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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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04 13:49 수정일 : 2024-02-06 19:02

씨족(氏族)의 연원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씨족(氏族)이요 아득한 원대의 뿌리는 가락국(駕洛國)의 김수로왕과 아유타국의 공주 출신인 허황옥의 후예(後裔)로서 10명의 왕자 중에 두 명(둘째와 셋째)의 왕자에게 허황후의 요청에 따라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허()씨 성을 쓰게 되었으며 양천(陽川), 태인(泰仁), 하양(河陽), 김해(金海)등으로 관향(貫鄕)을 달리하고 있으나 모두가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후의 후손들이며 고려 중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출(傑出)한 인재(人才)를 많이 배출한 명문벌족(名門閥族)이었다.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선계(先系)는 가야계(伽倻系)로서 허기(許奇)가 서기 756년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에 신주(信州)에서 전방 최고사령판인 병마사대광(兵馬使大匡)으로 있을 때 당나라에서는 안록산(安綠山)의 반란으로 당나라 현종은 내륙인 서육(:成都)으로 피란하며 중국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때에 신라의 사신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양자강을 거슬러 성도(成都)에 이르러 현종을 호위하고 환도(還都)를 도움으로써 이를 가상히 여긴 당나라의 현종으로부터 시서(詩書)와 황제(皇帝)의 성()인 이성(李姓)을 사성(賜姓) 받아 무술(戊戌)년에 환국함에 따라 신라 경덕왕은 친히 공을 높이어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를 봉() 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인천 지방에 세거(世居)하면서 토호문신세력(土豪文臣勢力)으로서 복록가문(福祿家門)의 영달을 누리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10대인 허겸(許謙)공을 기일세조(起一世祖)로 하여 인천이씨세보(仁川李氏世譜)의 본관(本貫)조로 삼으니 본관도 지명에 따라(소성:邵城,경원:慶源,인주:仁州,인천:仁川)바뀌어 사용하게 되었으니 이분이 고려 현종 15년 서기 1024년에 증()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 上柱國 邵城縣 開國侯)에 추증(追贈)된 이허겸(李許謙) 시조공 이며 그 후손들이 고려를 반석 위에 세웠으며 140여 년간 왕손의 가계를 이으며 찬란한 꽃을 피웠다. 무신들의 반란(정중부의 난)으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역사는 바뀌어 조선조 500년 역사의 전면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지금의 시중공파(侍中公派), 공도공파(恭度公派), 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 충강공파(忠剛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본관지(本貫地) 연혁

인천(仁川)은 경기도 강화만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소성현(邵城縣)으로 고쳐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에는 수주(樹州)에 붙였고, 숙종 때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씨의 고향이므로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했으며, 인종 때는 순덕왕후(順德王后) ()씨의 고향인 까닭에 인주(仁州이라 개칭, 공양왕 2년에 경원부(慶源府)가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에 인천(仁川)이라 칭하였다가 세조 7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향(外鄕)인 까닭에 도호부로 승격했다.

그러나 역사상으로 가장 중요시되었던 적은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어 문호가 개방된 때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성씨로는 이()()()()()()()()씨 등이 있었다.


주요 세거지(世居地)와 변천

문충공(文忠公) 이공수(李公壽)의 묘지명(墓地銘)에 의하면, 공의 성은 이()씨이고 선조는 신주(信州)(황해도 신천(信川)의 옛 이름) 사람이다. 공의 13대조 병마사대광(兵馬使大匡) ()가 소성수(邵城守)로서 그곳에서 살았다는 구절이 있다.

소성(邵城)은 인천(仁川)의 옛 이름이다. 따라서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상계조(上系祖) 이 허기(許奇) 때부터 소성에서 세거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인천시(仁川市) 남구(南區) 문학산(文鶴山) 아래 일대다. 3세손 이자연(李子淵)이 경원군 개국공(慶源郡 開國公)이 되고, 식읍(食邑)3천호가 내렸고 4세손 이정(李頲) 역시 경원백(慶源伯)이 되고 9세손 이장용(李藏用)도 경원군개국백(慶源郡開國伯)이 되었으므로 그 곳을 세거지로 삼았다. 그 뒤 자손이 번창, 각지에 산거(散居)하여 8세손인 시중공(侍中公) 이작신(李作臣)의 후손은 인천(仁川)합천(陜川)영동(永同)영평(永平)신계(新溪)안성(安城)보은(報恩) 등지에 살고 있으며, 14세손 공도공(恭度公) 이문화(李文和)의 후손은 대구(大邱)용인(龍仁)삼가율리(三嘉栗里)경산(慶山)진해(鎭海)함안(咸安)의령(宜寧)청양(靑陽)안의(安義)장흥(長興)부여(扶餘)김천(金泉)경주(慶州)가산(嘉山)정주(定州)황해도(黃海道) 일원에서 산거하고, 7세손 쌍명재공(雙明齋公) 이인로(李仁老)의 후손(後孫)은 경산(慶山)의령(宜寧)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또 인천군(仁川君) 이만영(李萬英)의 손자 충강공(忠剛公) 이징옥(李澄玉)의 후손이 경주(慶州)에서 세거하고 있다.


