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함안윤씨시조(咸安尹氏),윤희보(尹希輔),함안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8 17:14 수정일 : 2018-03-04 21:1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함안윤씨(咸安尹氏)는 시조는 윤희보(尹希輔)이다. 희보는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辛達)의 8세손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진 윤 위(尹威)의 손자(孫子)인 윤희보(尹希輔)를 시조로 받든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 때 흥위위(興威衛) 주부(主簿)를 역임하고 함안(咸安)에 정착하면서 관향(貫鄕)을 함안(咸安)으로 하고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함안(咸安)은 경상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삼한시대의 변한(弁韓) 땅이었으며, 또 가락국(駕洛國)의 6가야 중 아나가야(阿那伽倻)의 영역이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함안군(咸安郡)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고려 때의 995년(성종 14)에 함주(咸州), 1018년(현종 9)에 함안군(郡), 1172년(명종 2)에 함안현(縣), 1374년(공민왕 22)에 함안군, 조선 때의 1505년(연산군 10)에 함안 도호부(咸安都護府), 1506년(중종 1)에 함안군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 윤희보의 아들 기(頎)가 의랑(議郞)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로 제학(提學)을 지낸 희(禧)와 상시(常侍)를 역임한 당(당) 형제가 가문을 중흥시켰다.

희(禧)의 증손(曾孫)인 기견(起견)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문종(文宗) 대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서 기주관(記注官)이 되어 「세종실록(世宗實錄)」편찬에 참여했으며 연산군 때 부원군(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각(慤)은 진사(進士) 익상(翊商)의 아들로 숙종(肅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로서 청(淸)나라 사신(使臣)과 함께 백두산(白頭山)의 경계를 사정(査定)하고, 삼국 수군통제사(三軍水軍統制使)를 거쳐 총융사(摠戎使)를 지냈다.

그외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낸 의검(義儉)과 태연(泰淵) 등이 명망 높은 가문으로 빛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안윤씨(咸安尹氏)는 남한에 7,6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함안윤씨조상인물

   윤비(尹 頎): 고려(高麗) 때 의랑(議郞)을 지냈다.

윤희(尹 禧): 조선(朝鮮) 때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윤득룡(尹得龍): 조선에서 전서(典書)에 이르렀다.

윤덕린(尹德麟): 조선조(朝鮮朝)에 전서(典書)에 이르렀다.

윤응(尹 應):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윤영발(尹英發):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윤기견(尹起畎): 성종의 폐비(廢妃) 윤씨의 아버지, 응(應)의 아들. 1439년(세종 21) 생원(生員)으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1452년(문종 2)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지평(持平)을 거쳐 판봉상시사(判奉常시事)에 이르렀다. 죽은 뒤 1473년(성종 4) 그의 딸이 숙의(淑儀)가 되어 뒤에 연산군을 낳았으므로 연산군 때 부원군(府院君)에 추봉되고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으나 중종 반정(中宗反正 : 1506) 후 삭직(削職)되었다.

윤현덕(尹玄德): 조선(朝鮮)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

윤구(尹 遘): 자(字)는 경회(慶會).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했다.

윤지임(尹之任): 자(字)는 중경(重卿). 조선 때 사복시 첨정(司僕시僉正)을 역임하였다.

윤지화(尹之和): 자(字)는 순경(順卿), 호(號)는 남촌(南村). 조선조(朝鮮朝)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윤지청(尹之淸): 자(字)는 직경(直慶). 조선 때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지냈다.

윤의(尹 顗): 1557(명종 12)~1618(광해군 10). 자(字)는 정보(靖甫), 군수(郡守) 세형(世亨)의 아들. 1583년(선조 1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601년(선조 34)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고, 장령(掌令)․종묘서 령(宗廟署令)․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등을 거쳐 1605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을 지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윤원(尹 愿): 자(字)는 자후(子厚), 호(號)는 반계(盤溪). 1689년(숙종 15) 남학(南學)의 장의(掌議)로 송시열(宋時烈)의 억울함을 상소(上疏)하였고, 민비(閔妃)의 폐모론(廢母論)이 대두되자 수백 명의 유생(儒生)을 인솔하여 5일간 대권을 지키며 통곡하였다. 이로 인해 이원(利原)에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0) 신원(伸寃)되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공주(公州)의 육당서원(육塘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윤택정(尹宅鼎): 자(字)는 사규(士揆). 조선(朝鮮) 때 한성우윤(漢城右尹)을 역임하였다.

윤세의(尹世義): 호(號)는 석계(石溪). 조선 때 지평(持平)을 지냈다.

윤욱(尹 頊): 자(字)는 경중(敬仲), 호(號)는 심적당(心適堂). 1613년(광해군 5)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있을 때 아우 영(潁)과 함께 요동국모(搖動國母)는 죄범강상(罪犯綱常)이라는 글을 지어 이 첨(李瞻)의 죄를 공개하고 호남으로 낙향하여 보성(寶城)에 은거하였다.

윤진경(尹進卿): 자(字)는 응시(應時). 1620년(광해군 12)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1631년(인조 9) 임경업(林慶業)과 함께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쌓았다. 산성(山城)에 석비(石碑)와 비각(碑閣)이 있고, 정사원종1등공신(靖社原從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되었다.

윤수익(尹壽益): 자(字)는 형저(亨저), 호(號)는 동주(東洲). 조선 때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윤수두(尹壽斗): 조선조에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를 역임하였다.

윤천뢰(尹天賚): 1617(광해군 9)~1695(숙종 21). 자(字)는 대여(代餘), 부윤(府尹) 진경(進卿)의 아들. 1643년(인조 21)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657년(효종 8)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그후 도정(都正)․포도대장(捕盜大將)․도총관(都摠管)․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등 여러 관직을 지낸 후 신천 군수(信川郡守), 충청도(忠淸道)․함경남도(咸鏡南道)․경상좌도(慶尙左道)․함경북도(咸鏡北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영흥 부사(永興府使)․회령 부사(會寧府使)․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다.

윤각(尹 慤): 1665(현종 6)~1724(경종 4). 자(字)는 여성(汝誠),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진사(進士) 익상(翊商)의 아들. 1699년(숙종 25)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비변사 낭관(備邊司郎官)․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초계 군수(草溪郡守)․전주영장(全州營將)을 거쳐 전라도 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에 승진, 1711년(숙종 37) 해구(海寇)의 발호(跋扈)가 심해지자 천거(薦擧)로 금위중군(禁衛中軍)이 되어 방어에 공을 세웠다. 이듬해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어 청나라 사신과 함께 백두산(白頭山)의 경계를 사정(査定)하고, 백두산 남쪽의 지형(地形)을 그려 바쳤다. 1720년(숙종 46)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전임, 이어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거쳐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되었다가 1724년 의금부(義禁府)에 투옥, 장살(杖殺)되었다. 이해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신원(伸寃)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지(尹 志): 1688(숙종 14)~1755(영조 31). 자(字)는 사심(士心), 훈련대장(訓鍊大將) 취상(就商)의 아들. 1723 년(경종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이 되고 1724년(경종 4) 지평(持平)으로 소론(少論)이 모두 추방당할 때 제주도에 유배, 뒤에 나주(羅州)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743년(영조 19) 전리(田理)에 방출(放黜)되었다.

윤약연(尹若淵): 조선(朝鮮) 때 수찬(修撰)을 지냈다.

윤태연(尹泰淵): 조선 때 총융사(摠戎使)를 지냈다.

윤의검(尹義儉): 조선조(朝鮮朝)에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