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양산이씨시조(梁山李氏),양산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2 10:05 수정일 : 2018-07-27 14:11

양산이씨의 연원(梁山李氏의 淵源)

원조(元祖)는 가락국 수로왕 허씨(許氏) 왕후로부터 유래되었고,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된 후 허기(許奇) 어른이 당나라로부터 이씨(李氏) 사성(賜姓)을 받은 관계로 이허(李許)로 복성하였으며, 고려조 초기 이허겸(李許謙) 어른이 명나라로부터 이씨 사성을 받고 귀국한 후 고려 국왕이 소성백(邵城伯)으로 봉작하니, 이로부터 인천(仁川)이씨로 관향하게 되었다.

고려말기 공민왕 때 이전생(李全生)(1352~1450) 어른이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암행(暗行) 순찰사로 전국 순찰 도중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당시는 초산리)에 이르렀을 때 산세와 지형이 특출한 명당지임을 발견하고 그 후인 우왕(1380) 때 이곳에 전거한 후 3남 2녀를 얻었는데 아들 징석, 징옥, 징규(澄石, 澄玉, 澄珪)는 모두 무과급제한 후 남정(南征), 북벌(北筏), 내치(內治)에 큰공을 세운 당대의 장상(종1품의 품계)이 되었기 때문에 이곳 생가의 지명마저 삼수리(三帥里)가 되었다.

이전생 어른은 1398년 태조왕 때 공조판서(이때 왕지는 국가 문화재 지정 보물1001호)를 비롯하여, 예조판서, 영중추원사를 역임한 후 1407하야할 때 양산 부원군으로 봉작받으니, 이때부터 양산이씨의 관향이 생겼고, 양산 부원군의 명성이 높아지자 1416년에는 군명마저 순정(順正)에서 양산(梁山)으로 개칭되었다.(양산군지, 양산향교지 참조)

따라서 양산이씨는 김해김씨, 김해허씨, 인천이씨와 한 혈통으로서 현재는 가락 종친회에 속하고 있다.

양산이씨(梁山李氏) 관향과 족보의 유래

1450년(세종32년) 1월 22일 이전생 어른이 99세를 1기로 서거하니 세종대왕은 도승지 조유인을 예관으로 하고, 만사문(悗詞文)을 하사하였는데, 그 내용인 즉, “양남(兩男)이 분어동남계(分禦東南界)하니, 일국간성(一國干城)이 재일문(在一門)하다” 하시어 그 공을 치하하니, 세상의 이목은 이에 집중되었다.

이전생 어른의 묘분은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정1품 품계)로서 11개의 장방형 화강석(한 개의 무게 5t이상)으로 축조되었고, 계유정란(1453) 후유증으로 묘분 일부 및 비석과 문신석 등이 파손 분실된 바 있으나, 묘분의 원형은 현재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국가적 문화 유산이다. 그러나 과거 일본 제국주의 강점자들은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이곳 묘역을 공동 묘지로 만들은 바 있다.

세종실록(32년)에 의하면 세종대왕은 경상도 관찰사에게 호상제하고 있는 이징석, 이징옥, 이징규 형제들이 감기 들리지 않게 호상 초막 내에 온돌을 마련하여 주도록 하명하니, 경상도 관찰사는 국법에 어긋납니다고 개차하니, 세종대왕은 이유 없다 그대로 시행하라고 한 점은 전생 어른 및 3형제에 대한 세종대왕의 각별한 애정과 보살핌이 있었음을 역역히 알 수 있다.

양산이씨 종손가에서 보존하고 있던 단자 족보와 가승보 및 각종 유품은 임진왜란(1592) 때 왜병들의 약탈 대상이 되어 대부분 약탈되었고, 나머지 유품은 1700년대에 이르려 종가집 화재로 소실당하고 보니, 1800년 족보 대중화 때 상계 관계에 있어 확실한 고증을 찾을 길이 없었으나, 당시 순천박씨 가승보에 의하면 1세 숙정공 어른의 따님이 인천군 이만영에게 시집갔고, 그의 자는 이전생이고, 그의 손자는 이징석, 이징옥, 이정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양산이씨 득관조는 이전생 어른 득관 시조는 이만영 어른으로 하고, 양산이씨 족보를 정립한 후 1928년에는 처음으로 인쇄 족보가 발간되었다.

