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우봉이씨(牛峰李氏),우봉이씨시조,이공정(李公靖),우봉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3 17:07 수정일 : 2018-08-08 15:26

우봉이씨시조

우봉이씨(牛峰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사람인 이공정(李公靖)이다. 공정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우봉(牛峰)․잠성(岑城) 등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그 곳에 세거하면서 관향(貫鄕)을 우봉(牛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우봉(牛峰)은 황해도(黃海道)에 있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의 우잠군(牛岑郡)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우봉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 때 평주(平州)에, 문종(文宗) 때 개성부에 예속되었으며, 예종(睿宗) 때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太祖) 때 현(縣)이 되었고, 1413년(태종 13)에는 황해도(黃海道)에 편입시켰다. 1652년(효종 3) 우봉현(牛峰縣)은 금천군(金川郡)에 병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우봉이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성리학의 대가 재(縡)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조(英祖) 때 노론(老論)의 한 사람으로 대제학(大提學)․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냈으며, 그의 저서「사례편람(四禮便覽)」은 근세의 대표적인 명저로서 오늘날에도 상사(喪事)나 제례(祭禮)에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재(縡)의 손자 채(采)는 순조(純祖)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있을 때 그 고장에 처음으로 둑을 쌓아 농사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그 둑을 가리켜「이공제(李公堤)」라 불렀다 한다. 이외 휘정(輝正)이 대사헌(大司憲)․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광문(光文)이 형조․공조․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러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봉이씨(牛峰李氏)는 남한(南韓)에 23,9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우봉이씨조상인물

이자성(李子晟) ?~1251(고종 38) 시호(諡號)는 의열(義烈), 병부 상서(兵部尙書) 공정(公靖)의 아들. 1231년(고종 18) 몽고의 살리타이(撤禮塔)가 쳐들어오자 상장군(上將軍)으로 후군진주(後軍陳主)가 되어 난을 평정, 이어 충주(忠州)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반란에 괴수(魁首)인 중(僧) 우본(牛本)을 잡아 죽여 난을 평정했다.

1233년 4월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가 되어 용문창(龍門倉)의 난을 토평하고 6월에는 동경(東京)에서 바난을 일으킨 최산(崔山)․이유(李儒) 등을 영천(永川)에서 잡아 죽이고 개선했다. 그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사예(射藝)․서화(書畵)에 능했다.

이길배 조선조(朝鮮朝)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이승녕(李承寧) 조선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했다.

이순(李 淳) 조선조에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이승건 1452(문종 2)~1502(연산군 8) 자(字)는 자강(自强), 관찰사 길배(吉培)의 손자, 기(圻)의 아들. 1480년(성종 11)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주서(注書)가 되고, 1482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장령(掌令)․집의(執義)를 지냈다.

1495년(연산군 1) 사성(司成)으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시강관(侍講官)을 겸임했고, 뒤에 부제학(副提學)․승지(承旨)․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등을 역임했다. 1501년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