씨족사(氏族史)의 개요

고려조 470년을 통해서 인천이씨(仁川李氏) 일문처럼 번창하였고 영화를 누렸던 성씨는 드물 것이다. 많은 명공거경의 배출은 물론 국구(國舅)가 되어 자제(子弟)는 요직에 출사(出仕)하여 국권을 장악하고, 여러 명의 후비(后妃) 귀빈(貴賓)이 배출되어 권문세가와 혼인을 통해 인척을 맺음으로써 정종(靖宗)에서 인종(仁宗) 말에 이르기 까지 벌족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이자연(李子淵)은 현종 15년 문과에 급제,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딸 셋이 모두 문종비(文宗妃)가 될 만큼 현직(顯職)에 있었다. 고려 때의 풍습은 인척간의 혼인이 보편스럽게 성행되었기에 오늘의 시각에서 평가할 일은 아니다. 그의 외손은 순종선종숙종과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있고, 그의 큰 아들 정()의 딸이 원신궁주(元信宮主)가 되고 그는 서경유수(西京留守), 태사시중경원백(太師侍中慶源伯)이 되고, 또 여섯째아들 호()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증경원백(贈慶源伯)이며 그의 딸이 장경궁주(長慶宮主)가 되었다.

또 이호(李顥)의 아들 이자겸(李資謙)도 인종조(仁宗朝)에 태사중서령(太師中署令)에 올랐으며 소성후한양공(邵城候漢陽公)에 책봉된 인물로, 딸 셋이 인종비(仁宗妃)가 되었으나 그 뒤 인종(仁宗)의 장인의 지위에서 전권(專權)을 행사하다가 지미(之美)공의(公儀)지보(之甫) 세 아들과 더불어 숙청당하고 그 직계 후손(後孫)은 권좌(權座)에서 물러나 가운이 기울게 되었다.

한편 이자연(李子淵)의 동생 이자상(李子祥)은 벼슬이 사재경에 증직되었고, 아들 이예(李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현공(文顯公)이며 딸이 선종비(宣宗妃) 정신현비(貞信賢妃)가 되었으며 손자 이공수(李公壽)는 문장이 뛰어난데다 충성심이 놀라웠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손 이지저(李之氐)는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이지저(李之氐)9세손 이문화(李文和)는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증직되고 시호는 공도공(恭度公)이며 조선조(朝鮮朝)의 명신(名臣)이다. 그 아들 6형제가 대신의 지위에서 현달했으며 그 자손(子孫)이 인천이씨(仁川李氏)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靑蓮/臥陶軒 이인로(李仁老)는 신종조와 고종조의 출사인(出仕人)이면서 벼슬이 좌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까지 올랐지만 문필로써 더욱 추앙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예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량공(文良公) 이오(李䫨)의 증손이다. 그 밖에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종문(宗門)을 빛낸 인물로서 9세손 이장용(李藏用)은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판병부사문하시중(判兵部事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진공(文眞公)이다. 원나라에 들어가 외교수완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문장경술음률에도 달인이었다고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려조(高麗朝)의 번성과는 달리 조선조(朝鮮朝)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사회각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끊임없이 배출하고 있는 성씨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역대 주요 인물-인천이씨조상인물

고려조와 조선조

이허겸(李許謙)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소성백(邵城伯) 득성조 기(得姓祖 奇)10세손으로 신라 말에 태어나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손녀를 맞아드려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을 낳으니 이분의 세 따님이 8대 현종(顯宗)에게 납비되어 맏이 원성태후(元城太后)덕종(德宗)과 정종(靖宗) 두 왕을 둘째 원혜태후(元惠太后)는 문종(文宗) 탄생하여 왕실의 안정을 되찾았다.

이에 따라 현종은 왕비의 아버지인 김은부(金殷傅)에게 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 안산국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 守司空 上柱國 安山國開國侯 食邑一千戶) 어머니를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에 외조인 이()에게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尙書左僕射 上柱國 邵城縣開國候)를 증직하고 식읍일천오백호(食邑一千五百戶)를 내렸.