그러나, 그 후인 1960년대 이르려 양산이씨 거창 문중 종손가에서 소장한 고첩(1563) 필사분에 의하면 양산이씨 1세는 고려조 때 예조판서를 역임하신 이영무 어른 2세는 금산 군사로 역인한 후 공조참의로 증직받은 이복례 어른, 3세는 지평장령을 역임한 이수중 어른, 4세는 이조판서 인천군 이만영 어른, 5세는 양산 부원군 이전생 어른, 6세은 이징석, 이징옥, 이징규 어른으로 되어 있어 선산김씨, 벽진이씨 족보 참작과 학계의 자문을 받은 후 1970년 발행된 인쇄본에서는 이전생 어른은 양산이씨 득관조이시고, 정1품의 부원군 예우에 따라 4대 소급하니, 양산이씨 득관 시조 어른은 이영무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1979년 양산이씨 구미 문중 종손가 소장의 필사 가승보(1624)에서도 양산이씨 1세는 이영무 어른, 2세는 이복례 어른, 3세는 이수종으로 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1990년 발생의 양산이씨 대동보에서도 양산이씨 1세는 이영무 어른으로 정립되어 있다.

그러나, 양산이씨 1세이신 영무 어른은 인천이씨 제 몇 세손, 어느계파 어른의 후예인지는 아직도 그 고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의 원인은 양산이씨 종손가의 피화 사건에 있다고도 하였으나, 계유정난 당시의 화근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인천이씨 측 관련 계보에서 증거 인멸시킨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천이씨 대동보에는 양산이씨를 소성후(1세) 원대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양산이씨(梁山李氏)가 우리 민족사에 기여한 업적

일제 강점 하에서 발행된 차상찬 저서 4000년 비사, 민족사학 교수,황의돈 박사, 향토사학가인 안종석 선생, 민족 역사 문학가이신 박종화 선생, 방기환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학자는 한결같이 말씀하시기를

한 부모 설하에서 당대의 명장상인 이징석, 이징옥, 이징규의 3형제 장수(종1품 품계)가 태어난 사실, 그리고 그 생가를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직계 후손에 의해 보존되고 있는 점, 그리고 3형제 중 한분이신 이징옥 장군은 1453년(계유정란 때) 고구려의 후손인 여진족들의 추대를 받고 예고구려 땅인 만주 일대를 영토로 한 대금국의 황제가 된 것은 우리민족 5000년 사는 물론 세계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민족적 자랑이고 긍지이며, 당시 이징옥 장군이 수양 세조 추종자들에 의한 암살만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역사와 지리적 판도에 큰 변화가 생겨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식민지와 같은 치욕의 역사는 자초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징옥 장군의 죽음은 바로 민족의 불행이고 대 영토를 잃은 것이다.

비록 대금국의 역사는 극히 짧았다고 하겠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이는 민족사에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수양세조는 세조 3년 계룡산 경내에 있는 동학사 숙모전(단종을 위하여 목숨바친 충신을 모신 곳) 초흔기(招흔記)에서 이징옥 장군을 가리켜 금세지란신(今世之亂臣) 후세지충신(後世之忠臣)이라고 호칭하면서 아쉬움을 남긴 것은 대금국을 세운 것을 우리 민족이 웅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이를 파탄시킨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통감한데 있다고 하겠음으로 이징옥 장군의 누명은 이때 완전히 신원된 것이다. 그러나 세조 추종자들과 일제 강점자들은 민족사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자칭 대금국 황제로 오도하고 역사 속에서 그 업적을 매장한 바 있으나, 1980년 6월 삼장수 기념사업 법회의 소청을 받은 1980. 6. 12. 국사 편찬 위원회의 회시에 따르면 이징옥란 그 자체는 그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교과서에서는 란이라고는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역대 인물 - 양산이씨조상인물

이영무(李永茂) : 여조판서(고려조)

이복례(李復禮) : 금산군사 증직 예조참의

이수중(李守中) : 지평장령

이만영(李萬英) : 이조판서 인천군

이효림(李孝林) : 홍문관교리 증직 중추원사

이제림(李悌林) : 창영현감

이전생(李全生) : 공조판서 예조판서 영중추원사 양산부원군

이징석(李澄石) : 판충추원사 장강공 양산군

이징옥(李澄玉) : 판충추원사 함경도도절제사 충강공

이징규(李澄珪) : 판충추원사 병조판서 영산군

이윤담(李允聃) : 용양위 부사직

이팔동(李八仝) : 칠원현감 중추원사

이효년(李曉年) : 충무위사직

이윤조(李胤租) : 충좌위 부사직

이윤환(李胤環) : 금산군사 증직 예조참의

이공택(李公澤) : 여절교위부장

이재(李 栽) : 충훈부도사

이석(李 晳) : 교용교교위 수문장

이종(李 鍾) : 군자갑주부

이몽란(李夢鸞) : 훈련원 판관 첨지 선무원종 공신

이응벽(李應壁) : 소봉원 수봉관

이백강(李伯强) : 관찰사

이중강(李仲强) : 부사

이숙강(李淑强) : 가선대부 한양부윤

이약(李 禴) : 동지 중추원사

이혁(李 赫) : 가선대부 동지 중추원사

이승선(李承先) : 통덕량

이동교(李東喬) : 통덕량

이우춘(李遇春) : 호조좌량

14세손(世孫) 이하 생략(以下 省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