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해남윤씨(海南尹氏),해남윤씨시조, 윤존부(尹存富),해남윤씨유래,해남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8 17:39 수정일 : 2018-08-01 14:43

해남윤씨시조 및 해남윤씨유래(본관)

해남(海南)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의 색금현(塞琴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침명(浸溟)으로 고려 양무군(陽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해남(海南)으로 고쳐 영암군(靈岩郡)에 예속시켰다가, 1409(태종 9) 진도현(珍島縣)과 합하여 해진현(海珍縣)이라 했으며, 1895(고종 32)에 현()을 폐지하고 해남군(海南郡)이 되었다.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는 고려(高麗) 중기 때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출생과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 후 7세손까지의 소목(昭穆)도 미상(未詳)하여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온직장(司醞直長)을 지내다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아들 단봉(丹鳳)․단학(丹鶴) 형제를 데리고 강진(康津)으로 은둔(隱遁)하여 그 곳에 정착 세거(定着世居) 8세손 광전(光碘)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해남(海南)으로 삼게 되었다.

일찍이 호남지방(湖南地方)에 자리를 잡고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온 해남 윤씨는 생원(生員) 효정(孝貞)의 아들 대()에 와서 크게 가세(家勢)가 융성하여 가문의 기반이 다져졌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던 구(: 효정의 맏아들)1516(중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호당(湖堂)에 뽑히고 주서(注書)에 어어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으나 기묘사(己卯士禍) 때 삭직당해 영암(靈岩)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복관(復官)되었고, 문장(文章)에 능하여 후일 현손 윤선도(尹善道) ․류희춘(柳希春) ․최 부(崔溥) ․임억령(林億齡) 등과 더불어〈해남 오현(海南五賢)〉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의중(毅中)도 명종조(明宗朝)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직제학(直提學)과 형, 예조참의(, 禮曹參議)․ 도승지(都承旨)․ 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직했고,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572(선조 5) 평안도 관찰사와 이듬해 병조 참판(兵曹參判)․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가 동인(東人)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삭출되었다.

부정(副正) 유심(惟深)의 아들로 관찰사 유기(惟機)에게 입양했던 고산(孤山) 선도(善道)는 혼조의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와 은거지에서 생활하며 시가(詩歌)의 미답지를 개척하고 우리말의 새로운 뜻을 창조하여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그의 시조(時調)는 정 철(鄭 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었고 우리나라 국문학사(國文學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616(광해군 8) 서른 살 때 일개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으로서 북인(北人)의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영의정(領議政) 박승종(朴承宗)의 전횡을 고발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지루한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특히 그는 시()를 읊기를 좋아했으나 쓰기를 싫어했다고 하며 일생을 경륜(經倫)과 절의(節義)로 살았으며, 울분은 문학으로 발산했다. 문학과 함께 인품으로도 명망을 받았던 고산은 그를 못살게 하였던 정적(政敵) 원두표(元斗杓)가 앓아 누웠을 때 갖가지 비약(秘藥)을 써서 낫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효종(孝宗)의 스승이기에 임금은 항상 고산을 가까이 두고 싶었으나, 당시 성세(盛勢)하였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逡吉) 등 집권자들에 의하여 가혹한 정치적인 보복을 받았다.

고산은 74세때 최악의 유배지라는 삼수(三水 : 함경남도 벽지)에 귀양갔다가 81세에 풀려나서 완도의 보길도에서 생을 마쳤다.

효종(孝宗)이 세자(世子)였을 때 수원(水原)에 살면서 고산을 항상 곁에 두고 싶어 집을 지어 주었는데, 효종이 작고한 뒤에 그 집을 뜯어 배로 고향인 해남 연동에 옮겨 지금도 남아 있다. (사적 제167)


그밖에 해남 윤씨를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형인 윤()을 비롯, 아들․조카와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신()이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다시 전장에 나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순절하여 화암사(花巖祠)에 제향되었으며, 치경(致敬)과 동철(東喆)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여 함께 순절하였다.

그외 많은 인물들이 국난극복에 신명을 바쳐 앞장섰으며, 고산의 증손(曾孫) 두서(斗緖)는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통하여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겸재(謙齋) 정 선(鄭歚) 등과 더불어 〈삼재(三齋)〉로 불리웠고, 그의 아들 덕희(德熙)도 맹영광(孟永光)의 영향을 받아 말()과 신선(神仙)을 잘 그려 아버지인 두서(斗緖)와 함께 <쌍절>로 일컬어졌다.

