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부여이씨시조(扶餘李氏),이품(李稟),부여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1 14:32 수정일 : 2018-04-17 21:2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부여이씨(扶餘李氏)의 시조(始祖) 이 품(李 稟)은 고려(高麗) 정종(靖宗)의 왕비(王妃)인 용목왕후(容穆王侯)의 아버지로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부여(扶餘)에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부여로 하게 되었다.

부여(扶餘)는 충청남도 남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소부리(所夫里)라 불렀고,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660년(의자왕 20)에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예속되어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부여 도독부가 설치되었으며, 751년(신라 경덕왕 10)에 이르러 부여현(扶餘縣)이라고 개칭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공주와 병합하여 감무(監務)를 두고 다스리다가, 1413년(조선 태종 13)에 독립하여 부여현이 되었다. 1914년 부군폐합 때 홍산현(鴻山縣)․임천군(林川郡) 전역과 석성현(石城縣)․공주군 일부를 편입해서 16개 면으로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부여(扶餘)에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부여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 이품의 아들 온(穩)이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42년(정종 8)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문종(文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추밀원 지주사 형권(衡權)의 맏아들인 경렬(景烈)은 명종(明宗) 때 문과에 올라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동생 경일(景日)은 1218년(고종 5)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민세(敏世)와 일성(一誠)이 유명했으며,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한 세징(世徵) 도정(都正)을 지낸 순경(順慶), 첨정(僉正)을 역임한 항립(恒立)과 함께 부여 이씨(扶餘李氏)를 덕망 높은 가문(家門)으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貢獻)하였다.


인 구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여이씨(扶餘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61가구, 5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부여이씨조상인물

이온(李 穩)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이이(李 彛) 시호(詩號)는 문전(文靖). 고려(高麗) 때 중승(中丞)을 역임하였다.

이경렬(李景烈)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이재병(李在秉) 고려에서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하였다.

이림(李 淋) 고려(高麗) 때 학사(學士)를 역임하였다.

이세권(李世權) 고려조(高麗朝)에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이경일(李景日)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이재열(李在烈) 고려(高麗) 때 좌승선(左承宣)을 역임했다.

이원방(李元邦) 조선조(朝鮮朝)에 부승지(副承旨)를 지냈다.

이원직(李元稷) 자(字)는 준학(俊學), 호(號)는 죽헌(竹軒). 조선(朝鮮)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이순경(李順慶) 자(字)는 신용(信用), 호(號)는 운계(雲溪). 조선조에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

이항립(李恒立) 자(字)는 시용(時用), 호(號)는 운천당(雲泉堂).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이민세(李敏世) 자(字)는 계곡(桂谷), 호(號)는 승한(承韓). 조선(朝鮮)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이일성(李一誠) 자(字)는 규선(圭善), 호(號)는 삼고당(三顧堂). 조선조(朝鮮朝)에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이세징(李世徵) 자(字)는 승손(承孫), 호(號)는 민암(敏菴). 조선(朝鮮)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