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던 도중 금암역(金巖驛)에서 병사했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追贈)되었다.

윤규(尹 珪) 1365(공민왕 14)1414(태종 14)

판도판서(判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 1383(우왕 9)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390(공양왕 1)에 우정언(右正言)이 되고, 그후 예조 정랑(禮曹正郞)․내서사인(內書舍人)․형조 좌참의(刑曹左參議) 등을 지냈다.

1409(태종 9) 병조 참의(兵曹參議)․우부대언(右副代言)을 역임, 뒤에 좌부대언(左副代言)․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내고, 1413(태종 13) 경승 부윤(敬承府尹)이 되었다. 예서(隸書)와 초서(草書)에 능해 항상 상서사(尙瑞司)의 벼슬을 겸임했으며, 태종(太宗)과 같은 해에 급제하여 태종 즉위 후 후대를 받았다.

윤곤(尹 坤) ?1422(세종 4)

시호(諡號)는 소정(昭靖),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승순(承順)의 아들. 고려말 문과(文科)에 급제, 동생 향()과 함께 문학(文學)으로 기용되었다. 1400(정종 2)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태종)에 가담, 1401(태종 1) 좌명공신(左命功臣) 2등이 되고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으며, 이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8년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로 나가 기악(妓樂)을 폐지하고 풍속(風俗)을 바로잡는 등 치적을 남겼으며,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윤향(尹 向) 1374(공민왕 23)1418(태종 18)

시호(諡號)는 소도(昭度), 문하평리(門下評理) 승순(承順)의 아들. 고려 우왕 때 생원(生員)으로서 사예(司藝) 류백순(柳伯淳), 생원 박초(朴 礎) 등과 함께 상소하여 불교 때문에 나라가 망하므로 정도전(鄭道傳) 등 유학자(儒學者)들을 존중하여 유학(儒學)을 권장하라고 주장했다.

1404(태종 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이듬해 집의(執義)를 거쳐 1406년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로서 충청도 경차관(忠淸道敬差官)이 되어 왜구(倭寇)에게 미곡 운반선을 탈취당한 충청도 안문도절제사(忠淸道安問都節制使) 최 이(崔 迤) 등 지방관 4명을 처벌했다.

이듬해 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헌(大司憲)․한성 부윤(漢城府尹) 등을 역임, 1408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완산 부윤(完山府尹)을 겸직, 다음해 참지의정 부사(參知議政府使)를 거쳐, 1410년 경상좌도 병마절제사(慶尙左道兵馬節制使)로 계림부윤(鷄林府尹)을 겸한 뒤 1412년 한성 부윤에 재임되었다.

다음해에 대사헌․공조 판서, 1415년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 판서에 재직중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당시에 공을 세운 장수들의 공신녹권(功臣錄券)을 재정하라고 상소했다가 파직당하고 전리(田理)에 방귀(放歸), 이어 적성(積城)에 안치(安置)되었다. 1417년 풀려 나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고,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 평양(平壤)에서 객사했다.

윤희제(尹希齊)  1380년(고려 우왕 6년)~1467년(세조 13년) 정현대부 호서판서에 이르고 보국 승록 대부 의정부 좌찬성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증자되었다.

배는 남양홍씨로서 부는 찬성 잠(潛)이다.

윤번(尹 璠) 1384(우왕 10)1448(세종 30)

()는 온지(溫之), 시호(諡號)는 정정(貞靖), 승례(承禮)의 아들. 음보(蔭補)로 신천 현감(信川縣監)을 거쳐, 1428(세종 10)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에 이르러 딸이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부인이 되자 군기시 부정(副正)에 승진,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고, 1434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거쳐 이조․호조의 참판(參判)을 역임, 1439년 경기도 도관찰사(京畿道都觀察使)를 지낸 후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1440년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공조 판서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어 병으로 사직, 1447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윤삼산(尹三山) ()는 수옹(壽翁), 좌의정 호()의 아버지. 명종(明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문장․글씨․죽화(竹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로 알려졌다.

윤형(尹 炯) 1388(우왕 14)1453(단종 1)

()는 중회(仲晦),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장군 관()의 후손. 1411(태종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사직단직(社稷壇直)에 보직되고, 군자직장(軍資直長)에 전임, 1420(세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 사인(舍人)․지제교(知製敎)․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했다.

1439(세종 21)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440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경기도 관찰사․경창 부윤(慶昌府尹)․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형조 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냈다.

1447년 대사헌(大司憲)에 이어 이듬해 공조 판서․호조 판서를 역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거쳐 1452(문종 2)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2등에 추록,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윤사분(尹士昐) 1401(태종 1)1471(성종 2)

()는 계휘(繼輝), 시호(諡號)는 이정(夷靖), () 영의정 번()의 아들, 정희왕후(貞熹王后:세조비)의 오빠. 1426(세조 8) 음보(蔭補)로 중부 녹사(中部錄事)에 발탁되고, 세자익위사 우위수(世子翊衛司右衛率)․감찰(監察), 형조와 호조의 좌랑(佐郞), 한성부 판관(漢 城府判官)․형조 정랑(刑曹正郞)을 거쳐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등을 지내고, 1455(세조 1)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다음해 첨지돈령부사(僉知敦寧府事)가 되었다.

1458년 인수 부윤(仁壽府尹), 다음해 공조 참판(工曹參判)․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 1461년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오르고, 이어 우찬성(右贊成)․좌찬성(左贊成)․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뒤 1468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이해 우의정(右議政) 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1470(성종 1)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를 지냈다.

윤사윤(尹士昀) 시호(諡號)는 성안(成安).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판서(禮曹判書)․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고,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영평군(鈴平君)에 봉하여졌다.

윤사흔(尹士昕) 시호(諡號)는 양평(襄平). 조선(朝鮮)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라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하였으며 파주 부원군(坡州府院君)에 봉해졌다.

윤 경(尹 坰) 조선 때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역임하였고 추충적덕병의보조공신(推忠積德秉義輔祚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윤은(尹 垠)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하였고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윤암(尹 巖) 시호(諡號)는 제도(薺度). 조선 때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냈으며 태종(太宗)의 딸 숙경옹주(淑慶翁主)와 결혼,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윤평(尹 泙) 1420(세종 2)1467(세조 13)

인수 부윤(仁壽府尹) ()의 아들, 태종(太宗)의 사위 16세 때 태종의 딸 숙순응주(淑順翁主)와 결혼, 파원군(坡原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의빈부 승빈(儀賓府承賓)에 이르렀다.

윤사로(尹師路) 1423(세종 5)1463(세조 9)

()는 과옹(果翁)․주옹(周翁), 시호(諡號)는 충경(忠景), 목사(牧使) ()의 아들. 1436(세종 18) 세종의 딸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지고, 1452(문종 2) 영천위(鈴川尉)로 개봉(改封)된 뒤 세종 능의 수릉관(守陵官)을 지냈다.

이어 문종(文宗)이 죽자 다시 문종 능의 수릉관이 되고 숭덕대부(崇德大夫)에 가자(加資),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세력에 가담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추방하고, 1455년 세조(世祖)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좌찬성(左贊成)으로 발탁,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를 겸직한 뒤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가 되었다. 1458(세조 4)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1461년 간경도감 도제조(刊經都監都提調), 충훈부 당상(忠勳府堂上) 등을 지냈다.

윤호(尹 壕) 1424(세종 6)1496(연산군 2)

()는 숙보(叔甫), 시호(諡號)는 평정(平靖), 윤 관(尹 瓘)의 후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삼산(三山)의 아들. 1472(성종 3)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지낼 때에 그의 딸이 성종의 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자 국구(國舅)로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476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8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오르고, 이듬해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를 겸했다. 1494년 우의정(右議政)으로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고, 다시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윤흠(尹 欽)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1450(세종 32) 문과에 급제 한 후 한림정언(翰林正言)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윤신(尹 信)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좌랑(佐郞)에 이르렀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였던 조선조(朝鮮朝)의 학자(學者)이다.

윤탄(尹 坦) ()는 탕보(蕩甫), 시호(諡號)는 정호(丁胡). 제천․천령 현감(提川․川寧縣監) 및 성천 부사(成川府使)를 거쳐 내섬(內贍)․내자(內資)․종부(宗簿)의 시정(寺正), 우통례(右通禮)․우부승지(右副承旨)․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 등을 역임하였다.

그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영성군(鈴城君)에 봉하여졌다.

윤필상(尹弼商) 1427(세종 9)1504(연산군 10)

()는 양좌(陽佐), 참판(參判) ()의 아들. 1447(세종 2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50(세종 32) 추장문과(秋場文科)에 급제, 1453(단종 1) 저작(著作)이 되고, 1455(세조 1)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오르고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45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63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된 후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여 세조(世祖)의 측근에서 왕명의 출납을 잘 처리하여 총애가 두터웠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히 처리하여 우참찬(右參贊)에 특진,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지고, 이해 강 순(康 純) 등이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들을 토벌하자 왕명으로 군진에 가서 개선군을 위유(慰諭)했고, 이듬해 안주 선위사(安州宣慰使)로서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이해 세조가 죽자 3년간 광릉(光陵:세조의 릉) 수묘관(守墓官)으로 있었고, 1471(성종 2) 경상도에 한재(旱災)가 들어 기근이 심하자 우찬성(右贊成)으로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기민을 구제, 다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겸직 발령되어 이듬해까지 기민을 구제 한 공으로 모의(毛衣)․녹비화(鹿皮靴)를 하사받았다.