이당(李 塘)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지충(李之忠) 1509(중종 4)~1562(명종 17) 자(字)는 원로(元老), 호(號)는 삼우당(三友堂), 예조 판서 승건(承健)의 손자.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1537년(중종 32) 생원시(生員試) 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 교육에만 진력했다. 1553년(명종 8) 천거되어 동부 참봉(東部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이지행(李之行)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이지신(李之信) 1512(중종 7)~1581(선조 14) 자(字)는 원립(元立), 호(號)는 보진암(葆眞菴), 판서 승건(承健)의 손자, 심(諶)의 아들. 1531년(중종 26) 진사(進士)가 되고,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정원 정자(承政院正字)를 거쳐 1550년9명종 5) 전적(典籍)으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 記事官)을 겸하여「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성주(星州)에 기근이 들자 특명으로 목사(牧使)가 되어 진휼(賑恤)에 힘썼고, 그 후 호조․예조의 참의(參議)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한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이광춘(李光春) 조선(朝鮮) 때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이영(李 翎) 1615(광해군 7)~1637(인조 15) 자(字)는 거원(擧遠), 호(號)는 우송재(友松齋), 판결사(判決事) 유 겸(有謙)의 아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참봉(參奉)으로 아버지와 함께 강화(江華)에 들어가서 의병이 되어 광진(廣津)을 수비, 성이 함락되자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가족과 함께 길상산(吉祥山)으로 피란 도중 적을 만나 아버지와 함께 적과 대항,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를 업고 도망하다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아내 오씨(吳氏), 형수 김씨(金氏)도 자결했다. 충절(忠節)로써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이유겸(李有謙) 자(字)는 수익(受益), 호(號)는 만회(晩晦).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신녕현감(新寧縣監)이 된 뒤에 공조 좌랑(工曹佐郞)․함흥 판관(咸興判官)을 역임했고,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다. 아들 숙(䎘)의 공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 고양(高陽)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상(李 翔) 1620(광해군 12)~1690(숙종 16) 자(字)는 운거(雲擧)․숙우(叔羽), 호(號)는 타우(打愚), 시호(諡號)는 문목(文目), 참의(參議) 유겸(有謙)의 아들. 송시열(宋時烈)․김 집(金 集)의 문인. 유일(遺逸)로 벼슬에 올라 1661년(현종 2) 자의(諮議)․정언(正言)․지평(持平)․진선(進善)․집의(執義)를 역임했고, 숙종(肅宗) 때 형조(刑曹)와 호조(戶曹)의 참의(參議),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 전의(全義)의 뇌암사(雷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숙(李 䎘) 1626(인조 4)~1688(숙종 14) 자(字)는 중우(仲羽), 호(號)는 일휴정(逸休亭), 시호(諡號)는 충헌(忠獻), 참의(參議) 유겸(有謙)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48년 진사(進士)가 되고, 1655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찬(修撰)․응교(應敎)․집의(執義) 등을 역임했다. 1669년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거쳐 그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1675년(숙종 1) 서인(西人)이 실각하자 몰려났으나 뒤에 다시 등용되어 이조 판서를 지내고, 1687년(숙종 13)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대구(大邱)의 상덕사(尙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익(李 翊) 1629(인조 7)~1690(숙종 16) 자(字)는 계우(季羽), 호(號)는 농재(農齋),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호조 참의(戶曹參議) 유겸(有謙)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1657년(효종 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설서(設書)․사서(司書)를 거쳐 정언(正言)․사간(司諫)․동부승지(東部承旨)․대사간(大司諫)․이조 참의(吏曹參議)․원양도 관찰사(原襄道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숙종(肅宗) 때 대사헌(大司憲) 부제학(副提學)․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그 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거쳐 다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고,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수교집록(受敎輯錄)」을 편찬했다. 찬성(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만견(李晩堅) 조선조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이만성(李晩成) 1659(효종 10)~1722(경종 2) 자(字)는 사추(士秋), 호(號)는 귀락당(歸樂堂)․행호거사(杏湖居士),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우의정 숙(䎘)의 아들. 지평(持平) 영(翎)에게 입양. 1696년(숙종 22) 진사(進士)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고 전적(典籍)․좌랑(佐郞)을 거쳐 지평(持平) 겸 지제교(知製敎)․교리(校理)․응교(應敎)․동부승지(東部承旨)․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성(大司成)․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승진했다.

