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공주이씨시조(公州李氏),이천일(李天一)

작성일 : 2017-04-29 16:15 수정일 : 2018-02-26 22:11

시 조

공주이씨시조(公州李氏 始祖)는 신라(新羅) 때 사람인 이천일(李天一)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53년(신라 박혁거세 5)에 문명(文名)이 뛰어나 중국(中國) 한(漢)나라에 들어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흉노적(凶奴賊) 정벌(征伐)에 공(功)을 세워 요동백(遼東伯)에 봉군되어 신라(新羅)로 돌아와 공산(公山 : 공주)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공주(公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공주(公州)는 충청남도(忠淸南道) 동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475년(문주왕 1)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공주(公州)에 수도를 옮기고, 538년(성왕 16) 부여(扶餘)로 천도(遷都)하기까지 약 60년 간 백제(百濟)의 수도(首都)였다.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후 당나라가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는데, 670년(신라 문무왕 10)에 신라가 차지하여 신문왕 때 웅천주(熊川州)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太祖) 때 공주(公州)라 개칭하고 도호부를 두었다.

983년(성종 2) 목(牧)을 두었다가 993년(성종 12)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안절군(安節郡)이라 칭하여 하남도(河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때는 절도사를 폐지하고, 그 후 지주사(知州事)로 강등, 1441년(충해왕 복위 2) 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세종 때 진(鎭)을 두었다가 1895년 공주가 되고 그 후 변천을 거쳐 현재는 공주시(公州市)로 승격하였다.

그 후 천일(天一)의 36세손 우(堣 : 양호공)의 후손에서 크게 번창하여 우(堣)의 아들 저(苧)가 고려(高麗)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화성부원군(花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사손(思孫)은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다.

공주 이씨의 세계(世系)는 사손(思孫)의 두 아들 엽(曄)과 서(曙)의 대(代)에서 7파로 갈리어, 전공 판서(典工判書) 엽의 여섯 아들은 경력공파(經歷公派 : 명선)․어사공파(御史公派 : 명성)․공숙공파(恭肅公派 : 명덕)․지평공파(持平公派 : 명보)․참의공파(參議公派 : 명윤)․현감공파(縣監公派 : 명의)로, 참지의정부사 서(曙)의 아들은 강양공파(剛襄公派)로 분파(分派) 하였는데 그 중 경력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후손도 가장 많다.

명선의 현손 겸(謙)이 연산군(燕山君) 때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그곳에서 정착하였으므로, 경성을 중심으로 한 관북지방에 후손들이 집중 세거(世居)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력공파(經歷公派) 명선(明善)의 10세손 기수(麒壽)․붕수(鵬壽) 형제가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옥탑평(玉塔平) 싸움에서 순절하여 형은 부제학(副提學), 아우는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

원배(元培)는 명선(明善)의 18세손인데, 경서(經書)와 학행(學行)으로 이름나 정조(正祖) 임금 앞에서 구경(九經)에 대한 질문 62조를 적절하게 답변하여 많은 포상을 받고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공숙공파(恭肅公派)의 파조(派祖)인 명덕(明德)은 태조(太祖) 때 등과하여 세종(世宗)때 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나이 70세가 되어 치사(致仕)했으나 다시 등용되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러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또한 그의 8세손 정견(廷堅)․정헌(庭憲) 형제가 선조(宣祖) 때 함께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무공을 세워 명성을 날렸다.

강양공파 부(敷)는 조선개국 삼등공신(朝鮮開國三等功臣)으로 흥원군(興原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11세손 도(棹)가 숙종(肅宗) 때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그 외 3․1 운동 민족대표인 필주(弼柱)와 지평공파 명보(明保)의 후손으로 정조 때 한성부 판윤(判尹)을 지낸 응거(應擧)가 이름났고, 현감공파 명의(明義)의 후손인 병덕(秉德)은 순조(純祖)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주이씨(公州李氏)는 남한에 30,90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공주이씨조상인물

이인공(李仁公): 고려조(高麗朝)에 별장(別將)을 지냈다.

이인제(李仁濟): 고려(高麗) 때 좌정승(左政丞)에 올랐다.

이교송(李喬松):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이자광(李自光): 고려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이우(李 堣): 고려조(高麗朝)에 전공(典工) 시랑(侍郞)을 역임하였다.

이저(李 苧): 고려(高麗) 때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이사손(李思孫): 고려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다.

이엽(李 曄) 고려(高麗) 때 전공(典工) 판서(判書)를 지냈다.

이서(李 曙): 고려(高麗) 때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이명선(李明善): 조선조(朝鮮朝)에 경력(經歷)을 역임했다.