구한말에 와서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정기(廷琦)가 경사(經史)와 문장에 정통했으며 송()나라 미불(米芾)의 서체(書體)를 터득한 글씨로 필명을 떨쳤다.

주찬(柱瓚)은 고종(高宗)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다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위해 결사대를 편성하는 등 항일투쟁에 공헌하여 의절(義節)과 학문(學問)의 전통가문인 해남 윤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남윤씨(海南尹氏)는 남한(南韓)66,3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해남윤씨조상인물

윤환(尹 桓) 고려조(高麗朝)에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였다.

윤녹화(尹祿和) 고려(高麗) 때 진사(進士)를 지냄.

윤광전(尹光琠) 고려조에 영동정(令同正)․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

윤단봉(尹丹鳳) 고려 말(高麗末) 우왕(禑王)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낙향하여 강진(康津)에 은거하였다.

윤단학(尹丹鶴) 고려 때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역임.

윤천우(尹天佑) 조선조에 부정(副正)을 역임.

윤사보(尹思甫) 조선 때 창신교위(彰信校尉)․중단사직 좌통례(左通禮)를 역임.

윤종(尹 種) 조선 때 호군(護軍)을 역임.

윤경(尹 耕) 조선에서 사간원 사간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

윤사서(尹思瑞) 조선(朝鮮) 때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

윤강(尹 江) 조선 때 안산군수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

윤처지(尹處智) 조선조(朝鮮朝)에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윤효정(尹孝貞) 연산조 때 호조참판 역임

윤충은(尹忠殷)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윤충언(尹忠彦) ()는 형백(亨伯), ()는 율리(栗理). 조선(朝鮮)때 목사(牧使)를 역임.

윤안국(尹安國) ()는 언보(彦甫), ()는 일덕재(逸德齋).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윤경우(尹景佑) ()는 흥방(興邦). 조선 때 시독관(試讀官)을 지냄.

윤세좌(尹世佐) ()는 충보(忠甫).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냄.

윤순(尹 循) ()는 강정(講亭). 조선 중종(中宗) 대 예문관 교수(藝文館敎授)․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뛰어남.

윤구(尹 衢) 14951542 자(字)는 형중(亨仲), 호(號)는 귤정(橘亭), 생원(生員) 효정(孝貞)의 아들. 1513년(중종 8) 생원이 되고, 151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듬해 주서(注書)에 이어 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등용되었다. 1519년(중종 33)복관되었다. 문장(文章)에 능했다.

윤행(尹 行) ()는 대용(大用), ()는 졸재(拙齋).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능성 현령(綾城縣令)을 거쳐 진주․동래․제주․나주․광주 목사(晉州 東萊․濟州․羅州․光州牧使) 8()의 목사(牧使)를 역임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윤복(尹 復) ()는 원례(元禮), ()는 석문(石門)․행당(杏堂), 생원(生員) 효정(孝貞)의 아들, 목사(牧使) ()의 아우. 1534(중종 29) 생원(生員)이 되고, 153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553(명종 8) 낙안 군수(樂安郡守), 1568(선조 1) 선공 감 부정(繕工監副正)이 되고, 사성(司成)․수찬(修撰)․장령(掌令)․교리(校理)․집의(執義)․좌부승지(左副承旨)․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나주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

윤의중(尹毅中) 15241597 자(字)는 치원(致遠), 호(號)는 낙천(駱川), 정랑(正郞) 구(衢)의 아들. 1548년(명종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저작(著作) 등을 거쳐 1553년 부수찬(副修撰)으로 검토관(檢討官)을 겸했고, 이듬해 부교리(副校理)로서 제주 선위사(濟州宣慰使)가 되어 나갔다.

이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고, 1557년 검상(檢詳)․사인(舍人), 뒤에 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예조참의(禮曹參議)․승지(承旨) 등을 거쳐 1562년 대사성(大司成), 이어 부제학(副提學)․대사간, 병조와 호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1566년 호조 참판(戶曹叅判)으로 안주 영위사(安州迎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명종(明宗)이 죽자 이조 참판(吏曹叅判)․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겸직,「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1572(선 조 5) 평안도 관찰사, 이듬해 병조참판․대사헌(大司憲), 1574년 대사간․예조 참판 등을 역임, 1576년 형조 판서에 올랐다. 동인(東人)으로서 1589(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 때 삭출(削黜) 되었다.