 

이한(李 翰)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문경(文景)

이진(李 瑱) 우복야(右僕射)

이자연(李子淵) 문하시중(門下侍中)():장화(章和)

이눌(李 訥) 대장군(大將軍)

이자상(李子祥) 증상서우복야(贈尙書右僕射)

이성간(李成幹) 상장군 겸 검교태자소보(上將軍 檢校太子小保)

이총현(李聰顯)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정(李 頲) 태사시중(太師侍中)경원백(慶源伯)():정헌(貞憲)

이소현(李韶顯) ():혜덕왕사(惠德王師)

이적() 전중소감(殿中少監)

이석(李 碩) 공부상서(工部尙書)평장사(平章事)

이의() 춘천도감창사(春川道監倉使)

이호(李 顥) 수사공 문하시랑평장사 태자태부 상주국 경원백()경덕(景德)

이예(李 預) 중서시랑(中書侍郞)평장사(平章事)():문현(文顯)

이오(李 䫨) 태사중서시랑평장사(太師中書侍郞平章事)():문량(文良)

 

이자겸(李資謙) (1060-1126) 조선국공(朝鮮國公)/한양공(漢陽公)중서령 자연의 손자, 경원백

호의 장자, 문음으로 합문지후에 올랐으며, 47세인 1106년(睿宗 元年)에 시어사중승(試御使中丞), 2년 후에는 급사중(給事中: 從四品)이 되었는데 같은 해에 딸이 睿宗의 왕비로 들어감에 따라 50세에 예빈경(禮賓卿: 從三品)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 從二品)로 재상의 반열에 들었다. 그 후 어사대부 (御史大夫: 正三品), 수사공(守空) 병부상서(兵部尙書) 판삼사사(判三司事: 從 一品), 상서좌복야(尙書左鰒射: 正二品), 55세 때인 1114년(睿宗9)에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겸 서경유 수사(西京留守使)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수태위(守太衛), 판병부사(判兵部事), 판이부사(判吏部事), 판서북면병마사겸중군병마사(判西北面兵馬使兼中軍兵馬 使)가 더해지고 1121년엔 소성현개국백에 봉했다. 7살에 태자로 책봉된 외 손자를 집으로 대려다 金端 등 과 같은 박학다문(博學多聞)한 8사람들로 하 여금 제왕(帝王)에 필요한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122년에 예종이 승하 (昇遐)니 고명(顧命)으로 왕위를 넘보던 왕의 아우들을 물리치고 14살의 어 린 왕자를 받들어 임금의 위에 오르게 했다. 그 공으로 수태사중서령소성후(守太師中書令邵城侯)에 올랐으며 곧이어 한양공(漢陽公)에 책봉되었다. 임금의 숙부들의 편에서 왕위를 위협했던 조선국공의 반대세력은 이번에는 이간책을 써서 음양가(陰陽家)들로 하여금 목자위왕(木子爲王:이 씨가 왕이 된다)란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하고 임금을 현혹하니 이에 넘어간 임금은 하급무장들을 부추켜 외조 조선국공을 제거하기 위하여 친위 쿠테다를 일으켜 무리 하에 섭정인 외할아버지에게서 왕권을 회수하고는 이는 외할아버지가 역모를 획책 했기 때문에 대의멸친(大義滅親)하였다고 승리자로서 자신의 입장만을 역사에 기록 하도록 강요했다. 이 사건이 이른바 이자겸의 역모사건이다. 비록 일본사람 이긴 하나 인주이씨(仁州李氏)를 연구한 경성제대교수(京城帝大敎授) 후지다료사꾸(藤田亮策)는 그의 연구논문(硏究論文)에서 이자겸의 역모사건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소설 즉 불 허상에 불과 하다. 경솔 하고 깊은 생각이 없는 인종(仁宗)은 소인배의 말에 현혹되어 무모한 계획에 따라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첫 번은 실패했고 그 후 두 달이지나 제2차 쿠데타에는 외할아버지인 조선국공이 스스로 잡혀 주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급무장들에 의지하여 이룬 이 사건은. 당사자인 인종의 아들에게 되돌아와 의종(毅宗)은 하급무장들이 주축이 된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란(武臣亂)으로 퇴위되면서 고려의 왕들은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이자인(李資仁)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이자의(李資義) 호부상서(戶部尙書)

이자충(李資忠) 상서병부랑중(尙書兵部郞中)

이자례(李資禮) 좌사낭중(左司郞中)

이자지(李資智) 예빈경(禮賓卿)

 

이자현(李資玄) 대악서승(大樂署丞)∙시(諡):진락(眞樂)

