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나주정씨(羅州鄭氏),나주정씨시조,정해(鄭諧),나주정씨유래,나주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1 14:49 수정일 : 2019-08-19 15:22

나주정씨시조 및 나주정씨유래(본관)

나주정씨(羅州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에서 벼슬을 지냈고 군기감(軍器監)에 추증된 정해(鄭諧)이다.

그의 후손들은 나주(羅州)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호족(豪族)을 이루어 해(諧)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나주(羅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나주(羅州)는 전라남도(全羅南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 발라군(發羅郡)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 때 나주(羅州)로 개칭하였고, 995년(성종 14) 해양도(海陽道)에 속하였다가 1018년(고려 현종 9) 목(牧)으로 승격하였고, 조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으며 인조(仁祖) 때 강등하여 금성현(錦城縣)이 되었다.

후에 주(州)로 승격하고 1733년(영조 9) 다시 현(縣)으로 강등하였다가 1737년(영조 13) 복구(復舊)하였다. 1894년(고종 31)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했으나 1895년(고종 32)나주부가 폐지되어 전라남도의 한 군(郡)으로 강등되었고, 1931년 나주면(羅州面)이 읍(邑)으로 승격하였으며 1981년 나주읍(羅州邑)과 영산포읍(榮山浦邑)이 합쳐서 금성시로 승격하였다가 1987년에 나주시가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해(諧)의 손자(孫子) 송수(松壽)가 부사(副使)를 역임했고, 증손(曾孫) 가신(可臣)은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학사(密直學士)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왔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거쳐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도(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徒)에 이르렀고「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저술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문정공(文靖公) 가신(可臣)의 5세손 식(軾)이 세종(世宗)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야인정벌(野人征伐)에 공(功)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낸 국(菊)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낸 심(諶)․부사(府使)를 역임한 상(詳) 등이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쳐 별칭(別稱)「비장군(飛將軍)」으로 일컬어진 여린(如麟)이 뛰어났다.

또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사정(司正)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낸 기수(麒壽)와 수군방어사를 지낸 봉수(鳳壽),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응(鷹)이 가문을 대표하는 후손들이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정씨(羅州鄭氏)는 남한(南韓)에 37,8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나주정씨조상인물

정종산(鄭宗産) 고려조(高麗朝)에 예빈경(禮賓卿)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송수(鄭松壽) 고려(高麗) 때 향공(鄕貢)으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追贈) 되었다.

정가신(鄭可臣) 자(字)는 헌지(獻之), 호(號)는 설재(雪齋),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 1277년(충렬왕 3)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가 되고 정녕공(貞寧公)에 봉해졌으며 1284년(충렬왕 10) 밀직학사(密直學士)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와 1290년(충렬왕 16)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사유(師儒)가 되어 세자(世子)를 따라 원(元)나라에 다녀왔다.

그 다음해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원(元)나라에 다녀온 후 첨의시랑 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세자사(世子師)․참지광정원사(參知光政院事)를 거쳐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도(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徒)에 이르렀다. 문장(文章)에 능하여「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저술하였고 충선왕(忠宣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나주(羅州)의 설재서원(雪齋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탁(鄭 倬) 고려조(高麗朝)에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정전(鄭 佺) 고려(高麗)에서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정길(鄭 佶) 고려(高麗) 때 봉상대부(奉常大夫)로 개성 소윤(開城少尹)을 지냈다.

정억(鄭 億) 고려조(高麗朝)에 지유별장(指諭別將)을 지냈다.

정엄(鄭 儼) 고려(高麗) 때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정재진(鄭再振) 조선(朝鮮)에서 중직대부(中直大夫)로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정문진(鄭文振) 조선조(朝鮮祖)에 문과(文科)에 급제, 조산대부(朝散大夫)로 보성 군사(寶城郡事)를 역임하였다.

정경진(鄭慶振) 조선(朝鮮)에서 문과(文科)에 급제, 감찰(監察)을 역임 하였다.