1474년 이조 판서(吏曹判書)․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을 겸직하다가 한명회(韓明澮)․노사신(盧思愼) 등 권신들이 이조(吏曹)의 권한인 인사권(人事權)에 간섭이 심하므로 분개하여 사직하고 일시 은퇴 했으나 곧 복직, 좌찬성(左贊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던 도중 건주위(建州衛) 야인들의 정세를 자세히 탐지하여 보고했고,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479년 명나라가 건주위를 토벌할 때 좌의정으로서 서정 도원수(西征都元帥)를 겸직,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건주위를 토벌했으며, 1481년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84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이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1496(연산군 2)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조(成宗朝)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로 추죄(追罪)되어 진도(珍島)에 유배, 사약(賜藥)을 먹었으나 죽지않아 가졌던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윤석(尹 晳) 1435(세종 17)1505(연산군 11)

()는 희묵(希黙), ()는 한송(寒松), 부사(府使) 계흥(繼興)의 아들. 1456(세조 2) 진사(進士)가 되고, 1466년 고성별시문과(高城別試文科)에 급제, 오랫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뒤에 우통례(右通禮)에 이르렀으며, 글씨와 그림에 능했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 증(追贈)되었다.

윤계겸(尹繼謙) 1442(세종 24)1483(성종 14)

()는 익지(益之), 시호(諡號)는 공양(恭襄), 부원군(府院君) 사흔(士昕)의 아들. 1457(세조 3) 음보(蔭補)로 세자 우참군(世子右參軍)이 되고,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거쳐 1467(세조 13)에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1468(예종 즉위) 남 이(南 怡)․강 순(康 純) 등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데 참여,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으로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1469년에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좌승지(左承旨)가 되고, 이듬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승진, 1471(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봉해졌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겸임했다. 그후 대사헌․형조 판서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481(성종 12)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윤상로(尹湯老) ?1508(중종 3)

()는 상경(商卿), ()는 뇌헌(瀨軒), 시호(諡號)는 영평(靈平), 우의정 호()의 아들,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오빠. 1486(성종 17) 무과(武科)에 장원,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이 되었다.

1498년 우익위(右翊衛)가 되고, 1505년 동반직(東班職)에 기용되어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채청사(採靑使)로 지방에 내려갔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형조 참판(形曹參判)이 되고 대간(臺諫)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특지로 정국공신(靖國功 臣) 3등이 되었다.

1507년 이 과(李 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다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파천군(坡川君)에 봉해졌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윤형로(尹衡老) 1494(성종 25)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조(吏曹)의 천거로 지평(持平)이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때 미관말직을 전전하 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이되고, 영양군(鈴陽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윤금손(尹金孫) 시호(諡號)는 헌의(獻懿). 1491(성종 22) 문과에 급제한 후 옥당(玉堂)에 보직되었으며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파성군(坡城君)에 봉해졌다. 그후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윤여필(尹汝弼) 1466(세조 12)1555(명종 10)

시호(諡號)는 정헌(靖憲), 중종의 장인. 1506(중종 1)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고 이듬해 딸이 중종의 계비(繼妃 : 장경왕후)가 되어,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1545(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아들 임()이 화를 입었으나 그는 80세의 노령이었으므로 화를 모면, 뒤에 용인현(龍仁縣)에 부처(付處)되었다가 1551(명종 6) 풀려 나왔다. 죽은 후 복관(復官)되었다.

윤세림(尹世霖) ()는 은좌(殷佐), 지숭(之崇)의 아들. 생원(生員)으로 1494(성종 2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11(중종 6) 헌납(獻納),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고,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나 사화에 희생된 조광조(趙光 祖) 일파의 억움함을 상소하고 사직했다.

1522년 집의로서 전라도 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가 되고, 이듬해 충청도의 민정을 시찰했다. 죽은 뒤인 1537, 앞서 산릉도감 낭관(山陵都監郎官)으로 있을 때 장경왕후(章敬王后 : 중종비)의 장지(葬地 : 희릉)를 잘못 택했었다는 의금부(義禁府)의 탄핵으로 직첩(職牒)을 추탈(追奪)당했다.

윤세호(尹世豪) 1470(성종 1)?

()는 사영(士英),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직장(直長) 지준(之峻)의 아들. 1503(연산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520(중종 15) 전라도 관찰사로서 죄인(罪人) 김 식(金 湜)의 사건에 연루,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다.

1531년 심 정(沈 貞)․이 항(李 沆)․김극핍(金克愊) 등이 제거되자 다시 기용, 1539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윤탁(尹 倬) 1472(성종 3)1534(중종 29)

()는 언명(彦明), ()는 평와(平窩), 현감(縣監) 사은(師殷)의 아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1501(연산군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전적(典籍)으로서,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선비들이 추방될 때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기용되어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다시 파직, 뒤에 풀려 나와 1529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1532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어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역임했다.

당대 정계에 새로 등장한 사림파(士林派)의 거두로 심오한 학문과 진지한 연구 태도로써 대학자로 존경받았으며 송인수(宋麟壽)․이황(李 滉) 등이 그에게 수학했다.

윤인경(尹仁鏡) 1476(성종 7)1548(명종 3)

()는 경지(鏡之), 시호(諡號)는 효성(孝成), 부사정(副司正) 순의 아들.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06(중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학록(學錄)이 되고, 검열(檢閱)․정언(正言)․사간(司諫)․응교(應敎)․동부승지(同副承旨)․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1526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

그후 좌승지(左承旨)․도승지(都承旨)․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 후 1532년 예조 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36년 예조 판서에 승진, 호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 1539년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545(인종 1) 좌의정(左議政), 이어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이해 인종(仁宗)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잠시 국사를 체결했으며, 명종(明宗)이 즉위한 후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으로 파성부원군(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548(명종 3) 좌의정에 재임되어 죽었다.

윤임(尹 任) 1487(성종 18)1545(인종 1)

()는 임지(任之), 시호(諡號)는 충의(忠毅),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여필(汝弼)의 아들,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다. 그후 1544년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형조 판서를 거쳐 찬성(贊成)에 올랐다.

윤자임(尹子任) 1488(성종 19)?

()는 중경(中卿), 파성군(坡城君) 금손(金孫)의 아들. 생원(生員)으로 1513(중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이듬해 정자(正字)가 되고 이어 박사(博士)․정언(正言)․수찬(修撰) 등을 역임했다.

1519년 의주 목사(義州牧使)․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로 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북청(北靑)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학문과 무예(武藝)에도 뛰어났다. 1538(중종 33) 신원(伸寃)되었다.

윤정(尹 鼎) 1490(성종 21)1536(중종 31)

()는 정숙(鼎叔).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주역(周易)만 읽었다. 조정에서 그의 의()를 가상히 여겨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했으나 사퇴했다. 학문으로써 이름을 떨쳤으며, 민 기(閔 箕)․허 엽(許 曄)․이 항(李 恒) 등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윤원로(尹元老) ?1547(명종 2)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지임(之任)의 아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오빠, 원형(元衡)의 형. 왕실의 외척으로서 동생인원형과 함께 권세를 잡아 권신이던 김안로(金安老)와 대결하다가 1537년 좌사어(左司禦)로 있을 때 안로에 의해 파직, 유배되었다가 이해 안로가 사사(賜死)되자 풀려나왔다.

당시 동생 원형과 함께 대윤(大尹)의 영수 윤 임(尹 任)과 세력을 다투다가 1544년 인종(仁宗)이 즉위함으로써 대윤의 세력이 확대되어 파직당했으나 이듬해 인종(仁宗)이 재위 8개월만에 죽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등용되었다.

윤개(尹 漑) 1494(성종25)1566(명종 21)

()는 여옥(汝沃), ()는 회재(晦齋)․서파(西坡), 현감(縣監) 계손(季孫)의 아들. 감안국(金安國)의 문인. 1516(중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저작(著作)․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내고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었으나 한어(漢 語)에 능한 탓으로 외직(外職)에 좌천되는 것으로 그쳤다.

그후 다시 등용되어 필선(弼善)․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 1536(중종 31)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으로 창성(昌城)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풀려나와 1545(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예조 판서로 윤원형(尹元衡) 등과 대윤(大尹)의 제거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이 되고, 1548(명종 3)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으며, 1551년 우의정, 1558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해 이 양(李 樑)의 배척을 받아 면직당했다. 이 양이 제거된 후 다시 복직, 1563년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에 진봉(進封)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영경연사(領經莚事)를 겸했다.

윤원형(尹元衡) ?1565(명종 20)

()는 언평(彦平),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지임(之任)의 아들. 1533(중종 2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사관(史官)․교리(校理)․시독관(寺讀官)에 이어 지평(持平)․응교(應敎)등을 역임하고, 그후 좌승지(左承旨)․공조 참판(工曹參判) 등을 거쳐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의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이 되고,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으로 개봉(改封)되어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다.

1548년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어 우의정(右議政)․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를 지내고 1560년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563년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1551년 우의정으로 이조 판서를 겸직, 1557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듬해 다시 우의정이 되고, 1560(명종 15)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진봉(進封), 1563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윤춘년(尹春年) 1514(중종 9)1578(선조 11)

()는 언문(彦文), ()는 학음(學音)․창주(滄洲), 참판(參判) 안인(安仁)의 아들. 1534(중종 29) 생원(生員)이 되고, 1543(중종 3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으며, 을사사화(乙巳士 禍 : 1545) 때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였다.

그후 이조 정랑(吏曹正郞)․장령(掌令) 등에 이어, 1553(명종 8) 대사간(大司諫)에 승진, 1555년 부제학(副提學), 이듬해 대사헌을 지내고, 1558년 동지 겸 주청사(冬至兼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1565년 윤원형이 실각하자 예조 판서(禮 曹判書)로 파직당한 뒤 은퇴했다. 음율(音律)에 솜씨가 있었다.

윤현(尹 鉉) 1514(중종 9)1578(선조 11)

()는 자용(子用), ()는 국간(菊磵), 좌의정 필상(弼商)의 증손(曾孫). 1531(중종 26) 진사(進士)가 되고 1537(중종 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1548(명종 3) 검상(檢詳)이 되었다.