(1061-1125) 자 진정(眞精) 호 식암(息菴), 희이자(希夷子) 청평거사(淸平居士) 시호는 진락(眞樂) 용모가 크게 빼어나고 성정은 총기 있고 민첩했으며 1083년(문종 37)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더니 사직하고 강원도 춘천의 청평산에 들어가 참선의 본체를 터득 선교일치를 실천하면서 소식포의(蔬食布衣)로 도를 즐기며 평생을 마쳤다. 예종은 여러번 대신을보내 차.향.금.비단을 선사하고 조서를 보내어 불렀으나 이자현은 말하기를 "제가 서울의 성문을 떠날 때에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하였기 때문에 상감의 명령을 받들 길이 없나이다"라고 사양 하였으나 거듭 왕의 청으로 잠시 삼각산 청량사에 머물러, 왕이 내왕하며 선학의 교리를 질문하였다. 이에 이자현이 마침내"심요"한권을 저술하여 올리고 산으로 돌아왔다. 또한 이자현은 왕의 명을 받들고 산중에 나아가서 특별히 능암강회(楞嚴講會)를 개최하니, 여러곳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강의를 들었다.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임금은 시호를 진락공이라고 내렸으며 저술한 문장은 추화백락공락도시(追和百樂公樂道詩), 남유시(南遊詩), 선기어록(禪機語錄), 가송(歌頌), 포대송(包袋頌),등이 있다.

후일 퇴계선생이 청평사(淸平寺)를 지나면서 그의 청풍고절(淸風高節)을 찬양하였다.

이자덕(李資德) 금자광록대부평장사(金紫光祿大夫평장사)():장의(莊懿)

이자량(李資諒) 호부시랑(戶部侍郞)

이자함(李資諴) 호부랑중(戶部郞中)

이자원(李資元)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예빈경(禮賓卿)

 

이공수(李公壽) 문하시중상주국추성위사동덕공신(門下侍中上柱國推誠衛社同德功臣)∙시(諡): 문충(文忠) (1062-1137) 字 원로(元老) 초명(初名) 수(壽) 1086년 을과(乙科)로 과거급제, 궁전고판관(科擧及第, 弓箭庫判官)으로 벼슬길에 들어 직한림원(直翰林院), 좌습유(左拾遺)와 지제고(知制誥),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거처 1106년(숙종 11)에 예부(禮部)와 좌사에서 낭중(郎中), 비서감(秘書監)으로 옮겼으며 이어 사제소경에 지병 부사를 겸했다. 1109년(睿宗 4)에 영연전학사(英延殿學士)에 올랐으며 예부시랑을 거처 다음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위위경(衛尉卿), 비서감(秘書監) 겸 지형부사(知刑部事)1111년(예종 6) 국자감(國子監) 대사성(大司成) 겸 직문하성(直門下省),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공부이부상서(工部吏部尙書). 1119년(睿宗 14)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1124년(인종 2) 검교사공(檢校司空) 수사공(守司空)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사도(司徒)를 더했다. 다음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판형부사(判刑部事), 1126년에 추충위사가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보판이부사(推忠衛社功臣 加 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守太保 判吏部事)곧이어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上柱國)이 더해졌고 2년 후인 1128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1131년 치사(致仕)했다. 타고난 자질이 굉후(閎厚), 동정(動靜)에 매우 신중하였다.

이언림(李彦林)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이식(李 軾)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지정(李之正) 전중소감(殿中少監)

이지화(李之和) 상의봉어(尙衣奉御)

이지미(李之美) 추밀원사(樞密院使)

이공의(李公儀) 형부시랑(刑部侍郞)

이지언(李之彦) 공부시랑(工部侍郞), 어사잡단(御使雜端)

이지보(李之甫) 호부랑중(戶部郞中), 지다방사(知茶房事)

이지윤(李之允)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이지원(李之元) 합문지후(閤門祗侯)

이지저(李之氐) 정당문학(政當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문정(文正)

이지간(李之幹) 양온령동정(良溫令同正)

이지무(李之茂) 문하시랑 동 중서시랑평장사(門下侍郞 同 中書侍郞平章事)

이지혜(李之惠) 천관사 성중대사(天冠寺 性重大師)

이지의(李之懿) 상사직장(尙舍直長)

이지철(李之喆) 강정도감판관(剛正都監判官)

이광진(李光瑨) 참지정사(參知政事)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저의(貞懿)

이응구(李應球)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대부소경(大府少卿)

이응장(李應璋) 지첨사부사(知詹事府事)

이혁연(李奕筵)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간(貞簡)

이세흥(李世興) 한림원대제학(翰林院大提學)

이세장(李世長) 수사공 상서좌복야 태학사(守司空 尙書左僕射 太學士)

이세영(李世延) 형부시랑(刑部侍郞)

 

이인로(李仁老)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강좌칠현(江左七賢)