정기(鄭 祺) 조선조(朝鮮朝)에서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정유신(鄭維新) 조선(朝鮮)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초(鄭 初) 호(號)는 삼불의헌(三不義軒),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한 후 1409년(태종 9) 제주 목사(濟州牧師)가 되었고, 1414(태종 14)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올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하였다.

정원(鄭 轅) 조선조(朝鮮朝)에 만호(萬戶)를 지냈다.

정훈(鄭 薰)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 주부(主簿)․도원도찰방(桃源道察訪)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사헌부 감찰(司 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정식(鄭 軾) 1407(태종 7)~1467(세조 13) 자(字)는 빙보(憑甫), 호(號)는 영모정(永慕亭), 시호(諡號)는 경무(景武), 사공(司空) 가신(可臣)의 후손, 자신(自新)의 아들. 1432년(세 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지평(持平)․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1446년 세종의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죽자 국장도감 판관(國葬都監判官)을 겸직, 이어 사인(舍人)을 지낸 뒤 지사간원사(知司諫院使)가 되었다. 1445년(세조 1)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事)로 나갔다가 1460년 모련위(毛憐衛) 야인(野人)을 정벌할 때 군기의 제조와 공급을 담당하여 공을 세우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그 뒤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초기의 군사제도의 확립에 많은 공을 세웠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정지아(鄭之雅) 자(字)는 덕상(德尙), 호(號)는 일암(逸巖). 조선(朝鮮) 때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에 특별 제수(除授) 호남 경차관(湖南 敬差官)을 지냈다.

정국(鄭 菊) 호(號)는 빙헌(氷軒). 조선(朝鮮)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심(鄭 諶) 호(號)는 일헌(逸軒). 조선(朝鮮)에서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정상(鄭 詳) 호(號)는 창주(滄州).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익종(鄭益宗) 자(字)는 보문(補文), 호(號)는 묵와(黙窩).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천거(薦擧)되어 주부(主簿)․감찰(監察)을 역임하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자헌대부 (資憲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정여린(鄭如麟) 1574년(선조 7) 무과에 급제한 후 1592년(선조 25) 임진란(壬辰亂)에 용맹을 떨쳐 비장군(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613(광해군 5)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폐모살제(廢母殺弟)에 대해 상소(上疏)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 适)의 난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전공이 있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경원 도호부사(慶院都護府使)에 이르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군량미 48석(石)을 보내어 두 아들을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정이주(鄭以周) 조선(朝鮮)때 내금위(內禁衛)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을 지냈다.

정이상(鄭以商)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정이하(鄭以夏)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을 거쳐 참군(參軍)․부정(副正)을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고성현감(固城縣監)을 지냈다.

정지주(鄭砥柱) 조선(朝鮮) 때 음보(蔭補)로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별시위(別侍衛)에 이르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철주(鄭鐵柱) 조선조(朝鮮朝)에 음보(蔭補)로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무과(武科)에 급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역임하였다.

정기수(鄭麒壽) 자(字)는 인수(仁叟), 호(號)는 월탄(月灘).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이진 권관(梨津權管)을 거쳐 용양위 사용(龍驤衛司勇)에서 호분위(虎賁衛)․충좌위(忠佐衛)로 전직,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사정(司正)․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 겸 서생 포진(西生浦鎭)의 수군병마절도사(水軍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고 통정대부(通情大夫)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追綠)되었다.

정황수(鄭凰壽) 자(字)는 영수(靈叟), 호(號)는 월봉(月峯). 조선조(朝鮮朝)에 무과(武科)에 급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소모(召募) 금산전투에 공을 세워 충청도 수군방어사(忠淸道水軍防禦使)를 역임하였다.

정시교(鄭時僑) 조선조(朝鮮朝)에 장사랑(將仕郞)으로 사옹원 직장(司 甕院直長)을 지냈다.

정시중(鄭時重) 조선(朝鮮)때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