1550년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 뒤에 광주 목사(光州牧使)․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형조참판(形曹參判)․호조 참판(戶曹參判)․우참찬(右參贊)․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1572(선조 5)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 와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윤주(尹 澍) 1525(중종 20)1569(선조 2)

()는 경림(景霖), 돈령부 첨정(敦寧府僉正) 회정(懷貞)의 아들. 1543(중종 38) 진사(進士)가 되고, 1552(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을 거쳐 1555년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이어 박사(博士)․수찬(修撰)․정언(正言), 이듬해 황해 도 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로 나갔다.

1557년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재직중 이 양(李樑)에게 아부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가 1562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다시 기용되었고, 영평 현령(永平縣令)․한산 군수(韓山郡守)를 거쳐 1566년 사성(司成)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그뒤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을 때도 사관(史官)의 직책을 겸했다.

장령(掌令)․집의(執義)․동래 부사(東萊府使) 등을 거쳐 1568(선조 1)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지내고,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경연참찬관(經莚參贊官)을 겸임했다.

윤부(尹 釜) ()는 자기(子器). 1537(중종 32)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윤인함(尹仁涵) 1531(중종 26)1597(선조 30)

()는 양숙(養叔), ()는 죽재(竹齋), 첨정(僉正) 응규(應奎)의 아들. 155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도교(徒敎)를 거쳐 1559년 정자(正字)가 되었다.

이어 저작(著作)․박사(博士)․부수찬(副修撰) 등을 지내고 1561년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좌랑(佐郞)을 역임. 1563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재직중 동료들에게 전선(銓選)에 관한 기밀을 누설한 죄로 파직당했다.

후에 등용되어 공조와 호조의 참의(參議), 1584(선조 17)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서 적군을 방어하지 못한 죄로 좌천당했으나 경주가 함락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많은 적병을 죽였다.

호조 참의에 재임된 뒤 1597년 형조 참판(形曹參判)으로 영위사(迎慰使)를 겸하여 명나라 장수를 평양으로 출영 나갔다가 객사했다. 문장과 그림에 능했고, 특히 대()를 잘 그렸다.

윤엄(尹 儼) 1536(중종 37)1581(선조 14)

()는 사숙(思叔), ()는 송암(松巖․松庵), 영평위(鈴平尉) ()의 손자, 지함(之諴)의 아들. 1572(선조 5) 진사(進士)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발탁된 뒤 호조 좌랑(戶曹佐郞)․장수 현감(長水縣監) 등을 역임했다. 서화(書畵) 에 뛰어났으며, 서화 감식(鑑識)의 제일인자였다.

윤안성(尹安性) 1542(중종 37)1615(광해군 7)

()는 계초(季初), ()는 의관(宜觀), 참판(參判) ()의 아들. 1583(선조 16) 복병장(伏兵將)으로 야인(野人)의 침입을 격퇴하였고, 1589년 윤탁연(尹卓然)의 천거로 요직에 등용,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안동 판관(安東判官)을 거쳐 숙천 부사(肅川府使)를 지내고 이듬해 전주 부사(全州府使)로 전직되어 금산(錦山)에 쳐들어온 왜군(倭軍)을 막지 못한 데다 전주의 관고(官庫)를 소각하여 많은 미곡을 소실 했다는 죄로 파직당했다.

이어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등용되고 온성(穩城)과 회령(會寧)의 부사를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1597년 함경도 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吏) 류몽인(柳夢寅)의 천거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59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1601년 우승지(右承旨)․경주 부윤(慶州府尹), 이듬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1603년 해주 목사(海州牧使)등을 거쳐 1608(선조 41)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1610년 형조 참판(形曹參判)에 이어 1612년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재직중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관련되어 파직당했다가 1615년 능창군(綾昌君) ()의 추대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윤선각(尹先覺) 1543(중종 38)1611(광해군 3)

()는 수부(粹夫), 소자(小字)는 국형(國馨), ()는 은성(恩省)․달천(達川), 현령(縣令) 희렴(希廉)의 아들. 1568(선조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응교(應敎)․부제학(副提學)․좌승지(左承旨) 등을 거쳐 1592(선조 25) 충청도 관찰사 (忠淸道觀察使)가 되어 왜적의 침입에 대비, 무기를 정비했으나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를 막아 싸우다 패하여 삭직(削職)당했다.

뒤에 기용되어 충청도 순변사(忠淸道巡邊使)가 되고, 판결사(判決使)․병조 참판(兵曹參判)․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거쳐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이 되어 난후 혼란한 업무를 처리하고 광해군 초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윤민일(尹民逸) 1546(명종 1)1635(인조 13)

()는 현세(顯世), ()는 지산(芝山), 이조 좌랑(吏曹佐郞) ()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1588(선조 21)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되고, 159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成均館) 벼슬을 거쳐 1601년 병조 좌랑(兵曹佐郞), 이어 예조 좌랑(禮曹佐郞), 이듬해 지평(持平)으로 스승의 신구(伸救)를 상소하다가 수원 판관(水原判官)으로 좌천되었다.

1603년에 예조 정랑(禮曹正郞), 다음해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을 역임한 후 합천군수(陜川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1609(광해군 1) 전적(典籍)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이 되어「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1618(광해군 10)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올랐다.

윤명선(尹明善) 1547(명종 2)1608(선조 41)

()는 택중(擇中), 사평(司評) ()의 아들. 1567(명종 22) 진사(進士)가 되고, 1580(선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成均館)에 보직되었다가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에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로서 류 근(柳 根)․윤자신(尹自新) 등과 함께 종묘(宗廟)의 신주(神主)를 평양에까지 옮겼다.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거쳐 부평(富平)․장흥(長興)․평산(平山)의 부사(府使)를 지내고, 양주 목사(楊州牧使)․제용감정(濟用監正)․내섬시정(內贍寺正) 등을 역임한 후 양재도 찰방(良才道察訪)으로 좌천 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도 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윤동로(尹東老) 1550(명종 5)?

()는 기중(期中), ()는 수심당(水心堂), 생원(生員) 언성(彦誠)의 아들. 이 이(李 珥)의 문인. 1573(선조 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사과(司果)159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공조 정랑(工曹正郞)이 되고, 이듬해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파 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1604(선조 37) 울산 판관(蔚山判官), 162980세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라 파흥군(坡興君)에 봉해졌다.

윤인(尹 訒) 1555(명종 10)1623(인조 1)

()는 인지(訒之), 영의정(領議政) 필상(弼商)의 후손, 용종(龍從)의 아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사과(司果)에 이르렀고, 1601(선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07년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이듬해 예조 정랑(禮曹正郞)․함양 군수(咸陽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09(광해군 1)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으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직하며「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1612년 장령(掌令), 다음해 필선(弼善)을 거쳐 장령을 역임했고 후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올랐다.

윤경남(尹景男) 1556(명종 11)1614(광해군 6)

()는 여술(汝述), ()는 영호(瀯湖), 은신(殷臣)의 아들. 일찍 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를 포기, 경사(經史)에 열중했으며, 문위(文 緯)․정 온(鄭 蘊) 등의 학자와 교유(交遊)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의병장(義兵將) 김 면(金 沔)의 막하에 들어가 참모로서 활약, 그 공으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599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감찰(監察)이 되고 장수 현감(長水縣監)에 이르렀으며,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다.

윤경립(尹敬立) 1561(명조 16)1611(광해군 3)

()는 존중(存中), ()는 우천(牛川), 판서(判書) 국형(國馨)의 아들. 1585(선조 18) 진사(進士)가 되고, 1588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었다가 이듬해 정여립(鄭汝立)과 친분이 있다 하여 한때 파직되었다.

뒤에 검열(檢閱)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서 관량어사(管糧御史)․독운어사(督運御史)를 지내며 군량 공급에 공을 세워 1594년 부수찬(副修撰)에 올랐다.

그후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어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고, 사예(司藝)․응교(應敎)․사인(舍人)․집의(執義)․사간(司諫)을 역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뒤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거쳐 청주(淸州)․황주(黃州)의 목 사(牧使), 판결사(判決事) 등을 지내고, 1609(광해군 1)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윤영현(尹英賢) ()는 언성(彦聖), ()의 아들. 1588(선조 2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 1591년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고 1596년에 홍산 현감(鴻山縣監)으로서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에게 잡혀 굴종한 죄로 의금부(義禁府)에 투옥, 파직(罷職)되었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과거에 사부(師傅)였던 인연으로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에 등용되고,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를 지냈다.

윤정준(尹廷俊) ?1624(인조 2)

()는 수백(秀伯),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의 아들. 1608(선조 41)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618(광해군 10) 벽동 군수(碧潼郡守)로 있을 때 명나라에서 군사 7천 명을 요구해 오자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 立) 휘하에 종군하여 요동(遼東)에 건너가 군량(軍糧) 운반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뒤에 박 엽(朴 燁)에게 탄핵을 받아 낙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후 옹진 현령(甕津縣令)이 되고,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의 명으로 마탄(馬灘)을 수비하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난군(亂軍)에 합세하라는 이 괄․한명련(韓明璉)의 권유를 거절, 뒤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파령군(坡寧君)에 봉해졌다.

윤낙(尹 洛) ()는 득중(得仲), ()는 동호(東湖), 관찰사 상원(尙元)의 증손.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 차례 적정(敵情)을 탐지, 작전수행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공으로 경릉 참봉(敬陵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청하(淸河)에서 학문에 전심,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에 통달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윤민헌(尹民獻) 1562(명종 17)1628(인조 6)

()는 익세(翼世), ()는 태비(苔扉), 이조 좌랑(吏曹佐郞) ()의 아들.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인. 1588(선조 2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609(광해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다가 광해군의 난정(亂政)이 거듭되자 외직(外職)을 자청, 괴산 군수(槐山郡守)로 나갔다가 이어 파직되었다.