윤광계(尹光啓) 15591619 자(字)는 경열(景說), 호(號)는 귤옥(橘屋), 목사(牧使) 행(行)의 손자, 화중(和中)의 아들. 조 헌(趙憲)의 문인. 1585년(선조 18) 생원(生員)이 되고, 15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01년 주서(注書)․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거쳐 1603년에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서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역대실록(歷代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했다.

이듬해 예조 정랑(禮曹正郞), 1606년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다음해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조 헌의 문인이었으므로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았고, 광해군(光海君) 때에는 말직을 전전하다가 고향에 은퇴했다. 격조 높은 시작품을 남겼다.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참찬(叅贊) 의중(毅中)의 손자, 부정(副正) 유심(惟深)의 아들. 관찰사 유기(惟幾)에게 입양(入養). 1612년(광해군 4) 진사(進士)가 되고, 1616년 성균관(成均館)의 유생으로서 권신 이이첨(李 爾瞻) 일당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이듬해 경원(慶源)에 유배, 이어 기장(機張)에 이배되는 등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석방,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海南)에 내려갔으며, 찰방(察訪)․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에 임명 되었으나 모두 사퇴,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어 특히 봉림 대군(鳳林大君 : 효종)을 보도(輔導)했다.

이듬해 공조 좌랑(工曹佐郞)․형조 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호조 정랑․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역임,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예조 정랑(禮曹正郞)․문학(文學)을 지냈고, 이해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 현감(星山縣監)에 좌천되었다가 1635년 파직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왕을 호종하지 않아 화의가 성립된 뒤 영덕(盈德)에 유배, 이듬해 방환된 후부터 은거했다.

1652(효종 3) 왕명으로 불리어 사예(司藝)를 거쳐 예조 참의(禮曹叅議)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 다시 은퇴했다가 1657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기용되고, 이듬해 공조 참의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같은 남인(南人)인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을 철폐하려는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노쟁하다가 3()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되었다.

남인의 거두로서 1659년 효종(孝宗)이 죽자 산릉 간심관(山陵看審官)이 되어 수원(水原)에 장지를 정했다가 서인(西人)의 반대로 묵살되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3년설을 주장, 서인들의 정치세력을 꺾으려다가 서인들의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됨으로써 삼수(三水)에 유배되고 남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어 위리안치(圍籬安置), 1667(현종 8) 방환되었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 유배소에서 보냈으며, 그 동안의 작품은「고산유고(孤山遺稿)」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경원 배소에서 지은「견회요(遣懷謠)」와「우후요(雨後謠), 영덕 배소에서 풀려나와 고향에서 지은「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노후에 은퇴하여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의 시가(詩歌)는 미답지를 개척하고 우리말 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여 활용한 서정적인 작품이다.

그의 시조(時調)는 정 철(鄭 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1675(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신(尹 紳) ()는 사진(士搢).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형() 윤 륜(尹 綸)과 아들․조카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 싸웠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다시 용감히 싸우다 1010일 모두 순절(殉節)하였다. 화암사(花巖祠)에 제향(祭 享)되었다.

윤이경(尹履慶) ()는 사영(士榮). 양근 군수(楊根郡守)를 지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항쟁하다 순절(殉節)하였다. 화엄사(花巖祠)에 제향되었다.

윤익경(尹益慶) ()는 탁영(卓榮).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倭賊)을 막았으며, 1597(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항거하다가 순절(殉節)하여, 화암사에 제향(祭享)되었다.

윤륜(尹 綸) ()는 사언(士言).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윤신(尹紳)․윤치경(尹致慶)․윤동철(尹東喆)과 함께 병치(兵峙)에서 싸우다 순국(殉國)하였다.

윤치경(尹致敬) ()는 일지(一之).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윤신(尹紳)․윤륜(尹綸)․윤동철(尹東喆)과 더불어 왜적(倭賊)에 항거하다 순국(殉國)하였다. 화암사(花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윤동철(尹東喆) ()는 길로(吉老), ()는 호산(壺山).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였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윤 신(尹 紳)․윤 륜(尹 綸)․윤치경(尹致敬) 등과 함께 왜병(倭兵)을 격퇴하다 함께 순사(殉死)하였다.

윤세필(尹世弼) 조선 대 부사(府使)를 지냄.

윤사중(尹思中) ()는 시숙(時叔). 조선(朝鮮)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윤홍중(尹弘中) ()는 중임(重任). 1540(중종 3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46(명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거쳐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역임.

