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전주정씨시조(全州鄭氏),정원흥(鄭元興),전주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2 11:54 수정일 : 2019-02-11 12:08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전주정씨(全州鄭氏)는 연일 정씨(延日鄭氏)에서 분적(分籍)한 계통(系統)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시조(始祖) 정원흥(鄭元興)은 고려 예종(禮宗) 때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를 지내고 뒤에 전주(全州)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그곳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연일(延日)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전주(全州)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전주(全州)는 전라북도(全羅北道) 중앙(中央)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古代)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리우다가 555년(신라 진흥왕 16)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 재위기간 : 742~465)이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40여 년 간 이곳을 도읍으로 하였으나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 때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다가 공민왕(恭愍王)이 완산부(完山府)로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이라 하여 완산 유수부(完山留守府)로 개칭하였다가, 1403년(태종 3) 다시 전주부(全州府)가 되었으며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전주시(全州市)로 개편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후손 광엽(光葉)이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했고, 그의 맏아들 제홍(齊弘)은 정랑(正郞)을, 둘째 제운(齊云)은 찰방(察訪)을 지냈다.

그 외 원주(源周)와 지(芝)는 도승지(都承旨)를 지냈고, 충국(忠國)과 은소(恩蘇)는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각각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정씨(全州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2,461가구, 8,2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전주정씨조상인물

정광엽(鄭光葉) 조선(朝鮮) 때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정제홍(鄭齊弘) 조선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정제운(鄭齊云)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정국(鄭 國) 조선조(朝鮮朝)에 성천 부사(成川府使)를 역임하였다.

정만윤(鄭萬允) 조선(朝鮮) 때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냈다.

정조승(鄭潮升) 조선조(朝鮮朝)에 성균진사(成均進士)였다.

정원주(鄭源周) 조선조(朝鮮朝)에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정원지(鄭源芝) 조선(朝鮮) 때 성균진사(成均進士)였다.

정이손(鄭以遜) 조선(朝鮮)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정흥소(鄭興蘇) 조선조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역임하였다.

정사신(鄭仕信) 조선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정충국(鄭忠國) 자(字)는 종배(鍾培). 조선(朝鮮)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정은소(鄭恩蘇)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정일득(鄭一得) 조선(朝鮮) 때 사과(司果)를 지냈다.

정연한(鄭連漢) 조선에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정천종(鄭千鐘) 조선조(朝鮮朝)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정학해(鄭學海)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정태청(鄭泰淸)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정창복(鄭昌福) 조선에서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규석(鄭圭錫)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