(1152-1220) 초명 得玉 字 眉叟 호 靑蓮/臥陶軒, 28세가 되던 1180년 봄에 장원급제, 1182년(명종 12) 사신 병부시랑(兵部侍郞) 최영유(崔永濡)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금나라를 다녀와 계양(桂陽)의 서기가 되었고 곧 한림원에 들어오니 거의 모든 사소(詞疏)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한림원(翰林院)과 고원(誥院 : 藝文館)에서 14해를 보내는 동안 문장이 샘물 솟듯 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으니 그 때 사람들이 이걸 가르쳐 복고(腹藁)라고 하였고 당대 명유인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등과 망년우를 맺고 술과 시로 서로를 위로하니 세인들이 강좌칠현 (江左七賢)에 비견하였다. 또 한때는 최당(崔讜) 등 9인(최당, 장자유, 이준창, 이세장, 백광신, 고영중, 현덕수, 함순, 이담지)의 기로회(耆老會)에 끼어 연령(年齡)으로는 맞지 않으나 이 여러 노인들 틈에 놀면서 시문 100여수를 지어 좌중을 즐겁게 하였다. 여러 번 옮겨 신종조(神宗朝)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고 고종초(高宗初)에 비서감(秘書監)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겸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은대집(銀臺集), 쌍명재집(雙明齋集), 파한집(破閑集) 등이 있으나 현제는 파한집과 동문선(東文選)에 사, 부, 고시, 율시, 절구, 제고, 표전, 서, 발, 제문(辭, 賦, 古詩, 律詩, 絶句, 制誥, 表箋, 序, 跋, 祭文) 등 107편이 수록 되어 전해지고 있다. 정(程), 양(穰), 온(榲)의 3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서자 세황(世黃)도 파한집(破閑集)을 간행하면서 발문을 남겼을 정도로 문재가 대단했다.

이간(李 侃) 평주목사(平州牧使)

이정(李 程) 공부상서(工部尙書)

이온(李 榲) 예부시랑(禮部侍郞)

이경(李 儆)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작신(李作臣)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장용(李藏用) 판병부사문하시중(判兵部事門下侍中)∙시(諡):문진(文眞)

(1201-72) 초명 인기(仁祺) 자 현보(顯甫) 호 약촌(藥村), 고종 때 과거급제, 서경사록(科擧及第, 西京司祿)이 되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교서랑(校書郞) 겸 직사관, 국자대사성, 추밀원승지,(直司館, 國子大司成, 樞密院承旨), 1156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처 1258년(고종 45)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재상(宰相)의 반열에 올랐으며 1260년(元宗 元年)에 참지정사(參知政事) 1262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이듬해 수태부 판병부사 태자태보(守太傅 判兵部事 太子太保)를 더했고 1264년(원종 5)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 1267년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고 다음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1271년 벼슬에서 물러나 다음해에 졸했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 한 시대의 큰 글이 그의 수중에서 많이 나왔다. 또한 몽고와의 승산 없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왕과 권신들의 주저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원종임금의 원나라 행을 성사시켰으며 자신이 임금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와 독대 조금도 굴함이 없이 당당히 고려의 입장을 밝혀 첫째, 당시 전쟁종식의 걸림돌이던 출육(임금의 거처를 강화 섬에서 개성으로 옮기는 것) 문제를 해결하였고, 둘째 원나라가 고려에 요구한 막대한 군사(軍士)와 물자(物資)의 징발(徵發)을 줄여 고려백성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로 낮추어 줄 것 등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40여년 전쟁으로 극도로 궁핍하여 하루살이가 힘든 백성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협상과정에서 공이 보여준 높은 애국심, 깊은 학문 그리고 고매한 인격은 마침내 원나라 황제와 대신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원의 세조는 두 차례나 공을 위하여 연회를 열어 주었다. 한사람의 손실 없이 세치의 혀만으로 이루어낸 성과가 백만 대군으로 거둔 수많은 큰 승리보다도 더 값진 것이다.

이영(李 潁)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학사승지(樞密院副使, 禮部尙書, 翰林學士承旨)

이점(李 漸)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

이온(李 榲) 중현대부(中顯大夫)

이극명(李克明) 공조판서(工曹判書)

이원굉(李元紘) 정당문학(政當文學)연산군(燕山君)

이육 보은현감(報恩縣監)

이익세(李益歲) 중서사인지제고(中書舍人知制誥)

이춘년(李椿年) 종부령(宗簿令)

이원집(李元緝)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이관(李 灌)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이심(李 深) 전공판서(典工判書)

이활(李 活) 이조좌랑(吏曹左郞)

이양(李 穰) 중추부사(中樞府使)

이현좌(李賢佐) 대광보국숭록대부 경성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慶城府院君)