윤명중(尹明中) 자 명지(明之)조선(朝鮮) 때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을 지냄.

윤면중(尹勉中) ()는 면지(勉之). 조선(朝鮮) 때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다.

윤굉중(尹宏中)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주부 역임.

윤정(尹 定) ()는 정숙(靜叔), ()는 숙재(淑齋),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역임.

윤용(尹 容) ()는 대수(大受). 1556(명종 11)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남도포만호(南桃浦萬戶)를 거쳐 초계 군수(草溪郡守)를 역임.

윤택(尹 宅) ()는 인숙(仁叔). 조선 때 진해현감 목사(牧使)를 지냄.

윤대령(尹大齡) ()는 인수(仁叟).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윤유기(尹唯幾) ()는 성보(成甫), ()는 만오(晩悟). 1576(선조 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580(선조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충청․강원 감사(忠淸․江原監司)를 거쳐 좌승지(左承旨)․병조 참의(兵曹叅議)에 이르렀다.

윤유심(尹唯深) ()는 통보(通甫). 조선에서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을 지냄.

윤현(尹 俔) ()는 대유(大有). 1585(선조 18) 훈련판관(訓鍊判官)에 이르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동생 검()과 의병을 일으켜 해남(海南) 달마산(達摩山)에서 왜적(倭賊)을 맞아 항거하다 순절(殉節)하였다.그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 참판(戶曹叅判)에 추증되었다.

윤기(尹 琦) ()는 여온(汝溫). 조선 때 목포 만호(木浦萬戶)를 거쳐 당진 현감(唐津縣監)을 지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구와 맞서 싸우다 순절하였다.

윤검(尹 儉) ()는 이소(而素). 목포 수군만호(木浦水軍萬戶)․흥양 현감(興陽縣監)을 지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병치(兵峙)에서 왜병(倭兵)과의 격전중 순국(殉國)하였다.

윤석(尹 碩) ()는 억세(億世). 조선 때 충주목사(牧使)를 지냄.

윤부(尹 溥) ()는 자건(子建).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좌랑(佐郞)․정랑(正郞)을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윤승경(尹升慶) ()는 중영(仲榮), ()는 남계(南溪).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좌랑(禮曹佐郞)․정랑(正郞)․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를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윤옥(尹 沃) ()는 계숙(季淑), ()는 일재(一齋), 조선 때 절 충장군에 이르렀다.

윤조(尹 遭) ()는 경취(景就). 조선조(朝鮮朝)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윤정기(尹廷奇) ()는 시립(時立). 조선(朝鮮)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윤선창(尹善昌) ()는 경백(慶伯). 조선(朝鮮) 때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다.

윤최(尹 最) ()는 사극(士極), ()는 삼평당(三平堂). 조선조(朝鮮朝)에 형조 참의(刑曹叅議)를 역임

윤동로(尹東老) ()는 군수(君叟), ()는 당림처사(棠林處士).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백부(伯父)를 따라 양근(楊根)에서 왜적(倭賊)과 싸웠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떄도 의병(義兵)을 이끌고 상경(上京)하다가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낙향(落鄕)하여 학문 에 전념했다.

윤회천(尹回天) ()는 자성(子誠), ()는 송백당(松柏堂).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叅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자(字)는 효언(孝彦), 호(號)는 공재(恭齋)․종애(鐘厓)․참의(叅議) 선도(善道)의 증손. 1693년(숙종 1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시문(詩文)에 능했고 동식물․인물 등을 잘 그렸다. 현재(玄齋)․겸재(謙齋)와 함께 조선의 삼재(三齋)라 불리며,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윤환성(尹桓成) ()는 성소(聖韶), ()는 석당(石塘). 조선(朝鮮)때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윤효관(尹孝寬) ()는 율지(栗之), ()는 죽록(竹麓).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정랑(兵曹正郞)․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예조 정랑(禮曹正郞) 등을 거쳐 승정원 우승지(承政院右承旨)․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병조 참의(兵曹叅議)를 역임.

윤이형(尹陑亨)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윤진미(尹晋美) ()는 자보(子保). 조선(朝鮮) 때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냄.

윤창도(尹昌道) ()는 안여(安汝), ()는 추사(秋沙).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냄.

윤제(尹 濟) ()는 진경(振卿), ()는 절재(節齋).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냄.