이명성(李明誠): 조선조(朝鮮朝)에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했다.

이명덕(李明德): 1373(공민왕 22)~1444(세종 26). 자(字)는 신지(新之), 호(號)는 사봉(沙峰), 시호(諡號)는 공숙(恭肅). 엽(曄)의 아들. 1396년(태조 5)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예문 춘추관(藝文春秋館)에 보직되었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사간원(司諫院) 우헌납(右獻納)․집의(執義)․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형조(刑曹) 참의(參議) 겸 지도관사(知都官事) 등을 역임했다. 1415년(태종 15) 승정원(承政院) 동부대언(同副代言)․좌부대언(左副代言)을 거쳐 세종(世宗)이 즉위(卽位)하자 이조(吏曹)․병조(兵曹) 참판(參判)․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예조(禮曹) 참판(參判)․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1430년(세종 12) 공조(工曹) 판서(判書)가 되었다. 이듬해 병조(兵曹) 판서(判書)를 거쳐 1438년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인순 부윤(仁順府尹)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승진하여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명보(李明保): 조선(朝鮮) 때 지평(持平)을 지냈다.

이명윤(李明尹): 조선조(朝鮮朝)에 참의(參議)를 지냈다.

이명의(李明義):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이광필(李光弼): 조선조(朝鮮朝)에 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지냈다.

이기효(李起孝): 조선조에 예조(禮曹) 판서(判書)를 지냈다.

이건(李 鍵): 자(字)는 중계(重啓). 1624년(인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고 6조(六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연(李 兗): 조선조(朝鮮朝)에 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이겸(李 謙): 조선에서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이극공(李克恭): 조선(朝鮮)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이춘장(李春張):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이수성(李秀成): 조선에서 교리(校理)를 지냈다.

이붕수(李鵬壽): 1548(명조 3)~1592(선조 25). 자(字)는 중항(仲恒), 팽년(彭年)의 아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정문부(鄭文孚)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길주(吉州)․쌍포(雙浦)․단천(端川) 등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옥탑평(玉塔坪) 싸움에서 전사했다. 전공으로 1666년(현종 7) 지평(持平)에 추증(追贈), 그 후 다시 감찰(監察)에 가증(加贈)되었으며, 경성(鏡城)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홍춘(李弘春): 조선 때 병조(兵曹)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이긍(李 兢): 조선에서 사재감(司宰監) 정(正)을 역임하였다.

이인영(李仁榮): 조선조(朝鮮朝)에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이경유(李敬惟): 조선조(朝鮮朝)에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이발보(李發輔): 조선(朝鮮) 때 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이구(李 逑): 조선조에 호조(戶曹) 참판(參判)을 지냈다.

이요신(李堯臣): 조선조(朝鮮朝)에 좌윤(左尹)을 역임했다.

이요빈(李堯彬): 조선에서 판윤(判尹)을 역임했다.

이원우(李元祐):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종우(李宗祐):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공보(李公輔): 조선(朝鮮)에서 정언(正言)을 지냈다.

이인준(李仁俊):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이방(李 芳):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성(李 誠):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기창(李基昌):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이정춘(李廷春): 조선조(朝鮮朝)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이동복(李東復):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병현(李秉鉉):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재만(李在萬): 조선조에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이요필(李堯弼): 조선 때 공조(工曹)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이사준(李師準): 조선에서 지평(持平)을 지냈다.

이익무(李益茂): 조선조(朝鮮朝)에 공조(工曹) 참의(參議)를 지냈다.

이세빈(李世彬): 조선조에 공조(工曹)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이공여(李公與): 조선(朝鮮) 때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이미만(李美萬): 조선(朝鮮) 때 판윤(判尹)을 역임했다.

이익저(李益著):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이영찬(李英燦): 조선에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이정근(李貞根):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종림(李宗琳): 조선 때 이조(吏曹)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이기발(李起發): 조선조(朝鮮朝)에 판관(判官)을 지냈다.

이종연(李宗衍):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이종경(李宗慶):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이경동(李敬東):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이균(李 畇): 조선조(朝鮮朝)에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이진(李 畛):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복환(李福環):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이사열(李思說):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공필(李公弼):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이경(李 敬): 조선(朝鮮) 때 중추원(中樞院) 사(事)(中樞院使)를 지냈다.

이사필(李思弼): 조선에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이교(李 嶠):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흥정(李興廷):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지(李 智):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이인정(李麟禎):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백렬(李百烈):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빈(李 玭): 조선에서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이진흥(李振興):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이광욱(李光郁): 조선조(朝鮮朝)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이선영(李宣榮): 조선 때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이언(李 彦): 조선조에 절충장군(折衷將軍)을 지냈다.