이만영(李萬英) 이조판서 인천군(吏曹判書 仁川君)

이조(李 藻) 중랑장, 지군사(中郞將,知郡事)

이달(李 達) 한성판윤, 호조참판(漢城判尹, 戶曹參判)

이세정(李世楨) 군수(郡守)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이극성(李克誠) 수의부위(修義副尉)

이전수(李全粹)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이문화(李文和) 숭정대부대제학(崇政大夫大提學))∙시(諡):공도(恭度)

(1358-1414) 字 백중(伯中) 호 오천(烏川), 1380년(우왕 6) 문과장원(文科壯元), 우헌납(右獻納)과 예문응교(藝文應敎)를 맡았으며, 조선 태조(太祖)의 혁명(革命)후 고려의 구신(舊臣)들에 의해 신왕조(新王朝)를 도와주도록 선발된 엘리트 가운데 한사람, 1392년에 태조(太祖)에 의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1395년(태조 4)에 상시(常侍), 좌승지(左承旨)를 거처 3년 후 임금의 비서실장격인 도승지(都承旨)에 올라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정종(定宗) 2년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를 거처 태종 초 10년간 사평우사, 예문관대제학, 경상도관찰출척사,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의정부문학(議政府文學), 사평부우사(司平府右使), 대사헌(大司憲), 예조판서(禮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등 실권을 가진 직책을 두루 역임하고 다시 예문관대제학으로 돌아 왔으며 11년 개성유후사(開城留後使)로 나갔다가 14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향년 57세로 졸하니 임금이 애도를 금치 못하여 3일 동안 조회를 폐지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와 영의정(領議政)을 증직(贈職)하고 공도(恭度)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효인(李孝仁) 호조판서(戶曺判書)

이효의(李孝義) 공조판서(工曹判書)

이효례(李孝禮) 예조판서(禮曹判書)

이효지(李孝智) 형조판서(刑曹判書)

이효신(李孝信) 예조판서(禮曹判書), 판돈령(判敦寧)

이효상(李孝常) 지돈령(知敦寧)():안정(安靖)

이무창(李茂昌) 홍려소경(鴻臚少卿)

이계장(李繼長)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문명(李文命) 광록소경(光綠少卿)

이거(李 琚) 호군 증예조판서(護軍 贈禮曹判書)

이전생(李全生)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추() 보은현감(報恩縣監)

이백장(李栢長) 사직(司直)

이회장(李檜長) 부사직(副司直)

이계우(李繼祐) 현령(縣令)

이소인(李紹仁) 직장(直長)

이규경(李珪卿) 직장(直長)

이구경(李球卿) 숙천부사(肅川府使)

이선경(李璿卿) 상호군(上護軍)

이극명(李克明) 청백리(淸白吏)

이성해(李成諧) 직제학(直提學)

이거경(李居敬) 문과(文科)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기자(李起紫) 전력부위훈련봉사(展力副尉訓練奉事)

이송(李 松) 진사(進士)

이승원(李承元) 진사(進士)

이문영(李文英) 장사랑(將仕郞)

이현좌(李賢左) 조식문인(曹植文人)

이현우(李賢佑) 문행(文行)

이적(李 績) 생원진사(生員進士)한훤당문인(漢喧堂門人)

이성동(李成童) 대사간(大司諫))

이교(李 郊) 증승의좌통례(贈承議左通禮)

이장형(李長馨) 동몽교관(童蒙敎官)

이명세(李命世) 진사(進士)

이원형(李遠馨) 동몽교관(童蒙敎官)

이원성(李元盛)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이원좌(李元佐) 증한성우윤(贈漢城右尹)

이문범(李文範) 증사도시첨정(贈司導侍僉正)

이충범(李忠範)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시신(李時愼) 증봉직랑사복사판관(贈奉直郞司僕寺判官)

이시민(李時敏) 진사(進士)

이시립(李時立) 강진현감(康津縣監)

이주(李 輈) 진사(進士), 임진창의공신(壬辰倡義功臣)

이연(李 衍) 진사(進士)

이태연(李泰顯) 참판(參判)

이상운(李尙運) 문과(文科)

이휴복(李休復) 순천군수(順天郡守)진무공신(振武功臣)봉인원군(封仁原君)

이만성(李晩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재호(李在昊)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이승(李 昇) 진사(進士)

이가(李 岐) 거제, 창원 대도호부사(巨濟,昌原大都護府使)

이장(李 嶂) 무과(武科)

이후삼(李垕森) 증비서원승(贈秘書院承)

이충립(李忠立) 첨절제사(僉節制使)

이신립(李信立) 강동현감(江東縣監)

이맹(李 孟) 수문장(守門將)