윤의(尹 毅) ()는 평숙(平淑). 조선(朝鮮) 때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

윤덕희(尹德熙) 16851766 ()는 경백(敬伯), ()는 낙서(駱西)․연포(蓮圃)․연옹(蓮翁), 두서(斗緖)의 아들. 벼슬은 도사(都事)에 이르렀고, 맹영광(孟永光)의 영향을 받아 말과 신선(神仙)을 잘 그렸으며, 아버지 두서와 함께 쌍절(雙絶)이라 일컬어졌다.

윤항미(尹恒美) ()는 구숙(久叔). 1712(숙종 38)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부산진 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전주 영장(全州營將) 등을 역임하고, 1752(영조 28)에는 서흥 현감(瑞興縣監)을 역임.

윤지임(尹之任) ()는 명숙(鳴叔). 조선(朝鮮) 때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냄.

윤인서(尹麟瑞) ()는 현여(現汝), ()는 지란(芝蘭). 조선조(朝鮮朝)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냄.

윤진희(尹鎭禧) ()는 백계(伯季), ()는 백송(栢松).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좌랑(佐郞)․정랑(正郞)․승지(承旨)를 거쳐 공조 참판(工曹叅判)을 역임.

윤종호(尹宗毫) ()는 문거(文擧). 조선(朝鮮)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

윤이석(尹爾錫) ()는 거경(擧卿). 조선 때 아산현감(縣監)을 지냄.

윤서유(尹書有) ()는 개보(皆甫), ()는 옹산(翁山). 1756(영조 32) 문과에 문제한 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예조 정랑(禮曹正郞) 등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렀다.

윤규범(尹奎範) 1752(영조 28)1846(헌종 12) 초명은 지범(持範), 자(字)는 이서(彝叙), 호(號)는 남고(南皐), 선도(善道)의 손자, 제(悌)의 아들. 1777년(정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선도(善道)의 손자이므로 벼슬에 오르지 못하다가 왕명으로 서용(敍用), 임천군수(林川郡守)가 되었다.

1800년 정조(正祖)가 죽자 사직하고 12년간 은거하다가 1812(순조 12) 부호군(副護軍)이 되고, 7년 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전임, 이어 병조참의(兵曹叅議)․오위장(五衛將)을 지냄.

윤대욱(尹大郁) ()는 광보(光甫).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참판(吏曹叅判)을 지냄.

윤도일(尹道一) ()는 찬지(贊之).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윤이정(尹爾鼎)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냄

윤이진(尹爾晋) ()는 명경(明卿).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냄.

윤만항(尹萬恒) ()는 사구(士久), ()는 난계(蘭溪). 조선조(朝鮮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윤정기(尹廷琦) 1810(순조 10)~? 자(字)는 기옥(奇玉)․경림(景林), 호(號)는 방산(舫山)․한금(寒琴), 선도(善道)의 후손. 외조부 정약용(丁若鏞)에게 학문을 배웠고,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정약용의 문장과, 송나라 미불(米芾)의 체(體)를 터득한 글씨로 유명했다.

윤석삼(尹錫三) ()는 천흥(天興).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윤종익(尹鍾翼) ()는 기숙(旗叔), ()는 성헌(星軒). 조선(朝鮮)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윤낙호(尹樂浩) ()는 가현(嘉顯), ()는 지족당(知足堂).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냄.

윤주찬(尹柱瓚) ()는 사규(士圭), ()는 일사. 고종(高宗) 때 각부(各部)의 주사관(主事官)을 거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 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앞장섰다.

1907년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이는 한편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위해 결사대를 편성, 그 거사 자금으로 2천냥()을 내기도 하였다. 이해 3월 황태자(皇太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백관(百官)이 모이는 기 회를 이용하여 5적을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되어 유배형(流配刑)을 선고받고 진도(珍島)에 귀양갔다.

윤주신(尹柱臣) ()는 정헌(廷憲), ()는 청파(靑坡). 조선(朝鮮)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윤돈하(尹敦夏) ()는 전오(典五), () 는 탁사(濯斯). 조선 때 비서승(秘書丞)을 역임.

윤기하(尹基夏) ()는 경언(敬彦), ()는 서강(瑞岡).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냄.

윤우하(尹禹夏) ()는 윤지(允志), ()는 석계(石溪).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윤주현(尹周顯) ()는 덕은(德隱), ()는 묵옹(黙翁). 조선 때 교관(敎官)을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