이원근(李元根): 조선조(朝鮮朝)에 판윤(判尹)을 지냈다.

이효근(李孝根):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응린(李應麟):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예(李 禮):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이관(李 寬): 조선조(朝鮮朝)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이계원(李繼源):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이승길(李承吉): 조선조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했다.

이춘화(李春華):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이몽귀(李夢龜): 조선조(朝鮮朝)에 우후(虞侯)를 역임하였다.

이위(李 韡): 조선조(朝鮮朝)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이지형(李之馨): 자(字)는 자외(子外). 조선조에 목사(牧師)를 지냈다.

이지온(李之馧): 자(字)는 자문(子聞). 조선조(朝鮮朝)에 형조(刑曹)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이윤세(李胤世): 조선조(朝鮮朝)에 호조(戶曹)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이진호(李鎭蒿):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이진형(李鎭衡): 조선에서 영장(營將)을 지냈다.

   이도(李 棹): 조선(朝鮮)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이현익(李顯益): 조선조에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이미중(李微中): 조선(朝鮮) 때 정언(正言)을 역임했다.

   이진상(李鎭常): 조선조(朝鮮朝)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이응협(李應協): 조선 때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이흥종(李興宗): 조선조(朝鮮朝)에 교리(校理)를 지냈다.

   이언세(李彦世): 조선에서 정언(正言)을 지냈다.

이원배(李元培): 1745(영조 21)~1802(순조 2). 자(字)는 여달(汝達), 호(號)는 귀암(龜巖), 시호(諡號)는 문의(文懿). 경서(經書)에 밝아 학행(學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1798년(정조 22) 초야(草野)에 묻힌 선비를 찾을 때 함경도에서 추천을 받고 왕앞에 나아가 구경(九經)에 대한 질문 62조(條)를 적절하게 대답하여 많은 상을 받았다. 1801년(순조 1)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임명되고, 이어 상의원(尙衣院) 별제(別提)․장릉(章陵) 영(令) 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사(不仕)했다. 제학(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병덕(李秉德):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응거(李膺擧): 1715(숙종 41)~1807(순조 7). 자(字)는 사징(士澄), 호(號)는 덕암(德巖), 시호(諡號)는 돈희(敦僖), 증판서(贈判書) 세린(世麟)의 아들. 1788년(정조 12) 영변 참봉(寧邊參奉)으로 있을 때, 학행(學行)과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숭례전(崇禮殿) 낭(郎)이 되고, 이어 강릉(康陵) 참봉(參奉)을 거쳐 1791년(정조 15) 품계(品階)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도총관(都摠管)등을 역임한 후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이하석(李河錫):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동발(李東發): 조선(朝鮮) 때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이기조(李基肇): 조선에서 교리(校理)를 지냈다.

이호용(李浩鎔): 조선(朝鮮) 때 현감(懸監)을 지냈다.

이순(李 洵): 1768(영조 44)~1845(헌종 11). 자(字)는 신백(信伯), 시호(諡號)는 희정(僖靖), 영배(永培)의 아들. 당숙(堂叔)인 원배(元培)에게 사사, 동문인 현익수(玄翼洙)와 함께 스승의 유집(遺集)을 간행했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순릉(純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학문(學問) 연구로 생애를 마쳤다.

이형태(李亨泰): 1791(정조 15)~1842(현종 8). 서예가. 자(字)는 형백(亨伯)․회숙(會叔), 호(號)는 송남(松南), 항(恒)의 아들. 유(愉)에게 입양(入養). 1822년(순조 22) 정릉(定陵) 참봉(參奉)이 되고, 1838년(헌종 4) 함경도(咸鏡道)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41년 전적(典籍)․지평(持平), 이듬해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유곡도(幽谷道) 찰방(察訪)으로 부임 직후 병사했다. 글씨에 능했다.

이필주(李弼柱):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民族代表) 33인의 한 사람이 되어 10년 옥고(獄苦)를 치르고 출옥하여 목사(牧師)로 있으면서 육영사업에 힘썼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 되었다.

이봉창(李奉昌): 서울 출신의 19세 때 용산역 만주견습소에 입소하여 1924년 퇴직하고, 이듬해 도일(渡日)하여 대판(大阪)에서 철공소 직공생활을 하다가 일본인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931년 상해(上海)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김 구(金 九)와 접촉하여 일왕(日王)의 암살(暗殺)을 자원(自願)하고 기회(機會)를 기다리다 1932년 1월 8일 일왕(日王)이 만주국(滿洲國) 괴뢰황제(傀儡皇帝) 부의(부儀)와 일본 대대목련병장(代代木練兵場)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櫻田門)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失敗)했다. 그해 10월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