1617년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으로 기용, 이해 사성(司成)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아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에 좌천, 얼마후 파직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기용, 이어 장령(掌令)․내섬시정(內贍寺正)을 역임, 1624년 이 괄(李 适)의 난 때 공주(公州)로 왕을 호종(扈從),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올라 병으로 사직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특히 조맹부(趙孟頫)를 사숙(私淑), 해서(楷書)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윤중삼(尹重三) 1563(명종 18)1618(광해군 10)

()는 지임(志任), 범룡(范龍)의 아들. 1588(선조 2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죽산(竹山)․예산(禮山)의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1606(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08년 호조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정언을 지냈다.

1612(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문사랑(問事郞)에 추천되어 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승지(承旨)를 지내고, 1615년 수원 방어사(水原防禦使)로 나가 능창군(綾昌君) ()의 추대 사건을 적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영평군(鈴平君)에 봉해 졌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윤홍립(尹弘立) 1563(명종 18)?

()는 가수(可守), 형조 참판(形曹參判) 인함(仁涵)의 아들.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인.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다가 30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1606(선조 3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직장(直長)이 되었다. 그후 금성 군수(金城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김장생(金長生)․김 집(金 集)과 교유했다.

윤경(尹 絅) 1567(명종 22)1664(현종 5)

()는 미중(美仲), ()는 기천(岐川), 시호(諡號)는 정희(靖僖), 충좌위 상호군(忠佐衛上護軍) 대로(大老)의 아들. 1589(선조 2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00년 주서(注書), 이어 예조 좌랑(禮曹佐郞)․지평(持平)․공조 정랑(工曹正郞)을 거쳐 1605년 평양부서윤 (平壤府庶尹), 1610(광해군 2) 죽주 부사(竹州府使), 이어 분승지(分承旨)․분병조참의(分兵曹參議)를 역임했다.

1613년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여 파직, 양근(楊根)에 은거하다가 1621년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모문룡(毛文龍)을 맞으러 가도(椵島)에 갔다.

1623(인조 1) 해주 목사(海州牧使)가 되었고,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 평정에 종군,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세자(世子)를 시종하여 완산(完山)으로 피난했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판결사(判決事)로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다.

이듬해 병조 참의(兵曹參議)․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 1645년 공조 참판(工曹參判) 등을 역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656(효종 7) 90세가 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고, 1660(현종 1)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윤의립(尹毅立) 1568(선조 1)1643(인조 21)

초명은 의립(義立), ()는 지중(止中), ()는 월담(月潭), 판서선각(先覺)의 아들. 1594(선조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에 등용되어 설서(設書)를 겸했다.

정자(正字)로 재직중 1624(인조 2) 조카가 이 괄(李 适)의 난에 가담하여 처형된 뒤부터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 1626년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고, 이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형조 참판(形曹參判)을 거쳐 함경도․충청도․경기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형조 판서․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그림과 글씨에 능했고 특히 그림은 산수화(山水畵)를 잘 그려 이름이 높았다.

윤정립(尹貞立) 1571(선조 4)1627(인조 5)

()는 강중(剛仲), ()는 학산(鶴山)․매헌(梅軒), 판서 선각(先覺)의 아들. 1605(선조 3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천거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군수(郡守)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윤황(尹 煌) 1572(선조 5)1639(인조 17)

()는 덕요(德耀), ()는 팔송(八松)․노곡(魯谷),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창세(昌世)의 아들. 장인 성 혼(成 渾)의 문인. 1597(선조 3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자(正字)에 보직되고 1601년 전적(典籍)에 올랐다.

감찰(監察)․정언(正言)에 이어 병조․예조․형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수원(水原)․북청(北靑)의 판관(判官)과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지내고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어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전임, 1616(광해군 8) 대북(大北)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이산(尼山)에 은거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장령(掌令)․집의(執義)․대사간․검상(檢詳)․사인(舍人)․동부승지(同副承旨)․이조 참의(吏曹參議)․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역임, 1624년 부응교(副應敎)로서 이 괄(李适)의 난 때 검찰사(檢察使)사였던 이 귀(李 貴)가 임진강(臨津江) 싸 움에서 패한 죄를 탄핵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 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 : 1636) 때 사간(司諫)으로서 척화(斥和)를 극력 주장, 1637년 김상헌(金尙憲)․정 온(鄭 蘊)이 척화신(斥和臣)으로 청나라 군영에 붙잡혀 가게 되자 대신 붙잡혀 갈 것을 자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동(永同)의 초강서원(草江書院), 영광(靈光)의 용계사(龍溪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윤전(尹 烇) 1575(선조 8)1636(인조 14)

초명은 찬(), ()는 회숙(晦叔), ()는 후촌(後村),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창세(昌世)의 아들, 부윤(府尹) ()의 아우, 성혼(成 渾)의 문인. 1610(광해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저작(著作)이 되었다.

1613년 유생 이위경(李偉卿) 등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폐모(廢母)를 상소하자 이들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파직당했다. 이듬해에 박사(博士)에 기용, 전적(典籍)․감찰(監察)을 거쳐 1615년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대북파(大北派)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에 복직되었다.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公州)에 호종(扈從)한 뒤 공조 정랑(工曹正郞)이 되고, 환도 후 지평(持平)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호소사(號召使) 김장생(金長生)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강화(江華)에 들어가 분병조정랑(分兵曹正郞)․공조 정랑․사예(司藝)․예빈 시정(禮賓寺正) 등을 역임, 익산 군수(益山郡守)가 되었다. 1633년 종묘서령(宗廟署令)․직강(直講)․장령(掌令)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필선(弼善)으로 강화도에 들어가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연산(連山)의 귀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윤계선(尹繼善) 1577(선조 10)1604(선조 37)

()는 이술(而述), ()는 파담(坡潭), 희굉(希宏)의 아들. 숙부 희정(希定)에게 입양(入養). 1597(선조 3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이 되고,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 병조 정랑(兵曹正郞)․사서(司書)․헌납(獻納)을 역임, 수찬(修撰)으로 검토관(檢討 官)을 겸했다.

1600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설화(舌禍)로 옹진 현감(甕津縣監)에 좌천되었으나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곧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부임했다가 병으로 사직, 집에 돌아와 죽었다. 문장에 뛰어났다.

윤지경(尹知敬) 1584(선조 17)1634(인조 12)

()는 유일(幼一), ()는 창주(滄洲), 좌의정 개()의 증손, 도승지(都承旨) 담무(覃茂)의 아들. 1603(선조 3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09(광해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5년 서원 현감(西原縣監)이 되고, 1617년에 병조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역임한 후 이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9년 겸필선(兼弼善)․교리(校理), 이듬해 수찬(修撰)․보덕(輔德), 이어 검상(檢詳)․사인(舍人)을 지내고, 1623년 겸보덕(兼輔德)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궁궐에 입직(入直) 중 반정군의 신경유(申景裕)에게 잡혀 참수될 뻔했으나 인조의 만류로 살아 전한(典翰)이 되었다.

이어 응교(應敎)․집의(執義)․사간(司諫)을 거쳐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독전어사(督戰御史)로 나가 임진강(臨津江)에서 군사를 독려했고, 검독어사(檢督御史)로 군량미 조달에 힘써 그 공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참찬관(參贊官)을 겸임, 우부승지(右副承旨)․예조 참의(禮曹參議)를 거쳐 1632년 공충도 관찰사(公忠道觀察使)를 지냈다.

윤여임(尹汝任) 1590(선조 23)1637(인조 15)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636(인조 14) 병자 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이듬해 상주 토포사(尙州討捕使)로 쌍령(雙嶺)에서 창원 부사(昌原府使) 백선남(白善男)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영원군(鈴原君)으로 추봉 (追封)되고, 고향에 충신 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윤순거(尹舜擧) 1596(선조 29)1668(현종 9)

()는 노직(魯直), ()는 동토(童土), 대사간 황()의 아들, 성 혼(成 渾)의 외손. 숙부 수()에게 입양(入養).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 항(姜 沆)에게서 시(),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1633(인조 1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아버지가 척화죄(斥和罪)로 귀양가고 숙부 전()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1645년 대군 사부(大郡師傅)가 되고, 이어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공조 정랑(工曹正郞)․영월 군수(寧越郡守)를 거쳐, 장령(掌令)․사직 서령(社稷署令)․세자익위사 익위(世子翊衛司翊衛)․군자감정(軍資監正)․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여 글씨에 뛰어났다. 찬선(贊善)에 추증(追贈), 연산(連山)의 귀산서원(龜山書院), 영광(靈光)의 용계사(龍溪祠), 금구(金溝)의 구성서원(九成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윤강(尹 絳) 1597(선조 30)1667(현종 8)

()는 자준(子駿), ()는 무곡(無谷), 공조참의(工曹參議) 민헌(民獻)의 아들. 1624(인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뒤 1626년 검열(檢閱)이 되고, 봉교(奉敎)․정언(正言)․교리(校理)를 거쳐 1642년 사은 겸 진주사(謝恩 兼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승지(承旨)․이조 참의(吏曹參議) 등을 지냈다.

효종(孝宗) 때 대사간(大司諫)․충원 현감(忠原縣監)․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도승지(都承旨)․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 1657(효종 8)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9년 효종(孝宗)이 죽자 예조 판서로서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를 겸했으며, 이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윤유근(尹惟謹) 1599(선조 32)1660(현종 1)

()는 이신(而愼), 정랑(正郞), 홍의(弘毅)의 아들. 1627(인조 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공릉 참봉(恭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형조와 호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의성 현감(義城縣監)이 되었다.

