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풍기정씨시조(豊基鄭氏),정의(鄭誼),풍기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2 16:52 수정일 : 2019-08-20 15:4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풍기정씨(豊基鄭氏)는 시조(始祖) 정의(鄭 誼)가 고려조(高麗朝)에 영정감무(永定監務)를 역임하였으므로 관적(貫籍)을 영정(永定)으로 하였다가, 그의 아들 기(琪)가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공(功)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풍기군(豊基郡)에 봉(封)해졌으므로 봉군(封君)된 읍호(邑號)인 풍기(豊基)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15세손 형(衡)이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살다가 영남(嶺南)으로 피난 중에 보첩(譜牒)에 관한 문헌(文獻)을 분실(紛失)하여 시조(始祖)의 선계(先系)는 물론 분관(分貫)된 소목(昭穆)의 연원(淵源)을 소상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풍기(豊基)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은풍(隱豊)과 기천(基川)의 합명(合名)이며, 본래 신라(新羅)의 기목진(基木鎭)이었는데, 고려 초에 기주현(基州縣)으로 개칭하고 1018년(현종 9) 길주(吉州 : 안동)에 딸리게 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 은평현(隱豊縣)을 병합하였다. 1413년(태종 13) 기천현(基川縣)으로 개칭하였다가 곧이어 은풍(隱豊)과 기천(基川)의 2현을 합하여 풍기(豊基)로 고쳐 군(郡)으로 승격시켰고, 1914년 영주군(榮州郡)에 병합(倂合)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기(琪)의 아들 균(筠)이 고려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고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도사(都事) 수산(壽山)의 아들 덕승(德承)과 덕상(德尙)이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또한 1728년(영조 4) 이인좌(李仁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책록된 태재(泰齋)가 유명했고,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일람(一覽)․익화(益華)와 학자(學者) 시영(始榮),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한 연성(淵性) 등도 대(代)를 이어 풍기 정씨(豊基鄭氏)의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기정씨(豊基鄭氏)는 남한(南韓)에 9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풍기정씨조상인물

정기(鄭 琪) 고려말에 벼슬하여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오르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號)를 받았으며 풍기군(豊基君)에 봉해졌다.

정균(鄭 筠) 고려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정정(鄭 靖) 고려(高麗) 때 검교상서(檢校尙書)를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었다.

정성진(鄭聖進) 자(字)는 희천(希天). 조선(朝鮮)에서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다.

정염(鄭 恬) 자(字)는 낙도(樂道). 조선 때 음보(陰補)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정의직(鄭意直) 자(字)는 정숙(正叔).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정감(鄭 瑊) 자(字)는 함옥(咸玉). 조선(朝鮮)에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냈다.

정수산(鄭壽山) 자(字)는 인여(仁汝). 조선(朝鮮) 때 중부 도사(中部都事)를 역임했다.

정덕승(鄭德承) 자(字)는 용경(用敬). 조선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하였다.

정덕상(鄭德尙) 자(字)는 지겸(志謙). 조선 때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즙(鄭 楫) 자(字)는 제이(濟而). 조선(朝鮮)에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정국창(鄭國昌) 자(字)는 사언(士彦). 조선(朝鮮) 때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정유호(鄭唯護) 자(字)는 군민(君民). 조선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숙천 대도호부사(肅川大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정광경(鄭匡卿) 자(字)는 국보(國輔). 조선 때 첨병마절제사(僉兵馬節制使)를 지냈다.

정치운(鄭致雲) 자(字)는 선우(善友), 호(號)는 송은(松隱). 조선(朝鮮) 때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를 역임하였다.

정익(鄭 翼) 자(字)는 여식(汝式). 조선(朝鮮)에서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지냈다.

정승립(鄭承立) 조선(朝鮮) 때 거제 부사(巨濟府使)․부산 절제사(釜山節制使)를 지냈다.

정일람(鄭一覽) 조선 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행(鄭 行) 조선조(朝鮮朝)에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정형(鄭 衡) 자(字)는 자평(子平).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정현주(鄭顯周) 자(字)는 성백(聖伯). 조선(朝鮮)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를 지냈다.

정몽호(鄭夢虎) 조선조(朝鮮朝)에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정태재(鄭泰齋)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정익화(鄭益華) 자(字)는 효직(孝直).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동부참군(東部參軍)에 기용되고, 참하(參下)․참상(參上)․승육(陞六)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779년(정조 3) 고성(固城)으로 유배되었다. 1784년 사면되고,1784년 사면되고, 1792년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승진되었다.

정시영(鄭始榮) 초명은 시수(始燧), 자(字)는 군초(君初), 호(號)는 신와(愼窩). 조선조(朝鮮朝)에 학자(學者)로 명성을 떨쳤다.

정만선(鄭晩善) 자(字)는 치대(穉大), 호(號)는 향암(香庵). 1872년(고종 9) 광주도회초시(廣州都會初試) 진사(進士)에 합격, 영릉(寧陵)․태릉(泰陵)․혜릉(惠陵)의 참봉을 역임했다.

정연성(鄭淵性) 초명은 해명(海明), 자(字)는 성우(聖佑), 호(號)는 대현(大玄). 1891년(고종 28) 산릉 참봉(山陵參奉)에 제수되고, 기기국 사사(機器局司事)․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했다.

정실식(鄭實植) 자(字)는 춘경(春卿), 호(號)는 간송(磵松). 한말(韓末)에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정현식(鄭玄植) 자(字)는 성규(聖圭). 한말(韓末)에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를 지냈다.