이승원(李承元) 진사(進士)

이종인(李種仁)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익도(李益道) 단천만호(端川萬戶)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이수원(李壽元) 이인좌(李麟佐) ()때 의병창솔(義兵倡率)한 사의사(四義士)

이수윤(李壽胤) 이인좌(李麟佐) ()때 의병창솔(義兵倡率)한 사의사(四義士)

이희성(李希聖) 증공조참판(贈工曹參判)

이양채(李亮采)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약채(李若采)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원섭(李元燮) 진사(進士)

이민기(李敏琦) 생원(生員)

이부연(李復淵) 진사(進士)

이석룡(李錫龍) 증사헌부감찰(贈司憲府監察)

이석규(李錫奎) 진사(進士)

이화상(李華祥) 진사(進士)

이원승(李源昇) 진사(進士)

이태현(李泰鉉) 한산군수(韓山郡守)

이상구(李相求) 진사(進士)

이상교(李相敎) 진사(進士)

이영수(李永壽) 효행(孝行)

이병운(李柄運) 진사(進士)

이병규(李柄逵) 진사(進士)

이병철(李柄喆) 유문행(有文行)

이세연(李世然) 성균박사(成均博士)

이시연(李時然) 문행(文行)

이희석(李僖錫) 진사(進士)

이수하(李洙夏) 문행(文行)

이만영(李萬英) 판서(判書)

이전생(李全生) 판서(判書)

이징석(李澄石) 양산군(梁山君)

 

이징옥(李澄玉) 절제사(節制使), 1416년(태종 16) 무과에 장원(武科壯元)하고 사복소윤(司僕少尹)이 되더니 세종 6년 함경도 경원첨절제사(慶源僉節制使), 그 다음해 절제사(節制使), 9년에 경원절제사 겸 동지총제(同知摠制), 다음해 경원병마사(慶源兵馬使), 회령부사(會寧府使), 경원등지(慶源等地)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14년 참판(參判)으로 내직에 들어왔으나 19년 다시 경원절제사가 되었더니 자헌대부(資憲大夫)를 더했다. 21년 사직하니 경상도좌 도절제사(慶尙道左道節制使)에 임명, 다음해 중추원사 겸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 都節制使), 25년과 26년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와 경상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 등을 거처 1451년(문종 원년)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 都節制使)로 돌아가 일대의 야인을 제압하는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가 가자(加資)된다. 그러나 계유정난(癸酉靖難)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반대세력인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정분(鄭苯) 등을 제거한 사건에 연루되어 같이 죽음을 당했다.

이징규(李澄圭)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영산군(靈山君)

이경희(李慶熙) 한말독립투사(韓末獨立鬪士)

 

이장희(李章熙) (1900∼1929) 본명은 양희, 아호는 보월, 문단의 교우관계는 양주동, 유엽, 김영진, 오상순, 백기만, 이상화 등이며 실바람 지나간 뒤, 새한마리, 불놀이, 무대, 봄은 고향이로다 , 신민, 여명, 신여성, 여시, 생장, 동경, 석양구, 청천의 유방, 하일소경, 봄철의 바다 등 30여 편의 시 작품과 톨스토이 원작의 번역소설 장구한 귀양 등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 서구문예사조에 온통 휩싸여 퇴폐성이나 감상성이 지나치게 노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섬세한 감각과 이미지의 조형성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뒤를 이어 활동한 정지용과 함께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시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등과인명(登科人名)

고려조

예부등과(禮部登科)

이자연(李子淵) : 현종조(顯宗朝)

이예(李 預) : 문종조(文宗朝)

이자인(李資仁) : 문종조(文宗朝)

이자현(李資玄) : 문종조(文宗朝)

이공수(李公壽) : 선종조(宣宗朝)

이지저(李之氐) : 예종조(睿宗朝)

이인로(李仁老) : 명종조(明宗朝)

이문화(李文和) : 우왕조(禑王朝)

조선조

문과(文科)

이관(李 灌) : 이서참판(吏書參判)

이효인(李孝仁) : 호조판서(戶曺判書)

이효례(李孝禮) : 예조판서(禮曹判書)

이거경(李居敬) : 사성(司成)

이활(李 活) : 부사(府事)

이효지(李孝智) : 영천군수 동지돈령부사(永川郡守 同知敦寧府事)

이효의(李孝義) : 진무사(鎭撫使)

이효신(李孝信) : 판부사(判府事)

이효상(李孝常) : 지돈령(知敦寧)

이성해(李成諧) : 직제학(直提學)

이전수(李全粹) : 직제학(直提學)

이성동(李成童) : 대사간(大司諫)

이충절(李忠節) : 부사(府事)