이때 허 적(許 積) 등 남인(南人)들에 의해 양민(良民)을 함부로 노비(奴婢)로 삼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영평(永平)에 유배(流配)되었다가 허 적이 물러난 뒤 호조 정랑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윤겸(尹 㻩) 1601(선조 34)1665(현종 6)

()는 여옥(汝玉), ()는 오옹(梧翁), 판관(判官) 경승(慶承)의 아들. 1627(인조 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병조 좌랑(兵曹佐郞)․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역임. 1654(효종 5)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지냈 다. 1656년 장령(掌令)이 되고, 그후 평산 부사(平山府使)․봉상시정(奉常寺正) 등을 지냈다.

윤명은(尹鳴殷) 1601(선조 34)1646(인조 24)

()는 이원(而遠), ()는 사정(思亭), 직장(直長) ()의 아들. 1624(인조 2) 진사(進士)가 되고,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정언(正言)․지평(持平)․병조좌랑(兵曹佐郞)․교리(校理)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조 익(趙 翼)을 따라 의병을 모집하다가 강화(江華)에 피난, 난이 끝난 후 서천 군수(舒川郡守)․청주 목사(淸州牧使)를 거쳐 집의(執義)․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고, 16 45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윤원거(尹元擧) 1601(선조 34)1672(현종 13)

()는 백분(伯奮), ()는 용서(龍西), 필선(弼善) ()의 아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33(인조 11)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에 합격, 1635년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아버지가 강화(江華)에서 순절한뒤 은거해 있다가 1658(효종 9)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임명되었거나 부임하지 않았고, 현종(顯宗) 때 지평(持平)․장령(掌令)으로 수차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했다.

격조가 높은 시()로써 유명했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 연산(連山)의 귀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윤양(尹 瀁) 1603(선조 36)1641(인조 19)

()는 심원(深源), 부사과(副司果) 응열(應說)의 아들. 1624(인조 2) 생원(生員)이 되고, 163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成均館)에 보직되었다가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이듬해 독향사(督餉使)로 호서지방에 갔으며, 화의성립 후에 주서(注書)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했다. 1639년 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이듬해 칠곡 부사(漆谷府使)가 되었다.

윤문거(尹文擧) 1606(선조 39)1672(현종 13)

()는 여망(汝望), ()는 석호(石湖), 시호(諡號)는 충경(忠敬), 대사간 황()의 아들. 선거(宣擧)의 형. 김 집(金 集)의 문인. 1630(인조 8)에 생원(生員)이 되고, 163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이어 설서(設書), 여러 조()의 낭관(郎官),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 등을 지내고,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아버지를 따라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 1639년 부친상을 당해 집상한 후 제천 현감(堤川縣監)이 되었으나 곧 사퇴, 효종(孝宗) 즉위 후 여러번 승지(承旨)로 불렸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52(효종 3)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가 왜관(倭館)에서의 교역(交易)을 철저히 단속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 그뒤 승지(承旨), 이조․호조․형조의 참의(參議), 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만년에는 주자(朱子)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글씨에도 능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연산(連山)의 귀산서원(龜山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석성(石城)의 봉호서원(蓬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윤비경(尹飛卿) 1607(선조 40)1680(숙종 6)

()는 충거(冲擧). 1633(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고, 1650(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559(현종 즉위) 지평(持平)․장령(掌令)을 역임, 다음해 헌납(獻納), 1664년 좌부승지 (左副承旨)를 거쳐, 통진 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갔다. 1667(현종 8) 우승지(右承旨)가 되고 병조의 참지(參知)․참의(參議), 공조 참의(工曹參議)․경주 부윤(慶州府尹)을 거쳐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680(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南人)이 추방되자 등용되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승진,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윤선거(尹宣擧) 1610(광해군 2)1669(현종 10)

()는 길보(吉甫), ()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대사간 황()의 아들, ()의 아버지. 김 집(金 集)의 문인. 1633(인조 11)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양시(兩試)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했고, 1636년 후금(後金)의 사신이 입국했을 때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명나라에 대한 의()를 지키자고 상소했으며, 이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화(江華)에 피난, 성문을 지키다가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성을 탈출, 자의(諮議)․형조좌랑(刑曹佐郞)․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등의 벼슬에 여러번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금산(錦山)에 가서 평생을 학문 연구에 정진했다.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했고 성리가 전반에 걸쳐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평소 친교가 있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 휴(尹 鑴)가 학문으로 대립하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여 오히려 양인으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1715년 유 계(兪棨)와의 공편(共編)인「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으로 노소론의 싸움이 일어나자 이듬해 아들과 께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722(함경종 2) 부자가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모두 능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영춘(永春)의 송파서원(松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사(龍巖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교하(交河)의 신곡서원(新谷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윤지선(尹趾善) 1627(인조 5)1704(숙종 30)

()는 중린(仲麟), ()는 두포(杜浦), 판서 강()의 아들, 우의정(右議政) 지완(趾完)의 형. 1660(현종 1) 진사(進士)가 되고, 166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1674년 헌납(獻納)․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이해 숙종(肅宗)이 즉위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오른 뒤 이어 부수찬(副修撰)․종성부사(鍾城府使)․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했다.

1681년 대사간(大司諫), 공충도(公忠道)와 함경도(咸鏡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1683년 도승지(都承旨), 이듬해 형조 참판(形曹參判)․대사헌(大司憲),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광주유수(廣州留守)․한성부 좌윤(漢成府左尹)을 지내고, 1694년 병조 판서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지경연사(知經莚事)등을 겸임했다.

이조 판서에 이어 1696년 공조 판서(工曹判書)․좌참찬(左參贊)․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해 좌의정에 올랐다. 169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죽었다. 온건한 성품으로 당화(黨禍)를 입지 않고 숙종의 측근자로서 총애를 받았다.

윤이제(尹以濟) 1628(인조 6)1701(숙종 27)

()는 여즙(汝楫), () 판서(判書) 세징(世徵)의 아들. 1663(현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676(숙종 2)에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1682년 진하진주 겸 사은부사(進賀陳奏兼謝恩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오고, 다음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686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689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올랐다.

이어 한성부(漢城府)의 좌․우윤(左右尹)․판윤(判尹) 등을 거쳐 형조 판서에 올라 1691년 원접사(遠接使)로서 청나라 사신을 맞았다. 이어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南人)이 축출당하자 삭직(削職)된 뒤 문 외출송(門外出送)되었다가 1697년 풀려나왔다.

윤담(尹 譚) 1629(인조 7)1705(숙종 31)

()는 대숙(大叔), 판관(判官) 취전(就殿)의 아들. 18세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대과(大科)에는 낙방(落榜)했다. 1668(현종 9) 40세에 비로소 선공감(繕工監)에 등요되고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거쳐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지냈다.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정문 (旌門)이 세워졌다.

윤증(尹 拯) 1629(인조 7)1714(숙종 40)

()는 자인(子仁), ()는 명재(明齋)․유봉(酉峯),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선거(宣擧)의 아들. 유계(兪棨)․권 시(權諰)․김 집(金 集)의 문인, 후에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 되었으나 절교했다.

1663(현종 4) 학행(學行)으로 천거된 이래 현종(顯宗) 때 지평(持平)․진선(進善)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682(숙종 8) 호조 참의(戶曹參議), 1684년 대사헌(大司憲), 1695년 우참찬(右參贊), 1701년 좌찬성(左贊成), 1709(숙종 35) 우의정(右議政), 1711년 판돈령부사 (判敦寧府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었다. 1673(현종 14) 송시열에게 아버지 선거의 묘갈명(墓碣名)을 지어줄것을 요구했으나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行狀)을 그대로 인용한 뒤에 야유하는 뜻의 글을 받고 불만을 품던 중 1681(숙종 7) 송시 열의 학문과 덕행의 결함을 지적하여 썼던 서신이 송시열에게 전해 짐으로써 마침내 절교당했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南人)에 대한 처벌에 있어서 집권층인 서인(西人)이 강․온(强․穩) 양파로 분리되자 온건을 주장하는 소론의 영수(領袖)에 추대되어 강경파인 송시열측 노론(老論)과 치열한 당쟁을 벌였다.

이때부터 이산(尼山)에 머물러 학문연구와 후진의 교육에 힘썼으며, 1715(숙종 41) 간행된 스승 유 계의 저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에서 정 호(鄭澔)가 윤증을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의 격화, 소론이 거세되면서 이듬해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722(경종 2) 유생(儒生) 김수귀(金壽龜)․황 욱(黃 昱) 등의 상소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홍주(洪州)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윤진(尹 搢) 1631(인조 9)1698(숙종 24)

()는 자경(子敬), ()는 덕포(德浦), 순거(舜擧)의 아들. 1652(효종 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빙고 별검(氷庫別檢)․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를 지냈다.

1666(현종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승지(承旨)․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윤추(尹 推) 1632(인조 10)1707(숙종 33)

()는 자서(子恕), ()는 농은(農隱), 대사간(大司諫) ()의 손자, 선거(宣擧)의 아들, ()의 동생. 중년에 유일(遺逸)로써 천거 되어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동몽교관(童蒙敎官)․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81(숙종 7)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에 이어 회덕 현감(懷德縣監)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은퇴, 1706년 장령(掌令)․예빈시정(禮賓寺正)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아버지 선거(宣擧)가 강화(江華)에 유배당했을 때의 행적과 소론(少論)의 거두인 형 증()이 노론(老論)의 탄핵으로 억울하게 유배 된 사실을 밝히기 위해「변무사기(辯誣私記)」를 저술했다. 김 제(金 堤)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윤경교(尹敬敎) 1632(인조 10)1691(숙종 17)

()는 양일(養一), ()는 장호(長湖), ()의 아들. 1657(효종 8) 진사(進士)가 되고, 1663(현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을 거쳐 1670년 문학(文學)이 되었다.