1716년(숙종 42)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경종이 즉위 하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오르고 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전직했다가 다시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영암(靈巖)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재(李 縡) 1680(숙종 6)~1746(영조 22) 자(字)는 희경(熙卿), 호(號)는 도암(陶庵)․한천(寒泉),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진사(進士) 만창(晩昌)의 아들.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로서, 찬집청 기사관(撰集廳記事官)을 겸하여「단종실록(端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707년 봉교(奉敎)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홍문과(弘文館)에 등용된 후 헌납(獻納)․북평사(北評事)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1711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서 문학(文學)․승지(承旨)․부제학(副提學)․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등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재직중 소론의 재집권으로 삭직(削職)되자 인제(麟蹄)에 들어가 성리학의 연구에 전심하였으며, 1725년(영조 1) 영조의 즉위로 노론이 재집권하자 부제학(副提學)에 복직되고 대제학(大提學)․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냈다. 조선 후기 성리학계의 대가로서 당시 낙론(洛論)의 대표적 학자로 일컬어졌으며,「율곡전서(栗谷全書)」를 산정(刪定)했다. 서화(書畵)에도 능했으며 용인(龍仁)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채(李 采) 1745(영조 21)~1820(순조 20) 자(字)는 계량(季良), 호(號)는 화천(華泉),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좌참찬(左參贊) 재(縡)의 손자. 1774년(영조 5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듬해 휘령전 참봉(徽寧殿參奉)이 되고, 사헌부(司憲府)와 호조․형조의 여러 벼슬을 거쳐 돈령부 주부(敦寧府主簿)․음죽 현감(陰竹縣監)을 지내다가 무고를 받고 파직되었다.

1790년(정조 14) 홍릉령(弘陵令)에 기용된 후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거쳐 그후 선산 부사(善山府使), 상주(尙州)와 충주(忠州)의 목사(牧使)를 지내고, 1800년(순조 즉위) 세자익위사 위수(世子翊衛司衛率)․사어(司禦) 등을 거쳐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으며, 이어 황주 부사(黃州府使)를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부총관(副摠管)을 겸했다.

이휘정(李輝正) 1760(영조 36)~? 초명은 광정(光正). 자(字)는 경복(景服).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채(采)의 아들. 화(禾)에게 입양(入養). 1813년(순조 1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검열(檢閱)․정자(正字)를 거쳐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지내고 1834년 진하 부사(進賀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대사헌(大司憲)․이조판서(吏祖判書)․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등을 역임했으며, 1850년(철종 1)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광문(李光文) 1778(정조 2)~1838(헌종 4) 자(字)는 경박(景博), 호(號)는 소화(小華), 시호(諡號)는 문간(文間), 호조 참판(戶曹參判) 채(采)의 아들. 1801년(순조 9) 사마시(司馬 試)에, 1807년(순조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809년(순조 29) 주서(注書)․검열(檢閱)․홍문관제학(弘文館副提學)등을 역임하고, 1829(순조 29) 정조사(正朝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형조․공조․이조의 판서(判書)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시문(時文)에도 뛰어났다.

이광정(李光正) 조선(朝鮮) 대 이조 판서(吏祖判書)를 역임했다.

이호준(李鎬俊) 조선 때 이조 판서(吏祖判書)를 역임했다.

이상적(李尙迪) 1804(순조 4)~1865(고종 2) 자(字)는 혜길(惠吉), 호(號)는 우선(藕船). 역관(譯官)을 지낸 집안의 출신으로 벼슬은 온양 군수(溫陽郡守)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2차에 걸쳐 역관(譯官)으로 중국에 왕래하며 중국 문인들과 교우를 맺고 중국에서 시문집(詩文集)까지 간행했다. 그의 시(時)는 서곤체시(西崑體時)에 능하여 섬세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었으며, 특히 헌종(憲宗)도 해송했으므로 그의 문집을「은송당집(恩誦當集)」이라고 이름했다.

그밖에도 고완(古琓)․묵적(墨滴)․금석(金石)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헌종 때 교정역관(校正歷官)이 되어「통문관지(通文館志)」「동문휘고(同文彙考)」「동문고략(同文考略)」등을 속간(續刊)했다.

이완용(李完用) 1858년(철종 9)~1926 자(字)는 경덕(敬德), 호(號)는 일당(一堂), 석준(奭俊)의 아들. 조선에서 검교(檢校)․수찬(修撰)․동학교수(東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