이시립(李時立) : 군수(郡守)

무과(武科)

이귀경(李貴慶) : 북병마사(北兵馬使)

이산두(李山斗) : 첨사(僉事)

이대(李 岱) : 첨사(僉事)

이달(李 達) : 진관(鎭管)

이우(李 遇) : 사직(司直)

이징옥(李澄玉) : 절제사(節制使)

이여신(李汝愼) : 참군(參軍)

이여상(李汝祥) : 군수(郡守)

이숭곤(李崇坤) : 군수(郡守)

이여운(李汝惲) : 수문장(守門將)

이여순(李汝恂) : 진관(鎭管)

이당(李 瑭) : 현감(縣監)

이덕길(李德吉) : 부사(府事)

이유길(李維吉) : 선전관(宣傳官)

이양엽(李陽燁) : 부장(部將)

이원근(李元根) : 진관(鎭管)

이호겸(李好謙) : 선전관(宣傳官)

이요달(李堯達) : 판관(判官)

이휴복(李休復) : 군수(郡守)

이신(李 晨) : 판관(判官)

이기(李 岐) : 부사(府事)

이의립(李義立) : 참판(參判)

이원량(李原樑) : 선전관(宣傳官)

이신립(李信立) : 현감(縣監)

이원립(李元立) : 통정대부(通政大夫)

이맹(李 孟) : 수문장(守門將)

이충립(李忠立) : 방어사(防禦使)

이식인(李植仁) : 선전관(宣傳官)

이맹도(李孟道) : 만호(萬戶)

이언형(李彦馨) : 사과(司果)

이종인(李種仁) : 만호(萬戶)

이인수(李仁壽) : 현감(縣監)

이인귀(李仁龜) : 선전관(宣傳官)

이규화(李奎華) : 절형장군(折衡將軍)

이연(李 演) : 직장(直長)

이방현(李邦顯)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원발(李源發) : 선전관(宣傳官)

이채근(李采根) : 첨지충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명징(李明徵) : 선전관(宣傳官)

이팽석(李彭錫) : 사과(司果)

조선조 급제자 정록

이관(李 灌) : 태조(太祖) 2무시(武詩)진사(進士)

이효례(李孝禮) : 세종(世宗) 1증광시(增廣試)진사(進士)

이활(李 活) : 세종(世宗) 5식년시(式年詩)진사(進士)

이효신(李孝信) : 세종(世宗) 20식년시(式年詩)정과(丁科)

이전수(李全粹) : 세종(世宗) 21친시(親試)병과(丙科)

이성동(李成童) : 연산(燕山) 1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이진현(李秦顯) : 숙종(肅宗) 13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이상운(李尙運) : 영조(英祖) 32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이약채(李若采) : 영조(英祖) 37정시(庭試)을과(乙科)

이휴복(李休復) : 선조(宣祖) 39식년시(式年試)무과(武科)

공신(功臣) : 이휴복(李休復) 인조(仁祖) 이괄난토평진무공신(李适亂討平振武功臣)

절의(節義) : 이성동(李成童) 중종(中宗) 기묘신사사화(己卯辛巳士禍)

명륜(明倫) : 효행(孝行))이재연(李在年)

왕비(王妃) : 인예왕후(仁睿王后)(고려 문조비이자연(李子淵)의 딸)

; 인경왕후(仁敬王后)(고려 문종비이자연(李子淵)의 딸)

; 인절왕후(仁節王后)(고려 문종비이자연(李子淵)의 딸)

;;원신궁주(元信宮主)(고려 선종비이 정(李 頲)의 딸)

; ;사숙궁주(思肅宮主)(고려 선종비이 석(李 碩)의 딸)

; 장경궁주(長慶宮主)(고려 선종비이 호(李 顥)의 딸)

; 정신왕후(貞信王后)(고려 선종비이 예(李 預)의 딸)

; 문경왕후(文敬王后)(고려 예종비이자겸(李資謙)의 딸)

; 연덕궁주(延德宮主)(고려 인종비이자겸(李資謙)의 딸)

: 복창원주(福昌院主)(고려 인종비이자겸(李資謙)의 딸)

문집(文集) : 이인로(李仁老) : 은대집(銀臺集) 20, 후권(後卷) 4, 쌍명집(雙明集) 3권 파한집(破閑集) 3,홍도정부(紅桃井賦) 1, 추화백약공악도 시(追和百藥公樂道詩) 1

:이자현(李資玄) : 남유(南遊) ()1, 선기어록(禪機語錄)1, 가송(歌頌) 1권 포포송(布褒頌) 1

이장용(李藏用) : 선가종파도(禪家宗派圖), 화엄추동기(華嚴錐洞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