이듬해 헌납(獻納)으로 남인(南人)인 허 적(許 積)을 탄핵하다가 갑산(甲山)에 유배, 뒤에 풀려나와 1681(숙종 7) 공청도 관찰사(公淸道觀察使)가 되고 제학(提學)등을 지냈다. 종조부(從祖父) 윤선거(尹宣擧)에게 수학(修學), 소장(疎章)을 잘 썼다.

윤심(尹 深) 1633(인조 11)1692(숙종 18)

()는 현통(玄通), ()는 징암(懲庵), 참판(參判) ()의 아들. 1660(현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부교리(副校理)․부수찬(副修撰)․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서 1674(현종 15) 대사간(大司諫)에 올랐고, 다 음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추방당하자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기용되고, 이어 병조 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윤지완(尹趾完) 1635(인조 13)1718(숙종 44)

()는 숙린(叔麟), ()는 동산(東山), 시호(諡號)는 충정(忠正), 판서 강()의 아들, 좌의정 지선(趾善)의 아우. 1657(효종 8)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설서(說書)․헌납(獻納)․부수찬(副修撰) 등을 지냈다.

1675(숙종 1) 지평(持平)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고 경연(經筵)에 나가 당쟁의 폐해와 송시열(宋時烈)의 신구(伸救)를 건의했다가 다시 집권당인 남인(南人)의 탄핵을 받아 삭직(削職)당했다. 1680(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부교리(副校理)에 등용되었고,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경상도․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 등을 지냈다.

1682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어영대장(御營大將)․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 1684년 경상도 관찰사에 재임되고 1688년 병조 판서, 다음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

이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이 집권할 때 복직되어 좌참찬(左參贊)․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뒤 이듬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며, 1703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숙종(肅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윤이(尹 理) 1636(인조 14)1694(숙종 20)

()는 자일(子一), 영의정 인경(仁鏡)의 후손. 1657(효종 8) 진사(進士)가 되고, 1663(현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된 뒤 지평(持平)․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674(현종 15) 서인(西人)으로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자 파직당한 뒤 고향에 은퇴했다가 점차 서인이 집권하게 되어 1677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기용되었다. 1680년 경신대 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南人)이 추방당하자 장령(掌令)에 오르고 형조 좌랑(刑曹佐郞)․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역임,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실각하자 삭직(削職)당했다.

윤명운(尹明運) 1642(인조 20)1718(숙종 44)

()는 여회(汝會), 호조 참판(戶曹參判) 비경(飛卿)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스승 송시열을 변호하다 해미(海美)에 유배,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풀려 나와 선릉 참봉(宣陵參奉)이 되고 내외 관직을 거쳐 사재감 첨 정(司宰監僉正)에 이르렀다.

윤거형(尹居衡) 1654(효종 5)1715(숙종 41)

()는 임중(任重), ()는 송파(松坡), 태운(泰運)의 아들. 영변(寧邊) 출신. 힘이 장사여서 무과(武科)에 나가려다가 글을 읽기 시작, 구경(九經)․백가(百家)를 비롯하여 고금의 치란(治亂)․국도(國都)․세기(世紀)․인물(人物)․민족(民族)에 이르기까지 통달했고 유 학(儒學)에 정통했으며, 특히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주력, 당대의 거유(巨儒)가 되었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묘동 권관(廟洞權管)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영변(寧邊)의 남악사(南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윤상거(尹商擧) ?1728(영조 4)

()는 이상(而相), 부사(府使) 세형(世衡)의 아들. 1728(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노령을 무릅쓰고 의병 5백 명을 모집, 진주 영장(晋州營將) 이석복(李碩馥)의 군사를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때 병을 불구하고 종군하였다가 악화되어 죽었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追贈)되었다.

윤헌주(尹憲柱) 1661(현종 2)1729(영조 5)

()는 길보(吉甫), ()는 이지당(二知堂), 시호(諡號)는 익헌(翼獻),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아들. 1684(숙종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참봉(參奉)․봉사(奉事) 등을 지내고, 1698(숙종 2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을 거쳐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장령(掌令)․사서(司書)․필선(弼善)․헌납(獻納) 등을 역임, 1705년 사간(司諫)에서 승지(承旨)로 승진했다.

1716(숙종 42) 성주 목사(星州牧使)로서 크게 치적을 올려 동지 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으며, 1722(경종 2)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냈다.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로 다시 부임하여 오직사건(汚職事件)으로 용천(龍川)에 유배(流配)되었으나 1724년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풀려서 다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복직,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호조의 판서를 지낸 뒤 은퇴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박필현(朴弼顯)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북도 안무사(按撫使)로 기용되었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추록(追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석래(尹錫來) 1665(현종 6)1725(영조 1)

()는 중길(仲吉), ()는 둔정(鈍靜)․만회(晩晦), 부윤(府尹) ()의 아들. 1690(숙종 1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10년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숭릉 직장(崇陵直長)이 되고, 1714년 지평(持平)을 거쳐 필선(弼善)․장령(掌令)․헌납(獻納)․집의 (執義) 등을 역임, 1719년 동부승지(同副承旨)․사간(司諫)․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다.

이듬해 사간에 재임되고 동래 부사(東萊附使)로 나갔다가 1722(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소론(少論)이 집권하자 사직하고 은퇴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老論)이 재집권하자 판결사(判決事)로 기용, 참찬관(參贊官)을 겸하고,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윤동형(尹東衡) 1674(현종 15)1754(영조 30)

()는 사임(士任), 덕교(德敎)의 아들. 윤 증(尹 拯)의 문인. 1713(숙종 39) 진사(進士)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사서(司書)․수찬(修撰)․지평(持平)․사간(司諫)을 거쳐 응교(應敎)․사인(舍人)․대사간(大司諫)․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지내고, 1753(영조 29)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가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윤혼(尹 焜) 1676(숙종 2)1725(영조 1)

()는 회보(晦甫), ()는 천서(泉西), 관찰사 희길(希吉)5 대손.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1714(숙종 4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19(숙종 45)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명릉 참봉(明陵參奉)이 되고,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725(영조 1) 지평(持平)에 이르러 죽었다.

윤제세(尹濟世) 1677(숙종 3)1751(영조 27)

()는 인숙(仁淑), ()는 취암(就巖), 거형(居衡)의 아들. 평안도 영변(寧邊) 출신, 평안도 지방의 대학자인 아버지를 이어 더욱 학문에 힘써 경학(經學)에 해박하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학행(學行)으로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아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임명되었으나 취 임하지 않았다.

윤봉조(尹鳳朝) 1680(숙종 6)1761(영조 37)

()는 명숙(鳴叔), ()는 포암(圃巖), 명원(明遠)의 아들. 1699(숙종 25)에 생원(生員)이 되고 170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사서(司書)․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 등을 역임, 1713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다. 이어 이조 좌랑(吏曹 佐郞)․부교리(副校理)․사인(舍人)․응교(應敎) 등을 지내고 승지(承旨)를 거쳐 1719년 대사간(大司諫)에 승진, 이어 우승지(右承旨)에 전직했다가 경종(景宗)이 즉위하면서 소론(少論)이 집권하자 사직, 은퇴했다.

1725(영조 1) 승지(承旨)에 재등용,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고 부제학(副提學)으로 실록도청 당상(實錄都廳堂上)을 겸하여,「경종실록(景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으나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노론(老論)이 숙청당할 때 앞서 1725년 방만규(方萬規)가 탕평(蕩平)을 배척하는 상소문(上疎文)을 올린 일에 관련되어 파직당하고 삭주(朔州)에 유배, 이어 정의(旌義)에 안치(安置)되었다.

1735년 전리(田理)에 방귀(放歸)되었다가 1741년 관직이 복구되어 공조 참판으로 등용, 1743년 부제학이 되고 이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57년 우빈객(右賓客)․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다음해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특히 소차(疎箚)는 명문으로 유명하다.

윤봉구(尹鳳九) 1681(숙종 7)1767(영조 43)

()는 서응(瑞膺), ()는 병계(屛溪)․구암(九庵),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참판 비경(飛卿)의 손자.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1714(숙종 4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영조 1)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거쳐 1738년 집의(執義)에 오르고, 1741(영조 17) 주자(朱子)를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에 추봉(追奉)케 한 주창자로서 삭직(削職)되었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자의(諮議)․찬선(讚善) 등을 역임,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한원진(韓元震)과 함께 호론(湖論)을 주장했으며, 강문 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윤동원(尹東源) 1685(숙종 11)1741(영조 17)

()는 사정(士正), ()는 일암(一菴), ()의 손자, 대사헌 행교(行敎)의 아들. 1722(경종 2)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세마(洗馬)가 되고 장령(掌令)․한산 군수(韓山郡守)․부사과(副司果)․집의(執義)․진선(進善)을 역임했다.

윤봉오(尹鳳五) 1688(숙종 14)1769(영조 45)

()는 계장(季章), ()는 석문(石門), 시호(諡號)는 숙간(肅簡), 판서 봉구(鳳九)의 아우. 성균관(成均館) 유생으로서 일찍이 왕세제(王世弟 : 영조)를 측근에서 보필했고, 1725(영조 1) 시직(侍直)이 되었다.

174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필선(弼善)이 되고,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 이듬해 홍천 현감(洪川縣監)으로 나갔다가 1759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1763년 특진관(特進官)․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겸하고, 1768(영조 44) 사직(司直),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윤동규(尹東奎) 1695(숙종 21)1773(영조 49)

()는 유장(幼章), ()는 소남(邵南),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의 후손, 생원(生員) 취망(就望)의 아들. 이 익(李 瀷)의 문인. 과거를 보려던 뜻을 버리고 안정복(安鼎福)․이가환(李家煥)․채제공(蔡濟恭)등과 교유(交遊), 상위(象緯)․역법(曆法)․천문․지리․의약 등 실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학문의 수립을 주장하여 실학파(實學派)의 대가가 되었으며, 여러 역사를 참고하여 자수(訾水)․열수(洌水)․패수(浿水)․대수(帶水)의 「사수변(사水辨)」을 저술했다.

