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은진임씨 시조(恩津林氏),임성근(林成槿),은진임씨조상인물,임훈(林薰)

작성일 : 2017-05-07 15:30 수정일 : 2018-07-31 11:5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은진임씨(恩津林氏)는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청랑(朝請郞)․태상 박사(太常博士)를 역임한 임성근(林成槿)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은진(恩津)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은진(恩津)은 충청남도(忠淸南道) 논산군(論山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덕은(德恩)․시진(市津) 두 현의 합명인데, 덕은현(德恩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덕근군(德近郡)을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덕은(德恩)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덕은(德恩)으로 개칭하였다.

시진현(市津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가지 내현(加知奈縣 : 일명 加乙乃․薪浦)인데 경덕왕이 시진으로 고치고 덕은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덕은과 시진을 모두 공주(公州)에 편입시켰으며, 1307년(태조 6)에 덕은․시진을 합쳐 덕은(德恩)을 다시 설치하였다. 세종(世宗) 때 은진(恩津)으로 고쳤고 인조(仁祖) 때는 이성(尼城)․연산(連山)과 합(合)하여 현(縣)이 되었다가 1656년(효종 7)에 분리하였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논산군(論山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논산군(論山郡) 은진면(恩津面)으로 남아있다.

시조 임성근(林成槿)의 아들 정(挺)이 봉선대부(奉善大夫)로 낙안 군사(樂安郡事)를 역임하였고, 손자식(湜)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증손 천년(千年)이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광주 목사(光州牧使)와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한 훈(薰)과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지낸 훈의 동생 운(芸)이 이름났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진임씨(恩津林氏)는 남한(南韓)에 11,4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은진임씨조상인물

임정(林 挺) 조선조에 봉선대부(奉善大夫)로 낙안 군사(樂安郡事)를 역임하였다.

임식(林 湜) 조선(朝鮮)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였다.

임천년(林千年) 조선조(朝鮮朝)에 사온서 직장(司 署直長)에서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으로 전직, 선무랑(宣務郞)에 올라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역임하였다.

임자형(林自亨) 자(字)는 중보(仲甫), 호(號)는 창망(蒼茫). 조선(朝鮮)때 제3군진무소(第三軍鎭撫所)의 훈련 참군(訓鍊參軍)을 역임하였다.

임석번(林碩蕃) 자(字)는 현보(賢甫), 호(號)는 정제(靜齊). 조선조(朝鮮朝)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였다.

임득번(林得蕃) 자(字)는 연경(衍卿), 호(號)는 석천(石泉).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고, 벼슬에 뜻이 없어 사림(士林)에 묻혀 학문을 익히고 숭조(崇祖)의 법도를 따른 덕망높은 학자였다.

임훈(林 薰) 1500(영산군 6)~1584(선조 17) 자(字)는 중성(仲成), 호(號)는 갈천(葛川). 고사옹(枯査翁)․자이당(自怡堂), 시호(諡號)는 효간(孝簡), 진사(進士) 득번(得蕃)의 아들. 1540년(중종 35)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553년(명종 8)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이 되고, 제용감(濟用監)과 전생서(典牲署)의 참봉(參奉)등을 역임했다.

1566년(명종 21)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언양 현감(彦陽縣監)에 발탁되고,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거쳐 광주 목사(光州牧使)․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지낸 뒤에 1582년(선조 15)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향리(鄕里)에서 여생을 보냈다. 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안의(安義)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임운(林 芸) 1517(중종 12)~1602(선조 35) 자(字)는 언성(彦成), 호(號)는 첨모당(瞻慕堂)․노동(蘆洞), 진사(進士) 득번(得蕃)의 아들. 병서(兵書)를 읽고 기사(騎射)를 익히다가 이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성력(星曆)․지리(地理)․율려(律呂)․산수(算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했다.

만년에 행의(行誼)로 추천받아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 등을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 형(兄) 훈(薰)과 함께 효자로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안의(安義)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제향되었다.

임천산(林天山) 초명(初名)은 승우(承祐). 자(字)는 원보(元甫), 호(號)는 은암(隱菴).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진용교위(進勇校尉)에 올랐다.

임승경(林承慶) 자(字)는 가원(可遠), 호(號)는 화천(花川). 조선(朝鮮) 때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올랐다.

임숙형(林淑亨) 자(字)는 문죽(文竹), 호(號)는 은성(恩盛). 조선에서 무과(武科)에 급제, 소위장군(昭威將軍)으로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지냈다.

임세형(林世亨) 자(字)는 원중(元仲), 호(號)는 평계(平溪). 조선조(朝鮮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임호(林 虎) 자(字)는 백옥(百玉), 호(號)는 송암(松岩)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임여추(林汝樞) 자(字)는 사첨(士瞻). 조선조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秋府使)를 지냈다.

임지예(林之藝) 1803(순조 3)~1896(건양 1) 자(字)는 학진(學進), 호(號)는 모암(帽巖). 1882년(고종 19)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에 이르렀고,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