윤심형(尹心衡) 1698(숙종 24)1754(영조 30)

()는 경평(景平), ()는 임재(臨齋), 시호(諡號)는 청헌(淸獻), 부사(府使) 봉소(鳳韶)의 아들. 1721(경종 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이 되고 이듬해 정언(正言)에 재직중 소론(少論)의 과격파 김일경(金一鏡)이 환자(宦者)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을 시켜 왕세제(王世弟:영조)를 죽이려다 발각되자 이들 하수인들을 죽여 증거를 인멸해 버린 사실을 규탄하여 상소했으나 소론파의 방해로 묵살당했다.

이해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老論)이 추방당할 때 삭직(削職)당하고 은퇴, 1724(경종 4) 노론의 집권으로 응교(應敎)에 이어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되었으나 1728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파직당했다. 뒤에 부제학(副提學)에 기용되어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양래(尹陽來) 1673(현종 14)1751(영조 27)

()는 계형(季亨), ()는 회와(晦窩), 시호(諡號)는 익헌(翼獻), 부윤(府尹) ()의 아들. 1699(숙종 25) 진사(進士)가 되고, 170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에 초임(初任)되어 글씨를 빨리 써서 비주서(飛注書)라는 별명을 들었다.

이어 지평(持平)․사서(司書)․정언(正言) 등을 역임, 1716년 문학(文學)․필선(弼善)․헌납(獻納)․사간(司諫), 이듬해 집의(執義)로 경상우도 암행어사(慶尙右道暗行御史)로 나갔고, 보덕(輔德)을 지냈다.

1720 승지(承旨)․병조 참의(兵曹參議)․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721(경종 1)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재직중에 죄인 박세명(朴世明)을 즉시 도성(都城)에 효수(梟首)하지 않았다는 죄로 체포되어 국문(鞫問)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어 동지 겸 주청 부사(冬至 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이듬해 귀국했으나 당시 집권층이던 소론(少論)측으로부터 청나라에가서 경종의 질병을 함부로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파직, 갑산(甲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25(영조 1) 노론(老論)의 재집권으로 풀려 나와 승지로 기용, 이어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으로 재직중 탕평책(蕩平策)을 건의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으나 윤심형(尹心衡)의 논척(論斥)을 받고 영월 부사(寧越府使)로 좌천당했다가 곧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었다.

이어서 안동부사(安東府使)를 거쳐 1729년 예조와 병조의 참판(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 다음해 함경도 관찰사, 1723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이어 도승지(都承旨)․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공조․호조의 판서, 대사헌(大司憲), 1738년 좌참찬(左參贊) 등을 지내고 1743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1746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의 소론을 통박하는 연소문(聯疎文)을 올려 한때 삭직(削職)되었다가 판돈령부사에 이어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글씨와 시문(時文)에 능했다.

윤혜교(尹惠敎) ()는 여적(汝迪), ()는 완기헌(玩碁軒), 시호(諡號)는 문온(文溫). 1714(숙종 40)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판서(吏曹判書)․양관 제학(兩館提學)을 역임하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지인(尹趾仁) ()는 유린(幼麟), ()는 양강(楊江). 1694(숙종 20) 문과에 급제한 후 설서(說書)․대사성(大司成)․이조 참의(吏曹參議) 등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병조 판서(兵曹判書)등을 역임하였다.

윤동도(尹東度) 1707(숙종 33)1768(영조 44)

()는 경중(敬仲), ()는 남애(南厓)․유당(柳塘), 시호(諡號)는 정문(靖文), 판서 혜교(惠敎)의 아들. 1744(영조 20)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해주 판관(海州判官)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서(司書)․수찬(修撰)․헌납(獻納)․교리(校理)를 거쳐 대사간(大司諫)․경상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이조참판(吏曹參判)․부제학(副提學)․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1761(영조 37) 우의정(右議政)에 승진, 이듬해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윤구연(尹九淵)의 처벌에 반대하여 파직당했다. 1766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윤광소(尹光紹) 1708(숙종 34)?

()는 치승(稚承), ()는 소곡(素谷), 동규(東奎)의 아들. 1740(영조 16)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43(영조 19)에 사서(司書)가 되고,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어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종성(李宗城)과 같이「속오례의(續五禮儀)」를 수찬했다.

그후 교리(校理)․사간(司諫)․필선(弼善)․승지(承旨)․공조 참의(工曹參議)․이산 부사(理山府使)․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냈다. 1776(영조 52) 부사직(副司直)으로 정후겸(鄭厚謙)의 일파로 몰려 유배, 이듬해 풀려나왔고 뒤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윤동섬(尹東暹) 1710(숙종 36)?

()는 덕승(德升), ()는 팔무당(八無堂), 현교(顯敎)의 아들. 1754(영조 3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762년 전라도 안집사(全羅道安集使)가 되고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771(영조 47)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글씨를 잘 썼고, 특히 금석문(金石文)에 뛰어났다.

윤동절(尹東晢) 1722(경종 2)1789(정조 13)

()는 여숙(與叔), ()는 노운(老耘), 한성부 좌윤(漢成府左尹) 면교(勉敎)의 아들. 1756(영조 32) 참봉(參奉)이 되고, 군자감정(軍資監正)․한성부 좌윤(漢成府左尹)․청주 목사(淸州牧使)․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했다. 예서(隸書)에 능했다.

윤양후(尹養厚) 1729(영조 5)1776(영조 52)

()는 유직(幼直), 심형(心衡)의 아들. 숙부 심헌(心憲)에게 입양(入養). 1765(영조 4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부교리(副校理) 거쳐 1769 겸문학(兼文學)․사서(司書), 이듬해 겸보덕(兼輔德)이 되었다.

1773(영조 49) 부제학(副提學)에 오르고 이어 승지(承旨)․대사성(大司成)을 지냈으며, 이듬해 등준시(登俊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비변사 부제조(備邊司副提調)를 거쳐 참판(參判)이 되었다. 1776년 벽파(僻派)로서 세손(世孫 : 정조)의 대리청정(代理廳政)을 반대하다가 해남(海南)에 유배, 이해 정조가 즉위하자 투옥, 고문으로 장사(杖死)했다.

윤필병(尹弼秉) 1730(영조 6)1810(순조 10)

()는 이중(彝仲), ()는 무호당(無號堂), 판서 이제(以濟)의 증손, 사용(師容)의 아들. 1765(영조 4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6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언관(言官)을 지내고 1769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1777(정조 1) 장령(掌令), 1786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1797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했으며, 1806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명필(名筆)이었다.

윤숙(尹 塾) 1734(영조 10)1797(정조 21)

()는 여수(汝受),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의 후손, 명훈(命勳)의 아들. 1761(영조 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이듬해 사관(史官)으로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처형을 극력 반대하는 한편 이에 소 극적인 태도로 방관하던 영의정 신 만(申 晩), 좌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을 성토했다가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

윤행교(尹行敎) ()는 장문(長文). 조선 현종(顯宗) 때 문과에 급제 한 후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윤각(尹 慤) 조선(朝鮮)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윤광보(尹光普) 1737(영조 13)1805(순조 5)

()는 성박(聖博), 시호(諡號)는 효헌(孝憲), 동휴(東休)의 아들. 1784(정조 8) 진사(進士)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486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1788년 교리(校理)로 김사목(金思穆)․정언형(鄭彦衡)의 잘못을 논박하다 파직, 이듬해 복직하 여「장릉지(莊陵誌)」의 찬수(撰修)에 참여했다.

이어 수찬(修撰)이 되어 천주교의 배척을 상소, 서학(西學) 서적을 소각(燒却)케 했다. 그후 승지(承旨)를 거쳐 1799(정조 23)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고 이듬해 필선(弼善)에 전직, 1802(순조 2)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뒤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804(순조 4) 예조 판서․대사헌, 이듬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윤광익(尹光益) 1746(영조 22)?

()는 형중(亨仲), 휘계(彙啓)의 아들. 진사(進士)로서 1718(숙종 4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에 발탁 되고 1723(경종 3)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이어 교리(校理)․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1728(영조 4) 사간(司諫)을 거쳐 1730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언관(言官)으로서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많은 자문(諮問)을 했다.

윤선대(尹善大) 1753(영조 29)?

()는 인지(仁之), ()는 지비헌(知非軒), 형조 판서(刑曹判書) 헌주(憲柱)이 증손. 1795(정조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현감(縣監)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에 능했다.

윤광안(尹光顔) 1757(영조 33)1805(순조 5)

()는 복초(復初), ()는 반호(盤湖), 동미(東美)의 아들. 1757(영조 33) 생원(生員)이 되고, 1786(정조 1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거쳐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이조 참의(吏曹參議)․예조 판 서(禮曹判書) 등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영양(英陽)의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철거한 탓으로 1808(순조 8) 암행어사 이우재(李愚在)의 탄핵을 받아 무산(茂山)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왔다.

윤동야(尹東野) 1757(영조 33)1827(순조 27)

()는 성교(聖郊), ()는 현와(弦窩), 석로(碩老)의 아들. 최흥원(崔興遠)․정종로(鄭宗魯)․이만운(李萬運) 등에게 학문을 배워 한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예기(禮記)」「주역(周易)」「춘추(春秋)」 등의 경전(經典)을 도해(圖解)하여 알기 쉽게 풀이했고, 우 리 나라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에서 와전(訛傳)․오기(誤記)된 곳을 고치는 등 업적을 남겼다.

윤홍규(尹弘圭) 1760(영조 36)1826(순조 26)

초명은 두기(斗基), ()는 의보(毅甫), ()는 도계(陶溪), 광후(光後)의 아들. 1792(정조 16) 생원(生員)이 되고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여 예학(禮學)에 밝혔다. 1800(정조 24)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이어 익찬(翊贊)을 거쳐 고성 군수(高城郡守)에 이르렀다.

윤제홍(尹濟弘) 1764(영조 40)?

()는 경도(景道), ()는 학산(鶴山)․찬하(餐霞), 석복(錫復)의 아들. 1792(정조 16) 생원시(生員試)에 수석으로 합격, 179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1801(순조 1)에 정언(正言)이 되었다.

1806년 김귀주(金龜柱)의 관작이 추탈(追奪)될 때 그 일파라 하여 창원(昌原)에 유배, 뒤에 풀려나 1830년 풍천 부사(豊川府使)로 재직 중 황해도 암행어사 홍희석(洪羲錫)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당했다가 1840(헌종 6)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 어났으며 특히 그림에는 산수화(山水畵)에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윤상도(尹尙度) 1768(영조 44)1840(헌종 6)

()는 자정(子精), 성구(成九)의 아들. 양주(楊洲) 출신. 1807(순조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지내고 1830년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다.

윤용(尹 容) 조선조(朝鮮朝)에 판서(判書)를 지냈다.

윤행선(尹行先)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윤행직(尹行直) ()는 온수(溫叟). 조선 정종(正宗) 때 문과에 급제(及第)한 후 옥당(玉堂)․응교(應敎)를 거쳐 영광 군수(靈光郡守) 및 안변․춘천 부사(安邊春川府使)를 역임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으며 영원군(鈴原君)에 봉하여졌다.

윤광석(尹光錫) 조선(朝鮮) 때 화가(畵家)로 명성을 얻었다.

윤영치(尹榮治) 조선조(朝鮮朝)에 이름난 화가(畵家)였다.

윤영신(尹榮信) ()는 공실(公實), ()는 기산(綺山).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이조 참의(吏曹參議)․강화 유수(江華留守) 및 전라도(全羅道)․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대사성(大司成)을 거쳐 형․공․예조 판서(刑․工․禮曹判書)를 역임하였고 영춘군(鈴春 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윤대순(尹大淳) 1779(정조 3)1865(고종 2)

()는 자휘(子輝), ()는 활수옹(活水翁). 김도형(金道炯)․이원배(李元培)의 문인. 함북 경성(鏡城) 출신. 1836(헌종 2) 학행(學行)을 천거를 받아 지릉 참봉(智陵參奉)이 되고 1841년 의릉봉사(義陵奉事)에 올라 사직했다. 1858(철종 9)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事)․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윤종섭(尹鐘燮) 1791(정조 15)1870(고종 7)

()는 양백(陽伯), ()는 온유재(溫裕齋), 덕조(德祚)의 아들. 오희상(吳熙常)․홍직필(洪直弼)의 문인. 함경도 출신. 고향에서 후진을 가르치다가 1837(헌종 3)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윤종의(尹宗儀) 1805(순조 5)1886(고종 23)

()는 사연(士淵), ()는 연재(淵齋), 시호(諡號)는 효정(孝貞), ()의 아들. 1823(순조 2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852(철종 3)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 1856년 능령(陵令)․문의 현령(文義縣令)을 지내고, 김포 현령(金浦縣令)․함평 군수(咸平郡守)․청풍 부사(淸風府使)․강릉 부사(江陵府使)의 직을 역임하여 치적(治績)을 올렸다.

1875(고종 12)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보직되고, 파광군(坡光君)에 습봉(襲封),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정통했으며, 병법(兵法)․농사(農事)․천문(天文) 등에도 조예가 깊었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윤정(尹 程) 1809(순조 9)?

()는 경호(景顥), ()는 혜천(惠泉)․지비헌(知非軒)․서묵재(瑞墨齋), 판서 강()의 후손. 헌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벼슬이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그림을 잘 그려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윤자승(尹滋承) 1815(순조 15)?

()는 중무(仲茂), 원진(元鎭)의 아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1857(철종 8) 서산 군수(瑞山郡守)로서 선정을 베풀었고,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

1876(고종 13) 일본이 이노우에(井上馨)와 구로다(黑田淸隆)를 파견, 수교(修交)를 요청해 오자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으로 접견대신 신 헌(申 櫶)의 부관(副官)이 되어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의 체결에 참여, 조약 문서에 서명했다. 이듬해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884(고종 21) 이조 판서가 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윤자덕(尹滋悳) 1827(순조 27)1890(고종 27)

()는 중수(仲樹), ()는 국헌(菊軒), 목사(牧使) 주진(周鎭)의 아들. 1848(헌종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1858년 홍문관(弘文館)의 벼슬에 선발 되었다.

1861(철종 12)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이듬해 예방 승지(禮房承旨)가 되고, 이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낸 뒤 1879(고종 16) 이조 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관제개혁에 따라 상호군(上護軍)으로서 통리기무아문 당상(統理機務衙門堂上)이 되었다.

1882년 내아문(內衙門)을 설치하게 되자 총리내아문사무(總理內衙門事務)로 취임, 김홍집(金弘集)․조영하(趙寧夏) 등과 함께 보수내각(保守內閣)을 수립했으며, 1883년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윤태준(尹泰駿) 1839(헌종 5)1884(고종 21)

()는 치명(稚命), ()는 석정(石渟),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판서 교성(敎成)의 아들. 1873(고종 1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1881년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어 영선사(領選使)의 종사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1882(고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사어(司禦)․직각(直閣) 등을 역임, 이해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민비(閔妃)를 보호하여 여주(驪州)를 거쳐 충주(忠州)에 피난했다. 군란이 진압된 뒤 돌아와서 구식군대를 폐지하고 청나라 식으로 개편하게 되자 친군영(親軍營)의 감독(監督)이 되고 이듬해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을 지냈다.

1884년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등을 역임. 이해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후영사(後營使)로 사대당(事大黨)들을 보호하다가 독립당(獨立黨) 장사패들에게 살해되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용식(尹容植) 1859(철종 10)?

()는 사능(士能), 별검(別檢) 태원(泰元)의 아들. 1880(고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설서(設書)․전적(典籍)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진, 한성부 좌윤(漢成府左尹)에 올랐다. 1896(건양 1)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이 되고, 1898(광무 2) 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 3국의 공사(公使)가 되었다.

뒤에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봉상시제조(奉常寺提調)․충청북도 관찰사(忠淸北道觀察使) 거쳐 1901(광무 5) 비서원경(秘書院卿), 1903년 장례원경(掌隷院卿)․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를 지냈다.

윤효정(尹孝定) 한말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총무(總務)를 지냈다.

윤면익(尹冕翼) 한말(韓末)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하였다.

윤영기(尹永淇) 한말에 이름난 의병장(義兵將)이었다.

윤의병(尹誼炳) 한말(韓末)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하였다.

윤병호(尹炳皓) 한말에 일제에 항거,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

윤준희(尹俊熙) ?1921

함북(咸北) 회령(會寧) 출신. 1919년 회령의 조선은행(朝鮮銀行) 지점을 습격하여 체포되어 사형을 받고 순국(殉國)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윤기섭(尹琦燮) 1908년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安昌浩)의 지도 아래 박중화(朴重華)․최남선(崔南善)․김좌진(金佐鎭)․양기탁(梁起鐸) 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 민중 계몽 및 자주독립과 민권신장 운동에 주력하다가 뒤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남만주 서간도(西間島)에서 한족회(韓族會)의 조직에 참여 하여 학무부장(學務部長)이 되었고, 1935년 남경(南京)에 가서 김규식(金奎植)․지청천(池靑天)․신익희(申翼熙) 등과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한 뒤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흡수 통합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전력하였다.

윤해(尹 海)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시베리아에 망명하였고, 1937년 쌍성(雙城)에서 문창범(文昌範)․김 입(金立) 등과 함께 전로한족회 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설립하여 간부가 되었다. 1919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되었다.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 화회의(講和會議)에 고창일(高昌一)과 함께 대표로 파견되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윤애경(尹愛卿) 한말(韓末)에 일본(日本)의 내정간섭에 항거,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

윤병구(尹炳求) 한말에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

윤석우(尹錫禹) 한말에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獨立運動)을 벌였다.

윤현진(尹顯振) 1892(고종 29)1922

()는 석산(石山). 경남(慶南) 양산(梁山) 출신. 1908년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에 들어가 안희제(安熙濟)․서상일(徐相日) 등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뒤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동지들과 공동소비조합(共同消費組合)을 설립하여 자금을 마련하였으며 송문빈(宋文彬)․안희제(安熙濟)와 함께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경영하였다.

191931운동(運動) 때 미국인 선교사(宣敎師)를 통하여 백산상회에서 얻어진 자금 30만원을 상해(上海) 임시정부에 보낸 뒤 상해로 탈출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 재무차장(財務次長)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윤성운(尹聖運) 한말에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

윤세석(尹世昔) 한말에 일제에 항거,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

윤성태(尹成太) 한말에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獨立運動)을 벌였다.

윤식(尹 植) 한말(韓末)에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충남(忠南) 예산(禮山) 출신 의사(義士)로서 1926년 중국 청도(靑島)로 망명하여 1931년 상해에서 세탁소 외교원․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있으며 김 구(金九)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였으며, 1932년 김 구로부터 폭탄을 받고 일본 천황(天皇)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虹 口)공원에 들어가 투폭(投爆)하였다.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따(河端)와 일본의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까와(白川義則) 대장 등을 살해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오오사까(大阪)로 이송,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殉國)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